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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한국 무기를 산다고요?"
한국으로 온 폴란드 군인들이 한국 군대를 보자마자 경악한 이유
https://youtu.be/Ztu9eVSQvZ0?si=w1RasBFuIHGGYf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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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이등박문과 중국(청)이홍장 간의 조약
● "과거 직시해야 미래로 나가는 건 최소한의 상식" 이 말은 100% 맞는 말!
우리 대한민국, fighting ~ !
멋진 한국인들, fighting ~ !
● 일본ㆍ미국을 배척하고
북한ㆍ중국을 섬기는 민주당ㆍ주사파ㆍ좌익사상 무리들아!
● 너희들은 중국과 일본이
한국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서
그렇게 윤 통을 닥달하냐?
● 대한민국 역사를 알아야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 조선시대부터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
1. 중국은 한국인에겐 천년의 원수다.
2. 지배기간 비율
중국 503년 / 일본 36년!
중국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일본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 할 것도 없다. 중국이 503년이니,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3. 일본은 한국에 부스러기라도 남겼다. (부스러기란 근대산업화 기반과 기술, 재산 등을 남겼다) 여하튼 일본은 우리에게 부스러기라도 남겼다.
하지만 중국은 계속해서 가져만 갔다.
드러운 ×들 ... !!
● 일본에게 한국 '위안부' 가 있었다면
*중국에겐 50만에 이르는 한국 '환향녀' 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끝나던 당시 중국 ×들은 조선 인구의 10%를 청으로 끌고 갔다.
어디 그 '환향녀' 뿐인가?
중국 ×들은 걸핏하면
우리 처녀들을 공물로 데려 갔다.
*이성계의 쿠데타는 역사적으로도
잘못된 것으로 망국적 치적이었다.
중국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 부터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 때까지 503년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었다.
조선 왕조의 '조선' 이란 나라 이름은 이성계가 명나라에다 '조선' 과 '회령' 중에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을 세웠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했다.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 때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뜻인 '영은문' 으로 이름까지 바꾸었다.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 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중국인들은 500년 이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
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간 나라였다. 치욕적이게도 그 당시 조선의 왕은 중국 황제가 승인해야만 왕이 될 수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기에, 사신이 한 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 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바로 '영은문' 으로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중국 조정에다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者들이 매번 조선에 와서 본전의 몇배를 뽑아 갔다
*최영 장군의 '명나라 정벌 계획' 은 당연한 전쟁이었다.
1894년 발발한 일본과 청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일본 이등박문과 중국(청)이홍장 간의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서 조선은 중국 503년 지배에서 독립을 할 수가 있었다.
(오히려 일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립하면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으로 알고 있지만,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이나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 온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503년 동안이나 지배받았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려고, 1897년 "서재필 박사" 가 주축이 되어
*서대문 '모화관' 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영은문' 자리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 을 세운 것이다.
그때, 중국 공산당을 존경한다는 운동권 주사파들이 갑자기 권력을 잡게 되자, 반일을 내세우며 일본의 압제로만 몰아버림으로 실상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가 묻히면서, 잊혀져 버렸다
1950년 6ㆍ25 남침을 김일성과 모의하고 적극 지원하여 수십만 명의 우리 국민들을 살상한 마오쩌 등을 존경한다는 정신나간 문죄인이 등장한다.
독립문에 대한 무식과 오해가 희극이 되어버린 사례가 바로 이 문죄인의 2018년 3ㆍ1절 기념식인 것이다.
소위 대통령(문죄인)이란 자가
3ㆍ1절 기념 행사를 마치고
독립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대통령이란 자가 중국 독립문을
일본 독립문으로 부르짖었으니 ...
이건 정말 개가 배꼽 잡고 웃을 일이다.
이런 문죄인을 대통령으로 찍은 국민들 ...
계속 민주당을 옹호하고 있는 국민들 ..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것이 우리 한국인의 비극이다.
*우리를 중국으로 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다!
*우리를 일본으로 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중국으로부터의 해방은 일본이 시켜주었고,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은 미국이 시켜주었다는 사실만큼은 한국인이라면 당연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겐 8.15만 광복절이 아니고, 1895년 4월17일도 광복절이기에 둘 다 기념해야 된다.
과거 좌파 정권의 자칭 지도자라 했던 문죄인, 무식하면 용감할 수도 있지만 문죄인은 국민과 국가를 이끌 지도자 자격이 없었다. 그런 문죄인의 죄상이 지금 하나하나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다
중국은 우리 역사 이래 침략하고,
모두 빼앗아 갔다!
무식하고, 사악하고, 멍청하고, 찌질한, 중국 바보 ×들의 공산사회주의 선전 선동에 현혹되어서는 ... 동조하고 부화 뇌동하는 좌경세력들 !
윤 통 취임 후,
지난 3년간 민주당과 좌파들의 방해 공작과 음모와 훼방으로 윤 통은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윤 통이기에 지금까지 건제하지 다른 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 나라는 벌써 좌익의 손에 넘어갔다.
보라.
윤 통이 자신의 정치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으니, 주변에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윤 통의 몫이다.)
보라!
문죄인도 다 자기 사람 앉혔다.
문죄인 정부가 일본에 대해 하나라도 해결한 것이 있었냐? 하나도 없다.
오히려 문제만 일으켰다.
북한과 일본!
너희 때에 이미 해결했어야 잖아!,
도대체 윤통이 뭘 잘못했고
너희는 뭘 그렇게 잘한 것이 있다고
윤 통을 탄핵하겠다는 거냐?
윤 통에게 몽땅 뒤집어 씌우려고
잔머리 굴리는 너희 수가
"다 보인다, 보여ㆍ
*멍청한 민주당과 좌익들아!
너희들이 북한에 보태준 돈과
선물이 얼마나 많은지 우린 다 알고 있다.
어쟀든 너희는 왜 지금까지 김정은과 해결 보지 못했냐?
김정은은 지금까지 한국에게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 은혜는 안갚고, 안면 탁 접고, 계속 미사일 터트리고, 대한민국을 향해 '못생긴 ×' 까지 비아냥거리고, 쓰레기에 똥덩어리까지 보내는 그런 찌질이 김정은과 대화로 풀라고?
윤 통을 탄액한다고?
참으로 웃기는 인간들이다.
민주당과 좌익파들, 너희가 김정은에게 "윤 통 쫓아내려고 하니 쉬지 말고 미사일 쏘고, 쓰레기에 똥덩어리까지 계속 보내라" 고 시켰지?
민주당과 좌익파들!
국회에 들어 앉아 잔머리 굴리며 대한민국과 대통령 자리 넘보며 청문회에서 질문 한답시고 큰소리 치며 요상한 또라이 짓하는 민주당을 보면, 도대체 너희들이 뮈냐 ... ?
정말 입에서 쌍욕이 나온다.
중국과의 관계는 이미 오래된 역사이니 잊자고 하자. 그런데 계속해서 북한이 자꾸 우리 심기를 건드린다.
하여 일본 압제 36년도 잊고, 국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한다는데
이게 반일이냐?
또라이 김정은 혹시나 전쟁을 일으키면 일본과 미국의 손잡고 대응하겠다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일본과 미국을 배척하고 북한과 중국을 섬겨?
개보다 못한 × 들!
너희들은 대한민국 국민 될 자격 없고,
대한민국 땅 밟을 자격도 없다.
민주당ㆍ주사파ㆍ좌익사상 무리들아!
대한민국은 절대로 너희에게 못 준다.
제발 하루 빨리 대한민국을 떠나라.
더 이상 한국을 흔들지 말고 차라리 너희들이 좋아하는 북한과 중국으로 가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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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장(李鴻章
병음 : Lǐ Hóngzhāng (리훙장 )
출생 : 1823년 2월 15일 / 청나라 안휘성 합비[1]
사망 : 1901년 11월 7일 (향년 78세) / 청나라 직예성 북경[2]
작위 : 일등숙의후(一等肅毅侯)
자 : 소전(少荃)
부친 : 이문안(李文安)
시호 : 문충(文忠)
서명 :
역임한 관직 :
1. 개요
청나라 말기 주요 관리. 조선에서는 북양대신으로 유명했다. 19세기 후반 불씨가 꺼져가던 청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공친왕 등과 함께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시도한 실권자 중 한 명이었다.
2. 이름 표기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 중 한국에서 한국 한자음에 따라 이름을 표기하는 마지막 세대다. 한국에서 현대 중국 인물로 분류되어 중국인 발음으로 표기하는 기준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홍장은 그 이전인 1901년에 사망했으니 원칙상 이홍장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반대로 바로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위안스카이는 1916년에 사망했으므로 한국 한자음인 원세개가 아닌 중국어 발음에 따른 위안스카이라는 표기가 원칙이다. 참고로 중국어 현지 발음은 리훙(ㅎㅜㅇ)장(Lǐ Hóngzhāng)이다. 다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는 않는 편.[3] 종종 리훙(ㅎㅜㅇ)장이라 표기하는 책도 있긴 한데[4],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연상하기 어려운 린쩌쉬(= 임칙서)와는 달리 리훙(ㅎㅜㅇ)장은 딱 봐도 이홍(ㅎㅗㅇ)장이라 사실상 별 상관은 없다.[5]
3. 생애
3.1. 출생과 성장
청나라의 안후이성 허페이시 출신이며 한족으로 신사층(= 상류층) 출신이다. 아버지 이문안은 진사였고, 전 세대의 유학자인 증국번의 지인이었다. 1844년 향시를 통과한 뒤 베이징에서 증국번의 직계제자가 된다. 층층시하로 보는 과정을 거쳐, 1847년에 진사가 되었고, 진사 출신에서도 최고 등급이 임용되는 한림원 관리에 임명되었다.[6] 여기서 진사는 조선에서의 의미[7]와 달리 과거 시험 최종 합격자로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 수 있는 인물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생원 • 진사에 해당하는 것은 중국의 수재나 거인이고 지방 시험에서 합격해 베이징과 난징에서 열리는 과거 시험(회시)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거인이라고 했다. 거인이면 사대부 취급을 해주고 지방에선 유지로 행세할 수 있었다.[8] 물론 회시를 거치지 않고도 하급직이나 납연[9]이 가능했다. 진사 출신은 명 • 청 시대 과거 시험을 거친 최고 엘리트였다. 그 당시 중국의 과거 시험은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경쟁률이 높았고, 청나라 때는 인구도 대폭 늘어난데다가[10] 만주인 우대로 한인들은 관료로 들어갈수 있는 문이 더 좁아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늘구멍을 뚫고 나온 것과 비슷했다.
3.2. 의병 활동
홍수전에 의해 한족이 중심이 된 태평천국의 대란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혁신적인 주장을 두려워 한 지배 향신층은 이를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은 이미 18세기 말 백련교도의 난 때 무력함이 입증된 상태였으며, 태평천국 진압에는 향신층이 조직한 의병들이 주로 나섰다. 그렇다고 관군이 아예 논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 팔기군은 높은 전투력으로 유일하게 실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부 정벌에서 막강했던 팔기군은 50년도 안 되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의병을 조직한 사람 중엔 증국번도 있었다. 증국번의 의병은 "상군(湘[11]軍)", "회군(淮[12]軍)"이라고 한다. 이홍장은 이들을 물려받으면서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군벌이 되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증국번은 이홍장을 광서성 의병장 강충원에게 천거했다. 이홍장은 문관 출신이기는 했지만 태평천국 진압에서 발군의 진압 역량을 보여줬다. 태평천국 이후 중원 일대를 쉽쓸었던 반청 운동으로, 태평천국처럼 특정한 이념은 없었고 마적과 별로 다를 바도 없었던 염군(捻軍) 진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54년에 강충원이 사망하고, 복제가 안후이의 순무로 부임한다. 이홍장은 자신의 고향에서 모집한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상하이 수비 등에서 공적을 올렸고 전후 1등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때 쑤저우에서 협상 후 자진항복한 태평군 병사들을 모두 학살하는 사건도 벌였다. 이 학살 이후 항복 협상을 받아낸 조지 고든[13] 상승군 대장[14]이 크게 분노해 이홍장을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고 한다. 처형 자체가 잔혹한 탓도 크지만, 항복 협상 자체가 고든은 태평군 병사들의 생명과 신원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무혈 항복을 받아줬는데 처형이 벌어졌으니 고든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태평군 포로 학살은 이홍장만 벌인 게 아니라 대다수의 청군 지휘관들도 했으며, 원인은 태평천국 점령지에서의 만주족 학살로 인해 눈이 뒤집힌 청나라 조정의 불관용 방침이 컸다. 1858년에 복제의 지도력에 실망한 이홍장은 증국번과 함께 태평천국 진압에 힘쓴다. 1864년에 공적을 인정받아 황마괘[15]와 태자태보, 일등숙의백의 작위를 받고, 안후이성의 순무로 임명된다. 1866년에 염군 진압을 지도해 협판대학사와 호북호남총독으로 임명된다.
3.3. 활약
1870년 톈진에서 반(反) 기독교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 영국 - 미국 가톨릭 선교사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발하자, 이홍장은 증국번과 함께 프랑스 외무장관과 협상을 한다. 증국번을 이어 직례총독으로 임명되고, 북양통상대신과 문화전대학사를 겸임한다. 북양통상대신으로써 외교 업무를 전담하면서 직예, 산동, 봉천 3성과 조선의 정책까지 담당했고,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중개했다. 이후 서태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독일 제국, 영국 등으로부터 대량의 철갑함,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입하여 청나라 4함대 중 북양함대를 이홍장이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주독 청국공사 이봉포, 허경징, 기술자 서건인, 서도 부자 등의 인맥을 육성하였다.
같은 양무파였지만 정적이기도 했던 좌종당과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좌종당은 영국 - 프랑스 - 미국 같은 해양 세력보다는 북방의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것을 주장했고(= 새방), 이홍장은 러시아보다는 영 • 불 • 미가 더 위협이 될 것이라며 돈만 들어가고 반란이나 터지는 신강은 러시아에 팔아버리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그 자금과 병력을 해군력에 힘을 쏟아야 한다(= 해방)고 주장했다.[16]
이홍장은 균세, 즉 열강들이 세력균형을 이루어 중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홍장의 정책으로 만주와 외몽골은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고 지금에서 보면 좌종당과 이홍장의 정책은 일단 둘 다 일리는 있으나 한계도 뚜렷했다.
3.4. 실각과 말년
하지만 청나라의 군사력이 청일전쟁에서 무참히 무너지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실각하고 말았다. 다만 이건 마냥 이홍장의 잘못이라고 보긴 애매한 게, 이홍장이 반대하고 지원을 거부한 청불전쟁에서 청나라 해군이 7분만에 기함이 파괴되고 한시간만에 복건함대와 남양함대가 프랑스 해군에 전멸당하면서 이홍장은 정치적으로 크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청 조정에서도 자강 반대파와 양무운동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게 된다. 거기다 하필 그 시점에 서태후가 북양함대 예산을 횡령해서 흥청망청 쓰는 판에 청일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하여튼 청일전쟁을 정리하기 위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이홍장 아니면 전후 협상을 안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전권 위임 대사라면 관직이 낮은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관직이 높을수록 협상은 잘 될 것이며 특히 이홍장이나 공친왕이 직접 오시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약을 실제로 이행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지요."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홍장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갔는데, 일본의 극우파인 고야마 로쿠노스케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얼굴에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 날 다시 얼굴에 붕대를 감고 협상장에 나서는 위엄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홍장이 건강 악화로 귀국해 국제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 측이 3억 냥의 배상금을 2억 냥으로 줄이고 당초 톈진 할양 요구에서 타이완 할양으로 대신하는 합의를 해주었다. 물론 이것만 해도 청 중앙 정부의 1년치 총수입을 뛰어넘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청 입장에선 손해를 꽤 줄였다.
한편, 범인인 고야마 로쿠노스케는 사로잡혀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나 1907년 12년 만에 출옥되어 천수를 누렸다. 근데 천수를 누리다가 일본 제국이 잘 나가는 것을 보는 듯하더니 결국 원폭 공격당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고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는 것까지 보았다.
이후 일시적으로 재기용 되기도 했으나, 개혁파 중에선 온건파에 가깝던 그를 변법자강운동 당시 급진파들이 서태후와 연합을 할 까봐 우려해 멀리하였고 결국 다시 한직으로 밀려난다.[17] 그리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 채 신축조약으로 청나라가 사실상 반(半) 식민지화가 된지 두 달이 지난 1901년 11월에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유언은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그야말로 한스럽도다!" 이후에도 의식은 있는 채 하루를 더 생존했으나 병세가 심각해져 말을 하지 못했고 끝내 눈을 뜬 채로 눈물을 흘리기만 하자 좌우에서 "공께서 하지 못하신 일은 저희가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고 한다.
4. 평가
과거 출신이라서 고리타분할 것 같지만,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좌종당과의 논쟁에서 보듯이 이홍장이 보는 국제 인식은 대체로 정확했다. 1870년대 청나라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던 새방해방 논쟁에서 이홍장은 영국, 좌종당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두 나라 모두 야금야금 중국의 이권이나 영토를 삼키고 있었는데, 이홍장은 해양세력인 영국이 더 중국에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의 국력차이를 보면 아직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에 군사력을 투사하기 힘든 러시아보다는[18] 강력한 해군을 투사할 수 있는 영국이 중국에 더 위협적이었다. 이홍장은 건륭제 시절 손에 넣었지만 툭하면 반란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사막에 불과한 신장[19]을 러시아에 팔고, 그 돈으로 영국을 몰아낼 함대를 육성하자고 했다.[20]
문제는 청나라가 제대로 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적 문물을 전근대적으로 운용하다 보니 엄청난 실수가 있었다. 예를 들어, 통설과는 달리 청일전쟁 때 청군의 무기는 일본군의 무기보다 대체로 성능이 뛰어났음에도[21] 청군의 계급 체계나 조직은 명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결국 서양 교관들이 아무리 청군을 훈련시켜도 지휘관들이 무능했기에[22] 몇몇 삽질이 겹쳐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23]
청일전쟁에서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역으로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청나라를 일으켜세운 위인으로 대접받았으리라 조명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다만 이건 요즘 와서 하는 평가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이홍장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안 좋았다. 좋게 봐도 나라 말아먹은 무능 정치인, 좀 심하게 말하면 한간의 원조로 보는 케이스도 있었다.[24] 하지만 어른의 사정인지 혹은 양무운동이 체제 변화를 배제한 경제발전이라는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권 정책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1980년대부터 이홍장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계속 올라갔다. 한국으로 따지면 인지도 차이는 있지만 김홍집과 여러모로 비슷한 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위치에 있을 만한 능력도 있었고, 청나라를 개혁할 의지와 비전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나 나라의 상황이 너무나도 개판이었던 것이 그에게 큰 불운이었다. 위에도 나와있듯 이홍장이라는 인물 자체는 꽤 유능했으나 당시 청나라는 군대, 경제, 내치, 외교 등 모든 것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결국 나라 꼴이 이러니 이홍장과 몇 명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해결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개혁을 방해하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황실 자체를 냅두고 소극적 개혁만 부르짖으니 애초부터 태생적 한계이긴 했다.
5. 여담
ㆍ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르 프티 주르날, 1898년)
ㆍ위의 유명한 풍자화[25]에서 뒤에서 두 팔 든 채 손톱 세우고 격분하는 인물이 바로 이홍장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종이 호랑이임이 입증된 중국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이 갈라먹는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충격과 공포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26][27] 그러나 청나라 땅이 너무 큰 데다 유럽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폴란드처럼 갈라먹지는 못했다.[28]
ㆍ그래도 19세기 청나라 제국의 나름 개혁 의지가 있던 실권자였던지라 서구권에서도 꽤 유명했는지, 여러 인사와 만남을 가졌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와도 만났는데, 그랜트는 이홍장을 글래드스턴, 비스마르크급으로 고평가하기도 했다.
ㆍ둘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만나기도 했다. 면담 내용 기사[29]
ㆍ왼쪽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외교의 거물로 대영제국의 총리를 지낸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후작, 오른쪽은 조지 커즌 후작.[30]
ㆍ어마어마한 장신이었다. 위의 사진 속 오토 폰 비스마르크,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조지 커즌 세 사람 모두 193cm의 장신인데,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이홍장이 세 사람보다 작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며[31], 이홍장과 친했던 미국인 찰스 다니엘 테니의 회고에서도 190cm 정도의 장신이었다고 언급되며, 니콜라이 2세도 러시아를 방문한 이홍장을 만난 후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다고 일기에 썼다. 이런저런 증언들과 위의 사진들로 종합해 봤을 때 이홍장의 키는 185-190cm 정도로 추정된다. 놀랍게도 만주족이나 몽골인 등 북방민족이 아닌 남방민족인 한족인데도 당대 서양인에 비해서 꿇리지 않았다. 요즘 중국인들 키로 생각하면 2m 정도 되는 키라고 보면 편하다.
ㆍ40세가 넘은 나이에 영어를 혼자서 학습하였다. 일상회화를 하는 수준을 넘어 유럽과 미국의 산업시설, 금융기관 등을 둘러보며 전문적인 대화를 할 정도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와 통역없이 영어로 대화하였고 미국과 영국을 방문할 때 여객선에서 현지인들과 영어로 막힘없이 대화하였다. 영어에 능숙해진 이후로는 영자신문을 읽으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ㆍ당시 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만큼 조선 사람들도 적잖이 만나 봤는데 그 중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었을 때 만났는데, 이홍장은 반란의 수괴인 흥선대원군을 하문하며 심문하는 입장이었다.[32] 이홍장은 흥선대원군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학하다"고 평가했다가 1884년 올린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들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은 효웅이다. 그의 재기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ㆍ흥선대원군이 고종의 형 이재면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는 '니즁탕'이라는 호칭으로 거론된다. '니'는 성씨 '이(李)'이고 '즁탕'은 '중당(中堂)'으로 여기서 '중당'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청나라 시대에는 군기대신이나 대학사 총독등을 중당이라고 높여 불렀다.
ㆍ고종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유원과 서신으로 교류했다고 한다. 조선에 미국과 수교하라고 권고한 것도 이 서신에서 비롯된 일이다.
ㆍ비록 청일전쟁으로 인해 실권을 잃었다지만 특출한 외교적 수완은 계속 인정받고 있었기에 시모노세키 조약, 청 - 러 밀약, 베이징 조약 등 굵직한 대외적 협정마다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나섰다. 평생을 현역으로 활약한 셈. 80세 가까이 이르는 인생을 청나라 부흥에 전력 투구했으며 그럼에도 결국 그 몰락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역사상의 풍운아였다. 세대로 따지자면 청나라의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아편전쟁 때 그는 약관 17세에 불과했다.
ㆍ이홍장의 사후 위안스카이가 입지를 계승하여 훗날 청나라 왕조 멸망 후 중국 최고의 군벌로 부상한 북양군벌을 조직하게 된다.
ㆍ저서로는 《이문충[33]공전집》이 있다.
ㆍ그의 조카 리징시는 청나라 시절 운귀총독을 지냈으며 중화민국 10대 국무총리, 재정총장을 역임한다.
ㆍ그의 무덤은 고향인 허페이시에 있다. 라이벌인 좌종당과 마찬가지로 이홍장의 무덤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헤쳐졌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이후 이홍장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생가와 무덤을 복원하였으며 생가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되었다.
ㆍ청나라가 멸망 직전에 발행했던 지폐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34]
ㆍ조선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이 일본의 무력 시위에 당황해 청나라 조정의 의견을 물었고 이홍장은 조선에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권고하면서도 일본이 종주국인 청나라를 대신해 조선에 주도권을 행사할까 봐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통상 조약을 주선했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이 조선을 아예 병합해 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지만 이홍장이 비현실적이라며 물리쳤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으로도 조선의 병합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는 이홍장이 정치적으로도 조선을 별개의 나라로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관의 국가로 인지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홍장은 조선을 무리하게 병합하기보다는 기존의 번국 형태로 유지시키고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청나라에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중원의 통일 왕조들은 한나라와 당나라처럼 한반도 일부를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35] 그 이후로는 조공 관계를 맺고 상국으로 군림하는 정도에 만족했지 아예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희제 시절 대만을 복속시킬 때 조선처럼 외번으로 남기자라는 얘기가 나왔으나 강희제는 조선이 중국과는 풍속이 달라 그럴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대만은 발언 직후 얄짤없이 청의 직할지로 삼았다.[36]
ㆍ그의 외증손녀는 장아이링이라는 소설가인데, 중국 현대문학사에서는 유명한 루쉰만큼이나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한국에서는 후기에 쓴 단편 색계가 영화화 되어 나름대로 히트를 쳤는데, 원작자 장애령이 바로 장아이링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ㆍ쑨원은 청년 시절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쥔 이홍장의 개혁에 기대를 걸고 여러번 편지를 보냈으나 결국 답장을 받지 못했고 결국 청조의 개혁을 포기하고 아예 공화국을 세우자는 혁명운동에 뛰어든다. 하지만 둘이 서로 만난 적은 없다. 쑨원과 이홍장은 40여살 차이가 나며, 쑨원이 태어날 당시에 (1866년) 이홍장은 이미 과거급제에 태평천국군 진압으로 청나라의 실력자였으니 평민인 쑨원이 만나기는 극히 어려웠다.
6. 대중매체에서
6.1. 영화
ㆍ1965년 개봉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주선태가 연기했다.
ㆍ1991년 개봉한 영화 《황비홍》에서는 나름 뛰어난 관리로 묘사되어 나온다.
6.2. 드라마
ㆍ1995년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홍성민이 연기했다.
ㆍ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배우 남일우가 연기했다.
6.3. 만화
ㆍ《신 중화일미》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인물인 리 제독이 등장한다. 한국 더빙판에서는 원조대인으로 알려진 그 분이다.
ㆍ《왕도의 개》에는 노회하고 유능한 정치가로 등장하지만 김옥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등 음험한 역할도 맡았으며 이 때문에 카노 슈스케의 사주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위해 방일하던 중 입에 총을 맞아 복수당한다.
6.4. 소설
ㆍ《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원래 역사처럼 태평천국을 상대로 활약을 벌인다. 허나 고종과 서태후의 능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청나라의 상황이 원역사보다 더 안좋아지자, 이에 중화제국을 건국하고 근대화와 개혁을 시도한다. 허나 전반적인 여건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천명대전에 친정을 한 끝에 주인공 이형의 손에 목이 잘린다.
ㆍ《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이 도망쳐 나와 가장 먼저 의탁한 사람이며, 영어를 잘 아는 점이 일치해 상당히 친해져 이홍장 관할 구역에서 홍삼 사무역을 승인할 정도에 이르렀으며 나중에도 이 친분을 잘 써먹는다.
[3]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근현대 중국인의 인명을 표기할 때 오히려 신해혁명 이후 인물조차도 그냥 한국 한자 발음대로 읽는 케이스가 심심찮은 점을 감안하면 이홍장의 이런 케이스가 특이케이스에 해당되기도 한다. 특히나 일반 대중문화를 좀 넘어서 학계에 들어가면 아주 최근 논문이 아닌 이상 상당수의 논문이나 저서에서 모택동, 장개석, 원세개 같은 방식으로 그냥 한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경우가 잦은데, 발표된 지 좀 된 논문의 경우 이름을 아예 한국어를 빼고 한자로만 표기해서 그걸 한국 독음대로 읽어서 그런 경우도 많고, 그 영향이 남아 좀 더 최근으로 와도 현대 중국 인물을 한국어 한자 발음대로 읽는 경우가 흔하다
[4] 대표적으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5] 글자가 작거나 하면 자형의 문제인지 '리훙(ㅎㅜㅇ)장'을 얼핏 보고 '리홍(ㅎㅗㅇ)장'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서, '李홍(ㅎㅗㅇ)장이겠거니' 하고 잘만 알아먹는다. 심지어 병음 표기 'Lǐ Hóngzhāng'의 'o'에 이끌린 나머지 진짜 '리홍(ㅎㅗㅇ)장'이라고 쓴 책도 있다. 현대 중국어를 표기하는 한어 병음에서, 성모(음절 초 자음) 뒤 운모 '-ong'은 [ʊŋ]으로 발음되므로, 한글로는 '웅'으로 표기하는 게 옳다.
[6] 진사 출신 중 특별히 높은 등수로 합격하면 한림원으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
[8] 단순한 유지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로 치면 광역지자체의 부지사라든지 국장 같은 요직을 할 수 있었다.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을 임명하면 그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실무 관료들을 지방관 직권으로 구성했는데 거인 출신들이 그런 자리를 많이 역임했다. 물론 중국이 거대한 나라인 만큼 그 자체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였다.
[9] 돈으로 벼슬 임용을 합법적으로 행함.
[10] 명나라 말기에 1억 근처이던 중국 인구가 이미 4억이 되어 있었다.
[12] 안후이성의 약칭으로 공식적으로는 '환(皖)'을 쓰나, 화이허(淮河)를 따라 '회(淮)'라고도 종종 쓴다.
[13] 생몰년도: 1833년 ~ 1885년
[14] 용병부대이지만, 본인은 고결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파쇼다 사건을 참고할 것.
[15] 고위 관리들의 황색 제복.
[17] 그의 강력한 북양군은 위안스카이가 이끌게 되었고 결국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도구가 되고 만다.
[18]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한참 뒤인 1898년에야 완성되었다.
[19]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
[20] 사족으로 만약 그랬다면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령으로 남아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로 좌종당의 견해도 러시아의 역사적인 팽창주의를 보면 일리는 있었다. 또한 좌종당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신장은 현재 자원의 보고로 중국에 중요한 지역이다 보니, 중국이 외부적으론 러시아나 소련 시절부터 견제받고 내부적으론 그곳 위구르족의 독립 요구가 터져나옴에도 이를 거부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가 한몫한다.
[21] 당장 함대 총 배수량만 하더라도 일본 해군의 2배에 달했다. 일본 해군은 없는 7,000톤급 전함 2척도 북양함대에 존재했기에 일본 해군과 대등하게 교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상적인 운용을 했다면 청나라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다.
[22] 특히나 지휘관 중 엽지초는 공주에서 평양성으로 후퇴한 뒤, 성환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했다는 거짓보고를 이홍장에게 하였다.
[23] 무능한 지휘관들이 많았어도, 등세창 같은 해군 지식에 유능한 인물이나, 비록 해전에서는 무능했지만 지상전에서만큼은 지식이 빠삭했던 정여창을 배출하는 등 여러 명장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24] 한족임에도 만주족이 지배층인 청나라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즉, 한족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다.
[25] 청나라, 제2차 아편전쟁 문서에서도 이 그림을 볼 수 있다
[26] 위의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 그림에 중국을 갈라먹는 열강의 대표로 나온 인물들은 왼쪽부터 빅토리아 여왕, 빌헬름 2세, 니콜라이 2세, 마리안, 사무라이이다. 또 이홍장의 손톱이 긴게 특징인데, 당시 청나라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은 육체노동을 경멸하여 저렇게 손톱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다. 서태후 사진을 보면 긴 손톱을 보호대로 보호하고 있는 사진도 많다
[27] 1990년대 후반 베스트셀러인《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의 지은이인 한호림이 후속으로 쓴《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국어》라는 책자에서 저 사진의 말풍선 설명에서 구한말 역사를 잠깐 설명하며 이홍장이 조선을 먹으려는 것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오히려 신장처럼 청나라의 국력으로 통치가 어려운 지역은 과감히 러시아에 할양하고 국력을 정비하는 게 옳다고 보았을 정도로 팽창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자국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자국의 능력을 넘어서 직접 먹으려 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의 조선 병합 의견을 비현실적인 의견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이홍장이 조선을 먹으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단,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바란 것은 아니고 꽤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다.
[28] 후대에 대놓고 중국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같은 이유로 가장 승승장구할 때조차 중국의 동부 해안 지대만 간신히 차지했다.
[29] 이 동아일보 기사를 패러디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팬픽이 존재한다.
[30] 폴란드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할 때 폴란드의 국경을 확정한 커즌 선을 그었다.
[31] 로버트 개스코인세실도 나이가 들면서 키가 좀 줄어들었을 것이고, 대두(...)인 데다가 조금 구부려있는 상태로 찍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팔순 노구였음을 감안하면 키가 꽤 줄었을 것이다.
[32] 흥선대원군은 이홍장 수하의 정여창에게 짐승처럼 묶여서 압송되어 갔으며 청 조정 관리들은 대원군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않았다. 사실 청 조정의 관리들은 경대부(卿大夫)라서 제후인 조선왕과 스스로 동급이라 여겼고 이하 조선 관리들은 더 낮은 신분으로 여겼다.
[33] 이홍장의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다만 설치 이후 얼마 못 가 축출되거나 중앙 정부와 분리되어 현지 한민족과 동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36] 여담이지만 이 때 강희제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중국 중원 왕조가 대만 섬을 한번도 통치해본 역사가 없게 되기 때문에 일본 패망 후 중화민국이 돌려받지 못하고 미국이 관리하다 독립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대만의 민족 구성상 오키나와처럼 일본으로 반환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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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수 좋은 대한제국
운수 좋은 대한민국 - 1
운수 좋은 대한민국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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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11월 조선국 한성
한편 조선 독립전쟁이라고 불리는 제 1차 동아시아 삼국전쟁이 조선,일본측의 판정승으로 끝난 이후
이홍장이 평화 협상 의사는 조일양국에 보내게 되고 조일양국이 승낙하면서
1880년 11월 10일 조선국 한성에서 청나라측 대표 북양대신 이홍장,조선측 대표 내각총리대신 박규수,일본측 대표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삼인이 만나게 되었고
그뒤 평화 협상이 시작되자 가장 이 전쟁에서의 핵심 사안인 조선 독립 문제가 터지게 되었다.
조선측 대표인 박규수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당당한 자주국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곧 그는 협상장에서 청나라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으로 시작한 이전쟁의 전쟁 원인등을 꺼내면서 조선 독립을 주장하였다.
일본은 류큐를 청나라 간섭 없이 완전히 흡수하려면 류큐의 독립또한 필요하였기에 조선측을 지지하였으며
이홍장 또한 애초에 조선,일본과 평화 협상을 하러 협상장으로 나올때 부터 조선의 독립 요구 자체는 인정하였기에 곧 그가 조선 독립을 승낙하면서 조선이 청나라와의 조공질서에서의 조공국에서 독립하여 자주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후 일본또한 사실상 괴뢰국이 된 류큐를 완전한 일본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청나라에게 류큐 독립또한 요구하였고
이홍장도 청나라가 어차피 류큐 일대에 영향력도 행사 못하는걸 알기에 류큐 독립에 대해 승인하면서 류큐도 독립하게 되었다.
그뒤 조선측은 청나라에게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폐지와 새로운 평등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애초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경우는 조약 내용부터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체결하였기에 조선이 독립한 이상 개정이 필요하였으며 조선은 이때를 이용해서 독립과 동시에 불평등조약 청산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홍장은 조선의 독립과는 다르게 이 조약은 청나라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기에 조선측이 요구하는 조약 폐지및 새로운 평등조약 체결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으나
이홍장이 보았을때 청나라는 패전국이였고 조선과 일본은 승전국이였다.
그렇기에 이홍장은 별수 없이 조약 폐지및 새로운 평등 조약 체결에 대해 승인하였고
결국 이홍장의 승인과 동시에 기존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폐지됨과 동시에 새로운 평등조약인 조청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된다.
한편 평화협상에서 가장 큰 난관은 영토 문제와 배상금 문제였다.
청나라와 이홍장은 그냥 조선이 영토를 아예 안뜯어가거나 뜯어간다고 해도 그냥 조선인들이 간도라고 부르던 만주 끝자락의 똥땅을 가져갈거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박규수는 청나라의 침공을 이미 격은 이상 완충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압록강은 충분했지만 두만강의 경우는 막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미 멜서스트랩이 터진 조선의 인구압을 해결해야 했기에
그는 160년전쯤의 백두산정계비까지 꺼내오면서 조선의 영토는 압록-두만이 아니라 압록-송화라고 주장하였고 그걸 바탕으로 청나라의 길림성을 조선에 할양하라고 요구하였다.
당연히 청나라는 이러한 조선의 폭거에 항의하였고 서간도+동간도라는 중재안까지 제공했지만 조선은 거부하였다.
한편 일본은 타이완(대만)을 요구하면서 이 협상을 더욱더 진흙탕으로 밀어붙치고 있었다.
그리고 배상금 문제에 관해서도 청나라는 아직까지 싸울 여력이 있다면서 합쳐서 1억냥 이상은 못준다고 한 반면 조선과 일본은 배상금으로 근대화할 생각에 각각 1억냥 이상 요구하는 등 조약 체결 과정은 점점 난장판,진흙창이 되었고 그렇게 조약 체결 과정에서의 난항으로 파국이 될뻔했지만 어느 사건으로 인해서 조약은 급몰살을 타게 된다.
그 사건이란 12월 17일 한성에서 당시 55세 조선인이였던 이필제가 이홍장에게 총질하면서 이홍장의 얼굴에 총알이 스치게 되는 사건이였으며
그 사건으로 박규수와 이토는 이홍장에게 사과를 표하게 되었으며 그후 이홍장이 복귀하자
국제적 여론을 의식해서 조선측의 경우는 지린성에서 동간도+서간도 할양으로 낮췄으며
일본 측도 대만 요구에서 대만에서의 이권을 요구하는걸로 조정하였다.
배상금 또한 각각 1억냥 총합 2억냥에서 청나라가 원하던 총합 1억냥 각각 5천만냥으로 결정되게 된다.
가장 큰 문제였던 영토 문제와 배상금 문제가 해결되고 1880년 12월 25일 박규수,이홍장,이토 히로부미의 비준하에 한성조약이 체결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는 조선,류큐의 독립을 승인하며 기존 조공질서에서 벗어난다.
2. 청나라는 조선과의 불평등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지한다. 양국간의 새로운 통상조약은 평등조약으로 체결한다.
3. 청나라는 군비 배상금으로서 조선과 일본에게 순은으로 총합 1억냥(각각 5천만냥)을 지급하기로 한다.
4. 청나라는 조선에게 청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인 서간도,동간도의 모든 주권을 조선에게 양도한다.
5. 청나라는 일본에게 대만에 대한 이권 제공을 약속한다.
6. 청나라는 일본의 류큐 보호국화에 대해 승인한다.
7. 이 조약은 비준한 이후 188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자주국으로 독립, 불평등조약 청산, 새로운 영토 획득 및 배상금 획득으로
훗날 시행할 임오경장에 대한 재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조선과 다르게 영토는 못얻었지만
류큐를 중국으로부터 이탈시키며 괴뢰국으로 만들게 되었고 대만의 이권과 배상금을 얻게 되는 이득을 얻게 되었다.
● 그 후 일어날 일
ㆍ영국은 동아시아 챔피언으로 조선, 일본을 선택한다.
ㆍ조선은 을해경장을 잇는 갑오경장을 시작한다.
ㆍ조선과 일본은 서구에서 문명국으로 인정받게 된다.
ㆍ독일은 청나라에게 교주만을 뜯어낸다.
ㆍ러시아는 신강 할양을 대가로 청나라를 도와준다.
ㆍ프랑스는 청나라 개입없이 베트남 병합을 성공한다.
ㆍ청나라는 이홍장 주도로 적극적인 개혁을 시작한다.독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