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渡來人
우리 귀에는 낯 설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문헌, 특히 고대 문헌에는 심심치 않게 나오는 단어입니다.
고대에 사람과 문물이 한반도를 통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 아니겠어요. 누가 시혜를 베푼 것도, 지배를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살기위해 더 나은 곳을 선택해 가는 행위의 흐름이었겠죠. 그 과정에서 집단의 이합집산이 생기면서 마치 권력과 국가 간의 충돌, 정복과 지배의 기록이 역사가 되어, 뒤를 이어 사는 사람들을 편 가르기와 한풀이의 족쇄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군요.
요즘 해외에 나가 사는 분 많지 않습니까.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한 분들도 많고요. 병역 면제나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분들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잘 살기위해 선택을 하는 과정의 所産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고대에도 규모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중국, 한반도, 일본을 잇는 무역 못지않게 인적 이동도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要는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규모보다는 훨씬 많지 않았을까 하는 점 . . . ?
渡來人의 기록은 모두 일본에 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리고 관련 연구나 관심있는 아마추어 연구그룹도 거의 일본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는 전문 연구가가 아니고 이것저것 들쳐보는,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토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상상하는 것을 즐기는 공상가라고 할까 요 . . .
일본인들의 기록이나 역사 해석은 좀 아쉽게도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인을 편협하고 왜소함으로 밀어붙이는 우리에게도 한계가 있는 거 같고요.
모두가 역사 complex? 한쪽은 고대사, 다른 한쪽은 근대사 . . .
渡來人의 역사는 크게 4 단계로 나뉘어 볼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한사군의 와해와 대방군의 설치 등으로 혼란했던 2~3세기경입니다.
三國志魏志倭人傳(陳壽)에 의하면 247년에 대방태수가 長城守備隊長인 張政을
倭에 파견합니다. 그는 266년 까지 근 20여년을 倭에 체재하였습니다. 왜? 그리고 무엇을 했을까요.
200년경부터 중국은 後漢이 기울기 시작하여 220년경에는 익히 잘 아는 위, 촉, 오의 삼국이 치열하게 다투어 280년에 吳가 사마의에 항복, 晉으로 통일되었고, 옛 흉노의 영역은 선비족이 자리를 잡았으며, 고구려는 압록강변에 도읍을 하고 선비족과 팽팽하게 맞섰던 때입니다. 이때 한사군은 재편되어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되어 魏, 이어 晉의 영역이 되었는데 장정은 대방태수의 명으로 倭에 파견되었고, 이때 장정의 직책은 長城수비대장이었습니다. 그러면 長城이 황해도까지 있어야하던지, 아니면 낙랑과 대방군이 山海關 근처에 있던지 해야 하는데 역사가들은 헷갈리고 있습니다.
장정의 파견(AD 247 ~ 266 까지)은 군사적인 목적이 가장 컷을 것이고, 20여 년간 끈임 없이 본국과 교신을 하였을 것이며, 그리고 자의건 타의건 간에 현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겁니다. 장정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대비하여 왜에 이르는 길, 방향, 거리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그것도 20여 년간 관찰한, 주변국의 국력 평가를 전쟁가능성에 입각하여 보고했을 겁니다. 바꿔 말하자면 張政의 보고에 기초한 倭人傳(陳壽)은 사실이고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700년대에 편찬된 일본의 史書 日本書記, 古事記에 기록된 2~300년대의 내용이 일치해야 되는데 . . . 안타깝게도 matching이 잘 안되어 비슷하다는 것 끼리 같은 거라고 각자 주장하다보니 . . . 그게 다 고고학자가 쓰면 논문이고 저 같이 제멋대로 상상하는 사람이 쓰면 종이 값이 아까운 쓰레기고 . . . 게네들은 그 나라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이 나라 사람들은 한사군 위치 갖고 왜 그래요 . . . 장정한테 물어보면 되는 것을 . . . !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보면 신라는 박혁居西干이 창업하여 박씨가 196년까지 지속하다 昔氏 姓의 奈解尼師今(AD 196~230)으로 넘어가고, 金氏 姓인 味鄒尼師今(AD 261~284)으로 잠시 넘어 갔다가 昔氏 姓의 尼師今(AD 284~356)으로 그리고 김씨 성의 내물, 실성尼師今(356~417), 김씨 성의 눌지, 자비, 소지麻立干(417~500)이었다가 지증왕에 이르러 비로서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합니다. 居西干, 麻立干. . . 기스칸, 머리칸. . . 왕을 칸이라고 한 것을 보아 박씨 성과 김씨 성의 왕은 몽고족 내지 흉노족이고, 니사금은 닛금, 즉 님금 임금, 君, 단군 . . . 석씨는 조선 부여계 후손이 세운 나라가 신라입니다. 2~3세기의 신라는 여러 부족의 칸들이 和白회의를 통해 화친과 결속을 유지하였던 거 같습니다. 말이 和이지 긴장감도 흘렀겠죠. 처음엔 6촌으로 시작하였지만 나중에 진골 이상의 모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새로 참여하는 부족도 있었을 거고, 불만을 품고 떠나는 부족도 있었지 않겠어요.
500년 지증왕에 이르러 신라는 중앙집권의 나라다운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야는 여러 부족이 通交는 하였으나 화친과 결속의 정도는 신라에 미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왜 가야는 강력하게 결속을 못했을까요. 가야의 부족국가들은 농업과 목축업의 국가들이 아니고 제철의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무역과 상업국가라 결속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대신 한반도와 왜와의 무역 내지 교류는 가야가 신라보다 훨씬 활발했을 겁니다. 이런 가야의 역량을 백제가 잘 활용하였고 그래서 친해질 수밖에 . . .
부족의 최소 단위는 수십 명의 일가친척이고 결혼으로 인맥이 연결되어 점점 큰 단위의 부족, 邑落國家를 형성했을 겁니다. 상업의 물류 라인과 부족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인 결속 여하에 따라 보다 더 큰 단위의 연맹이 형성되어 갔겠죠. 그러나 결속력 측면에서 보면 단위가 낮을수록 크고 의사 결정이 빠른 반면, 단위가 커지면 결속력이 낮아 지도자의 정치적인 역량이나 제도적인 통치가 필요하게 됨은 물론 의사 결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2~3세기 일본으로의 도래인은 규모면에서 가족단위거나 같은 姓씨의 친인척 단위, 좀 크게는 邑落단위로 이루어진 거 같습니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정치상황이 이들을 내몬 원인이고요.
한편 장정이 왜에 도착한 나라는 耶馬壹國, 왜는 통일 국가가 아니고 20여개의 나라가 서로 자웅을 겨루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를 史家들은 왜의 대란기라고 합니다. 이때가 한반도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국들이 백제, 신라, 가야로 통일된 국가로 진황해가던 시기로 일본에서는 약간 늦기는 하지만 같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한반도로 부터의 도래인이 안주하는 데에 저항이 적은 환경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지금의 규슈지방은 많은 국가가 탄생하는 창조국가 인큐베이터 . . . ?
같은 시대에 살았던 제갈공명이나 사마의에게는 한반도나 일본 모두 창업열풍지대로 보였을지 모르겠네요. 이시대의 도래인 기록은 신화나 설화로 나타나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일본 시마네(島根)현에 이즈모(出雲)라는 일본 開國基源의 고장이 있습니다. 포항에서 뗏목을 띄우면 저절로 도착한다는 곳. 이곳 出雲風土記에는 國引神話가 있는데 그 옛날 出雲國主가 나라를 크게하기 위하여 4 곳으로부터 나라를 끌어드렸다는 신화입니다. 그 4 군데라는 곳이
1. 志羅紀의 三崎
2. 北門의 佐伎國
3. 北門의 良波國
4. 高志의 都都의 三崎
인데, 4 곳 중 1번 시라기는 신라를 의미하는 것에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는데 2~3 번에는 의견이 분분 합니다. 강릉에서 여진, 동예의 지역을 넘어 지금의 블라디보스톡 까지 비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 가야지방의 여러 나라도 초청의 대상이었을 터인데 . . .
규슈 남단 미야자키(宮崎), 가고시마현 사이에 韓國岳(카라쿠니다케)가 있습니다. 맑은 날 韓國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나요. 그들에게 보인 것은 지금의 한국이 아니라 옛날 가야국입니다. 그 곳에는 가야국의 龜旨峰 설화와 똑 같은, 너무나도 똑 같은 설화가 있습니다. 김수로왕에게는 아들이 아홉인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큐슈로 건너갔다는 얘기도 있긴 합니다만 . . .
김수로왕이 구지봉에 내려올 때 瑞雲이 끼었다는데 신비롭게 降任하려면 구름을 타고 내려와야겠죠. 쉽게 이야기 하자면 설화가 같다는 것은 큐슈 지방에 가야계 부족들이 많이 건너왔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가야 사람들 구름을 상서롭게 보는 모양인데, 이즈모(出雲)도 구름이 나온다는 곳 아닌가요 . . .
耶馬壹國은 卑弥呼라는 여왕, 鬼道로 통치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巫女이었던거 같고(어떤 책에는 그녀가 김수로왕 아들과 관련이 있다고 우긴 사람도 있습니다. 저보다도 상상력이 뛰어난 분입니다. 그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장정을 통해 대방군과 교류를 했으며, 卑弥呼 사후 후계 옹립에 장정의 영향력도 개입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든 중소 난립된 국가들의 통폐합 과정을 장정은 잘 관찰하여 본국에 보고했겠죠.
두 번째 단계는 대방군과 낙랑군이 붕괴되는 375년경 부터입니다. 가야국의 仲哀왕의 젊은 황후와 그의 아들이 왜로 건너와 가야계의 부족국들을 통합하여 大和國을 330년에 세우고 應神왕이 됩니다.(應神의 모친 神功皇后는 321년부터 섭정을 하고, 369년에 백제의 부탁을 받고 신라를 침공합니다. 년도는 일본측 기록에 의한 인사들의 주장입니다. 120년 차이가 있을 수 있음)
大和를 야먀토라고 읽는데 왜? 일까요. 야마는 산(山)을 말하고, 토는 터로 집터라는 우리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산 높은 곳에 위치한 자리, 터입니다. 일본의 城을 보면 天守閣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城 안의 제일 높은 곳으로 城主가 머무른 곳. 산 높은 곳에 터를 닦고 집을 짓고 대 화합의 나라를 세운 산의 터, 大和의 산의 터, 大和야마토, 그리고 쓰기는 大和, 읽기는 야마토가 된 것입니다.
비로서 신라의 화백회의를 벤치마킹한 체제의 나라를 세운 거 아닌가요. 예네들도 天孫降臨의 민족이라 높은 산의 꼭대기를 신성하고 통치의 念力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 강화도 마니산처럼 . . . 瑞雲이 감도는 . . .
이 시기의 도래인 특징은 대규모라는 점입니다. 기록에 있는 대표적인 것을 보면
秦氏 - 4~5세기경 신라(波旦 출신) 弓月君, 127현 3~4만 명, 규슈 정착
양잠, 직조, 주조, 金工. 大和정권의 재정담당
東漢 - 應神왕 시 백제(가야 제국), 17현 민, 阿知使主(阿智왕)의 자손.
大和정권의 문서기록, 외교, 재정 담당. 제철, 토기(스에기)
西文 - 王仁의 후손
가야계의 나라 大和에 신라와 백제계 유민이 join 하기 시작하는군요.
제 3단계는 장수왕의 백제 신라 정벌인 475년경입니다. 백제는 그 주력이 일본으로 이동하고 남은 세력이 공주로 밀리는 때 . . .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 신세가 됩니다. 일본은 백제 세력에 의해 왕조가 가야계에서 백제계로 바뀌는 커다란 변화, 나라 아스카 시대를 엽니다.
4단계는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멸망입니다. 백제 유민은 천여척의 배에 10만여명이 도래 아닌 도래를 하게 됩니다. 이어 이들로 인해 제 2의 백제계 왕조인 국호 일본이라는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 후로는 고려말에 삼별초가 밀리면서 일본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후 도공과 일본 부역자들의 도일, 그리고 일제하에서 건너간 재일 한국인들 등등.
이들이 남긴 흔적이 지명으로 남은 곳, 백제의 22담로의 흔적 淡路와 高麗를 살펴보겠습니다.
토오쿄오에 神田淡路町, 오오사까시에 淡路町는 오오사까성 북쪽과 서남쪽 2곳에 있고, 세토내해 淡路島에 淡路市가 있고,
高麗는 토오쿄오 근방에 日高市에 高麗鄕, 大幾市에 高麗町, 오오사까시에 高麗町, 高麗橋, 그리고 가고시마시에 高麗町, 高麗橋, 나가사끼시에 高麗橋가 있습니다. 구마모토시에는 임진왜란 때 울산전투에서 일본에 부역한 사람들을 카토오기요마사(加藤淸正)가 데리고 가서 살게 한 蔚山町이 있습니다.
오오사까시의 高麗橋(옛날 에도시절의 우끼요 그림, 현재는 주변에 고가도로가 있고 확장 재건축되어 옛 모습이 아니라 첨부하지 않음)
가고시마市의 高麗橋(주변의 高麗町에는 임진왜란 후 온 도공의 후예들이 살았던 곳이라 하는데 아마도 삼별초의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가사끼시의 高麗橋(이 다리의 역사는 아직 잘 모릅니다)
요즘 세상이 何 수선하여 어찌 잘못되면 나도 도래인 될 수도 . . .
중고시장에 가서 똑딱선 하나 사서 강릉 앞바다에 매 놔야하는 거 아닌가요.
첫댓글 張政에 대한 기록은 어느 史書에 나와요?
대단히 훌륭한 글인데, 활자가 너무 작아 읽기가 힘들어요. 다음부터 ( 아니 이 것도 ) 활자크기를 12 point 정도로 키워주어요. 그럼 더 열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