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대🌺 |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은 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17일 사이 조선과 청나라 만주, 산둥성 일대에서 벌어진 청나라와 일본 제국의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닛신센소), 중국이나 대만 등에서는 갑오전쟁(甲午戰爭, 자우전장)이라 한다.
풍도해전(豊島沖海戦 / 豐島海戰) 7월 25일 황해 아산만 부근 풍도(현재 행정구역 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서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
일본이 승리하면서 청나라의 '상방지권(上邦之權)'을 파기하고 패권을 탈각시켰으며, 위압적으로 조선에 친일 내각을 수립시켰다. 이후 영국-이집트의 전례 등을 참조해, 갑오개혁 등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가 개입하며 좌절되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수 차례 내각이 바뀌고 뒤이어 을미사변,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을 전후로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승전 후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요동반도 등을 할양받았고 이후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기반이 되었다. 청조는 청불전쟁과 더불어 베트남과 조선에서의 실패를 반면 교사로 삼고자 했는데, 대외적으로는 티베트 및 몽골 속지의 종주권-주권 문제의 사례로써 활용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청 조정이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였다. 명칭도 청일전쟁이고, 실제 전쟁의 주체도 청과 일본이지만, 실제 청일전쟁의 전투들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자료: 나무위키 | |
| 🌱1900년대🌱 | |
🌲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처음 보도
대한제국 광무 11년, 1907년 7월 25일, '대한매일신보'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처음 보도됩니다.
고종황제의 퇴위까지 연결된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여전히 '답답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밝혀진 사실을 중심으로 정리해 봅니다. 만국평화회의보, 사진 왼편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7년 7월 25일 @조선일보DB
우리 특사들이 파견된, '만국평화회의'는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전쟁 법규 등을 정리하려고 만든 국제회의입니다. 최초 제안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II, 1868~1918). 그의 제안에 따라, 1차 회의가 1899년 5월에 개최됩니다. 그리고 2차 회의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애초 계획보다 1년 뒤인. 1907년 6월부터 개최됩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 1907년 6월 15일 ~ 10월 18일, 네덜란드 헤이그
당시 상황을 한번 보겠습니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국제사회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각종 외교활동을 펼칩니다. 그리고는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의 덕수궁 포위 속에, 고종과 대신들은 서로 '책임회피'를 하고.... 이 와중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고종이 서명을 하지 않았다'라고는 하지만, 을사늑약 당시, 대신들은 '고종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했고, 고종은 '대신들이 협의해서 하라'고 했답니다.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종은 늘~ 스스로 결정하는 법이 없이, '대신들의 뜻이 그렇다면 윤허한다'는 식의 정치를 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는 상황에서도 그러했던 모양입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러시아제국 니콜라스 2세 황제
이때,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비밀리에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이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합니다. 이에 대해, 최근의 연구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혁명세력으로 국내 정세가 불안한 러시아가, 외교적 방법을 동원해, 일본의 확장을 막고 러시아의 이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고종을 끌어들였다'는 말도 있네요. | |
🌲20년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 등, '폐허' 창간
1920년 7월25일..오상순 염상섭 변영로 등, '폐허' 창간
한국문학은 20세기 현대사의 구조적 모순을 비유와 상징의 언어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사실, 해방공간을 견뎌 낸 한국문인들의 창작(創作)과 절절한 체험은 세계문학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국권(國權)을 잃었고 말과 글, 이념과 풍속의 갈등을 겪었으며 해방 후 동족상잔(同族相殘)과 전쟁, 여기다 가난과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의 세례를 압축적으로 체득(體得)해야 했다.
지금은 폐간된 옛 잡지를 펼쳐보면 시대를 풍미한 당대 문인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숨을 쉬고 있다. 때론 궁벽하고 구차하며 의뭉스럽지만 현대사를 버텨 낸 ‘민얼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기억조차 바랬지만, 시간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 문인들의 실화(實話)를 발굴해 소개한다. | |
🌲21년 안용도가 지휘하는 의용대가 흥원군을 습격 하여 일본군과 교전 : 일경 2명 사살함. 🌲22년 전국 기자연맹 결성 🌲39년 경춘선(성동-춘천) 철도개통 🌲44년 신임 총독에 아베 노부유키 임명됨. | |
🌲46년 좌우합작회담 시작
좌우합작위원들과 함께. 앞줄 왼쪽부터 안재홍, 김붕존, 김규식. 8.15이후 미.소 냉정구도가 남긴 민족분단상황에서 대화를 통한 소통과 협력을 강조하였다.
1946년 7월 25일 오후 2시 반 서울 덕수궁 석조전 2층 대형홀에서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과 국민당 당수 안재홍, 한민당 총무 원세훈 등 우익측의 유력인사 5명과 인민당 당수 여운형, 민족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 등 좌익 측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좌우합작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좌우합작은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대립이 심화되고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시작됐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자 우익은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벌였고, 좌익은 민족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 찬탁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국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좌익과 우익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같은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여론 또한 그 같은 방향으로 형성됐다.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 해단식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맞춰 활기를 띠는 듯 하던 좌우합작위원회는 1개월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면서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침을 전환하자 큰 타격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마저 암살되자 12월 들어 위원회는 해체를 결의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민족의 단결을 통해 정치적 난관을 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진행되어 온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파가 존재할 수 없는 첨예한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의 일부 단결에 그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
🌲54년 이승만 대통령 미국방문(∼8월13일)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요청 🌲55년 美 극동지상군 사령관 및 8군 사령부 서울로 이전 결정, 美 사령관에 화이트 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