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1일 목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인재를 초빙하는 일
우리가 삼국지를 보면 그림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같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제갈 공명을 초빙하여 촉 나라를 이룹니다. 이때 유비가 제갈 공명을 초빙하기 위해서 삼고초려(三顧草廬)합니다. 이 유명한 고사는 ‘스승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세 번이나 오두막집을 찾아 나선다.’는 뜻이지요. 유비는 그 당시에 40대 중반이고, 제갈 공명은 겨우 27살의 약관입니다. 그런데 초당에서 낮잠을 즐기는 어린 공명을 깨우지 않으려고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적어도 족히 여섯 시간은 밖에서 기다립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의 정서에 이렇게 인재와 스승을 찾는 일이라면 젊거나 늙거나 그 어떤 체면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오는 스승이 제자를 불러 세웁니다. 마태오는 군말 없이 세관장의 벼슬과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미움이나 받고 욕만 얻어먹는 세관장인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는 예수님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자를 불러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큰일을 맡기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 가능합니다. 문왕(文王)은 태공(太公)이 낚시질 할 때 만난다는 일설에 의하면 낚시질이 목적이 아니라 곧은 낚시로 왕을 낚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문왕은 태공을 만나 그의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그만 왕의 신분도 잊고 크게 세 번 절하고 스승으로 모셨고 그 후 명군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스승을 모시거나 제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대기업에서는 서로 좋은 인재를 초빙하려고 혈안이 되어서 그야말로 치열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인재를 어떻게 초빙하고 있나요? 이에 우리 교회나 본당에서 혹은 교구에서는 너무 소홀합니다. 훌륭한 인재를 초빙하는데 아주 인색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 사람들을 추천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내가 말하는 것을 따르시오.”라고 인재를 초빙하는 것이 전부인양 오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땅한 어떤 일이 주어지면 세관장 마태오처럼 군말 없이 따르지 못하고 변명하고, 갖은 이유를 달고 겸손을 가장하는 말로 눈 가리고 모르는 체 하는 경우도 많아서 우리 교회를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못해 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정적인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부르셨고, 오늘 마태오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인재를 찾는 것은 쓸모를 따져서 찾을 수도 있지만 잘 가르쳐서 훌륭한 인재로 키우는 것도 지도자나 스승의 몫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인재 찾기와 인재 기르기에 이제는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다양한 제자 만들기에 가일층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흔히 견해 차이는 인심여면(人心如面)이어서 사람의 마음도 얼굴이 제 각각 다른 것처럼 견해도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회는 '옥석혼효'(玉石混淆)라는 말과 같아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섞여서 한 공동체를 이루기도 합니다. 옥과 돌은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누가 옥인지, 누가 돌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회를 예수님은 모두 옥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과 흙을 옥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늘에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어 강진이란 곳으로 18년이나 유배생활을 떠나서 그 곳에서 목민심서를 쓰지요. 그 중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목민을 잘 하는 자는 반드시 인자하다. 인자하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청렴하고 결백해야 한다. 염결하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절약한다. (善爲牧者必慈 欲慈者必廉 欲廉者必約)는 말처럼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먼저 인자함을 강조하십니다. 어려운 사람들, 특히 아픈 사람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가장 외롭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인자한 행동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식사하고, 얘기도 나누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일이 예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교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인자하고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태공은 문왕에게 말합니다.
’'여인동우동락 동호동오자 의야'(與人同憂同樂 同好同惡者 義也)라고 말하는데 ‘뭇사람과 같이 근심하고 같이 즐기며 같이 좋아하고 악과 부정부패를 미워함을 같이 하는 것이 의(義)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의인(義人)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모두 의인을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과부와 죄인과 아주 외롭고 힘든 사람들과 같이하시고, 바리사이들을 같이 위선자를 미워하시며 그렇게 함께하십니다. 의인이라고 생각되거나 죄인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계시는 것만으로 의인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거나 의인이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죄인도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고, 의인도 더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