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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당나라 현실주의 시인
1. 생애1) 집안 내력
두보의 초상화
두보는 경조(京兆) 두씨라는 북방의 큰 집안 출신이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노(少陵野老)이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두보의 본적은 후베이성 샹양(襄陽)이며, 증조부 때 허난성 궁(鞏)현 동북으로 이주했다.
당나라 때의 같은 성을 가진 두목과 함께 진(晉)나라 때 유명한 학자 두예의 후손이지만 후에 집안의 촌수는 멀어졌다. 두보는 두예의 둘째아들 두탐(杜耽)의 후손이고 두목은 두예의 막내아들 두윤(杜尹) 쪽이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초당1) 시기의 시인 두심언이다.
2) 청소년기의 여행과 과거 낙방
두보의 청소년 시기는 좋은 집안 환경 때문에 풍족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일곱 살 때 벌써 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도 뛰어났고 자신감도 대단했다. 19세부터는 약 4년에 걸쳐 각지를 여행했다. 당시 두보의 부친이 산둥성 옌저우(兗州)에서 사마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두보는 부친을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제나라 · 조(趙)나라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23세 때 고향에서 향공2)에 응시했고, 24세 때는 허난성 뤄양으로 가서 진사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3)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과의 만남
그가 33세 되던 해에(744년) 두보는 뤄양에서 당나라 때 저명한 현실주의 시인 이백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양 · 송 일대(현 허난성 카이펑, 상추 일대)를 여행한다. 이후 두보는 다시 제주(齊州, 지금의 산둥성 지난)로 건너갔다가 4년 뒤 옌저우로 가서 이백과 다시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신선을 찾아다니고 시와 문장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렇게 이백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두보는 이백과 아쉽게 헤어진 뒤에도 몇 년에 걸친 방랑생활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려지며, 이상은과 두목을 ‘소이두(小李杜)’라고 하고, 두보와 이백을 ‘대이두(大李杜)’라고 구별한다. 두보는 ‘노두(老杜)’라고도 불린다.
중국 각지에 조성되어 있는 두보의 상
4) 순탄치 않은 벼슬길
명문가 출신에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였던 두보는 젊은 날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이 있었고 포부가 남달랐다. 또 힘들게 사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 · 순 시대를 갈망하는 정치적 이상도 품었다. 현실 정치의 문제와 추악한 면도 실감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뜻을 펼쳐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현종의 통치는 후반기로 갈수록 부패에 찌들었고 두보의 생활도 실망과 빈곤으로 치달았다.
현종의 조서에 따라 그도 장안(현, 시안(西安))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의 권신 이임보의 농간으로 시험에 참가한 응시자 모두가 낙방했고, 과거길이 막힌 두보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권문세족의 집안을 전전하며 글을 써주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장안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그 뒤 현종에게 올린 <대례부(大禮賦)>란 글이 현종의 눈에 들어 조정에 나갈 기회를 잡았으나 역시 이임보 때문에 관직을 얻지 못했다. 두보가 44세 되던 무렵에 겨우 말단 관리직을 받았으나 그때 어린 아들이 굶어 죽는 참극이 일어나 두보의 일생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터진 안록산의 난은 두보를 더욱 더 곤경에 몰아넣었다.
중국 각지에 조성되어 있는 두보의 상
5) 전란과 수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쳤다. 태자 이형이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현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이때 두보는 집을 옮겨 난을 피했다가 숙종의 즉위 소식을 듣고 혼자 숙종이 거처하고 있는 영무(靈武, 지금의 닝샤후이족 자치구 링우시)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함께 포로로 잡힌 왕유와 달리 말단 관리에 불과했던 두보는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고난을 겪으며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을 시로 표출했다.
그가 46세 되던 해인 757년, 정부군을 이끄는 곽자의가 장안 북쪽으로 진격하자 두보는 장안을 빠져나가 마침내 숙종에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숙종은 두보에게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을 내렸다.3) 그러나 재상 방관의 석방을 건의했다가 숙종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화주4)로 쫓겨나 허드렛일을 맡았다.
화주에 온 두보는 고뇌에 시달렸다. 이 무렵 지은 시는 실의에 빠진 자신의 처지, 싸늘한 세대, 간신배들에 대한 울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방관은 재상 장호(張鎬)가 힘을 써서 구하기는 했지만 한번 돌아선 숙종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숙종은 그 뒤 다시는 두보를 찾지 않았다.
6) 유랑과 일시 정착
47세 되던 해인 758년, 두보가 화주를 떠나 뤄양과 허난성 등지를 떠돌던 중 업성5)에서 당나라 군대가 반란군에 대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보는 뤄양에서 화주로 돌아오던 중 전란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삼리(三吏)>와 <삼별(三別)>로 불리는 유명한 역사시 세 편을 남긴다. 바로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의 ‘삼리’와 ‘신혼별(新婚别)’, ‘수노별(垂老别)’, ‘무가별(舞家别)’의 ‘삼별’이 그것이다.
759년에는 화주와 관중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뜩이나 힘든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두보는 가망이 보이지 않는 벼슬을 내던지고 서쪽 간쑤성 일대로 갔다가 각지를 전전한 끝에 마침내 청두(成都)에 이르렀다. 여기서 두보는 당시 청두 절도사로 있던 엄무 등의 도움을 받아 성 서쪽 완화계 옆에 초당을 짓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훗날 ‘두보초당’ 또는 ‘완화초당’으로 불린 곳이다.
두보는 엄무의 추천으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고 엄무의 참모가 되었다.6) 하지만 두보는 이 벼슬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두보의 생활이 보기에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비바람에 초당이 쓰러지고 가족이 굶주리는 등 힘든 생활은 여전했다.
7) 죽음
엄무가 죽자 두보는 청두를 떠나 각지를 전전했다. 기주(夔州, 지금의 쓰촨성 펑제(奉節)현) 도독 백무림(柏茂林)의 보살핌으로 잠시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두보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는데 2년 안에 4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57세 때인 768년, 두보는 향수 때문에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후난성 웨양(岳陽)을 거쳐 담주(潭州, 지금의 후난성 상탄(湘潭)시)에서 다시 형주(衡州, 지금의 후난성 형양(衡陽)시 일대)로 갔다가 다시 담주로 돌아왔다.
59세 때인 770년, 담주에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다시 형주로 가서 외삼촌에게 몸을 맡기려 했으나 강물이 불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굶주렸다. 두보는 생각을 바꾸어 다시 담주로 돌아오려다가 담주에서 웨양으로 가는 작은 쪽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두보의 죽음에 관해서는 역대로 많은 설들이 있었다. 병사를 비롯하여 처형, 투신자살, 식중독사 등이 있으나 병사로 보는 설이 우세한 편이다.
2. 평가
그는 중국 고전 시가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시인 중의 하나로 후인들은 그를 ‘시성(詩聖)’이라고 부르고,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고 일컫는다.
759년에 두보가 안사의 난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쓰촨(四川)으로 피난 갔을 무렵을 전후로 <춘망(春望)>, <북정(北征)>, <삼리(三吏)>, <삼별(三別)> 등 주옥같은 명작을 만들었다. 그는 약 1천5백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대부분 『두공부집(杜工部集)』에 실려 있다.
3. 두보의 시풍
이백과 나란히 거론되는, 그렇지만 신세는 이백보다 훨씬 처량하고 서글펐던 위대한 시인 두보의 시풍은 그의 고단한 삶의 역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는 이백보다 열한 살 아래였고, 문하성에서 좌습유라는 보잘것없는 하급 관리를 지냈다. 중년 이후 안사의 난을 맞이하여 더욱 빈궁하게 지냈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굶어죽을 정도였다.
그의 시는 극악무도하게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권문귀족과 평민들이 받는 박해에 대해 침통해하는 등 대부분의 시가 소리없이 흐느끼는 듯하다. 두보의 시는 단순히 그의 천재성에만 기대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가 뼈를 깎는 듯한 고심의 산물이다. 이런 그의 시풍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석호리(石壕吏)>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이 시는 중국 역사상 제2 황금시대로 불리는 당나라가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혼란에 빠져들 무렵에 만들어졌다.
석호리(石壕吏)
날 저물어 석호촌에 머물렀는데
관리가 밤에 사람 잡으러 나왔네.
할아비는 담 넘어 도망치고
할미는 문 앞에 나와 보는데
관리의 호통이 어찌나 노엽고
할미의 울음은 얼마나 서럽던지!
들으니 할미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하네.
‘세 아들 업성으로 수자리 살러 갔는데
한 아들 부쳐온 글에
두 아들이 싸우다 죽었다 하지 뭐요.
산 놈은 구차하게라도 산다지만
죽은 놈들은 영영 끝장이지요.
집안에 사람이라곤 없고
오직 젖먹이 손자뿐인데,
손자가 있어 어미는 가지 못했지만
나들이 하려해도 온전한 치마 한 벌 없다오.
늙은 이 할미의 힘 노쇠하긴 했지만
나으리 따라 밤도와 가리다.
급히 하양 전쟁터로 때맞추어 갈 수 있다면
그래도 아침밥은 지을 수 있을게요!’
밤 깊자 말소리 끊어지고
흐느껴 우는 소리 같은 것만 들렸는데
날 밝아 길 떠날 적에는
오직 할아비와 작별하였네.
두보가 말단 관리를 지냈고, 중년에 안사의 난을 잔혹하게 치렀던 당시의 심경과 처지를 <춘망(春望)>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춘망(春望)>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한다.
봉홧불이 석 달이나 계속되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한다.
흰 머리를 빗으니 다시 짧아져서
온통 비녀를 이겨내지 못할 것 같구나.
麗人行[여인행] 杜甫[두보]
미인의 노래.
三月三日天氣新[삼월삼일천기신] : 삼월 삼짇날이라 하늘의 기운은 새롭고
長安水邊多麗人[장안수변다여인] : 장안 강물 가에는 아름다운 사람 많구나.
態濃意遠淑且眞[태농의원숙차진] : 농염한 자태 뜻은 깊고 본성 또한 맑은데
肌理細膩骨肉匀[기리세니골육균] : 살결 보드랍고 매끄러워 뼈와 살 고르네.
繡羅衣裳照暮春[수라의상조모춘] : 수놓은 비단 옷과 치마 늦은 봄을 비추고
蹙金孔雀銀麒麟[축금공작은기린 : 금실로 공작을 은실로는 기린을 수놓았네.
頭上何所有[두상하소유] : 머리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翠微匎葉垂鬂唇[취미압엽수빈순] : 푸른빛 족두리 갈래 귀밑털 가에 드리우고
背後何所見[배후하소견] : 등 뒤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珠壓腰衱穩稱身[주압요겁온칭싱] : 구슬 찍은 허리 옷깃 몸 편하게 알맞구나.
就中雲幙椒房親[취중운막초방친] : 그 중에 특히 구름 장막의 왕비의 친척들
賜名大國虢與秦[사명대국괵여진] : 괵국과 함께 진국 큰 나라를 봉호로 받았네.
紫駝之峰出翠釜[자타지봉출취부] : 자색 낙타의 봉우리 비취 가마에서 나오고
水精之盤行素鱗[수정지반행소린] : 수정을 쓴 쟁반에 흰 물고기가 유행하였네.
犀筯厭飫乆未下[서저염어구미하] : 물소뿔 젓가락 싫증나 오래동안 손 대지 않고
鸞刀縷切空紛綸[난도누절공분륜] : 난도로 잘게 썰어 베느라 헛되이 어수선하네.
黄門飛鞚不動塵[황문비공부동진] : 환관들은 먼지도 안 나게 말 재갈을 날리고
御厨絲絡送八珍[어주사락송팔진] : 수라간에서 실을 묵 듯이 팔진미를 보내오네.
簫鼓哀吟感鬼神[소고애음감귀신] : 통소와 북은 슬피 읊어 귀신도 감응시키는데
賔從雜遝實要津[빈종잡답실요진] : 북적되는 시종 문하들 요직을 밝히는구나.
後來鞍馬何逡巡[후래안마하준순] : 뒤에 오는 안장 지운 말은 어찌 이리 느긋한가
當軒下馬入錦茵[당헌하마입금인] : 마루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비단 깔개에 드네.
楊花雪落覆白蘋[양화설락부백빈] : 버드나무 꽃이 눈처럼 떨어져 흰 마름을 덮고
青鳥飛去銜紅巾[청조비거함혼건] : 파랑새가 날아 가는데 붉은 수건을 물었구나.
炙手可熱勢絶倫[적수가열세절륜] : 사람을 끄슬러 기함하게 하는 절륜한 세도
慎莫近前丞相嗔[신막근전승상진] : 근처에 가지마라 승상께서 노하신다.
이 시는 천보 12년(753) 봄, 楊國忠[양국충] 형제자매들의
교만과 사치 음일을 풍자했다.
4. 관련 유적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허난성 궁셴의 무덤, 쓰촨성 청두의 두보초당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많이 남아 있다.
두보의 고향인 허난성 정저우 공의시에는 두보가 어린 시절 살던 옛 집 ‘두보고리(杜甫故里)’가 기념관을 중심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두보의 무덤도 이곳에 잘 정돈되어 있는데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1963년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청두를 비롯한 네 곳에 두보의 사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특히 후난성 형양에 있는 레이양(耒陽)에는 허난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서 두보의 무덤과 사당 및 서원 유지 등이 지정되어 있다.
두보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두보가 거처했던 두보초당이다. 두보초당은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완화계 가에 위치하고 있다. 두보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청두로 흘러 들어와 머물던 집이다.
759년 12월 안사의 난을 피하여 두보는 장안에서 간쑤를 거쳐 청두로 도망왔다. 이듬해 3월 친구의 도움으로 이곳에 풀로 집을 짓고 스스로 ‘초당’이라 이름 지었다.
두보는 3년 넘게 이곳에서 살면서 240편이 넘는 시를 창작했는데, 초당을 소재로 한 시가 아주 많다. ‘만리교 서쪽 초당 하나’라든가 ‘만리교 서쪽 백화담 북장’ 등이 모두 초당의 위치를 가리키는 시 구절들이다. ‘완화계 물이 서쪽 끝으로 흐르면서 춘강이 마을 한 바퀴 휘감아 도는구나’라는 구절은 초당의 환경을 묘사한 것이다. ‘초당이 가을바람에 부서진다’는 시는 훗날 사람들이 천고의 절창으로 꼽는 명시다.
청두의 두보초당과 초당 내의 두보상
두보초당 내의 두보상
두보초당(杜甫草堂)
두보초당이 그 당시 얼마만한 규모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의 초당은 동쪽의 범인사와 서쪽의 매원을 합친 총 면적 20만 제곱미터가 넘는 대규모다. 초당 안을 매화 · 대나무 · 녹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고전적인 원림 건축은 문화적 색채가 농후하여 청두를 찾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감상하는 곳이 되고 있다.
초당의 원림은 아주 조용하고 그윽하다. 시내가 구불구불 흐르고 다리와 정자가 서로 마주보며 손짓한다. 4계절 내내 꽃과 나무가 서로 어울려 사람들을 끈다. 현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두보는 이곳에서 햇수로 4년을 머물며 울분을 달랬고, 그 울분을 240여 수의 주옥과 같은 사실주의 시작으로 승화시켰다. 훗날 사람들이 이런 두보를 흠모하여 북송 때부터 초당 유지에 사당을 세워 그의 넋을 기렸다.
초당 건축은 정문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대해(大廨) · 시사당(詩史堂) · 시문(柴門) · 공부사(工部祠)로 이어진다. 그 중 대해와 시문은 두보의 시에도 나오는 초당 원래의 건축이고, 시사당과 공부사는 훗날 두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시사당 한가운데에 두보의 입상이 있고 안에는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주련7) · 현판이 진열되어 있다. 공부사는 그가 한 때 검교공부원외랑이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사당 안에는 두보 초상화가 있고, 이와 함께 두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육유, 황정견이 함께 모셔져 있다. 실내에 벽에는 비각8) 같은 문물들이 있다.
공부사 왼쪽에는 ‘소릉초당(少陵草堂)’이란 편액이 걸린 비각이 있다. 두보의 별명이 두소릉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는데, 네 글자는 청나라 공친왕 혁흔의 필체다.
1985년 5월 두보초당 개관 30주년을 축하할 무렵 두보초당 박물관이 정식으로 섰다. 박물관 안에는 3만여 종의 책과 2천여 건의 문물이 소장되어 있다. 문물 중에는 두보의 시를 책으로 펴낸 송 · 원 · 명 · 청 역대의 정각본9) · 영인본10) · 수초본11) 및 근현대의 활자본이 포함되어 있다. 또 그 중에 15종의 문자로 된 번역본과 조선 · 일본에서 출판한 한자본 120여 종도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보 [杜甫, dù fǔ] - 당나라 현실주의 시인 (중국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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