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심문모전] 제3부 함안댁(제40회)
5. 출정 사연(3)
(처음부터 읽지 못한 분을 위한 재수록입니다.)
그 전시 작품들 중에는 준호도 미술반원으로서 활동을 해온 작품을 출품하고 있었다.
당시 준호는 막 경구중 오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경구여중 전시 작품 중에 졸업생 찬조 출품작으로 이윤옥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었다.
이윤옥은 득순이 다니고 있는 성문교회 주일학교 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득순의 아들 윤호가 국민 학교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유치반에서 담임한 적이 있어서 그때 이래로 득순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이윤옥은 전시회가 있기 달포 전까지 그 학교 재학생이었으나 4년제 고녀가 6년제 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음에도 오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수료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전해 새로 생긴 초등교원 강습소에 입학해 신입생이 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고보)를 졸업하면 입학할 수 있는 교원 양성 기관이었다. 이 학령은 일제 말년으로 갈수록 단축되었는데 원래 10년이던 것이 남녀에 따라 8년 내지 9년으로 단축되었다.
사범학교는 본과와 심상과가 있었다. 본과에서는 중등교사를 양성했었고, 심상과(보통과의 뜻)는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고보를 졸업하여 입학할 수 있었는데 본과의 경우 수학 기간은 4년간이었고, 심상과는 2년이었다. 그러므로 본과 기준으로 볼 때 학령은 오늘날 2년제 전문대학 수준이었고, 심상과는 고졸 수준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심상과는 5년제 보통학교를 수료하고도 입학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고보 수준의 기본 수학 기간을 합쳐 5년간의 수학기간을 거쳐야 했다.
그렇던 사범학교 제도가 해방과 더불어 철폐되고, 사범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6년제 중학교 졸업자가 입학 자격이 생기고, 수학연한을 4년으로 하여 일반 대학과 일치되게 하였다. 그리고 심상과를 폐지했다.
그 대신 초등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사범학교를 창설하려고 준비하는 기간으로 지역에 따라 2년 내지 3년의 말미를 두었는데 그 준비 기간 동안 이의 대안으로서 4년제 고보 또는 중학교를 졸업한 자를 상대로 1년 만에 수료하는 ‘초등교원 양성소’를 설치했다. 이는 당시 절대 부족한 교사를 수급하기 위한 방책으로 속성으로 양성했다. 이는 정규 사범학교가 설립될 때까지의 임시적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광복 직전인 일제 말기의 사범학교 심상과 수학 연한과 맞먹는 교육 기간(학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교육자로서 전문성을 다지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양성소는 설립 2년차인 이듬해에 수학 기간이 2년으로 늘었다. 이 기간을 수료하면 학령상 6년제 중학교를 이수하는 것과 일치했다.
윤옥이는 바로 이 과정에 입학한 것이었다.
두 학교가 공동으로 예술제를 열기 직전 각 학교의 미술반원들은 학교별로 시내 또는 야외 사생행사를 가졌었다.
그때 공교롭게 여중의 미술반 일부와 경구중 미술반 일부가 대구역 광장에서 사생 행사를 함께 했었다. 그 날 그 자리에 두 학교가 함께 사생 행사의 자리로 정한 것이 양 쪽 학교 지도교사나 반 임원간의 약속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실이 있었다 해도 그 학교를 졸업한 윤옥이나, 신입반원의 처지였던 준호에게는 그런 사실을 사전에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많은 반원들을 몇 군데로 분산되도록 하기 위해서 서너 군데의 사생 자리를 놓고 각자 선택하게 했는데 준호는 역 광장을 선택했었다. 아마 여중 쪽에서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그랬는데 그 자리에 윤옥이와 준호가 같은 자리에서 사생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참동안 서로가 그 자리에 함께 사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서울에 유학 중인 두 사람의 친구인 김종대가 서울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 나타남으로써 윤옥이와 준호가 그 자리에 같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림이 완성되자 세 사람이 함께 어울려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자리는 우연한 회동이었지만 준호로서는 윤옥이와 처음으로 정식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 거의 7개월 사이에 세 차례나 서로 부딪쳤으나 그들이 서로의 정체를 확인한 것은 지난여름 윤옥이네 과수원에서였다. 그러나 그때도 그뿐이었으므로 그 이후 제대로 가까이에서 마주 대하기는 이 날의 회동이 실질적 대면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이 날도 물론 전처럼 사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린 두 사람의 작품이 이 전시회에 함께 전시됐었다.
따라서 이 미술 전시회는 두 사람에게 인생에 중요한 인연으로 발전할 될 수도 있는 빌미가 되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그렇게 의미 있는 결과를 이루지 못한 것은 이 전쟁이 한 원인일 수 있었다.
준호에게는 이 전시회가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삶에 운명적 기회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전쟁에 이르기까지 3년이나 걸렸음에도 관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몇 가지 결정적인 장애가 있었다.
그 첫째가 신앙 문제였다. 윤옥은 기독교인인 배우자라야 한다는 마음을 정하고 있었으나, 한 가정의 장자요, 제사를 모셔야 하는 준호로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었다.
둘째는 윤옥이에게는 이미 김종대라고 하는 마음 속의 연인을 품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윤옥이의 일방적 연모였다. 종대는 종대대로 또 다른 여인 곧, 백설공주 조철자의 언니 조숙자와 사귀고 있었으므로 윤옥이의 마음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가 3년의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엮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호가 일본에서 귀국할 때 다시는 왜놈의 무도인 검도와 인연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모가 그렇게 권하는 데도 죽도를 잡지 않았는데 이 전시회가 죽도를 다시 잡게 된 연유가 되었었다.
표면적 이유로는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경구중 검도부를 재건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경구중학교도 일제시대에는 다른 중학교와 마찬가지로 유도부와 검도부를 두고 적극 장려하고 있었으나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이 철수하고 나자 한국인 교사들 중에 아무도 이를 지도할 지도자가 없었다. 그래서 유도부도 검도부도 해산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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