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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문학도시
좋은 문학의 조건과 일상적 사건의 승화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뒤러는 참다운 조화란 같지 않은 것을 서로 맺어주는 것이라 했다. 미학적 의미에서 균형이란, 부분들을 모두 합한 것을 물론 의미하기도 하지만 각 부분들에서 나타나는 한 전체로서의 구성도 동시에 의미한다. 유기적 전체는 불연속적 부분의 총화가 아니며, 부분은 그 특수한 전체 속에 의존되어 존립한다.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 부분을 하나의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모든 예술적 작품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좋은 작품은 높은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좋은 수필은 ‘필유사성’의 차원에서 네 가지 성질을 지녀야 한다. 이번 월평은 물론 계간평 차원이 되었지만, 철저하게 문학성의 관점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미리 알려둔다. 문학의 평가에 있어서 혹자는 각자의 주관성을 기준으로 가치평가를 무력화하려고 하지만, 문학의 평가에 주관성은 없다. 그런 딜레마는 이미 칸트가, 평자에게는 ‘심미적 취향’이 있어야 하고, 독자에게는 ‘심미적 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언명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었음을 밝힌다.
부산문인협회 <문학도시> 편집부로부터 11월 말경에 월평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수필 전문 비평가로서, 월평을 통해 수필의 문학성을 드높이기를 원하는 편집부의 요구로 받아들이고 싶다. 3개월 치를 한꺼번에 하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계간평이 되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10월호에는 신서영의 <방생>, 손명순의 <흰색>, 안명순의 <또라이와 꽃>, 성낙향의 <설거지를 하고 싶다>, 손금희의 <양날의 칼>, 반강호의 <동굴 속의 사색>, 이병수의 <평생 짝지를 보내며> 등의 좋은 수필을 발견할 수 있었다. 11월호에서는 네 편의 작품에 눈길을 둔다. 전화숙의 <간판은 웃고 싶다>, 최순덕의 <배냇저고리>, 허정의 <연애기술>, 황소지의 <한시서예의 재미>다. 12월호에서는 여섯 편을 고를 수 있었다. 김상곤의 <모기>, <김초성의 <찾을 일이다>, 신창선의 <커피카파타>, 안경덕의 <노을이 되다>, 안명수의 <땀과 눈물>, 조혁훈의 <신작로>다. 문학의 개념으로서 가장 탁월한 것은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다.”라는 정의다. 전체를 보지 않고 눈으로 대충 봐서 알 수 있도록 한 성질이 조형성이다. 우선 겉으로 봐서 수필다워야 수필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구성적 비유라는 서정의 방식으로 직조된 수필이 진짜 수필이다. 36편 중에서 17편을 골랐다.
이들 작품들은 하나같이 비가시성의 가시화,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라는 수필시학적 측면과 복합적 통일성이라는 형식적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반대의 이유가 없는 한 이들 수필이 가지고 있는 성질은 미의 징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필의 문학성은 글의 구조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은 ‘무엇’이란 주제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어떻게’라는 형상에 방점을 찍는다. 따라서 가치평가의 대상이 작품들은 전부 이러한 관점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봐도 좋다. 수필의 두 가지 기본조건, 즉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치환이란 ‘수필틀’과 형상적 체험이라는 ‘문장술’의 차원에서 수필의 메타성을 지니면서, 수필의 재료인 인식과 형상으로 빚어낸 작품을 엄선했다. 작품이란 이러한 재료의 어떤 특수하고 유일한 조직일 것이며, 이렇게 조직된 구조가 아름다움을 갖는 것이다. 형상적 체험 즉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지 않으면 문학수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병수의 <평생 짝지를 먼저 보내고>는 아내를 보낸 슬픔을 절제된 감정으로 잘 그려내었고, 안병순의 <또라이와 꽃>은 산에서 만나 나체 남자의 몸에 대한 단상을 꽃과 상관화시킨 특이한 관점이 돋보였다. 손명순의 <흰색>은 흰색에 대한 탁월한 사유와 삼단으로 된 구성이 멋졌다. 손금희의 <양날의 칼>은 언어의 힘을 긍정효과와 연결시키면서 그 특성을 양날의 칼로 의미화한 게 돋보인다. 성낙향의 <설거지를 하고 싶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반전을 가져와 재미를 주었다. 반강호의 <동굴 속의 사색>은 동굴 속에서 근본적 물음에 접근하는 모습이 반성적 성찰이라는 수필 장르의 특성과 조우하고 있고, 최순덕의 <배냇저고리>는 손주를 생각하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이 반성과 회한에 젖어 감동을 주었다. 허정의 <연애기술>은 수영과 비교한 연애의 기술을 코믹하게 그려냈고, 황소지의 <한시서예의 재미>는 한시를 배우면서 느끼는 한시미학의 즐거움을 드러내고 있다. 김상곤의 <모기>는 여름밤 모기와의 전쟁을 통해 모기에 대해 알게 된 사연을 재미있게 그렸고, 김초성의 <찾을 일이다>는 고령 가야고분군을 다녀와서 쓴 유적 발견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신창선의 <커피칸타타>는 수필쓰기의 고독과 즐거움을 씁쓰레한 한 잔의 커피에 견주고 있고, 노혁훈의 <신작로>는 어린 시절의 신작로에 대한 기억을 향수로 잘 치환하였다. 안경덕의 <노을이 되다>는 비행기를 타고 노을을 감사하면서 적은 노을에 대한 느낌을 문학적으로 구체화했고, 노을과 어둠의 관계를 서정적인 필치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신서영의 <방생>에서 나타나는 ‘구피’의 ‘죽음과의 사투’는 생태적 상상력의 절박함을 극대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분양한 구피의 위급한 상황은 ‘방생’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는 충격적 경험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구피의 위기, 절명, 친구의 탄식 등은 방생에 대한 회의를 가져오게 한다. 이 수필의 발단부, ‘중앙에 우뚝 솟은 화산석에서 연신 기포가 보글보글 숨을 쉰다. 미세한 공기 방울을 탄 수초는 리듬체조를 하듯 하늘거린다.’라는 묘사는 전개예고 기능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문장이다. 구피를 분양해서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려내지 못한 작가의 자괴감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암시하기 때문이다. ‘기포가 보글보글 숨을 쉰다’거나 ‘미세한 공기 방울을 탄 수초가 하늘거린다’ 등은 더없이 효과적인 장치다. 기포는 상황의 시급함과 비참한 결과를 더욱 비참하게,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상징으로 슬픈 감정의 증폭제 역할을 하다. ‘구피’의 생사를 오가는 위기와 관상문화는 작가 자신에게 삶에 대한 성찰은 물론 삶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바꾸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설정이다.
며칠이 지나자 다급한 지인의 전화를 받는다. 구피들이 주둥이를 연신 물 밖으로 내밀고 답답함을 하소연하듯 허우적거린다고 한다. 질박한 옹기에 옮겨 보라고 일렀다. 그제야 건강을 되찾아 꼬리를 치며 잘 논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랬었구나. 하필이면 그 연약한 생명을 찜통더위에 보내 (ㄱ)방생이 아니라 살생한 바나 다름없는 분양이었다.
산소발생기나 여과장치도 없이 부레옥잠과 물배추가 떠 있는 돌절구에서 자라던 구피였다. 어두침침한 곳이지만 그곳이 안온한 그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ㄴ)잠수함을 타고 바닷물 속을 처음 봤을 때 신비롭다기보다 두려움에 떨어 빨리 뭍으로 나가고 싶었던 나처럼, 구피도 휘황찬란한 조명 빛과 새로운 거처에 몹시 불안을 느꼈던 모양이다. 현란한 불빛에 모여든 풀벌레들이 빛을 따라 정신없이 맴돌다가 아침이 되면 싸늘하게 죽어있지 않던가. 생명체들은 더 나은 환경을 동경하지만, 그곳에 적응하며 새 터전을 잡기란 죽음을 담보로 할 만큼이나 힘든 인고의 과정을 겪어내야 할 것이다.
- 신서영의 <방생>
위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가는 한마디로 수필을 쉽게 말해서 잘 쓰는 것이다. (ㄱ)의 진술에서와 같이 문학의 묘미는 치환에 있다. (A)에서 (B)를 생성해 내는 것이다. ‘방생’의 본래적 의미를 ‘살생’으로 치환시켜 자기만의 개성적인 언어로 재발견하는 언술행위는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목이다. 이렇듯 문학은 ‘변형’과 ‘부수’라는 변용의 미학이 있어 심미적 쾌락을 주는 것이다. 또 하나 문장술에 있어서 돋보이는 점은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직설법보다는 간접법을 써서 ‘정서의 객관화’를 (ㄴ)과 같이 취한다는 점이다. 문학은 삼화다. 정화, 순화, 그리고 승화되어야 문학적 정서가 살아나는 글이다. 직접보다는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완곡하게, 외면화보다는 내면화하는 게 더욱 문학적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정서의 객관화 작업과 치환과 변주 장치의 활용을 이해하는 게 이 수필을 맛있게 읽는 독법이다. 이런 문학적 사건의 함축성과 상징성은 이 수필의 문학적 구도를 미적으로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하겠다.
작가는 ‘구피’의 방생을 통해서 생태문제를 정조준하고 있어서, 담론적 차원에서 저항성도 확보하고 있다. 에코필리아적가치의 중요성을 표명하면서, 기존의 상식을 깨는 인식을 수필의 출발선에 놓음으로써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 수필의 쾌미는 아무래도 이 부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 역시 이런저런 삶의 환경에 부딪히면서 어깨에 자꾸만 무게가 얹힌다. 그 무거움이 온몸을 짓누르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난다. 몸과 마음이 짐을 벗어버리자고 은근히 압박해온다. (ㄷ)여행은 내 안의 갈등에 몸부림치며 갇혀있는 나를 자연으로 방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ㄷ)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방생’의 의미를 ‘여행’으로 치환함으로써 <방생>에서 <살생>으로 갔다가, 그 의미를 다시 <여행>으로 치환해냄으로써 죽음에서 삶의 희망을 건져 올리는 정반합의 변증적으로 진술했다. 이로써 수필을 전형적인 화해해결구도로 만들어, 설득과 공명의 울림통을 직조해내었다고 하겠다.
전화숙의 <간판은 웃고 싶다>라는 작품도 수작이다. 물론 제목에서 너무 주제를 강하게 암시한 것은 옥이 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노출은 봐줄만 하다. 이 수필의 ‘간판’ 이야기는 문화적, 철학적 담론까지도 포괄하는 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크다. 그녀는 ‘수필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라는 걸 말해 주듯이 한 편의 수필은 주제의 의미화도 구체화도, 상상화도 잘 되었다. 각 건물에 걸린 광고판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광고판 비판 그 자체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데서 이 수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광고 비판은 인간의 <허세>로까지 나아가다가 한국의 <허세>로까지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주제의 구체화를 위해 설득력이 있고 품격을 갖춘 삽화나 예시를 동원해야 한다. 그녀가 주제 의미화를 위해 들고 나온 체험의 영역은 적재적소의 공간에 문학화의 옷을 입고 감각적인 형상으로 배치되어 공감과 설득을 위한 최적의 근거들로 작동하고 있다. 화려하지 않고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광고들에 대한 체험도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고 작가는 간판이 없어야 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도 설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비유를 써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작가는 문예문장의 목적이 ‘전달’에 있지 않고 ‘표달’에 있음을 확연히 아는 것이다.
(ㄱ) 상가건물에 ‘오월의 신부’는 새색시를 위한 홈웨어 전문점이다. 오월에 결혼한 딸에게 사주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가위 마당’에는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이 짤각짤각하며 머리를 자르고 있겠다. 흰색 이층 건물에 붉은 장미 넝쿨손이 뻗어 오르는 ‘디셈버’란 찻집, 그곳을 지날 때면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분들이 떠오른다. 바다에서 방금 건져낸 생선이 펄쩍 뛸 것 같은 횟집 ‘어부사시사’, 그런가 하면 ‘여보게 친구 오랜만 일세 차나 한잔 하세’ 목판에 붓글씨로 쓴 전통찻집에는 옛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들어서고 싶어진다.
(ㄴ) 간판이 없는 거리는 토르소 조각을 보는 듯하다. 얼굴 없이 동체만으로 차분히 아름다움을 나타낼 것 같으면서도 표정을 볼 수 없기에 단조로움을 느낀다. 어느새 간판들의 떠들썩한 호객행위에 길들여졌나 보다. 간판은 필수이겠지만 단정한 매무새를 갖췄으면 싶다.
(ㄷ) 독일 엘랑엔에 머물 때였다. 거리엔 삼층 석조 건물들이 다정하게 어깨를 겯고 "우린 오랜 친구예요." 하듯이 담쟁이 넝쿨과 이끼를 공유하며 서 있었다. 몇 대째 그 자리에서 대물림하여 영업을 한다고 했다. 간판은 상가를 이루고 영업을 하고 있어도 호객행위가 아니라, 학생들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이름표처럼 동판에 새겨져 문 위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였다. 조용한 거리 모퉁이, 간판도 없는 양품점 가게에 들어섰을 때, 옷이나 손가방, 모자 등 명품이 가득해서 구경만 해도 재미있었다.
- 전화숙의 <간판은 웃고 싶다>
수필은 비교적 짧은 산문이라서 정선된 언어와 치밀한 구조를 요구한다. 이 작품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가치 있는 제재를 겨냥해서 주제를 구체화하는 문학적 기법으로 직조된 수필이라서 감동을 준다. 앞에서 다룬 작품의 제재가 유정물이라면, 이 작품은 무정물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전화숙은 제재가 무정물임에도 불구하고, ‘간판은 웃고 싶다’는 자기 생각을 서술어로 구체화해서 간판을 유정물화하고, 생명과 인격을 부여하는 등 ‘이것’을 ‘저것’으로 하는 치환의 방법을 통해 창작수필의 멋을 잘 살려내고 있다. 두 작품이 대상만 다를 뿐, 주제지향성은 같다. 둘 다 생명성에의 천착이다. <방생>이 관상어라는 ‘보는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무정물이지만 간판이란 우리가 ‘보는 것’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수필이다. <간판은 웃고 싶다>란 수필은 다양한 미의식이 입체적으로 깔려 중층적인 울림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미의식과 울림은 무엇보다도 광고간판이 학력간판으로 이화되는 의미의 변용에서 발생한다. 이 수필은 소재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통찰이란 측면에서 담론 전략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수필이 주는 문학적 향기는 질서정연한 구도와 정서를 객관화하려는 작가의 성실성에서 나온다. (ㄱ)은 ‘오월의 신부’, ‘가위 마당’, ‘디셈버’, ‘어부사시사’, ‘여보게 친구 오랜만 일세 차나 한잔 하세’ 등의 예시를 통해 단정한 간판이 주는 정서적 효과를 나타내었고, (ㄴ)은 간판이 없음의 건조함을, (ㄷ)은 얌전한 간판의 장점과 미학을 체험에 기대어 표현함으로써, 최고의 설득적 진술인 정반합의 변증법적 화법을 구사한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이야기의 논리적 전개와 감동적인 구조를 형상화하기까지 위한 전략을 치열하게 탐구했다는 반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의 설득 논리에 의해 생성되는 로고스적 울림은 이 작품의 구조미학적 백미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압권은 아무래도 효과적인 담론기법과 서술전략에서의 성공하고 있는 결말부에서 찾을 수 있겠다. 작가가 건물에 다는 ‘간판’을 ‘학력’이란 간판으로 치환해서 간판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인식의 높이는 탁월하다. 간판문화의 독특한 소재를 격조 있게 작품화한 가치를 지닌다.
안명수의 <땀과 눈물>을 11월의 수작을 뽑는다. 작가는 ‘슬픔과 눈물’, ‘운동과 땀’의 대비 구도를 통해 눈물의 미학을 간접 체험인 다양한 삽화를 들어 검증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직접 체험을 통해, ‘눈물이 가장 진실한 언어’라는 것을 말해준다. 문학이 지닌 은밀한 매력은 해석의 미로를 헤쳐 가며 얻는 감상적 쾌락에 있다. 비유로 무장된 수필은 현실이라는 육지와 문학성이라는 섬을 이어주는 기나긴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수필 창작에서 중요한 것이 발견과 상관화이다. 유사성이 있는 제재를 통해 주제의식을 내포하도록 하게 되면 독자는 상상과 연상을 통해 숨어있는 주제를 찾아가며 미적쾌락을 맛볼 수 있게 된다. 본격수필이라면 문학의 쾌락성 외에 또 다른 목적인 효용성을 별개로 따져보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는 다양한 인용과 이야기를 활용하여 땀과 눈물의 상관관계를 참신하고 창의적인 시각으로 표현해 내고 있기에 문학적 감동이 증폭되고 있다고 하겠다. 발단부는, 화학 방정식을 적어놓고, 이것을 학생들에게 풀게 하자, 학생들은 하나같이 사실인의 입장에서 실증주의적 접근으로 과학적인 답을 내어 놓지만, 문학가인 작가는 현상학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본론에 앞서 칠판 한가운데 < NaCl + H2O = ? >을 큼직하게 써 놓고,
“이게 뭔지 아는 학생?”
“소금물입니다.”
“염화나트륨 수용액입니다.”
“식염숩니다.”
몇몇 학생들은 조롱기 섞인 폭소를 터뜨렸다. 영어 교사의 가당찮은 질문이 자기들의 실력을 무시했다는 저항감의 표시였다. 나는 재치 있는 학생으로부터 기발한 명답이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지만 나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날 때가 더 많다. “내 비록 화학 담당은 아니지만 소금물을 몰라서 너희들에게, 이 바쁜 시간에 이런 질문을 하겠어? …” “화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소금물이겠지만, 문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눈물이 되기도 하고, 땀이 될 수도 있는 것이야. 너희들은 배고픈 설움도, 사랑의 아픔도 아직은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니 명답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 ……”
이십여 년 전, 가슴이 볼록볼록한 여고생들 앞에서 멋진 수업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온갖 수작을 부렸던 장면들이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가슴을 때린다.
- 안명수의 <땀과 눈물>
이 수필은 개념적 지식에 해당하는 염화나트륨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로 치환해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감상하는 입장에서 볼 때, 단순히 비유의 함축성을 해독하는 데만 치중하게 하지 않고, 그러한 표현이 주는 미감을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적인 인용과 예시를 제공하고 있어 독자를 공감과 설득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수필이란 강렬하고 뚜렷한 무엇이 아니라 연륜과 여유 속에서 약간의 파격과 개성을 통해 우러나온 삶에 대한 사랑이다. “화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소금물이겠지만, 문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눈물이 되기도 하고, 땀이 될 수도 있는 것이야. 너희들은 배고픈 설움도, 사랑의 아픔도 아직은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니 명답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는 진술에는, 전개부에서 다루어질 예고 및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의식의 상상화가 응축되어 있다. 마지막에 있는 눈물의 의미화, ‘소리 없는 웅변이었고, 이심전심의 대화였다. 주삿바늘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절망감이 눈물을 넘치게 하여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는 이 수필의 압권이라 하겠다. 이로서 우리는 의미가 숨어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수필이 문학으로서 수행하는 예술적 기능을 볼 수 있다.
서정수필에서 비유는 인식의 어머니로 불리며, 문학화 수법에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문학작품의 성공 여부는 형상화에 의해 결정된다. 해석과 형상화가 함께 어우러지면 감동이 배가 된다. 해석과 형상화는 문학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현실과 문학 사이를 이어주는 ‘소금’와 ‘눈물’ 그리고 그 사이에 ‘담’이라는 삼각지대가 있다는 해석으로 인해서 안명수의 이 수필 <땀과 눈물>은 자못 풍부한 상상력과 활력 넘치는 언어를 풀어놓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대조적인 것의 상관화 작업은 수필을 더더욱 수필답게 만드는 신비로운 에너지로 작동한다. 일상적인 소재를 변화무쌍한 제재로 변용시켜 주제표현의 매개로 삼겠다는 수필가의 의지와 제재를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선이 본격수필을 만들었다고 하겠다.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내거나 문학적 사건으로 변용시켜 체험으로 활용한다 하더라도 참신한 변주나 색다른 전략으로 의미화해내지 않는다면 독자에게 문학적 감동을 안겨줄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안명수는 어떤 것이 가장 적재인지 고르는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수필적 사유를 통해 형이하학적인 ‘소금’을 형이상학인 ‘눈물’이란 의미체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생사의 사투를 목전에서 목격해야 하고, 자신의, 또는 타인의 손에 쥐어진 ‘구피’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에서 느끼는 생명의 외경을 수필로 잘 형상화시킨 신서영의 수필, ‘간판’에 대한 단상으로 외모지상주의,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표현한 전화숙의 수필, 그리고 소금에서 눈물의 미학을 훔쳐낸 안명수의 수필은 어떤 수필보다 단연 돋보였다. 물론 이들 수필에서 발단-전개-결말로 이어지는 구도 속의 부분은 그 특수한 전체 속에 의존되어 존립한다. 한 사람의 작가와 세계가 조우하게 되면서 빚어지는 수필미학은 우리에게 바이오필리아적 철학을 안겨준다. 한 작가가 ‘구피’를 죽음을 구해내지 못하고 절망하는 사이, 한 여성이 간판으로 허세를 부리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통해 하는 사이, 그리고 한 남성 작가가 친구의 죽음 앞에 무력함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이들의 정서에 완전히 몰입하여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고, 이들이 메시지를 음미해 보기도 한다. 내가 그 친구라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해보고, 내가 건물주라면 하고 입장을 놓아보면서, 생멸의 과정에서 생기는 자타의 갈등을 통해 이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성찰해 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들이 주는 가치는 크다. 그 고민과 모색 자체가 인간의 조건을 개선시켜주는 문학적 행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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