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기린다.
ㅡ 왜군 안코쿠치 에케이로 僧將
*정담 장군의 군사로 웅치 전투에 출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17세 아들이 시신을 찾아 오는 효성으로 忠孝의 본이되어, 후손이 관직과 땅을 하사받은, 친구 안성근 12대 선조의 명복을 빕니다.
권율 장군은 행주대첩보다 이치웅치 전투가 더 큰 대첩(왜군의 호남 진출 막음)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권율 장군이 장계에 사실대로 1차 금산전투를 이치웅치 전투와 묶고 비록 고경명과 곽영 장군의 금산전투가 실패했더라도, 이치웅치 전투는 대첩임에 분명하고 청사에 빛나는 업적이다.
이것이 아쉽다.
본인이 지휘한 전투에서 왜군을 퇴각시켰다는 승리감에 취하고, 웅치에서 전주성으로 진출한 왜군을 타격하기 위해 전주성으로 갔지만, 길이 다르고 왜군은 이미 퇴각하고 없었다.
장계 쓰는 시간에 금산으로 달렸어야 진정한 무인 忠武公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이 없다는 전투, 금산전투마저 승리했다면, 과연 권율 장군은 고경명 의병장의 공을 갈취하지 않고 마냥 축하만 했을까?
이광 관찰사는 전주성에서 전장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전전적 이정란이 백성들과 허수아비를 세워 군사 수를 과장하는 등 왜군을 견제했다.
왜군의 퇴각한 군사들이 도착하여 금산본진에는 1만 천여 명이지만, 이치웅치 전투와 전주성까지 진격했다 돌아온 군사들은 피로가 쌓였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는데...아쉽다.
그나마 다행은 금산 전투, 이치웅치 전투를 계기로 관군과 의병이 공동체로서의 전투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행주성과 진주성 전투에서 그 빛을 발한다.
마침 나의 분노에 들어온 바람이 올린 조식曺植(1501~1572,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義理의 구명과 실천의 삶 영위)의 우음偶吟을 우연히 읊조려보며 나싀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人之愛正士 사람들이 올곧은 선비 사랑하기를
好虎皮相似 호랑이 가죽을 좋아함과 비슷하다
生前欲殺之 살아생전에 죽이지 못해 안달하다
死後方稱美 죽어야만 아름다운 이름 칭송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당시의 기묘사화나 을사사화에서 느낀 의리의 상실감에 숱한 부름에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평생 의리를 구명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조식 선생 말년에 퇴계 이황은 조식 선생을 지극히 흠모하여 '천리신교'天理神交를 맺자는 엄청난 우애를 원하고도, 뒤로는 조식 선생을 비난한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다행히 죽은 다음에 발견되었고, 그 이중 인격에 파란이 일었다.
사후 저승에서나마 이황의 이중성 의리도 알게되고, 20년 후 권율의 비굴한 정의감에 가슴아파하셨으리라.
아무튼 권율 장군은 울산전투 등 본인 노력의 승전을 이룬 전투도 있으나, 행주에서는 허균의 매부인 의병장 우성전의 秋義軍과, 충청수사 정웅 장군의 화살 지원 덕분에 대첩을 이루었고, 이치웅치에서는 고경명 장군 덕분에 대승을, 조헌 장군과 승병장 영규 대사 덕분 등에 왜군의 호남 진출을 결정적으로 막아내는 영광을 거의 독차지하였다.
권율 장군은 사후 시호를 이순신 장군이나 김시민 장군과 달리 忠武가 아닌 충장忠莊을 받았으니 이는 선조의 치적 중 하나가 아닐까?
전투에 임에서는 씩씩하게 싸웠지만 武人의 道가 결여되었음을, 그때 고경명과 조헌을 지원했더라면...아쉬움을, 고위의 장군이 도주하려는 병사를 즉각 참살한 비윤리를 선조와 유성룡 등 영감들이 안 좋게 보고 忠莊으로 반영하며, 그래도 공이 높으니 영의정에 추증하고 영가부원군으로 추봉했으리라.
1차 금산전투의 본인 과오는 빼버리고 뻥튀어 올린 권율 장군의 장계에, 권율 장군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이광 장군은 용인 패전의 책임자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뒤, 의금부에 감금되어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 고향 경기도 개풍으로 돌아갔는데, 왜란 전까지는 훌륭히 근무했고 인정도 많아 피해도 봤다.
곽영 장군은 승리가 없는 졸렬한 장군이라며 이광과 함께 탄핵 받아 파직되었다가, 1595년 두 품 아래 정3품 行護軍이 되었고 1599년 왕비 호위를 잘해 숙마(熟馬: 잘 길들여진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금산 본진이 위험하고 굶주려 퇴각하면서도, 웅치 영웅들의 시신을 발로 차며 가도 시원찮을 판에, 정담 장군 등의 조그만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기린다.) 표목을 세워주면서 명복을 빌어준 안코쿠치 에케이 승장 1대장의 武人愛.
이런 그들에게 수천여 명의 동료들이 죽어나갔다는 결과에 비분이 가득 해져있는데, 이런 때에 의병군들이 공격해 온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경명 장군과 그의 아들 고종후 장군의 목을 베어 창끝에 달았고, 얼마 후 공격해온 조헌 장군과 승병장 영규 대사의 의병군을 무참히 살육했으리라.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키다 히데이에의 군단 3만여 명 중 1만 2천여 명을 잃은 비분에, 히데요시의 분노까지 더해진 왜군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키다 히데이에가 1만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3번 대장 총사령관이 되어, 9만의 병력을 총지휘하며 잔혹하게 성내 5만 6천여 명을 몰살시켰다.
하물며 왜군도 이럴진대, 조헌 장군은 의형 고경명 장군과 의병군의 속절없는 고독한 죽음에, 그 비분과 미안함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새삼 다시 느껴본다. 금산 왜군을 죽이고 또 죽여, 호남 곡창은 커녕 왜국으로 날려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고경명 장군이 금산 본진으로 공격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채 웅치로 가서 1천여 명으로, 알았지만 이치에서 2천 5백여 명으로왜군 1만 6천 명의 진출을 막기 위해, 두려움을 충정과 의기로 배수진치며 전투에 임하신 순국 선조님들께,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내신 진짜 영웅들이시라고 격찬하며, 의병장군님들께 추증된 좌찬성이나 영의정 등이 선조님들의 관직임을 아시고 위안받으시라 속삭여 보며,
나 자신에게는 고경명 장군의 백마강 후렴으로 위로한다.
'傍人莫問溫(家>傷)事
벗들이여 옛 상처는 묻지 말게나
弔古傷春易白頭
옛 일에 상한 마음으로, 봄 경치까지 감상적이면 백발이 될까 싶네.'
*황진 장군을 난세의 영웅으로 미화한 사극 등이 있는데, 전주 안덕원과 소양 신원리(화순 순두부 가게 위쪽)전투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석연찮은 공적으로 역사서 논란이 많고,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모를 정도로 역사서 해석이 인터넷에 난무하다. 이 원인은 권율 장군의 장계 덕분이다.
ㆍ황진 장군은 8월 14일 이치에서 전투하며 허벅지 탄환을 맞았으나 권율의 용전으로 왜군을 퇴각시켰다.(사실)
ㆍ황진은 남원에 갔다가 다시 올라와 전주 안덕원에서 왜군 3천명을 빗자루 쓸듯이 죽였다.
이때 왜군은 웅치에서 천쯤 죽어 천오백여 명쯤 됐을까?
ㆍ안덕원 전투 시기는 황진이 이치에서 싸우고 있을 때고, 천리비행술을 펼쳐야 갈 수 있는 시간대다.
ㆍ소양 신원리 전투는 가능성 있지만 이도 어렵다. 황진 장군은 허벅지 부상으로 잘 걷지도 못하고, 산 허리를 따라가는 횡적 길도 없고, 이치에서 소양리까지 가려면 이도천리비행술이 있어야 가능하다.
현대에 와서 의심받는 안덕원, 대승리 전투지만, 그렇다고 황진 장군의 빛나는 이치전투의 업적이 없는 게 아니다. 이후 익산 군수가 되고 충청병마절제사가 되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산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