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
마태복음 28장 1절-10절
예수 재판, 십자가 사형 집행, 부활 사건은 가장 유명한 사건이어서 그 스토리를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 사건만은 그 내용이 구약에서부터 예수 죽음까지를 결산하는 내용이고, 또한 그 이후로 종말까지 전개될 인류 전 역사와 다시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부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전체 내용을 요약 정리한 다음, 단락 별로 의미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요약정리> 마28, 막16, 눅24, 요 20, 21
예수님은 예언하신 대로 죽으신 지 3일만에, 정확히는, 십자가에서 영혼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다음 약36~39시간만에 부활하셨다.
그의 무덤은 훼파됐는데, 무덤을 손상하면 당시 로마법으로는 형사법상 사형에 해당하는 살 떨리는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의 무덤 훼파하면 살인극 일어난다.
그런데 이런 무지막지한 무덤 훼파 사건이 천사(낯선 청년들)에 의해 일어난 것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현장에서 목격했다.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것도 예수님 무덤을!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무덤 훼파라고 하는 무서운 사실에 사색이 되어 다 줄행랑을 쳤고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넣으려고 무덤을 찾은 그 여인들도 이 무시무시한 무덤훼파사건을 목도하면서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예수님의 무덤이어서 더 놀랐지만,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무덤 훼파범으로 잡히면 영락 없이 현행법으로 몰릴 가능성 때문이었다. 마2801-4
무덤 안에 있던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셨으니 빨리 그곳에 가서 주님을 뵈라 했다.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허겁지겁’ 빠져 나와 훼파된 무덤으로부터 가급적 빨리 멀어지기 위해 줄행랑을 치듯 내뺐다.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천사들의 괴이한 모습 때문이기 보다는 무덤 훼파 죄인으로 몰릴까 봐서 그런 것이었고, 그들이 ‘크게 기뻐한 것’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이기 때문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내빼고 있을 때, 예수 부활체가 나타나셔서 그녀들에게 말씀하셨다.
‘(덜덜 떨지 말고) (너희 주가 부활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 때서야 여인들은 한 숨을 돌리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알아보고 경배했다. 주님은 다시 당부하셨다. ‘(이제는) 무서워하지 마라!<내 형제들>에게 어서 알려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해라’ 하셨다. 마2808-10
*우리 성경의 본문은 주께서 여인들에게 ‘평안하뇨?’라고 말을 건넸다고 번역했으나, 원어는 의문문이 아니고 명령문이다. 또 뜻도 ‘평안’이라는 뜻은 없고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평안하뇨’는 ‘즐거워하라!’, ‘기뻐하라!’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 부활의 의미, 지금 여인들이 두려워 떠는 상황에 맞아 떨어진다. 평안하고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그 여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찾았다. [베]와 [요]는 힘껏 달려갔고, 여인들은 힘이 부쳐서 한참 뒤떨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요한은 무덤 밖에서 무덤 안의 사정만 살펴 봤고,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현장을 샅샅이 살펴봤다.
그들은 상황을 살핀 다음 시체가 없어진 것이 사실임에 심증이 가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낙향했다. 요2003-10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에서 부활체 예수님을 뵀다. 부활체는 이 장면이 처음.
막달라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나중에 알아본 다음에,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자,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 내 형제들에게 내 부활 소식을 전하라 하셨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요2011-17, 막1610-11,눅2409-11
그 시각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은 상황을 보고 받은 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돈을 주며 거짓 루머를 만들어서, 시체를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퍼뜨리게 했다. 마2811-15
부활하신 날 오후, 엠마오로 도망가던(낙향하던) 도마 일행에게 예수님이 동행하셨으나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 밤까지 부활체 예수와 길을 함께 가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서야 예수님인 줄 알아봤다. 눅2413-32 도마가 그 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동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역시 믿지 않았다. 막1613
그날 밤 예루살렘에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 모여 있던 자리에 예수님께서 현현하셨다. 제자들은, 예수 일당으로 발각되면 사형 당할 것이 두려웠고, 무덤 훼파죄까지 둘러 쓸 위험성도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불안에 떨면서 신분을 감추고서 은밀한 곳에 숨어 있었다.
부활체 예수님이 오셔서 그런 제자들에게 ‘평강 있으라’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다. 이 ‘평강’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덩어리가 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로 이미 하나님과 예수가 한 덩어리가 돼버렸고, 그리고 그 예수님, 하나님, 제자들이 이미 한 덩어리가 돼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의 결정과 실상을 직접 전하시는 장면이다.
이것은 요17장에서 기도하셨던, ‘하나님 안에 예수님, 예수님 안에 하나님’, 그리고 ‘자기 백성 안에 예수님, 하나님’으로 하나된 것이 성취된 것을 최초로 발표하신 내용이었다.
부활체 예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활을 증언하셨다. 잠긴 문을 통과하셔서 들어오심으로 영적 부활임을 증언하셨고, 구운 생선을 제자들이 앞에서 잡수시며 육체 부활도 증언하셨다.
그리고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동일인물임을 증언하셨다. 요2019, 눅2436-44
그러신 다음, 그 자리에서 11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인계하셨다. 예수의 지상사역의 이어달리기를 맡기신 것이다.
그러시면서 마가 다락방의 성령강림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수여’하셨다. 그 성령의 권세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게 조치하셨다. 요2021-23
이 자리에서 도마는 예수의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예수께서 직접 만져보게 하셨고 도마가 그것을 믿었다. 요2020, 24-29
그러신 다음 부활체 예수님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 그 다음 날 새벽에 나타나셨다. 낙향한 갈릴리 출신 제자들 7명이 밤새워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부활체 예수님이 그들에게 던지라는 곳에 그물을 던지자 큰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았다.
그들은 예수님인 줄 알아봤고, 부활체 예수님은 그들이 하선하자 그 바닷가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먹이셨다. 요2101-14
부활체 예수님은 식사를 마치자, 배신자 베드로를 불러 앉히시고, ‘내 양을 먹이라’는 교회 설립 사역을 인계하시고서 복권해주셨다. 이 복권으로 베드로가 교회 설립의 선봉장이 됐다. 요2115-24
그러신 다음 11제자들을 갈릴리로 불러 놓고, 중대 발표를 하셨다.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대선언이었다.
그 선언을 하신 다음, 그 ‘권세’로써 첫 명령을 제자들에게 하셨다. ‘온 나라를 다니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마2816-20 막1615-18
자, 이제는 의미를 살피고 교훈을 얻자;
<1> 왜 여인들은 3일째 날에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넣으러 갔을까?
당시의 중근동의 민속 신앙은 죽은 자의 영혼이 3일간 시체 곁에 맴돈다고 믿었다. 그래서 3일째에, 혼령이 떠난 다음의 시신에 향품을 더 채워서 손질할 요량이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신앙을 갖고 있다. 3우제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우제’라는 제사를 세 번 드리는데, 매장을 마치고 묘지 현장에서 그날 초우제를 드리고, 다음날 두번째로 재우제를 드리고, 3일째에 삼우제를 드린다.
이 제사의 뜻은 죽은 자의 혼령이 시체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 다만, 성경에 있다고 다 용인하거나, 진리라고 달려가면 안 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말씀과 생각, 그리고 행동만 진리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언행은 진리가 아니다.
*우제(虞祭): ‘우’가 ‘염려하고 근심한다’는 뜻이다. 죽은 이의 혼령에 대하여 염려하고 근심이 돼서 드리는 제사라는 뜻이다.
<2> 예수님은 도망간 제자들인데 ‘내 형제’라 하셨다. 마2810, 요2017
예수님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자기의 부활 사실을 ‘내 형제들’에게 빨리 알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지칭한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활과 관련이 깊은 하늘의 비밀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제자’가 ‘형제’로 바뀐 것이다. 단순히 용서하시는 주님, 사랑 많으신 주님으로 덮어놓고 달려가면 안 된다.
예수님이 지상 사역 때 ‘내 형제’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셨냐 하면,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셨고, 히브리서에서는 ‘하나에서 난 자’라고 정의했다. 마1250(막0335)
예수님이 제자들을 형제라 했으므로, 그 제자들은 하나님의 혈족으로 편입된 하늘의 비밀조치 내용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제자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로 편입된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편입됐다. 아들은 아버지 뜻을 따라야 한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 한 사람이 자기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일인극으로 끝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구원의 대속을 위해 죽는 것으로만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기본 질서와 구조까지 바꿔버린 그런 엄청난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과 천국 길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형제의 관계도 확고히 돼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예수님과 한 몸이 이미 돼있다.
한 몸이 돼야 믿음의 상태가 되는데, 이미 이것은 완료형이다. 믿음의 상태가 되면 형제처럼 혈연관계가 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바울도 자기의 동역자들과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200회 이상 지칭했다. 우리도 믿음의 동기들끼리 형제인 것을 알고, 그렇게 지내야 한다. 한 몸이며 한 피가 흐르는 형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형제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형제인 것을 알리는 일이다. 그들에게 이것을 알리는 방법은 무차별적으로 우리 이웃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3> 왜 부할 이후부터는 갈릴리가 중심이 됐는가?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는 뚜렷하게 갈릴리 중심적이다.
부활하시자마자 갈릴리로 가셨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선언을 하셨다. 왜 정치, 종교, 문화, 경제 등 모든 중심지여서 일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예루살렘을 버리시고, 변방 시골인 갈릴리로 중심 이동을 하신 것일까?
그 답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0901-2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 속에서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여기서 ‘전에 고통 받은 자들’은, 정치적 피해자들, 경제적 피해자들, 종교적 피해자들이다.
즉 강자에게 피해를 당하고 고통과 압제를 당하던 가난한 자들, 힘 없는 자들이다. 스불론 땅이고 납달리 땅이었던 갈릴리가 그런 곳이었다.
예수님이 왜 오셨냐 하면 강자들을 혼내시고, 이런 약자들과 피해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눅0418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등에 있어서 강자들의 집합장소이고, 그들은 피해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피해 주는 일을 일삼던 자들이어서 그들을 혼내셔야 했고, 갈릴리가 속한 스불론과 납달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앗수르와 바벨론과 주변 강국들에게 수없이 할퀸 지역이어서 그들 편을 들어주셔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북쪽으로부터 강국들의 침략이 빈번했는데, 그럴 때마다 갈릴리, 스불론, 납달리 지역을 맨먼저 포기했기 때문에 항상 적에게 형편 없이 짓밟혔고, 예루살렘지역은 사수해서 피해를 받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고통과 슬픔과 피해의식과 열등의식, 그리고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존시에는 악행을 해온 예루살렘을 호통치시며 악을 바로잡는 일이 주류였지만,
부활이 된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약자요 피해자들인 갈릴리 같은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가해자 집단의 상징이고, 갈릴리 지역은 피해자 집단의 상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고, 예루살렘은 예수를 잡아죽였다. 예레미야는 이런 악한 예루살렘에게 세 차례나 경고했지만 예수님을 죽이고서도 알아듣지 못했다. 렘0414, 0608, 1505
그런다고 가난한 자를 위한 하나님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다. 강자를 미워하신다는 것, 강자들이 약자와 피해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들, 피해자들,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 강자를 편들거나 강자와 손잡고 뭔가 이득을 취하면 못쓴다.
<4>나는 베드로 타잎 신자인가? 요한 타잎인가, 마리아 타잎인가?
베드로는 배신자로 낙인 찍혀서 염치 없는 놈이 됐고, 동료 제자들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판이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베드로에게 맨먼저 알렸다.
베드로는 요한과 여인들과 함께 무덤으로 달렸다. 먼저 앞서가던 요한은 무덤 입구에서 발을 멈추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무덤 밖에서 안쪽을 살펴봤다.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개선장군처럼 뻔뻔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시체가 없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자 맥없이 낙향하고 말았다.
여인들은 그 무덤 안에 들어가 아예 드러눕다시피 했다. 울며불며 우리 주님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소동을 피웠다. 그 여인들은 거기서 부활체 예수님을 만났다.
여러분은 어느 타잎의 신자인가?
요한처럼 자기 피해를 철저히 예방하면서,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자기 처지도 모르는 채, 앞뒤 재지 않고 무턱대고 믿음이라며 감정적으로 돌진하는가?
아니면 여인들처럼, 목숨을 걸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가?
우리는 이 세 타잎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들은 요한처럼 진지하고 신중하지 못하다고 자책하기도 하고, 베드로처럼 용기 있는 믿음이 아니라며 자책하기도 하고, 여인네들처럼 끝까지 집요하게 덤벼들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않나?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신앙의 어떠함이 사태의 진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여인네들은 떼를 써서 부활체 예수님까지 만나기는 했지만, 본질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동의 어떠함에 의해서 일이 달라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진의대로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는지 그것만 중요하지 우리들의 반응이나 표현, 열심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시체’에 주목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본질에 주목했어야 한다.
이런 열심이나 인간적인 덕목을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왔는데, 기독교는 윤리 종교도 도덕 종교도 아니므로, 이런 버블을 이제는 거둬내기를 바란다.
<5>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에게로 올라가신다’ 하셨다. 요2017
이것도 하늘의 굉장한 비밀을 밝히신 내용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예수님은 왜 부활하신 다음 세상에 오셨을까? 이것은, 부활이 성공한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과, 이 일로 어떤 하늘의 조치들이 내려졌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오셨다.
이 말씀도 세상의 구조와 질서를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꾼 사건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믿음] 두 개의 길이 확고하게 됐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하늘의 조치 완료 내용을 밝히신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과 하나님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므로, ‘구원’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의 상태’가 돼버렸다는 비밀이다.
구약 시대의 간접 소통 방식일 때는 구원과 믿음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되면서 하나님과 직접 소통을 하려면, 구원과 믿음의 기반이 확고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을 확고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의 정도가 변하거나, 믿음의 정도가 변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믿음과 구원에 목숨을 걸면 방향착오다. 이미 완성된 완료형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모든 민족을 다 제자 삼을 수 있고, 그들을 가르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가능하고, 세상을 섬겨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단순히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에 머무는 것은 초기 신앙이다.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방향착오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개인의 유익을 최대화하려는 것은 미신행위다.
또 예수님은 부활체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라는 인사를 세 번이나 하셨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축복의 말씀이다.
‘내 형제’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평강’은 자동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라고 인사하신 것은, ‘우리는 한 덩어리야!’ 하는 말이다. 그런데 도마는 이런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같은 의미이다.
우리도 도마처럼 ‘불신 상태’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깨어나 믿어라!
예수님은 지상사역 하실 때,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서 자기 백성들과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과 한 덩어리가 되게 하는 평강을 주시겠다 하셨는데 그 조치가 이미 끝난 것이다. 요1427
또,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려주셨다.
이것도 주님 사망과 부활로 취해진 하늘의 조치다. 이 성령은 마가 다락방에서 임하게 될 그 성령 강림이 아니다. 그 성령강림은 구원받을 모든 사람에게 내릴 성령의 모습이라면, 이번의 성령 수여는, 예수의 사역을 인계하는 성격의 성령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그 동안 부리던 성령을 이제 너희에게 인계한다’는 뜻쯤 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자기 백성들이 천국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길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고 천국에 올 백성들을 찾아내는 일을 제자들에게 인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은 예수를 대신하는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주님의 모든 제자들, 사역자에게는 이와 같은 특별한 인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 인수 사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6> 도마의 행태를 생각해보자.
도마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없다 단정하고, 낙향했다. 그 낙향 길에 부활체 예수께서 동행하셨다. 그는 거의 한나절을 동행했지만 부활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 식사 때 예수께서 음식을 축사하시자 알아봤다. 낮에 여러 가지로 말씀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지만 간과했고, 긴 시간을 동행했지만 건성이었다.
예수님이신 줄 알자 곧바로 밤길을 달려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수님이 현현하시자,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만져 보게 했더니, 즉석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도마가 이렇게 온탕 냉탕을 뛰어다닌 것은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 도마는 자기의 확신을 합리화하는 데 바빴다. 이런 도마의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이 문제를 삼으신 것은,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즉 자기 주장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불신 증후군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세 사람에게 만원을 주면서 가장 좋은 일을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A는 저축을 했다. B는 책을 샀다. C는 부모님께 선물을 사다 드렸다.
누가 잘했는가? 누가 가장 옳은 일을 했는가?
질문을 바꿔보겠다. 저축한 사람은 책을 산 사람을 뭐라고 평가할 것 같은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는 또 만원이 생기더라도 저축하겠다, 미쳤다고 책을 사나?’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는 것이다. 사실은 누구도 절대적으로 잘했다거나 옳다고 할 수 없다.
저축한 것, 책을 산 것, 부모님 선물 사드린 것…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자기 행동에 대해서는 합리화하며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미쳤다고 책을 사나? 저축을 해야지…!’
누구에게나 이런 경향을 갖고 있다. 이것을 설명한 것이 Festinger의 [인지부조화 이론]이다.
자기 생각이나 결정이 잘못됐거나 불리할 경우, 자기의 주장을 강화하는 쪽으로 누구나 달려간다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도 없는데 자기 것이 옳다는 이론과 명분을 열심히 생산해 낸다.
도마는 자기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낙향한 것에 대한 자기 방어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예수님과 한 나절을 함께 걸어가면서도, 예수가 부활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조차도 싫었다. 그래서 그 긴 시간인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저녁 식탁에서 예수신 것을 알아보고 그 밤길에 예루살렘까지 달려와서 제자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던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감추고 만회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현현하시자 직접 만져봐야 믿겠다고 좌중에서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좌중에게 자기가 얼마나 신중하며 빈틈 없는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예수 부활을 믿지 못했거나 감지하지 못한 경거망동을 상쇄하려고 했던 것이다.
틀렸는데 옳다고 우기거나, 다른 행동으로 보완하려는 행동은 점점 도마를 미궁으로 빠뜨렸다. 회복되지도 개선되지도 않았다. 도마의 설득에 아무도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예수의 상처를 만진 다음, 거기서 무릎을 꿇자, 모든 문제가 해결됐던 것이다. 그 장면까지 가지 않고, 무릎을 꿇었더라면 좋았겠다- 보지 않고 믿어라. 이것이 주님의 도마에 대한 결론이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하면, 자기 주장을 언제든지 의심하고, 언제든지 고치라는 것이다. 그 길은 오직 진리 앞에 서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경향이 있다. 자기입장을 살리려다가 점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엉터리 지식이나 과장된 신앙을 자기가 지켜주려고 하지 마라. 정답만을 추구하는 입장을 추구하라.
[교회 다움]은 정답주의를 확고히 지키며 가고 있다. 정답 아닌 것은 타협하지 않는다. 정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향성은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여러분의 가정과 회사에서도 이 방침을 지키기 바란다.
<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한 미션은 전도가 아니라, 교회 세우기였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 보통 전도 명령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유언’이라고도 하고, ‘The Great Mission’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 문장을 원어의 뉴앙스를 최대한 살려 내가 다시 번역해 보겠다.
이 말씀은 분명히 두 문장이고, 주제가 둘이다.
1) [예수께서 제자들 가까이 오셔서 얘기를 나누셨다. 선포하시길 ‘하나님께서 내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
2) [그래서 내가 그 권세로 말하는데,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라’. 모든 민족들을. 그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가르치면서.]
물론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은 ‘네가 명령했던 모든 것들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가는 것과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다 분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는 일(동사)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 명령에서 명령어는 ‘제자를 삼아라’ 하나뿐이다.
예수가 제대로 죽자 하나님은 제대로 부활시켜서 세상에 보내, 그간 하늘의 조치가 무엇인지를 밝히도록 하셨다. 그 중에 또 하나가 여기서 추가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대로 죽으셨더니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께 주셨다>는 하늘의 비밀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로써 내가 지상에서 해야 할 마지막 처음이자 마지막 명령이 있는데 그것은 이 명령이다,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교회(성도)를 많이 세우라]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존재가 맨먼저 그 권세를 사용해서 해야 할 명령이 교회 설립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교회 설립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지상 과제다.
그래서 이 중대한 발표와 명령을 동시에 하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 설립’이 핵심으로 드러나야 한다. 교회를 세우면 자동으로 전도 활동은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를 주라’한 점과 ‘가르치라’는 점에 대해서
더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세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원어를 직역하면, ‘아버지 권위(이름)의 본질 안에서, 아들 권위(이름)의 본질 안에서, 성령 권위(이름)의 본질 안에서 <세례를 주라>’고 했는데, 세례 주는 것을, 신앙을 고백하게 한 다음 물에 집어넣는 ‘제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버지의 본질, 아들의 본질, 성령의 본질 안에서’를 <제도 세례>로 달려가기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제도의 틀로 해석하면 그것은 다분히 제국주의 방식이다. 위협적이고 강제적으로 고착된 ‘틀’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한 다음, 서둘러서 물통에 집어넣는 틀(제도)로 달려가는 것은 생태계가 다르고 낯선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기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런 의미 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본질을 점차 이해해서 ‘빠져들도록’ 점차적으로 이끌어간다는 뜻이 강하다. 물론 그 과정의 적당한 때에 ‘제도 세례’를 베풀게 되겠지만.
‘세례’의 본 뜻은 ‘예수께 이전해주다, 물들게 해주다’는 뜻이지 ‘물에 집어 넣다’라는 뉴앙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세례를 주라’로 번역한 바람에 제도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그런 도식적인 세례를 베푸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르친다’는 것도,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같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면서 그들의 묵은 ‘삶의 방식과 습관’을 고쳐주는(instruct)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런 삶의 질적 변화를 통해, 그의 온 마음과 영을 예수께로 묶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두고 전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교회를 세워가고 발전시켜가는 프로세스다.
더더구나 전도를 예수님의 최후 유언이라느니, 지상명령(The Great Mission)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상 과제가 전도일 수 있는가?어떻게 우리들의 지상과업이 전도이겠는가?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지 전도일 수는 없다.
전도는 성도들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결실인 것이지 전도 자체를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지상 명령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종말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천국 입성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목표를 반듯하게 정비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의 우선순위는, 구원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성령 충만도 아니고, 복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책임이지 우리 책임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교회(성도)를 많이 세우는 것이다. 교회(성도)를 반듯하게 세워서 제대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부활 이후에 교회 시대와 성령 시대가 제대로 시작됐으므로 그 길을 곧장 달려가야 한다.
그 길을 최대한의 속력으로 달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