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먼 그때에는 외 1편
김명철
동지 지나 섣달그믐도 지나 달도 해도 길어지고 있는데 내 생각은 내 마음은 자꾸 짧아진다 더 어두워진다 춥다
고개 숙여 길을 걷다가 주머니에서 손바닥을 빼내어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아본다 하늘을 쳐다본다 언뜻 하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숯불이 발갛게 피어오른 아궁이 같은 것도 보인다 손바닥에서 군고구마와 살얼음 낀 동치미 냄새가 난다 둘러앉은 얼굴에 검댕이를 묻힌 형과 누이들 냄새도 난다 각기 다른 냄새가 아니라 하나의 냄새로 난다 먼 어제의 일이다
나처럼 등이 굽어 튀튀한 사람이 멈춰서 있는 나를 피하려다 내 어깨를 어깨로 스치고 간다 뒤돌아 나를 본다 우리는 광활한 설원에서 먹을 걸 찾아 헤매다 마주쳐 서로에게 멀뚱멀뚱한 두 설인(雪人) 같다 어디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깩깩 거대한 새소리도 들려온다 매머드(Mammoth)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지 땅이 움씰거린다 먼먼 어제의 일이다
나와 설인이 서로에게 서로의 공손한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죄송의 미소를 보낸다
주머니에 들어온 손바닥을 다시 펼칠까 하다가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다시 하늘을 본다 무수히 많은 점들이 하늘에 까맣게 박힌다 아주 먼먼 어제에 어쩌면 저 많은 점들도 처음에는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전에 만났던 그 설인도 어쩌면 나와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늘도 눈도 매머드도 나와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들어온 차가운 손바닥이 핸드폰의 진동을 느낀다 여기는 푸른 별 9홉니다 당신의 에이아이가 길을 잃어 지금 보호 중입니다 아이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울고 있습니다 아이의 체온이 높습니다 지금 계신 곳으로 아이를 전송해드릴 테니 안아주십시오 아늑하고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따듯해지는 손, 멀고 먼 내일의 일이다
화석지에서
공룡알 화석지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갯달래가 꽃망울을 밤하늘의 불꽃처럼 터뜨리고 있었네
말도 글도 갈수록 퇴화되어
오래전에 서로의 수심 깊이 묻어두었던
작은 알돌들은 여전히 식어가고
백 년도 아니고 천 년도 아니고
천만 년에 천만 년을 열 번 더하는 시간이란 뭘까
내가 당신 속으로
당신이 내 속으로 들락거리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도 화석이 될 수 있을까
퇴적과 지층 퇴적과 지층 퇴적과 지층
지층들 사이에서 부화를 기다리고 있을 알돌들
당신은 갯벌에 묻혀 있는 알들이
언젠간 부화할 것이라고 이 빙하기가 끝나면
언젠간 눈을 떠 맑고 투명한 손톱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였네
노을은 기울어지고 있는데
화석이 되어가는 갈대숲 가을의 사이 길을 따라
당신은 노을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둥지에서 벗어난 알 하나가 먼 지평선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네
천 년이란 게 하찮다는 듯
김명철
1963년 충북 옥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시집으로 짧게, 카운터펀치, 우리는 바람의 얼굴을 꽃이라 하고 싶다 외.
소설집으로 백석-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외.
시론집으로 현대시의 감상과 창작, 시의식의 근원과 발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