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1:1-11)
사도 바울은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에 네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에 두 편이 성경에 들어와 있는데 오늘의 본문은 고린도후서 첫 번째 장 첫 부분의 내용입니다.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 경위
저는 먼저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 경위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는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주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의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이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인구가 65만이나 되었고, 12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신전이 아테네 신전인데 이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여사제가 있었습니다. 도시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가 주변 지역을 전도하도록 선교 전략을 세웠던 바울이 이러한 크고 중요한 도시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2차전도 여행에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설립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고 성도들과 교제할 때 그 은사를 활용하여 도움을 주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자신도 보람 있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분파의 문제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분파의 문제였습니다. 베드로파가 있었고, 바울파도 있었고, 아볼로 파가 있었고 심지어 나는 베드로파도 바울파도 아볼로파도 아니라 나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했다고 해서 그리스도파도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이게 교회로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가정의 윤리 문제, 우상 제물의 문제, 결혼과 독신의 문제, 부활에 대한 문제, 영적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는 문제, 성찬 예식 때 음식을 먹는 문제,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들고 제 3차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면서 이러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적어서 보낸 책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는 사도바울이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책망으로, 때로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를 차근차근히 설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편지만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디도라고 하는 담임 목회자 를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디도는 목회를 아주 잘 했습니다. 디도로부터 교회가 안정되고 부흥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사모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또 이단에 대해서 강하게 대처하기 위해 쓴 편지가 고린도 후서입니다.
환난과 고난의 보편성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피면 ‘환난’이라는 단어와 ‘고난’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후 1:1-11에 ‘환난’이란 단어가 네 번, ‘고난’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환난과 고난을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들이 있습니다. 8절에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 소망이 끊어졌다." 했습니다. 9절에 '사형선고'란 말이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 같은 큰 사망'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도 죽을 고생했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보면 11절의 말씀 중 환난에 해당하는 표현이 10번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인생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가면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고난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좀 형편이 나아 보이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에게는 나 같은 고민은 없겠지!" 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고 남모르는 환난이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태국의 반정도 데모 사태로 태국의 경제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태국 외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융 위기는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인 위기상황입니다. 그리고 금융위기 뿐만 아니라 갑자기 환난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종류
고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둘째는 애매한 고난도 있습니다. 지금 방콕에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고난도 애매한 고난입니다. 애매한 고난의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얼마 전에 미국 샌디에고에 이민 가서 살고 있었던 37세 된 윤 동윤씨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지금부터 20년 전 1989년에 그러니까 17살 때 이민 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그마한 집도 한 채 마련했고 4년 전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고 행복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둘째를 낳으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기로 하고 지난 10월에 둘째가 태어나 이사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딸의 산후 조리를 돕기 위해 장모되시는 분도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훈련 비행을 마치고 샌디에고 근처에 있는 해병대 비행장인 미라마 비행장으로 돌아가던 전투기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윤씨의 집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집에 있던 부인과 두 딸 그리고 장모님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종사는 민가에는 추락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추락직전 탈출했습니다. 윤씨는 이 사실을 알고 슬픔 중에서도 "조종사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를 용서한다.” 고 했고 “고통 중에 있는 그를 위해 기도해 주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는 첫째 딸이 태어나기 두 달 전부터 교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의 고난의 원인을 뭐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세 번째는 자원하는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고난입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고난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고후 1:8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행14:19)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고는 여종을 이용해서 돈벌이 하던 주인이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 때 매를 심하게 맞고 감옥에 투옥까지 당하게 됩니다(행16:19-24). 그리고 에베소에서는 아데미라는 우상과 우상의 집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바울과 그 일행의 전도로 말미암아 타격을 받게 됩니다. 손으로 만든 조각은 신이 아니 다고 하니 장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우상 장사꾼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고소해서 어려움에 처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고후1:4에 보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환난을 위로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환난은 선교에 동참하면서 받는 여러 종류의 환난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애매한 고난이나 범죄로 인한 고난은 위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환난을 다 위로하신다는 뜻입니다. 가령 범죄로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습니다. 이 고난은 징계이지 저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만일 범죄하고도 고난과 환난이 있으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무서운 저주입니다. 히12:8에 보면 잘못해서 받는 징계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그 사람을 버려진 자식이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라는 겁니다. 징계를 통하여 잘못을 깨닫게 되고 돌이키면 그 징계는 아름다운 징계가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징계가 되는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도 위로하심. 그리고 애매한 고난도 위로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샌디에고의 한 초신자 가정이 당한 환난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애매한 고난이요, 이해할 수 없는 환난입니다. 다른 집들도 같이 폭격을 맞았으면 다 그렇게 당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하겠는데 왜 하필 우리 집에 비행기가 떨어지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습니까? 가령 운전자가 잘못해서 길 가던 사람을 칩니다. 그리고 애매한 가게에 돌진해 와서 가게를 부셔버리고 손님들과 주인을 상하게 했습니다. 이웃 집 사람이 불조심 안 해서 우리 집까지 불타버렸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같은 내무반에 있는 전우의 총기 오발로 옆에 있는 사람이 다칩니다. 요나하고 같은 배 타고 갔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런 이유 없이 풍랑 만나서 보따리까지 바다에 던져야 합니다. 악한 강도가 여러 집들 가운데 하필 우리 집에 들어와서 강도짓하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갔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합니까? 사람은 위로할 수 없습니다. 위로의 말을 해도 약 올리는 것 같고, 이해가 안 되고 화만 납니다. 원수 갚고 싶습니다. 내가 나은 내 자식을 부모라고 해서 제대로 알고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실연을 당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딸이 있어요. 어머니가 와서 "얘야, 인생이란 본래 그런 거란다. 어쩌고......." 한다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위로가 안 되는 거에요. 집에 불이 났어요. 다 타버렸어요! 식구들은 그래도 다 무사했습니다. 누가 위로한답시고 "집은 불탔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온 식구가 무사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말 듣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와 가지고는 내보고 하는 말이 집은 다 타버려도 사람이 무사하니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런 감사한 일을 저 사람도 한 번 경험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내용 듣고 위로하려 왔던 사람이 놀래서 도망갔습니다. 그러니 쉽게 그냥 말로 위로하려고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이 엄청난 고난을 당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보고 일주일 동안 입이 착 벌어져서 다물지를 못하고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는 욥이 좀 그래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위로한답시고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할 때는 열 받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안 찾아오는 것이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 당한 사람에게는 그냥 같이 아무 말 없이 있든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 말 없네!" 그러든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정도 하면 됩니다. 극단적인 예로 지금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었어요. 유가족을 위로한답시고 사람은 한번 있다 누구나 예외 없이 한 번 가는 것입니다. 순서가 없습니다. 옛말에도 '생자필사'라 했습니다. 성경에도 한 번 죽은 것은 정해진 것이나 했습니다. 너무 상심마세요. 기운 차리세요!" 그래 보세요. 위로하러 온 손님이나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 뭐라 그러겠어요! "자슥! 놀고 있네! 너도 생떼 같은 자식 먼저 보내 봐! 그 말 나오나 보자!" 안 그러겠어요!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신29:29에 보니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하였다." 했습니다. 여기서 오묘한 일이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나타난 일이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 생각과 지능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서 나중에 깨닫게 하실 것이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멀리 내다보시고 깊히 들어다 보시면서 합력하여 유익하게 하시고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잠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임 받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벧후2:9에 보면 이 땅 위에는 애매한 고난이란 것이 있는데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그 고난도 아름다운 고난이 된다고 했습니다.
고난의 필요성
인생이 살아가는 데는 고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동식물이 살아가는 데로 고난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구약학자인 브루스 워키(Bruce Waltke) 교수는 그가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딸이 어렸을 때 어린 딸과 함께 숲 속을 거닐다가 막 태어나고 있는 나비를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누에고치가 꿈틀거리며 돌고 있는데 나비의 한쪽 날개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딸이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아빠, 나비가 나와요, 그런데 너무 힘든 모양이에요. 아빠, 도와주면 안 돼요?" 순간적으로 브루스 워키 교수는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딸과 같이 나비가 잘 나오도록 가위로 누에고치를 찢어 주었습니다. 나비는 쉽게 나왔습니다만 나르지도 못하고 땅바닥에서 빙빙 돌다가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날 브루스 워키 교수는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람의 위로로 위로 받을 수 있는 고난은 그래도 견딜만한 고난입니다. 큰 고난은 사랑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참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지금의 미국 땅 원주민인 인디안의 풍습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인디안 소년들이 자라면서 성인식을 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시험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기 위한 여러 가지 훈련 과정 중 제일 마지막이 뭐냐 하면 혼자 어두운 숲에서 하룻밤 동안 찾아내는 훈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아주 깊은 산중에 들어갑니다. 저녁때가 되면 장작불을 피워주면서 "내일 아침까지 이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내일 아침까지 갈 만큼의 장작만 줍니다. 초저녁부터 너무 많은 장작을 써버리면 깊은 밤에 쓸 것이 없어지니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합니다. 내일 아침 다시 오겠다고 내려갔습니다. 아들은 혼자 남았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초저녁엔 나뭇잎이 바람결에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도 깜짝 깜짝 놀랍니다. 밤에는 독벌레가 나올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멀리서 맹수 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소년은 밤을 새우면서 불을 꺼뜨리지 아니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어두움, 그 무서움, 그 외로움 속에서 인내를 배웁니다.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저편 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라서 몸을 굽혀 숨기고는 어두움 속을 자세히 보았더니 짐승은 아니었습니다. 키가 큰 어른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시는데 보니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다고 해 놓고는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밤새 그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고통당할 때, 아들만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고 아들이 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자녀는 이렇게 아픔으로 크는 나무와 같습니다. 이 아들의 고통에 아버지가 동참하십니다.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의 고통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고통 당할 때에 여러분 혼자 고통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 고통을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곁에서 함께 계시면서 함께 고통당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 말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숙 시킬 방법이 없고 이 방법 말고는 여러분을 성장 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고통을 당하시면서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위로 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위로 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 위로가 된다는 말씀은 그 환난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위로케 하시는 하나님
그 다음으로 이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모든 환란 중에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은 능히 위로하시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이 말씀을 쉽게 설명 드리면 "하나님은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또 하나님의 위로를 새 힘과 용기 얻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위로하도록 만드신다." 는 것입니다. 좀 전에 제가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로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섣불리 위로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 주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환란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그 소중한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환란과 어려움 있으면 여러분 이것을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환란의 위로자 만들기 위해 그 자격증 주기 위해서 훈련시키시고 과외 시키시는구나!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울 중앙 의료원에서 원목 생활을 오래 계속하신 목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병원에서 10년 동안을 투병생활하신 분입니다. 수술을 열두(12)번 했습니다. 수술하고 한 번하고 두 번하고... 하고.. 또하고 12번 수술을 했습니다. 10년을 투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어요! 죽으면 시체실에 안치해야 되는데 시체실이 냉동실 아닙니까? 시체실이 만원이라서 다른 시체 꺼내고 그 곳에 들어갈 수 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어서 임시 보관소에 갔다 두었습니다. 그 곳은 냉동실이 아니예요! 그래서 냄새가 많이 납니다. 다음 날 아침에 나가는 시체가 하나 있어서 시체실에 넣으려고 가보았더니 시신이 꿈틀거려요!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냉동실에 넣었다면 오히려 얼어 죽을 뻔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살아났습니다. 이 사람! 이렇게 해서 살고 보니 "내가 나머지 생명을 어떻게 살아야 되겠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신학 공부해서 목사가 되어 병원에 있는 어려운 환자들을 도와주자!" 해서 늦게 목사가 되었습니다. 환자 : 나 지금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걱정 됩니다. 목사 : 나 시체실에 갔다 왔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기도해서 돌려보냅니다. 환자 : 나 2년 투병 했는데 아직도 안 나았습니다. 2년이나 투병해도 안 낫는 것 보니 죽 을 것만 같아요! 목사 : 나 10년 투병 생활했습니다. 그러면 그 환자에게 위로가 됩니다. 위로가 되면 용기가 생기고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태국에서 비자 문제로 이민그레이션 유치장에 갖힌 분을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보자마자 저의 손을 잡고 우시드라구요! 김목사 : 저도 유치장에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도 : 뭐시라여! 목사님도 유치장에 갖혔습니껴? 김목사 : 예! 일 주일 있었습니다. 그분이 울음을 그치더니 눈에서 빛이 나면서 내가 유치장 갔다 왔다는 말에 은혜를 받아요! 성도: 저는 내일은 나갈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왜 유치장 갔습니까? 김목사 : 예 대학생 때 데모하다가 붙잡혀서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1975년도 였으니까 35년 전입니다. 대학 4학년 때였습니다. 그때는 대학들이 데모해서 유치장 한 번 안 갔다 오면 대학생활의 낭만이 없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신학 대학도 대학 아닙니까? 신학대학생이라고 기숙사에서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게 어찌 좀! 못나 보이는 것 같이 그때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학생회 간부들이 모여서 밤새 데모계획을 짜고 구호를 정했습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중앙 정보국 해체하라.” 그러면서 교문 밖으로 밀고 나가려고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회의 할 적에 데모해야 된다고 열변 토하던 대표자는 정작 데모하는 날 쏙~ 빠져 버리고 나는 멍청하게 열 받아가지고 열심히 하다 보니 데모대 제일 앞에 와 있어서 내가 잡히죠! 그런데 사실 저는 그 유치장 안에 있으면서 신학대학 4 년 중 제일 잘 먹은 일주일 이었습니다. 신학대학 때 기숙사의 반찬이 거의 시레기국이었습니다. 지금은 보리밥에 시레기국을 별미로 먹지만 그때는 배추에 쓰레기로 버리는 껍데기를 주워 모아다가 쓰레기 "쓰"자를 "씨"라고 바꾸어서 "씨레기국" 그랬습니다. 그것만 먹다가 학생회에서 갇힌 사람 고생한다고 통닭, 과일, 케이크 김밥 하면서 계속 들어오는데 "야! 며칠 더 있게 안 해주나?"하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집사님이 사업하시다가 너무 어려워서 하다 하다 안되서 부도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어느 친구 집사님 부부가 찾아왔어요! "위로 받으세요" 그러는거에요. 그런데 위로가 안되는 겁니다. “자기들은 부부끼리 유치장에 데이트 나왔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나도 옛날에 엄청난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죽지도 못하고 붙잡혀서 1년 감옥살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일어나서 이 만큼 삽니다. 걱정 말고 기다려 보세요. 다 길이 있습니다." 그 말에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런 말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환란 중에 하나님께 위로 받고 일어선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다시 일어나 위로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위로 이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남다른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소중히 쓰시고 귀하게 쓰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위로자로 쓰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파트너로 쓰시려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려움이 내 인생에는 없다. 감기 걸린 것 밖에 없다.” 그런 분은 남을 위로 하는 일에는 아예 잊어버리세요. 위로해도 되지를 않습니다. 괜히 시간 낭비하고 오히려 더 화나게 만듭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위로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한 참모의 아내가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 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정상적인 궤도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여왕 폐하께서 얼마 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떠나갔답니다." 롱펠로우라는 19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있었습니다. 그가 "인생의 찬가"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슬픈 곡조로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 날 허망한 꿈이라고. 인생은 참되다. 인생은 엄숙하다. 세상이란 넓은 싸움터에서, 그리고 인생이란 야영지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소같이 되지 말고 싸움하는 영웅이 되라.』
여러분 그가 어떻게 해서 위대한 시인의 된 것입니까? 그는 한 평생 쓰라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젊은 날에 결혼한 부인이 병들어 오래 투병생활 하다가 죽었어요. 재혼을 했는데 그 여인도 몇 년 못가서 부엌에 불이 나서 화상을 입고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75세가 됐어요! 그 쓰라린 인생 경험을 아름다운 시로 출판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품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 내가 당하는 이런 저런 어려움을 거부하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결국은 성숙하게 되고 유익하게 되고 결국은 위로자의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환란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실 수 있는 능력과 긍휼이 중심되신 하나님! 환란 중에 있는 주의 백성을 안위 하시고 요동할 때 안돈시켜주시옵소서. 저희들도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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