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4일에 개봉한 영화, '왕사남'이 '파죽지세'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영화 역대 관객수에서 부동의 1위는 2014년 7월에 개봉했던 영화, '명량'이 차지하고 있다.
관객수가 무려 1761만 명이었다.
역대 2위는 2019년 1월에 개봉했던 '극한직업'으로 1626만 명이었다.
현재 '왕사남'이 1612만 명을 기록하며 3위에 올랐지만 이 증가세라면 2위마저 곧 압도할 기세다.
결과가 어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다.
'선두경쟁'이 치열한 한국의 영화시장이 그저 감사하고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때, 내가 2014년 8월 20일에 작성해 두었던 영화 '명량' 후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왕사남'의 고군분투와 정진에 힘찬 박수를 보내면서 말이다.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공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왜침 보름 만에 조정을 버리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도망갔다.
'종묘사직'을 보위해 후일을 기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비굴과 저열함의 극치였다.
나라는 참담했고 내팽개쳐진 백성들은 불쌍했다.
왜놈들의 칼끝에 국가는 처절하게 유린당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왜놈들의 전의와 사기가 점점 시들어 갔다.
또한 조선군과 백성들의 항쟁이 도처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쟁의 양태가 바뀌자 도주했던 '군주'는 다시 한양으로 복궐했다.
그때가 1593년 10월이었다.
그 1년 7개월 동안 한양은 명목상 조선의 수도였으나 실상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가엾은 백성들의 애환과 고초는 형언할 수 없었다.
당시 조정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기존의 두 파벌조차도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사색당파'로 극심한 '자중지란'을 겪고 있었다.
'대소신료들'은 무능했고 부패했으며 파벌싸움에 골몰했다.
글을 깨친 자들은, 경향각지의 크고 작은 관직들을 '매관매직'하여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팔도강산 어디에도 진정한 리더나 준비된 위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선조는 '황윤길'과 '김성일'을 대표로 파견하여 저들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섬나라는 '풍신수실'(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왜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돌아온 '황윤길'(서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건조하고 있으며, 무기들을 재정비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극심한 전화가 있을 것임을 보고했다.
그러나 '김성일'(동인)은 왜인들의 전쟁준비와 침략조짐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저들의 통상적 수준에 지나지 않으므로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보고했다.
붕당과 계파의 극명한 폐단이 여실히 드러났다.
신료들은 대부분 '동인'의 주장을 추종하고 나섰다.
당연한 이치였다.
과연 어떤 관료가 깨어 있어 미래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려 할 것인가?
막연한 미래의 기약 없는 정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자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자발적으로 '유비무환'을 되새기며 조국의 내일을 대비할 것인가?
누구나 말로는 '국난대비'를 외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를 묵묵하게 실행할 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거의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조시대'의 조선이나 작금의 '박근혜 정권'이나 어쩌면 이리도 닮은 꼴일까 싶었다.
그저 '유구무언'일 따름이었다.
위기의 질곡으로 나가떨어진 '조선'이었다.
'국가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목숨 바쳐 헌신할 자 누구였던가.
없었다.
당시 '이순신'은 억울한 누명을 쓴 채 파직당한 상태였다.
영의정 '류성용'은 선조에게 '난세를 평정할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순신' 뿐이라며 간곡한 심정으로 국왕께 주청 했다.
'영의정'은 '이순신'보다 세 살이 많았다.
또한 '동향출신'이었기에 소싯적부터 장군의 '사람됨됨이'와 '충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만시지탄'이었지만 조국의 안위가 다급한 상황에서 그렇게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후였고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의 나이 '쉰두 살'이었다.
임란 6년인 1597년, 오랜 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혼란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 그리고 12척의 낡은 병선이 전부였다.
최후의 보루였던 '거북선'마저 불타 사라진 뒤였다.
'설상가상'이었다.
현실은 암울했고 참담했다.
그런 위기 속에서 무자비한 성격에 뛰어난 지략을 가진 왜군, '구루지마'가 적군의 수장이 되어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남해를 거쳐 서해로 치고 올라가 한양을 재침공하려는 간계를 세우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자 한반도엔 다시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강토는 이전보다 더욱 흉흉했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바다'를 향해 출정했다.
낙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종묘사직'이 '백척간두'로 내몰리고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비장한 결의로 전쟁에 임했다.
모든 전황이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열악했으나 장군은 단 하나의 전략과 원칙을 목숨처럼 붙들었다.
그것은 바로 '사즉생의 정신'이었다.
'울돌목'은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바다였다.
그곳에서 양국 수군은 국운을 건 채 '건곤일척'의 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2척의 초라한 조선군과 330척의 골리앗 함대 일본군이었다.
역사의 물꼬를 뒤바꾸며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해전이 그곳에서 촉발되었다.
개전 8시간 만에 치열했던 전투는 빠르게 막을 내렸다.
왜군의 사망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기적 같은 승리였다.
단 한 사람의 뛰어난 장수,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목숨 건 해전을 통해 조선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왜군의 '한양함락'과 '조선정벌'에 대한 꿈은 허망한 물거품이 되어 포말처럼 흩어졌다.
그랬다.
전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가장 드라마틱한 전투였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었다.
8시간 동안 격렬했던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왜군은 처참하게 침몰했다.
그에 반해 조선은 기적적으로 부상했다.
두려움에 떨던 '조선수군'의 극적인 승리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강한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전율과 울림이 끝내 가슴 먹먹한 감동으로 승화되었다.
과연 '이순신'은 '충무공'이었다.
영화 상영 내내 격한 떨림과 가슴 먹먹함이 스크린에 흥건했다.
때론 눈시울이 뜨거웠다.
걸작이었다.
진정으로 감동적인 영화였기에, 한국 영화사엔 지금도 '전인미답'의 새로운 이정표가 뜨겁게 세워지고 있다.
역대 최단기간인 개봉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흥행세가 매섭다.
지금까지 정점에 자리 잡고 있던 최고의 히트작, 아바타를 가볍게 눌렀고 개봉 21일 만에 마의 1,500만 명도 훌쩍 뛰어넘었다.
대한민국 영화사에 신기원이 수립된 순간이었다.
뜨거운 갈채와 오마주를 보낸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이 영화의 성공에는 '4050 세대들'의 강력한 견인이 있었다.
중장년 세대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는,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지략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컨대 '일자진', '백병전', '충파' 등 장군의 계책이 궁금해서도 아니었다.
최첨단 해양 CG 기술과 초현실적 스펙터클한 전투신을 보러 간 것도 아니었다.
구름 같은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우리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 그 한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갈급한 심정이었다.
준비된 리더 하나 없이 탐욕스러운 잔챙이들만이 준동하는 작금의 메마르고 대책 없는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이 눈물겹도록 슬프고 허망하기 때문이었다.
'지도자 대망론'에 갈급한 선량한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과 비원이 골수에 사무치기 때문이었다.
그 애타는 소망이 크면 클수록 현실세계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어찌 다 필설로 설명할 수 있으랴.
현실이 암담할수록 이 영화는 관객들의 영혼을 애통하게 갈랐다.
그리고 '임전무퇴'와 '사즉생'으로 전세를 완벽하게 뒤집었던 위대한 장군의 그 정신과 자세를 국민들이 애타게 갈구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눈물겨운 반증이었다.
벌써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째다.
과연 무엇을 했는가?
과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 때 국민들은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우리나라에 준비된 지도자, 믿고 따를 수 있는 위정자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산적한 적폐를 일신하고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켜 나라를 구해낼 자 누구인가?"
"과연 누가 있어 이 애끓는 대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김한민 감독'은 이 작품에서 '자도자의 자질과 역할'을 얘기하고 싶어 했다.
이 영화의 존재론적 본질과 당위를 호소하고 싶어 했다.
극장문을 나서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 영화의 '태생적 본질'을 생각하며 사유했다.
물론, 나의 사유가 틀릴 수도 있겠지만, 내 사유의 끝은 상술한 내용과 동일했다.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무언의 사자후, 그것은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투혼으로 인한 기적 같은 승리가 아니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사즉생, 그 숭고한 용기와 구국을 향한 깊은 애국심, 바로 이것이었다.
바로 이 단 하나의 요체가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성웅 이순신'의 본질이었다.
그랬던 까닭에 '충무공'의 자질과 애국심을 목도했을 때 수많은 관객들은 모두가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가슴이 뭉클했던 거였다.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작금의 리더들에게 묻고 싶다.
한 시대를 예리하게 벼리는 당신만의 준비된 '어젠다'는 무엇인가?
그 '어젠다'의 실질적인 구현과 개혁의 뜨거운 실행을 위해 당신은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올곧은 사명감, 각근한 노력, 한결같은 실천궁행이 가능한 사람인가.
이런 리더가 아니라면 제발 바라옵건대, 더 이상 아까운 국민의 혈세를 축내지 마시라.
이 영화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작금, 이 강토엔 참된 지도자가 존재하는가?"
오늘도, 내 영혼의 작은 술잔엔 회한과 눈물이 반이다.
"성웅 이순신 장군님, 부디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굽어 살펴 주소서"
갈급한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이 영화가 개봉된 지 근 3주가 지났다.
개봉 초기에 이 영화를 관람했으나 후기를 바로 작성하지 못했다.
참담한 박근혜 정권의 작태와 암울한 세태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영화 '명량'은 전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과 찬사를 받았고, 흥행가도는 요원의 불길처럼 급속도로 번졌다.
엄혹한 시대를 반영한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 준비된 단 한 명의 영웅이 난세를 평정했다.
늘 그랬다.
역사의 가르침은 언제나 엄정했다.
사람을 잘 헤아려 보고 사람을 잘 뽑아야 한다.
어느 조직이든, 어느 회사든, 어느 국가든 예외는 없었다.
사람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