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목사가 본 ‘신의 악단’은?
오늘 19일에 대소변을 가릴 줄 아는 삼촌 여섯 명과 저와 아내, 이렇게 여덟 명이 신의 악단이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보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어느 날, 북한 당국은 외부로부터 모든 지원을 중단 받게 되고, 마지막 방법은 NGO를 통한 방법뿐이었습니다. 2억 달러를 지원받기 위해 외부 세계에 보여줄 하나의 ‘연출’을 준비합니다.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이 바로,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 찬양단’을 꾸며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냉혹한 보위부 장교 박교순(박시후)은 초등학교 때 일기 숙제에 ‘밥을 먹으며 어머니가 어떤 책을 읽었다. 내가 보니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글이 보였다.’라고 써서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보위부에 고발했고 어린 교순의 어머니는 성경책을 빼앗기고 성경이 찢어지는 광경을 보며 죽임을 당합니다.
어릴 때 당한 충격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에게 종교란 단지 통제해야 할 대상일 뿐, 믿음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는 임무를 맡습니다. 예수 믿는 사촌 형님까지 직접 죽이는 악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무 감정 없이 사람들을 모으고, 찬양을 가르치고, 연기를 시킵니다.
“웃어라. 기도하는 척해라. 믿는 것처럼 보여라.”
모든 것은 완벽한 ‘쇼’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진짜처럼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라고 합니다. 성경책을 합법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찬양을 반복하고, 가사를 따라 부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몇몇 단원들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진짜 믿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의 강한 임재가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박교순 장교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는지, 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사는지…. 하지만 그들의 찬양을 듣고,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서 그 역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찬양이 얼마나 은혜였는지 영화를 관람하며 눈물을 연신 닦아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따라 했던 기도, 의미 없이 외웠던 말들, 형식적인 노래였던 찬양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위험했습니다. 이 모든 프로젝트는 애초에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조금이라도 통제를 벗어나면, 모두가 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끝나면 모두 사살하라는 지령을 받습니다.
주인공 박교순 장교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끝까지 이 연극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느끼기 시작한 이 낯선 감정을 따라갈 것인가…. 찬양단은 탈북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찬양단 전체의 운명을 바꿔놓게 됩니다. 외국의 NGO 대표단이 ‘신의 악단’ 찬양을 관람하기 위해 ‘대동강 교회’로 모이고, 신의 악단팀도 대동강 교회로 가는데, 신의 악단팀이 도착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게 멋지게 준비했는데 말입니다. 박교순 장교 혼자 도착합니다. 오면서 신의 악단 찬양팀을 탈북시키고 혼자만 대동강 교회로 온 겁니다.
박교순 장교는 하얀 옷을 입고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맞아, 하얀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힘겹게 걸으며 독백합니다. “하나님 저 잘했지요.” 그 독백이 끝난 후 ‘탕’하는 소리와 함께 영화는 끝납니다.
감동이었지만 뭔가 허전함이 함께하는 영화였습니다. 신의 악단이 부르는 찬양마다 은혜였습니다. 박교순 장교는 당의 지령을 받고 가짜로 믿음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순교라는 엄청난 일을 감당했습니다. 분명 성령님이 함께하는 순교였습니다.
대단한 영화 ‘신의 악단’은‘가짜로 시작된 믿음이, 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가?’라는 것을,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