사람은 고난과 함께 사는 존재
(애 3: 26-33)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주일낮시간으로 생각하는 중에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사람은 고난과 함께 사는 존재"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인간은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고난을 주고 계실까요? 물론 고난에 대해서 여러 곳에 말씀이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신 곳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금심케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람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힘든 것은 고난 당하는 분명한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힘들게 합니다. 우리도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곳에는 고난이 항상 함께 공존합니다 고난이 없는곳은 이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생은 고난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실 때 반드시 원칙을 가지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만 알고 있어도 어느 정도 고난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원칙이 무엇입니까?
첫째, 감당치 못할 고난은 없다는 원칙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말을 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로 할 수 없고 책으로 몇 권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항상 자기고난이 제일 크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천국에 가면 "슬픔의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그 나뭇가지에 걸어놓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다가 "내가 당하는 불행 때문에 나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천사는 데리고 슬픔의 나무에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슬픔을 벗어서 그 나뭇가지에 걸어놓습니다. 그리고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그는 슬픔의 나무 주위를 천천히 둘러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걸어놓은 슬픔들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자기 것 대신에 다른 슬픔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기 것입니다. 왜요? 사실 누구든지 자신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슬픔을 살펴보니 자기 것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고난이 왔는데 감당할 수 없습니까?
아니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정신을 내려놓고 믿음을 내려놓고 자빠지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이것만은 믿어야 합니다.
제가 가끔 잘 읽는 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기마음을 보여 주신 김정준 박사님의 시입니다.
그분은 암에 걸리셨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기도로 낫지 않았습니다.
한 학생이 와서 물어봅니다.
"교수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지 말아야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그 때 쓰신 시입니다.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날은 눈이부시도록 햇빛이 비취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품에 안긴 내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광채는 새하늘에 옮겨진 내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고난에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당할 고난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고난입니다.
너무 힘든 고난 이 있다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셨다면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그래서 이사야는 41장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원칙입니다.
히브리서12장5절이하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가 잘못했다면 혼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혼내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혼낸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계적인 면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게 싫은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화를 내고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가 걱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엄청나게 잘못하고 있는데도 고난이 오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십시오, 떠내려갈까 염려하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싸움을 하지 않고 사는 부부는 드물것입니다
한번 싸우지않고 살아가는 결혼한 부부가 있다면 무슨재미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부란 싸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것입니다 성년이되기까지 배움이다르고 환경이다르고 성이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른데 이렇게 서로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이견차이가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싸우는게 아니라 싸우드라도 잘싸워야하고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싸움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싸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회복이 있을 수 없는것입니다.
고난을 당했던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참으로 사랑했던 첫 사랑의 여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겠다고 정계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지위에도 올랐지만 정치게임에 밀려 누명을 쓰고 고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새말로 노숙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땅에서 자면서 하늘을 볼 수 있었고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 ! 베아뜨리체가 자기를 영원한 세계로 안내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단테의 [신곡]이라는 작품입니다. 이런 것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소경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악보를 다 외울 수 밖 에 없어서 최고의 지휘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때때로 현재 우리가 고난을 깨닫지 못해도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그래서 히브리서12장11-13절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유익이 없는 고난은 없다는 원칙입니다.
시편 119편 67-71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모든 고난은 다 유익한 것입니다. 사실 평안은 위함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실 때 고난의 보자기에 싸서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축복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 보셨습니까? 어떻습니까? 죽을병에 걸려서 사업에 실패했다가 다 포기하고 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성공이나, 실패나, 건강이나, 질병이 후에 보면 다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고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의. 그런데 왜 그 은혜가 컸습니까? 자신이 받은 고난 때문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그냥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눈치 없이 부모 형제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이런 고난 당해보셨습니까? 감옥에서 잘 성공하나 싶더니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 받아 더 심해졌습니다. 꿈을 잘 해석해주었더니 다 잊어 먹었습니다. 그는 큰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알게 됩니다. 이런 고난이 얼마나 자기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은 창세기50장19절 이하를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남긴 불후의 명저 [하나님의 도성] 이라는 책에서 참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미풍이 불어오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깁니다. 그러나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받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원칙만 믿으시면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감당치 못할 고난은 없다는 원칙입니다.
둘째.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원칙입니다.
셋째, 유익이 없는 고난은 없다는 원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