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회오리바람, 그녀의 중환(重患)은 나의 일상을 일시에 바꾸어 놓고 말았다. 전업주부 역할, 예기치 못한 현실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두려웠지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세월이 어느새 2년 차에 접어든다.
해 질 무렵 장바구니 캐리어를 끌고 동네 재래시장통을 서성인다. 오늘은 과일과 채소를, 장 보는 날, 콩자반, 깻잎 등 밑반찬 종류는 단골집으로 직행하면 되지만 과일과 채소는 신선도가 생명이라 구매하기에 신경이 쓰인다. 이곳저곳을 눈여겨 살핀다.
재래시장에 가면 반찬가게가 즐비하다. 가게마다 반찬 종류가 엇비슷하지만, 맛은 제각각이다. 처음에는 시식용 구매를 했지만, 지금은 입맛에 맞는 단골 가게가 정해져 있어 시장보기가 수월하다. 대구탕 사장님은 나를 알아보고 국물을 듬뿍 담아 포장해 주고 난장의 가자미 할머니는 가자미 한 마리를 덤으로 덥석 얹어주기도 한다. 안면이 쌓이고 쌓여 후덕하게 베푸는 그들의 선심이 정겹기만 하다.
아무리 맛 나는 반찬이라도 연달아 먹으면 질린다. 밑반찬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국과 곰국은 세 가지 정도를 준비해 두었다가 순번대로 상을 차린다. 1식에 3친 1국을 기본으로 한다. 소고기를 살짝 볶은 야채 계란말이를 곁들이고 생선은 일주일에 두세 번 구워 먹는다. 삼겹살 구이와 알 배추를 쌈장으로 쌈 싸 먹는 맛은 별미이다. 아침에는 샐러드를 즐겨 먹는다. 사과, 오이, 토마토를 주로 하여 양상추나 오크상추를 찢어서 넣는다. 불루베리나 견과류를 첨과하면 금상첨화다. 드레싱은 참께 소스를 주로 한다.
역지사지 당해 봐야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주부님들의 고충과 스트레스를 알 것 같다. 최고의 밉상은 상차림을 다해 놓았는데 좌정하지 않고 딴전을 피우는 경우이다. 쓰잘데 없이 부엌에 들어와 이러쿵저러쿵 간섭을, 한다거나 계란 후라이에 노른자가 터졌다고 잔소리를 해대면 잘 볶아지던 볶음밥도 탄내가 난다. 울화가 치밀어 당장 전업주부 역할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도피처가 없다.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이기에 아내의 숱한 잔소리와 짜증을 한 맺힌 가슴으로 삭힐 수밖에.
내가 터득한 진리, 부엌에는 오로지, 한사람이 있어야 한다. 둘이 있으면 시끄럽다. 수저통에는 한 종류로 통일해야 한다. 흑수저 은수저 금수저가 섞여 있으면 수저 놓기가 성가시다. 울화가 치밀면 대청소를 한다. 그래야 숨을 쉴 수가 있다. 이 세상 남편들에게 경고 한다. 밥상이 차려지면 지체없이 식탁 앞에 좌정하라. 밥상머리에 앉아 군소리를 하지마라.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도 맛있는 척하라. 젓가락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짜니 싱겁니, 하는 것은 정말, 밉상이다.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상차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메뉴의 다양성은 물론 맛과 영양과 소화까지 신경을 쓰다 보면 때로는 머리가 띵 해온다. 전업주부의 월평균 가사노동 가치가 팔십에서 백삼십 정도라는 평가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정해진 근무시간도 없이 밤낮으로 가사에 전념해야 하는 주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금액일 것이다. 가사노동이 법률적으로 평가받고 생산가치로 인정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나의 경험치로는 평가액보다 몇 배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이 세상 모든 주부님들에게 격려와 고마움 그리고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50여 년 동안 나의 입맛에 익은 손맛으로 상차림을 해준 아내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운명처럼 다가선 전업주부 생활, 정성을 다하여 차려진 식탁 위에 웃음꽃이 피고 맛깔스럽게 먹고 난 빈 그릇을 모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나의 지극정성이 하늘에 닿아 오래오래 보고 싶다. 먼 길 떠나간 후에 당신이 내게 남긴 잔소리마저 그리울 대면 그 슬픈 고독을 내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나 떠난 후에 따라오시게나. 소원일세.
첫댓글 곽 작가님의 글은 읽을수록 구수합니다. 첫 인상은 좀 엄격해 보였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면 무척 자애로우신 분이라 생각듭니다.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 또한 남다르게 느껴지는군요. 아내를 위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 존경하고 싶어지네요. 부디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쓰 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