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신씨 시조(鵝州申氏 始祖), 신영미(申英美)
●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아주신씨(鵝州申氏)의 발상지는 한반도의 남단의 섬 거제도(巨濟島)의 한 지역으로 현재 행정 명칭은 거제군(巨濟郡)이다. 신라 때부터 군으로 불러왔던 큰 고을로서, 아주현(鵝洲縣), 송변현(松邊縣), 명진현(溟珍縣)이라는 3개의 지역단위가 있었다.
아주신씨는 아주현의 토호세력 중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영미(申英美) 시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 영조(英祖) 때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와 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아주신씨의 가첩(家牒)에 신영미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아주신씨가 평산신씨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12세손 신익휴가 시조로서 평산신씨로부터 분관(分貫)되었는 주장이 있는데, 평산신씨의 대동보를 포함한 관련자료에서 신익휴라는 인물이 없고, 계대가 평산신씨와의 동 항렬에서 100여년이 차이가 난다. 2021년 현재 평산신씨대종중의 공식 입장은 <아주신씨가 평산의 분적종이라는 기록이 없으며, 아주신씨와의 관계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라고 공문을 통해 밝힌 바 있다.
1817년 아주신씨 청주파의 신극조 선조가 충북 청주의 김노정이 화해사전을 통해 여러 성씨의 선대 세계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중에 신익휴 윗대의 아주신씨 조상이 있어 이를 평산신씨 11세에 신숙, 12세에 신숙의 두 아들 신익보, 신익휴를 입록하고, 차자 익휴를 아주신씨의 시조로 특정하였다. 그후 이를 경북 의성에 통지하므로 읍•귀 양파에서 각 2명씩 뽑아 각기 대표를 선출하여 귀파 도와공 신정주, 읍파의 우암 신치교가 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 달여에 걸친 확인 결과 학식이 풍부한 선비 도와공은 근거 없는 조작된 사실임을 파악하고, <호서기행록>을 작성하여 그 내용이 허위임을 밝혀 그 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화해사전>은 진서가 아니며, 시조 신익휴란 인물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찾을 수 없는 가공인물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 아주신씨 시조의 묘
아주신씨 시조의 묘는 거제시 아주동 당목마을 뒷산 주령에 있었다. 대우조선소가 들어오면서 이장을 해 갔다. 아주지역은 1971년 대우조선소가 들어 올 당시 탑골, 용시골, 안골, 배골, 간송, 장터몰, 당목 등이 있었다. 지형이 바닷가 평지이고 농토가 많고 물이 좋고 주위에 울창한 산이 있어서 농경지대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 아주신씨 상계 해설
아주신씨의 시조는 신영미(申英美)이다. 신영미를 시조로서 1세조(一世祖)로 하여 상계(上系)는 시작되었다. 5세까지 행장을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1세(一世): 신영미(申英美)
고려에서 권지호장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윗대는 삼국시대부터 아주지역에 호족으로 거주하여 왔던 것으로 여느 지방 호족과 마찬가지로 성(性)이 없었는데 고려조에 들어와서 성을 가졌는데, 토착지역 아주를 성의 본관으로 삼았고 향직(鄕職)인 호장(戶長)을 수임하였다. 호장은 지역주민의 수장(首長)이었고 중앙관서의 지방행정을 대신하여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자손들은 음직(蔭職)에 올랐다. 음직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자리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子)는 진승(晋升)이다. 고려조에 등장한 여느 성씨도 그렇듯 배위(配位)는 알 수 없어 실전(失傳)으로 전해왔다. 고려 중기 때까지 시조의 부인을 기록한 것은 사실에서 벗어난 것으로 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2세(二世): 진승(晋升)
관직은 산원동정(散員同正), 산원은 고려 때 2군6위에 소속된 정8품의 무관(武官)벼슬이다. 고려 초기에는 의흥친군의 10위에 소속된 역시 정8품의 품계의 무관관직이었다. 여기에 동정이란 직위도 있는데 이것은 산원보다 높은 정5품의 무관벼슬이고 대개 향리에게 제수되었다. 특히 음직으로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처음 받는 벼슬로 이 동정직부터였다. 배(配)는 실전(失傳).
3세(三世): 득창(得昌)
관직은 영동정(令同正)이다. 고려에서 전교시, 사복시 등의 관청부서에 둔 벼슬인데 이 벼슬의 품계는 최고 3품 품계에서 최하 9품까지로 두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각 부서 우두머리로 종5품에 속했다. 전교시는 각종 도서와 인쇄에 관한 업무를 보는 관서였고 사복시는 왕이 사용하는 가마와 말을 관리하는 관청이며 전객시는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고 조공문제 같은 것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배(配)는 실전(失傳).
4세(四世): 윤유(允濡). 초명은 원유(元濡)
관직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배(配)는 지평직(持平職)에 있는 이언(李堰)의 여식이다. 역사서 동사찬(東史纂)에 보면 고려 충렬왕 6년( 1280년) 정월 임진일에 승선(承宣) 신윤유의 본래 이름은 원유(元濡)였는데, 충선왕의 이름자와 음이 같다고 하여 윤(允)자로 바꾸었다. 당시 왕명에 의해 왕과 같은 이름의 글자를 금하는 법령이 있었다. 판도판서는 재상급 관직으로 조선시대 호조판서와 같은 직위이다. 나라 안의 호구(戶口)와 조세(租稅), 공부(貢賦), 재정(財政)을 맡는 관청의 장이었다. 승선(承宣)은 나라의 명령을 하달하고 궁궐을 호위하고 군사관계의 기무를 맡는 중추원이란 관청의 정3품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여기에 좌승선 우승선이 있었다. 군사 병기를 만들고 보관하는 관청인 군기시의 검교라는 직책도 맡았는데 이것은 임시직이었다.
5세(五世): 우(祐)
관직은 봉상대부사헌부장령(奉常大夫司憲府掌令)과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을 역임하였다. 봉상대부는 고려의 문관벼슬로 정4품의 품계이다. 충열왕 때 제정된 대부벼슬이었다. 사헌부장령은 문무(文武) 양쪽의 공직자들을 감찰하는 업무와 품속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기관에 소속된 관직으로 종4품에 해당한다. 전라도안렴사는 전라도지역을 안찰하는 직무이고 품계는 종3품에 속했다. 신호위호군은 신호위라는 군 부서에 소속된 정4품의 무관벼슬이다. 신호위는 고려의 육위(六衛)의 하나로 7개의 군영을 거느리는 부대였다. 위는 군의 부서를 표시한 것이다.
특히 우(祐)는 효자로 유명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覺)의 문헌에 보면 관직은 호군이었는데 고려말 혼탁한 세상사에 스스로 몸가짐에 조심했고 물러나서는 부모에 효도하기를 진력하였다. 부(父) 판서공이 졸(卒)하였을 때는 묘 앞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조석(朝夕)으로 곡(哭)을 했다. 그런데 대나무 두 그루가 분묘 앞에 자란 것을 보았다. 이것은 효도에 감동한 소치였다는 소문이 났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지고 노변 좌측에 효행을 기록한 효자비가 섰다. 그래서 그 지역을 효자리(孝子里)라 부르게 되었고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 즉 지금의 의성군 단밀면 관동리(館洞里)이다.
● 우(祐)의 하계(조선 순조 25년(1825)에 후손 신체인의 사적기 인용)
우(祐)의 자식부터 邑派(읍파)와 龜派(귀파)로 나뉘어진다.
첫째 읍파의 파조 光富(광부)는 內府令(내부령)하였고, 둘째 귀파의 파조 光貴(광귀)는 知鳳州事(지봉주사)하였다..
[광부]가 자식을 두니 士贇(사빈)의 後孫(후손)은 遺墟地(유허지)에 살고 士廉(사렴)은 彦陽縣監(언양현감)하다.
사렴의 후손 元福(원복)은 參奉(참봉)이며 孝友(효우)로 이름났다. 元祿(원록)은 贈參議(증참의)며 號는 悔堂(회당)이니 孝行(효행)으로 公(공)을 더욱 빛나게 하고 廬墓三年(여묘삼년)으로 旌閭(정려)받아 의성의 藏待書院(장대서원)에 奉享(봉향) 되었다.
悔堂(회당)의 자식 伈(심)은 監察(감찰)을 하였고 仡(흘)은 贈承旨(증승지)하고 효우로 이름났다.
仡(흘)의 자식, 適道(적도)는 察訪(찰방)을 하고 호는 虎溪(호계)니 정묘와 정축에 倡義(창의:의병을 일으킴)하였다.
達道(달도)는 修撰(수찬)으로 承旨를 하고 호는 晩悟(만오)니 정묘에 斥和(척화:화친하자는 것을 물리침)하였다. 晩悟(만오)의 자식 在(재)는 泰仁縣監(태인현감)을 하고 圭(규)는 文科佐郎(문과좌랑)하였다. 재의 후손 濂(렴)은 孝로 贈持平(증지평)하다.
悅道(열도)는 正言(정언: 말이 바르다)하며 호는 懶齋(나재)니 孝友(효우)와 文章(문장)으로 이름났다.
[광귀]가 자식을 두니 希信(희신)은 丹陽郡守(단양군수)며 希忠(희충)은 河東縣監(하동현감)이며 그리고 希敬(희경)이다
希信(희신)의 후손 介甫(개보)는 司直(사직)을 하였고 用甫(용보)는 果川縣監(과천현감)이고 命周(명주)는 扶餘縣監(부여현감)하다. 또한 후손 謙(겸)의 자식 應祥(응상)은 參奉(참봉)이다. 개보의 자식 幹(간)은 直長이며 翰(한)은 贈判決事(증판결사)이다.
간은 百齡(백령)을 두었고, 개보의 후손은 格(격)과 檢(검), 楗(건)이다. 또한 후손 之禮(지례)와 之亨(지형)은 直長(직장)이며 之仁(지인)은 司宰監正(사재감정)이며 之益(지익)은 參奉(참봉)을 지냈다. 특히 지익은 어미의 병으로 손바닥에 불을 켜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지인의 자 鋏(협)은 아버지의 병으로 매로 꿩을 잡아왔다. 지익의 자 鐔(심)은 왜적이 아버지를 공격함에 몸으로 칼날을 받았다. 삼인 모두 孝 旌閭(정려)를 받았다.
한의 자식 應奎(응규)는 參奉(참봉)으로 贈參判(증참판)하고 또 그의 자식 夢得(몽득)은 贈承旨(증승지)하고 또 그의 자식 之孝(지효)는 선비들의 推重(추중)을 받아 聞韶誌(문소지)에 기재되었다. 임진년 왜적의 칼에 죽음에 임박하여 혈서를 동생에게 부쳐 나라 위해 죽기를 힘쓰라 하였다.
오봉선생 之梯(지제)는 文科(문과)하여 承旨(승지)로 壬辰勳(임진훈)에 기록되었다. 贈參判(증참판)하고 호는 梧峰(오봉)이니 덕행과 문장을 갖추었고 지극한 효행으로 廬墓(여묘)하여 藏待書院(장대서원)에 봉향되었다. 오봉의 자식 弘望(홍망)은 文科正言(문과정언)이며 호는 孤松(고송)이니 旅軒門下(여헌문하)에 유학했다. 보는 이들이 春風和氣(춘풍화기-봄날의 화창한 기운)라고 말하였다.
之信(지신)은 孝友(효우)로 이름나 역시 聞韶誌(문소지)에 기재되었다. 용보의 아들 椿年(춘연)은 參奉(참봉)이고 그의 아들 暹(섬)은 龍宮縣監(용궁현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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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주신씨는 전국에 33,7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아주신씨 시조(鵝州申氏 始祖), 신영미(申英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