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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양식
요한복음 풀이 3. 信天함석헌
「요한복음」에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또 그 담에 세례를 줬다는데, 예수님이 주신 거 아니고 제자들이 줬다 그 말이 있고 그러면 이이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그럴까 그런 걸 짐작을 할 수가 있어요.
이 얘기를 왜 하는고 하면 초대 교회에 있어서 그거는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이 얘기하는 말인데 예수님 나셨던 그 일세기 말쯤만 해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세례 요한을 메시아라고 따르던 사람들하고 두 파가 대립이 되어 있었대요. 그래서 그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그걸 다른 복음에서보다도 더 분명히 하잖아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것은 세례 요한 자신이 수차 수차 말하기를 “나는 메시아 자신이 아니고, 메시아를 일반 세상에 소개하기 위하여서 왔다”는 거고 세례 받았다는 그 얘기도 없어요. 여기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반 신도들에게 그걸 분명히 말하기 위해서 그랬어요. 둘이 서로 트러블도 좀 있었고 그랬는가봐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 자신이 “나는 쇠해야 하고 그는 흥해야 한다”고 말을 했고, 자기는 “내 뒤에 오시는 이에 비긴다면 그 신들매를 들기에도 감당 못한다” 그에 말했지만, 제자들은 그래도 역시 자기들의 선생인지라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던가 봐요. 그래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하게 말해주기 위해 여기다 이런 점을 집어넣고, 그 다음엔 세례 요한이 증거하는 얘기가 있지요.
그는 이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으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 장 8~10 절)
아까 위에 말했던 거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요한복음」, 1장 10절) 말하자면 임금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 그 백성이 영접치 않은 셈이오 그러나 “영접을 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장 12~13절)
이거는 공관복음에 있는 말과 잘 대조를 해가면서 서로 반대가 아니라 설명하는 이면과 이면이 속면에서 하는 것이니까, 뭐 다윗의 자손에서 났다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났다든지 꼭 그런 말 하는 것보다는, 여기서는 그이가 말하자면 우주가 그이로 인해서 된 바로 그이요 만물이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는 그이라는 그이의 정체를 말하여서 어떤 그이인가를 알리자는 거요. 그가 곧 생명이요, 이 생명이 사람 속에 있어서 곧 빛, 사람의 지혜라 그럴까, 사람 속의 빛인데, 그 빛이 세상에 왔건마는 세상이 그 빛을 몰라보더라, 그래서 세례 요한이 와서 증거하게 됐다는 거예요.
세상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지마는, 그러나 세상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자는 그는 분명 사람인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를 보면서 그를 통해서, 그를 맘속에 받아들여서, 영접해서 그는 참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권능을 줬다, 권세를 줬다 그랬어요. 그러나 여기 설명하길 하나님의 자녀 되는 거는 보통 우리 육신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고 육정으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요한복음」,1장 13절) 이라 그랬어요. 그럼 요 말을 참작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이 무 슨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육신을 가지고 말할 것 같아서 이러고저러고 의심이 있는데, 여기서는 차원이 다른 데 있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1장 14절) 요걸 보면 공관복음에서 보던 게, 알기 어렵다고 하던 게 풀리는 것이 있을 거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이거 하나는 이 시간에 알고 넘어갑시다. 그거 하나 ‘말씀이 육이 된다’ 하는 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 돼요. 다른 분들은 보통 여기 성경만 보시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 하시진 않을 거예요. 그러나 힌두교라든지 유교사상이라든지 그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동조하는 의미에서 보면, 그것도 자연적 여기 이 말을 봄으로 해서 그것들도 자연적으로 풀려요.
뭔고 하니 ‘화신’(化身)이라는 거, 인간 사이에는 ‘하나님의 화신’이 있다는 거는 기독교에서만도 아니고 힌두교에서도 이걸 강조해요. 힌두교에서 말하면 그걸 '아바타르’라 해요.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건지시기 위하여 오시는 것은 한 번만이지, 시대가 그럴 때마다 늘 오신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아요. 그러나 인도에서 말한다면 이 세상이 악하게 돼서 이 안에 있는 의로운 사람들이 고생을 하게 될 때는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브라만이 인간이 돼서 오신다고 해요. 이걸 아바타르라고 그러는데, 기독교와 차이는 세상이 어지럽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가 오신다는 거예요. 이렇게 차이는 있지만 서로 비슷하게 근사한 것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려면 길어지니까 그저 쉽게만 말합시다.
간디의 말을 인용할 거예요. 간디가 언제 말하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누가 말하길, 물론 꼭 문구는 이렇진 않습니다만, 내가 부득이 풀이해 말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에게 직접 가면 어떻습니까?” 물었어요. 인도 사람의 지경으로 말하면 브라만, 즉 우리의 구경의 그 마지막 우주의 지경을 브라만이라고 그러는데, 우리 기독교에서처럼 인격적으로 하나님이라 그러지 않고 그저 하나의 비인격적인 그런 브라만의 지경을 말하는 것인데 “그 브라만의 지경을 우리가 직접 찾아들어가면 어떻습니까? 그거 좋습니까? 그렇잖으면 이 세상에 그로 나타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그 나타내려 온 이를 믿는 것이 좋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간디 같은 이는 놀라운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으로는 안하는 분인데, 그가 말하는 게 뭐라 그랬는가 하면 “직접 갈수 있으면 직접 가는 것이 물론 다시 없이 좋지만 보통 사람으로는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길은 화신으로 나와 나타나 있는 이를, 그이를 믿는 게 그게 좋다” 그랬어요.
이제 불교에서 하면 법신불이라, 불·법·승을 삼보라 그러잖아요? 이것도 그 비슷한 것인데, 그러니까 이게 좀 말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래도 사람으로 하면, 나는 철저하게 내 느낌을 말한다면 “직접 갈 수 있으면 직접 갔으면 좋지” 그런 말, 그런 생각,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나는 뭐 생각해도 그리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못 되지만, 그래도 “생각해 파고들어간다면 누구면 왜 안되느냐?” 그러고 싶은 맘이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러나 이거 좀 말하기 어려운데, 그러나 이번 기회는 요 말만은 좀 하고 가야겠다 하고 마음에 들어온 것이 있으니까 합시다.
직접 가는 거는 사람이 이상으로만 말한다면, 이론으로만 한다면 그렇지만 그러나, 인간이란 나는 데에 똑같이 나는 거 아니란 거, 그거는 인정을 하고 들어가시오. 사람이 그 체질을 볼 때는 다 평등이 아니에요. 우리의 ‘자유’ ‘평등’ 다 문제가 되는데 평등이 있나하면 평등이 없어요. 어떤 애는 나면서부터 제 달도 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서, 요새 뭐라 그러지요. 인큐베이터라 그러나? 하여간 그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가 있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죽고 마는 아이도 있지만. 산다 해도 옛날에도 칠삭둥이 팔삭둥이 그랬는데, 체질이 같이 나지를 않아요. 같이 제 달을 채우고 나왔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결코 평등이 아니에요. 또 그 재주나 감정이 풍부하다든지, 무슨 추리력이 풍부하다든지 그것도 같지를 않아요. 차등이 심해요. 우리는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인슈타인 지경에 갈 수 없어요. 본래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것을 뭐.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인슈타인이 한 걸 내가 왜 못한단 말이야” 그래도 그건 소용없어요. 지금은 인간이 공정하게 평가해서 그가 어느 만큼 소질이 있나 하는 것들을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표시해서 알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나로서의 인간 노릇 하는 데 훤히 하나 알고 들어갈 것은 나는 어느 만큼 타고 났나 그걸 알아야 해요. 타고난 이상의 걸 바라는 건 그건 욕심이지요.
종교란 뭔고 하니 인간의 이 평등하지 않게 타고난 걸 그걸 ‘좋다’ ‘나쁘다’ ‘언짢다’ 하는 걸 없애도록 가르치려는 거예요. 사람들이 잘못되는 게 뭔고 하니 타고난 것에다 고하(高下)를 붙여요. 잘 타고났다 못 타고났다, 하나님에게선 잘잘못이 없어요. 이 천지만물을 내시는 하나님의 그 뜻으로 하면 소나무는 소나무로 난 거고 꽃다지는 꽃다지로 난 거지, 대소가 거기 비교가 안된단 말이오. ‘곱다’ ‘밉다’도 비유가 안돼요. 그 자체에서 보면 ‘좋다’ ‘언짢다’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다 똑같은 값이다 평등이다 그 말이오. 하나님 내시는 마음씨에는 차별이 없어요. 맏아들도 좋다, 둘째 아들도 좋다, 병신자식도 좋다, 그거 차별이 없어요. 꼭 같지 우등을 하고 갔거나 낙제를 하고 왔거나 차별 없이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지, 만일 공부 못하고 온 자식보고 아버지가 “넌 내 아들 아니다” 그러면 그건 아버지가 아버지 자격 먼저 잃잖아요.
나로서, 내가 나를 생각할 때는 내 천분을 내가 알아야 해요. 타고난 걸 내가 뭘 타고났고 내 소질이 뭐며 내가 어떻게 낳나 그걸 알아가지고 내가 사람으로서 노력을 할 수 있는걸 내 노력을 가해서 이걸 발전을 시킬 수 있는 데까지 발전을 시켜요. 그런데 거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뭔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거다” 그렇게 알고 거기 고하를 붙이지 말란 말이에요. 객관적인 우리 눈으로 보면 잘 타고난 사람 못 타고난 사람 차별이 있지만, 이 차별은 우리 눈에 보이는 차별이지, 하나님 눈에는 차별이 없다 그 말이에요.
그게 조금 이론이 안 맞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신앙이란 건 그걸 분명이 아시고 들어가야 해요. 이 세상의 더구나 불교 같은, 힌두교 같은 사상을 보면 평등관에 가지 않고는 구원 못 얻는다 그랬는데 그 말이 옳아요. 뭣이 좋다 언짢다가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은 구원 못 얻는다 그 말이오. 좋다 언짢다는 여기 이 속에서 내가 하는 소리지, 그 꽃들에게 말하려 하면 저 꽃은 저 꽃대로 최고고 이 꽃은 이 꽃대로 최고고 잎사귀는 잎사귀대로 최고지, 거기 무슨 잘잘못이 없어요. ‘곱다’ ‘밉다’는 육신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눈은 여기서 살아가는 동안에 뭣을 먹고 뭣을 입고 이거 때문에 이편이 되어 있는 거지, 이 담에 여기 이걸 지나서 그 뒤에 있는 영원한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이 눈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첫째가 나는 잘못 타고났지 그런 생각이 안 나도록.
나는 내 타고난 것이 뭐냐. 타고난 거는 교수가 되거나, 길가의 청소부가 되거나 하나님 보시기엔 다 똑같은 거요. 하나님 어떨는지 내가 모르지만 우주 근본에서 볼 때는 차별이 없어요. 차별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잘못 생각해 그렇지, 괜히 뭐든지 수량이 커야 좋은 것처럼, 시간이 많아야 좋은 것처럼, 무슨 힘이 강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내 욕심 때문에 차별이 생긴 것이지. 그러니까 그거를 없애는 자리까지 가는 것을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안돼요. 나의 그런 걸 안담에 내가 그걸 잘 발휘해서 발휘하도록 힘써야 해요. 그런 것인데, 하나님이 어찌해 그런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세상에서 어떤 때는 어떤 분은, 우주에 한 번인지 여러 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와 같은 보통 이런 인간이면서도 우리와는 동뜨게 그런 사람들이, 역사에서 보면 예수나 석가 같은 분들이 이따금씩 하나 둘 나오는 거예요. 그들이 십년 만에 백년 만에 쑥쑥 그렇게 나오는 거는 아니에요.
노력하면 다 그렇게 되겠지요. 이 종교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협잡꾼이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제가 하면, 제가 할 수 있다면 뭐 예수나 석가 같은 분들을 신용할 필요가 없어져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틀려요. 그런 거는, 예수나 석가 같은 이는 싸구려로 그렇게 마구 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우리가 왜 그럽니까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가장 좋은 설명은 각 경전에 공통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 이 세상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인해가지고 잘못되는 거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것을 건지기 위해서 보내는 거다 그거요. 그게 이제 아바타라는 거요, 화신(incarnation)이란 거.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속에 거하는” 거, 그이도 살이오.
몰라, 요셉이 아버지 노릇 했는지 안했는지 거기 대해선 분명하게 말 못하겠어요. 마리아가 동정녀로 수태했다는 거 그건 아까 얘기대로 생리적인 그 관계를 말하자는 그거 아니라, 이 살은 예수님도 똑같은 살이라는 거, 밥 안 먹으면 시장하고 찌르면 피나는 살, 그러니까 십자가에 쿡 찔리자마자 피났다 그러잖소. 아픈 것도 같이 아프고, 뜨거운 것도 같이 싫고 그런 분이지요. 그 점에서는 다른 분이 아니오. 그런 분인데 다만 어느 속 그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 점에서 보면 다르오. 물론 우리도 근본에서 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알아요. 어느 지평선이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씨를 가지고 있다, 천분을 줬다 그래요. 유교에서도 그 강조점이 ‘바탈’이란 것에 있는데, 그걸 알지만 그들과 우리 보통 사람들과는 차이가 참 많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거는 나도 노력하면 될 수 있지” 그런 따위 착각을 가져서는 안돼요. 그건 욕심에서 나온 거요. 아니 내가 천분을 몰라서 그래요.
믿음에도 남의 믿음을 부러워하는 생각은 못써요. 나도 “아무개 저만큼 믿었으면” 그러지만, 내가 내 믿음을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데까지 믿으면 됐지, 그 사람은 믿음이 강하면 신이라도 쑥쑥 옮기는 기적을 하려는진 모르지마는 그게 정말 깊은 데까지 들어가면 내가 내 믿음 철저히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란 말이오. 그리고 예수님이 했던 기적들을 나는 왜 못한단 말이냐 하는 거는 내 욕심이지, 만일 내게도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해주시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신앙을 잘못 생각해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우리도 다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다. 그보다 더한 일을 할 수 도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그거는 가능성으로 하면 이 담에 뭐 그럴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이를 살리셨으니 나도 살리겠지” 그렇게는 안돼요.
내가 아는 사람도 하나 있어요. 부인인데 처음에는 애기를 낳았다가, 참 모처럼 만에 낳은 아들인대, 이 아들이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니까 아들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기도를 하다 마음에 회심이 돌아오기를 “아들이 아픈 게 이게 다 내 죄가 있어서 그렇지” 싶더래요. 그러니 신앙은 바로 들어간 셈이지요. 그런데 무슨 생각이 나는고 하니 “죽은 자도 기도하면 살아난다” 던 말이 생각이 나더래요. 그래 애기가 죽으니까, 살아나려니 하고 시체를 놓고 나흘을 기도를 했다는 거요. 이건 뭐 그렇게까지 해봤다는 게 잘못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거는 상기도……. 믿는 믿음은 있지만 채 못된 데가 있어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오.
또 어떤 사람은 재치있게 재주로 그 문제를 넘기는 사람도 있어요. 누구라 해서 한동안 기독교계에 이름도 있던 이인데, 이이는 일제시대에 경부 노릇도 하면서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도 많이 죽이고 했던 분인데 후에는 교회에 들어와서 회개도 하고, 좋았지요. 그 사람으로 인해서 교회 들어온 사람도 많지요. 그런데 또 좀 이상한 데가 있어요. 언젠가 금강산엘 갔는데, 거기 앉은뱅이가 하나 왔더래요. 그래 그 앉은뱅이의 모양이 하도 가련하고 하니 마음이 안되었겠지요. 그래 앉은뱅이를 보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너가 일어나 가라” 그랬대요. 그런데 그게 될 턱이 있어요. 세 번 했어요. 그런데 세 번해도 안 일어난단 말이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면 우리 같으면 낙심이 날 것 같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얼핏 생각나는 게 “그렇지. 내가 일어나라 했는데 안 일어나니까 그렇담 내가 업고 갈 수밖에 없지”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래 자기 잔등에 업고 갔다는 거요. 그건 재주지 기적은 아니오.
그런데 이런게 다 믿는 마음으로 해도 뭔가 잘못된 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믿는다는 건 내가 나대로 비록 지금 내게 있는 것이 객관적으로 보면 불만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는 가장 좋게 주신 걸로 고맙게 알 수 있으리만큼 만족할 줄 하는 그런 자리에, 그런 심리에 갈 줄을 알아야 돼요. 남의 믿음이 내 보기에 아무리 좋은 믿음인 거 같더라도 그것이 부러워서 ‘나도 저 아무개처럼 하면 오죽 좋을까’ 부러워하는 생각 있으면 아무래도 거기 시기가 나요. 그러니까 성신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시기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잘못해서 그런 건데, 얘기는 그 말을 하자 해서 그런 거 아니라,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잘못된 까닭으로 해서,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이인데,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을 건지려면 우리들을 가르쳐서 하나님 자기에게 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따금 이 역사상에 하나님 자기 자신이 오시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이다 하는 것을 꽉 인정을 하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 그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사람이란 누구나 다 마찬가지니까 “나도 노력을 하면 되겠지” 하는 그런 따위 생각은 안된단 말이에요.
또 이 말을 한번 따진다면 물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그를 나하고 같은 인간에 놓고 그와 내가 경쟁을 하는 식으로 “그거, 왜 내가 예수님보고 내 주님이라 그런단 말이야” 그런다면, 그런 심리로는 예수님이 어떠신 분이신가를 종내는 이해를 못하고 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인데, 그도 분명 사람은 사람이지만 우리로서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체험할 수도 없는 이전의 모든 것을 체험한 이로서 우리가 도저히 미칠 수도 없는 것들을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저이를 보면 우리가 “야아, 참 저기 하나님이 계시다”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이분이시다.
어느 만큼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웬만한 것은 우리도 노력해서 될 수가 있겠지만 적어도 이 면,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줘서 참으로 온전히 허물할 수 없는 면을 나타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참 그렇다” 할 수 있는 이런 이로는 세상에서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쑥쑥, 운동한다고 해서 쑥쑥 오는 그런 것은 아니오. 적어도 이거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이 우주 가는 역사에 어느 그런 신비의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리만큼 내 마음이 겸손한 처지에 가지 않고는 이 예수의 인격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이해 못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나에게 걸려서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라 하셨어요. 돌이 있을 때 거기 걸려서 넘어지면 그만 깨지고 말잖아요? 예수란 이가 하나 있음으로 하여,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잘 받아들이면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인간적인 정도를 못 면하고 여기 예수의 인격이란 것에 걸렸다가는 도저히 이것을 타고 넘을 수가 없어요. 예수라는 이와 경쟁을 해서 “예수란 이도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나도 하면 되겠지” 할는지 모르지만 천만에,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 하나님의 섭리를 거기서 봐요. 일이 그런 거니까 우리가 그걸 그렇게 받아들여야지, 그냥 세상에서 하는 모양대로, 세상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모양으로 그 사람 재주가 얼마나 한가하는 걸 비교하는 따위 가지고는 예수를 이해하기가, 믿는 자리에 가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지식을 좀 가졌다는 이가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생각을 좀 해보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도 필시 그래서 했을 것이고.
그러니 이런 것은 지식만으로도, 우리 이성만으로도 아니 되고, 여러 가지 인생의 쓰라림에 부대껴본 담에는, 내 마음이 겸손해진다면 겸손해지고 또는 밝아진다면 밝아지는 그 점에 있어서만 그 자리에 접근을 할 수가 있어요. 내가 지내본 것이 있고 하니까 이제 여러분께 말씀을 해드립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
이것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비교해서 하는 말, 그렇게 알고 넘어 갑시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요한복음」, 1장 15~16절)
이건 아마도 빛을 두고 한 말일 것인데, 우리에게 충만하게 줄 수 있으리만큼 가득 찬 빛이란 말이에요. 이건 아마 세례 요한의 말이라기보다도 이 글을 쓰는 이의 말일 거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 장 16~18 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차원이 달라요. 위에서 이렇게 내려오는 차원이지 땅에서 인간이 연구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땅에서 연구해서 하나님께 도달한다는 것은 그것은 근본부터가 잘못된 거요. 에덴 동산에서부터 그렇게 하려고 한 것에서 잘못이 생긴 거예요. “우리도 저걸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이건 지혜는 지혜지만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잘못된 것인데, 그건 저차원이니까 여기서 올라갈 수는 없고 저기서 내려오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자연히 무슨 얘기가 나오는고 하니 우리는 올라가려면 고쳐 나지 않고는, 새로 나지 않고는 안된다 그 말입니다. 여기서는 그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그렇게 됐지만, 니고데모를 만나서 말씀하실 때는 “너가 하늘나라 보려면 고쳐 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랬는데, 고쳐 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런 게 아니라 영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걸 글로 써놓으면 같은 말 같으니까 혼돈이 되어가지고 가령 무슨 교파에서 세례를 해주면 물에 흠뻑 들어갔다 나오면 된다든지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거는 이런 무슨 방법으로 해주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밖에 있는 그런 조건으로 되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 깊은 데서 체험을 해서 되는 차원이오. 이 물질이라면, 물질이 나타난 이 현상계가 아닌데도 그 점이 혼돈이 돼서 토론이 나서 이러고저러고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주 그 점에서는 저 공관복음에 있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하던 것을 좀 생각을 하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쉽도록 해놨어요. 어려운 거 같지만 내가 그걸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훨씬 쉬워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란 무슨 의미인지 내가 알겠다” 할 그런 거 있어요. 그러면 어느 의미로 보면「마태복음」「누가복음」「마가복음」에 있는 동정녀 수태라든지 하는 것들에 걸려서 믿지 못 하겠다고 하던 사람들도 이「요한복음」을 보면 “그렇다면 나도 믿을 수 있어” 그럴 겁니다. 그래서 여기「요한복음」에서 통과되면,「마태」나「마가」나「누가」의 기록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던 것들로 거꾸로 올라가면 그때는 그게 문제가 안돼요. 조금도 어려움이 없이 쓱 지나갈 수가 있는 거예요. 혹 어떤 분들에게는 이제 내가 설명한 이것이 조금은 참고가 되지 않으려나 싶군요.
문제는 예수란 이를, 그대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그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본 듯이 만나게 되는 이다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만 아니고 다른 종교에서도 다 있는 얘기인데, 다른 남의 얘기는 할 것 없이 여기서 본다면 우리의 마음자리가 앞서 말했던 그런 자세라야만 그래도 비교적 바르게 예수님을 보게 되는 자리에 가게 되니까, 그런 점을 아시고 우리의 세상적인 학문이라든가 하는 것과 혼동을 일으키지 마시오. 그러니 이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나면 공관복음에서, 물론 그것도 자연히 참고해서 둘을 서로 비춰봐야겠지만, 그 어렵던 것들도 쉽게 지나갈 수 있다는 걸 말씀해드립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내려가면 보실 것을 지적만 해드리겠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그게 니고데모와 문답하며 말씀하신 내용이 “고쳐 난다”고 하는 말로 시작이 되잖아요? 그전에는 2장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애기가 나와요. 그건 다른 복음에는 없고 여기「요한복음」에만 나와요.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실지 있었던 기적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오신 뜻을 나타내기 위해 상징적으로 쓴 거다 하는 얘기도 있지만, 그렇게까진 생각할 것 없고 어느 때 그런 기적을 행했겠는데, 이이가 특별히 그것을 첨에 내서 말하는 데는 이것도 역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려면 고쳐 나야 한다. 하늘나라 들어가려면 두 번 즉 육신으로 한 번 영적으로 한 번 이렇게 거듭나야 한다는 데 대한 의미로 읽으시면 좋을 거예요. 뭐 두 번 난다는 거는 인도 사상에도 있어요. 인도 사람들도 브라만족은 두 번 난 인종이다 그러고 다니지요. 나이 들어서 세례 받는 모양으로 예수님도 세례 받고 그랬는데,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이런 거 있어요. 노끈으로 요렇게 고리 매듭 모양을 지어 가지고 목에다 걸고 다니고 그랬어요. 그게 다 ‘트와이스 본’(twice born) 두 번째 났다는 증거로 하고 다닌 거예요. 그런 게 있어서 그걸 표시하기 위해서 새로 난다고 하는 거, 그러니까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다는 거는 그 기적을 가져다 말을 했어요. 다음 3장에도 다른 덴 없고 여기만 나와 있는 자료인데,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한복음」, 3장 2절) 했던 것, 말하자면 니고데모 자기도 생각이 있어서 왔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엔 아직도 멀었지요. 상기도 껍데기를 벗지 못했는데 그걸 벗겨주시기 위해서 첫마디로 아주 때리는 거요. 고쳐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 아는 척하지만 모른다, 그러니 "너가 다시 나야 한다”고 말해요.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래서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인데 그것도 왜 모르느냐 하는 말씀이고.
4장에 가면, 그렇게 보고 보시오. 그럼 재미있어요. 제2장에서 기적으로 표시하고, 제3장에서 니고데모의 문제로 사람은 고쳐 나야 하늘나라 들어간다는 걸 말씀해주시고는, 그런 뒤에 실지로 고쳐 난 사람의 실례를 말하는 것이 4장이에요. 나는 이게 좋아서 특별히 많이 보는 사람입니다만 사마리아에 가시다가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 회개시키는 일, 5장에 내려가면 이제 차차 전도가 시작이 되어 전도하시는 일인데 그 전도에서 예수님 토론이 나와요. 다른 복음보다 여기는 토론이 많아요. 다른 데서는 설화를 가지고 그러지만 여기「요한복음」에서는 아마 이걸 쓴 이가 그런 면을 특히 주의를 해서 봤으니까 그렇겠지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토론을 해서 사람의 마음 문을 열어서 알려주는 게 많아요. 그런데 그걸 때마다 거길 주의해서 보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는 말이 하나 있어요. 뭔고 하니 말마다 “나는 보내심을 입어서 온 사람이다” 그래요.
이제 하나 꽉 믿어버리지 않아선 안되는 거예요. 세례 요한한테도 자기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예수님은 가는 데마다 여러 번 여러 번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른다.” “나는 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가 하라 해서 한다. 나는 내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보내는 이의 뜻을 완성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보내심을 받아 왔다”는 게 바로 중요한 말이오. 물론 하나님이 보내셨다 그 말인데 우리 인간들은 어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세상에서 잘나서 생각을 하지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아요.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는 데는 자연히 그 사명이 뭣이다 하는 걸 알 수 있고 또 특별히 보내심을 받아서 온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문제도 거기서 나을 수 있어요. 그러니 이건 열쇠가 되는 말이에요. 그 말 “나는 보내심을 받아서 왔다”는 말이 수십 번 나와요.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의 확신도 거기 있고 확신이 있지만 자기는 자기로서 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그래요. 자기가 “보내신 이를 보고 들은 것을 한다”고 했어요. 보고 들었다는 게 무슨,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들은 것이 아닌데, 그러니 보고 듣는다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우리가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다른 이적도 있지만 공관복음에 있는 기적을 한두 개 여기 자료로다 인용을 해서 쓴 것이 있어요. 그중의 하나가 떡 먹이는 거. 떡을 먹여놓으시고, 그 담에 그 유명한 6장에 있는 말, 그거 재미있는 말 아니오. 사람들이 따라왔으니까 “야, 이놈들아 너 기적을 보고 따라온 거 아니지? 다 먹여주니까 배가 불러서 따라왔지? 먼젓번에 강 건너에서 실컷 먹여줬으니까 또 그래 먹으러 온 거 아니냐?” 이걸 문제로 삼아서 몸만 아니라 사람의 영혼도 먹어야 산다, 그 영혼이 먹는 거는 “밥이 아니라 따로 먹는 양식이 있다” 그런 말씀을 하다가 그 말이 결국은 뭘로 가는고 하니, 사람들이 “그 양식이 뭐요?” 하며 양식을 달라니까 “내가 기다. 내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게 또「요한복음」의 독특한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걸로 인해서 제자들이 많이 떨어져나가요. 그 말에 낙제자가 아주 많이 나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사람이 어찌 사람을 먹을 수 있느냐? 일반적으로 우리들도 사람에게 사람을 먹으라 그러면 걸려버리겠지만, 특히 그 사람들, 유대 민족은 더욱 그래요. 모세의 가르침의 중심이 되는 게 “사람의 생명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건데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먹어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견디겠어요? 그러니까 우린 그 말 모르겠다 하고 가버리고, 제자들조차도 많이 떨어져갔다고 그래요. 그런 거를 주의해 읽어내려가야 해요.
그럼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먹어라” 이건 무슨 소리냐, 왜 하는 소리냐,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살을 먹는 거요 피를 마시는 거냐. 무슨 까닭에 그런 말씀하시는 거냐 하는 그런 점이 다 많이 씹어보고 씹어 보고 생각하지 않고는 모르는 점이에요. 얼마나 어려우면 따라다니던 제자들까지도 낙제를 하고 떨어져갔겠어요. 그래 그러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차차 하시는 일이 한 계단 한 계단 위기 속으로 들어가요. 바리새 교인들과 충돌이 돼서, 한 사건 한 사건 할수록 충돌이 돼서 마지막에는 바리새 교인들이 결정적으로 미워하게 됐고, 그래 그 미워하시는 것을 아시게 되면서부터 예수님의 행적이 달라져요. 그때까진 모든 촌으로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될수록은 전도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보시곤 이제 아무래도 일이 비극적으로 될 것이다 하는 걸 짐작을 하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서 조용하게 다니면서 제자들을 특별 훈련을 하셔요. 전도의 방법이 달라지는 거요. 첨에는 일반 사람들에게 다 이렇게 해서 기적을 행하고 불쌍한 사람 고쳐주고 했지만 이젠 싸움의 전략이 달라져요. 물론 후에도 병 고쳐준 거 있지만, 그 전에 하시던 것과는 달리 해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기회 있는 대로 증거하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제는 비극적인 순간이 오실 거를 알기 때문에 각오를 하고 특별 준비를 하게 되는 게 그게 흥미있게 볼 만한 거요. 깊이 봐야 할 것이에요.
일이 이제 다 틀리게 됐어요. 결정적으로 이제 내가 아버지의 주는 잔을 안 마실 수 없지 하게 돼요. 그러니까 물론 일이 이렇게 될 조짐이 보일 첨에만 해도 예수님께서도 이 쓴 잔을 될 수만 있으면, 떠날 수만 있으면 떠나게 해주시오 하고 기도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게 된 것을 아시고는 “그래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대로 합니다” 하고 결정을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나가고 이렇게 되는데…….
그럴 때, 이건 다른 복음에서는 볼 수가 없어요. 뭔가 하면 마지막의 일주일간을 그렇게 자세하게 제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가르쳐요. 그게 「요한복음」13장 이하 18장까지 내려가면서 있는 거예요. 다른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건 꼭 보셔야 예수님의 내부의 생각하신 것이 어떠셨나 알 수 있어요.
다른 데서는 늘 겉으로 훌륭한 기적을 행하셨다 하는 기적 말만 많지 예수님이 속에 우셨다든지 적정을 하셨다든지 하는 것은 여기 말고는 당최 없잖아요. 거기에 벌써 예수님 우셨다는 말도 있고 노하셨다는 말도 있고 민망해 내가 죽게 되었다 하는 말도 있고. 그런데 이건 어떻게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그건 추태 아니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은 말이지만, 하여간 그런 말이 적혀 있는 데가 얼마나 그 깊이가 있는 덴지 알 수가 있는 뎁니다. 그러고 그게 이제 특별 준비 시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제 자기는 가시는데 왜 가시는 게 좋은지, 가는 고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예수님의 교육방법 이 어떻게 됐나 그것도 알 수가 있고, 어떻게 돼서 초대교회가 일어나나 그것도 알 수가 있고, 12사도라 했던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나 그것도 거기서 알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1981년 8월 3일 연곡에서 퀘이커 모임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친우회보 1982 봄호
저작집30; 21- 249
전집20; 19-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