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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12절-15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2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믿는 우리는 주님의 구속으로 죄와 허물에서 구원을 얻었다. 주님께서 죄에 얽매이고 사망에 얽매인 나를 탈출시키셨고, 또 세상권에서 탈출시키셨고, 유혹과 미혹을 받을 수 있는 것에서 탈출을 시키셨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에서 나를 해방시키시고, 해방이 된 나를 보실 때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렇다면 내가 이 모든 죄에서 해방이 된 것이 나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만큼 기쁘냐, 아니면 전혀 못 느끼느냐? 느낀다면 감사한 마음이 얼마나 클까?
우리가 진리를 알고 모르고 간에 일단 예수 믿고 교회에 나와서 앉았을 때 마음이 기뻤느냐, 아니면 기쁜 줄도 몰랐고, 오늘날까지도 기쁜 줄을 모르고 있느냐?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시켜주셨고, 이 주님이 해방이 된 나를 보고 기뻐하시고, 나도 해방된 그 기쁨으로 기뻐한다면 단 둘만 기쁘겠느냐, 이것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도 기뻐서 좋아서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겠느냐? 다 같이 기뻐한다.
내가 교회에 처음 나올 때 주님도 기뻐하시고 나도 기쁘다. 그리고 교인들도 교회에 나온 나를 보고 기뻐한다. 인간에게는 다 같이 기뻐하는 마음의 느낌이 있다. 그런데 운동회 때 자기편이 이기면 기뻐하는 이런 기쁨은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 영원히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잠깐 동안의 기쁨을 맛보려고 하고 이게 다 인줄 아는 게 문제다.
우리에게 영원히 가는 기쁨은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받고 마음 속에서 기뻐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발산하는 것이 전도고,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간증이다. 말씀을 깨달으면 이렇게 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바로 못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은 이런 거다’ 하고 가르쳐 주는 게 전도요 설교다. 주님을 만난 간증이다. 우리에게는 이게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기뻐하는 것만 아니라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있다. 슬플 때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눈물은 왜 준 거냐? 슬플 때 울라고 준 거다. 실컷 울고 나면 눈물과 함께 구정물이 다 빠진다. 그러나 자기의 슬픈 것을 남에게 전가시키지는 말아라. 기뻐하고 있는 사람을 자기 슬픔에 끌어들여서 눈물을 빼게 하지 말아라.
우리 인간에게는 오각의 오감성이 있어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건데, 이걸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잘 조절하면 건전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조절을 못하면 정신없는 사람이 된다. 사람을 잘 분별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고’ 이걸 잘 조절해 나간다면 이 사람을 볼 때 얼마나 든든하냐? 규모 있는 사람이다.
불길 속에 뛰어 들어가서 사람을 구해 나오면 건짐을 받은 사람도, 건진 사람도 얼마나 기쁠까?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얼마나 기쁘겠느냐?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는 거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믿는 우리는 육적인 차원에서도 민감하고 반응이 빨라야 하고, 영적인 차원에서도 반응이 빨라야 한다. 민감해야 한다. 좋은 일에 빠르고, 나쁜 일에도 빨리 뛰쳐나와야 한다. 이걸 잘 조절해 나가면서 더 나아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놓는다면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이걸 조절을 못해서 집에서 싸운 것을 밖에 가지고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성질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시켜 놓고 기뻤을까, 슬펐을까? 기뻤다. 우리를 구원시켜 놓고 “괜히 구원시켰네. 살려놓으면 ‘내 일생 책임저라’ 라고 할 텐데 괜히 살렸구나” 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현재적으로 성도들이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나가면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기뻐하신다. 우리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것을 느꼈을 때 기쁠까, 슬플까? 기뻐해야 한다. 기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된 거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슬프냐, 기쁘냐? ‘누가 나를 교회에 나오게 했느냐? 참으로 귀찮구나. 집사 직까지 받았으니 안 갈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교회 나가는 게 큰 짐이로구나’ 이런 거냐? 교회에 나오는 것이 기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짐스러운 사람도 있을까? 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산 사람이겠느냐? 쉽게 말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럽고, 어떻게 보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기쁘냐? 이치는 똑같은 거다. 좋은 사람들과 모이면 그렇게 부담스러운데 죄인을 만나면 그렇게 기쁘냐?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즐거움이 전달된 사람은 어떤 마음이 나온다? 자원하는 마음이 나오는 거다. 말하자면 주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 자원적으로 기쁨으로 희생을 하셨듯이 구원을 받은 자는 자원적으로 즐거움으로 주님을 위한 봉사가 나오는 거다. 그런데 주님의 기쁜 구원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위한 일을 할 때 자원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달라는 거다. 이건 인본주의 사고방식의 신앙이다.
주님의 구원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아달라는 게 없다. 자원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 알고 계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진리의 말씀을 붙드는 마음, 순종하고픈 마음 등등의 마음이 있으면 자원이 되어서 나오게 된다. 자원적으로 할 때 자기에게 은혜가 내려가는 거다.
사랑을 하면 자원이 들어간다. 이 ‘자원’이라는 말 속에는 기뻐서 좋아서 하는 희생성이 들어있다. 이 자원은 하면 할수록 자꾸 기뻐지는 희생이다. 이 희생에는 건강도 찾아온다. 그런데 억압적 강압적 희생은 조금만 해도 병이 찾아온다. 상대를 위해서 희생하기가 귀찮고 싫은 거다. 왜냐?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면 옆에서 그것을 보는 사람도 힘들다.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자원이었고 좋아서 하신 거다. 우리가 이 사랑에 감염이 되면 우리도 자원적 희생을 하게 되고, 희생을 하면 할수록 기쁘고 마음이 평안한 거다. 그래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기도를 하는 거다. 이런 기도는 참 좋다.
13절: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기본구원의 즐거움이나 성화구원의 즐거움이나 구원을 자세히 알고 진하게 느끼는 사람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주님의 도를 전하게 된다. 주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자원하는 심령에서 되는 거다. 누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심령에서 되는 거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의 종이 되는 거다.
범죄자들에게 주님의 도를 가르쳐서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이게 최고의 직이다. 그래서 아무나 목사가 될 수 없는 거지만 목사라면 세상용어로 말한다면 최고의 직이다. 이 이상의 직이 있을 수 없다. 사랑에 의해 자원적으로 되는 직이기 때문에 최고의 직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는 직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이 종이 되는 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서 주께 돌아오게 하려면 진리의 도가 무엇인지, 생명의 도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계시가 무엇인지,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범죄자를 의인이 되게 하려면 어느 법에 범죄인지, 무엇이 범죄인지, 누구 앞에 범죄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르쳐 주면 주께 돌아온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단순히 교회에 나온다는 말인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된다는 말인지? 주께 돌아온다는 의미가 뭐냐? 예배당에 들어온다는 말인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면으로 돌아온다는 말인지? 후자다. 후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예배당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이상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면이 없을 수도 있다.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없다면 거짓된 종이요 거짓된 교인이다.
알아야 가르쳐 주지 모르면 못 가르친다. 못 가르치면 죄인들이 주께 못 돌아온다. 하나님의 의사를 모르거나, 예수 믿는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르치겠다고 죄인들에게 달려들면 교회가 어떤 상태로 발전이 되겠느냐?
거짓 종들이나 이단자들이 활동을 하면 어떤 결과가 되겠느냐? 1. 죄인 된 사명자가 죄인들을 가르치면 의인들의 세상이 되고 천국화 된다? 이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식이다. 소경이 되었으면 훈련이 잘 된 개를 따라가야 한다. 죽은 시체는 죽은 나무 둥치만도 못하다. 죽은 나무는 도끼로 패서 불이나 때지만 죽은 시체는 쓸 데가 없다.
2. 의인들이 아무리 모여도 그 단체가 숫자적으로 불어나지 않고 적으면 그만 악한 집단이 돼버린다? 좋은 질이 악한 질로 되는 거냐? 3. 육적 비진리가 커지면 점점 진리화 되고, 아무리 진리라도 사람이 적으면 비진리화 된다? 4. 세상사람들이 넓은 길로 많이 가면 그 길이 점점 생명 길 좁은 길이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 목적은 우리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다. 우리 성도가 바라는 것도 역시 영원 궁극적으로 이룰구원이다. 이 구원은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고 가야 할 구원이다. 육신이 죽으면 구원을 이룰 수 없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귀중하게 여겨야 하겠느냐? 자기 육신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어리석어서 육신을 함부로 다루다가 몸에 병이 들거나 병을 만들면 안 된다. 우리가 사랑으로 나는 병은 괜찮지만 어리석어서 자기 몸에 병을 만들면 안 된다.
분을 품되 하루 종일 품지 말라고 했다. 내가 늘 말하지만 지나가는 것은 내버려둬라. 지나가는 것을 잡고 ‘이렇네 저렇네’ 해도 소용이 없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걸로 교훈이 되는 거다. 현재에서 지나간 날에서 교훈을 받고 바로 살면 되는 거다. 현재 바로 살고 있는데 지나간 것을 끄집어내서 싸운다면 바로 된 사람이냐?
14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다윗은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를 계획적으로 죽였다. 우리야의 이룰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면 우리야도 육적 이스라엘이니 계시적으로 보면 영적 이스라엘인데, 이 우리야도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룰구원은 필연적이다. 다윗에게만 이룰구원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야에게도 있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야의 육신을 죽이고 피를 흘렸으니 그의 이룰구원이 중단된 면을 생각하면 다윗이 괘씸한 생각이 든다. 남의 이룰구원을 중단시켰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하실 일이냐?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도 다윗처럼 해야 하느냐, 안 해야 하느냐? 안 해야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 일도 많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일도 많고, 정신적으로 미워한 일도 많으니 영적 살인을 한 일도 많고, 더 나아가 알지 못해서, 또는 알고도 다른 사람의 이룰구원을 방해를 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영인성장은 죽든지 말든지 알지도 못한 채 육신을 감싸고 육신을 다독거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자기가 하는 일이 하늘나라의 일인 줄로 알고 남의 구원을 헛되게 만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했다. 우리도 그 죄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알지 못한 상태는 죄가 누적이 된다. 그러니까 죄가 누적되지 않게 그 차원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자기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저질적인 것이라면 여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듯이 나도 영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상대방의 영적인 면을 죽일 수도 있다. 영적인 면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을 들어서 영적 차원의 일을 깨닫게 하는 거다.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님의 의는 나를 의롭다고 만드신 기본구원에 대한 칭의가 있고, 또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덧입어 가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있다. 이 의는 천국에 들어가는 의요, 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의요,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서 이 의는 세상에 속한 의가 아니다. 세상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의가 아니라,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의다.
이 의는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인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신앙 안에서 이뤄지는 의다. 그래서 이 의는 생명적 의다. 따라서 이 의는 하나님의 의의 성품으로 되어진 최고의 수준급의 고상한 의인데, 자기가 이 의를 받고 가졌다면 어찌 찬송이 안 나오겠느냐?
‘주의 의를 높이’ 라는 이 의의 고상함이 어느 정도인 거냐? 최고 수준급의 고상한 의다. 세상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는 의행은 어디까지나 땅에 속한 거다. 그러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의의 성품으로 되어진 정신 사상은 최고의 고상한 의요, 신령세계에 들어가는 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수준을 가지고 인인관계를 연결시켜 나가는 거다.
일반적으로 ‘누구의 행동이 어떻고’ 하며 세상 땅의 수준을 가지고 잘못한 사람을 비난하고 매도시키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은 그냥 슬슬 넘어갈 수 있는 거고 사람 속의 신앙의 질을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에서 자기의 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지할 수 있는 거다.
15절: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석류 속에 열매가 가득 차서 속에서 팽창이 되면 표면이 짝 갈라진다. 밤도 열매가 익으면 송이가 갈라진다. 열매가 갈라지면 망가진 건데 보기가 좋다. 왜 그런 거냐? 가득 차면 갈라진다. 터치고 나온다. 안 나오는 것은 가득 안 찼다는 거다. 자라지 못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갈라지는 것은 좋은 것이라서 보기가 좋은 거다.
뱃속의 아기가 때가 되면 엄마 배를 터치고 나온다. 왜 터치고 나오는 거냐? 가득 찼으니까 터치고 나오는 거다. 다르게 말하면 답답해서 엄마 뱃속에 못 있겠다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부른 배를 보면서 ‘속에 뭐가 들었을까? 얼마나 자랐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하며 궁금해 하고 있으니까 ‘나를 좀 봐라. 내 얼굴을 봐라’ 하고 밖으로 나오는 거다. 그런 것처럼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 속에 기쁨이 가득 차면 입술이 벌어지고 노래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기쁜 것은 많이 들어있지 않고 슬프고 안 좋은 것만 가득 들어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루 온 종일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데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하루 온 종일 즐겁게 보내고 있다면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으냐?
찬송이 나오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것이 가득 차서 입술을 벌려서 속에 들어있는 것을 밖으로 표현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내 입에서 찬송이 나오는 것은 기쁘다는 표현이요, 찬송을 하며 전한다는 것은 주님을 전파하는 것을 자원이 되어서 기쁨으로 한다는 거다. 그래서 찬송을 하며 전파를 하는 거다. 말씀의 이치를 전하는 것이 기뻐서 기쁨의 마음으로 전파한다는 거다.
자기 속에 여물어진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충만해지면 이 사람이 전하는 것마다 사람이 구원되는 요소가 된다. 사망권 안에 살고 있는 자를 생명권 안으로 구원하는 일을 한다. 땅에 속한 불타질 세상소원 목적을 가진 자를 천국에 속한 영원한 존귀영광의 소원 목적으로 바꿔지게 하는 구원의 일을 한다. 세상에 속한 불타질 가치판단 평가성을 가진 자를 하나님과 같은 하늘의 신령한 뜻을 지닌 가치판단 평가성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차원 높은 구원의 일을 하게 된다.
성도의 입에서 진리가 쏟아져 나오면 이 교훈을 듣는 사람의 인격이 살아나고, 성격이 성질이 주님처럼 바꿔지는 역사가 되어 나온다. 이것이 구원역사다. 전도에는 이런 게 들어있다. 우리교회 교인들도 이와 같은 전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면 진리 길 생명 길로만 가면 다 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세상 속화된 것을 잔뜩 듣고 배워서 다른 곳에 가서 전도한다면 ‘예수 믿고 부자 되라. 부자 되려면 예수 믿어라’ 이런 식으로 전하게 된다.
그러면 전도할 때 부자에게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라고 하면 이 부자가 예수를 믿겠느냐? ‘나는 이미 부자다’ 라고 하며 안 믿는다. 또는 ‘예수 믿으면 병 낫는다’ 라고 전도를 한다면 이미 예수를 안 믿고 병이 나은 사람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거고, 예수를 믿고 병이 나은 사람도 더 이상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거다. 이치가 이렇게 돌아가는 거다. 우리가 왜 이런 전도를 할 거냐? 이것은 거짓전도다.
보통은 신학교에 다니고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는 것으로 알지만 우리교회 교인들은 ‘내가 목사가 되어야지’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이 되어서 그 질로 자라가면 그 질이 되느니만큼 입을 열어서 진리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니 이게 하나님 앞에 종이다. 성경이 이렇게 되어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꼭 교회적 제도를 타야만이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이건 제도적인 목사다. 진리와 상관이 없다. 고작 안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적 측면뿐이다. 성경이 다 기독교 역사인데, 이 역사 속에 들어있는 계시 면을 바로 깨닫고 자기 속에서 그 깨달음이 점점 커지고, 자기 속의 커진 것을 입술로 전하면 이게 전도고 이게 목회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