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전의 브리타니아는 여러 부족이 다스리는 영토로 분할되어 있었다 .기원전 5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손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에 대해서 직접 기록했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이유는 자신이 맞서 싸우고 있는 골족에게 전사를 보내주어 지원하고 있는 켈트인 부족장에 대한 가혹한 응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로마의 함선들이 칸티아키 부족이 거주하고 있는 브리타니아 남부에 가까이 접근하자, 수많은 부족의 전사들이 소금기를 공중에 흩날리며 달려왔다. 해안은 비좁았고 절벽꼭대기에서 는 파도에 휩쓸려 비틀거리면서 상륙을 시도하는 군단병들의 머리위로 발사무기 세례가 쏟아졌다. 기병의 상륙 또한 지체되었다. 거친 바람은 기병들의 상륙을 방해했으며, 이곳 해안은 브리튼의 전력을 테스트해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로 여겨졌다.
카이사르는 전면에 위치한 함선들에게 닻을 내려 정박할 것을 지시하고, 후방에 위치한 함선들에게는 현위치에서 멀지않은 장소에 병력을 상륙시킬 보다 안전한 장소를 찾기위해 북동쪽으로 배를 몰아갈 것을 지시했다.
청동갑옷을 걸친 부족 전사들은 전차를 앞세우고, 전투의 함성과 소라고둥 소리를 산들바람에 울려퍼트리며 해안을 따라 함선들을 쫒아갔다. 브리타니아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에서 멀리 떨어진 미지의 장소로 여겨져 왔으며, 갖가지 미신들이 불길처럼 로마군대 사이에 퍼져나갔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깔보왔던 부족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는 바람에 그날밤 다시 골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다음해에 카이사르는 3만명의 군단병과 2천명의 기병,숫자가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보조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를 재침공했다.
위 사진에 있는 군단병들은 접근해오는 적들에게 투창(필라)를 던지기 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투창은 적의 방패를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로마 군인들이 상대와의 근접전투에서 악명높은 찌르기용 단검을 사용하는 것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이사르는 켈트인 기병을 자주 사용했으며, 이들은 상의에 사슬갑옷을 입고, 60에서 70센티미터의 스파타(Spatha)로 무장하고 있었다. 스파타는 켈트족의 무기에 기원을 두고있는 베기전용 장검이었다. 기병들은 왼손에 평평한 타원형의 방패를 들고있었으며,때때로 육각형 모양의 방패도 사용되었다. 말에게 여러 가지 팬던트나 주석입힌 구리 메달을 장식하는 일은 많았지만 갑옷은 입히지 않았다.
등자는 6세기 경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안장은 자주 사용되었으며, 가장자리에는 4개의 돌기가 나있어 기수가 앞이나 뒤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이번 침공에서 카이사르는 켄트를 압박하고, 템즈강을 건너 틸베리 근처에 있는 카투벨라우니족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이중전술을 사용했다. 부족장인 카시벨라우누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로마 침략자들에게 화평을 요청해왔다. 카이사르는 상대가 제공하는 인질을 받아들인 후 , 1년에 한번씩 브리튼에서 공물을 받기로 약속을 받아내게된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을 떠난 후, 두 번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후에.... 기원 후1세기 경 , 남부 브리타니아의 부족들은 로마의 동맹으로 들어오게 된다.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BC55년 경에 이들 부족장들과 친분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기원후 41-42년경에 카투벨라우니족이 다른 부족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은 새로운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로마는 브리타니아와 1백년이 넘도록 무역관계를 유지해왔고, 언제나 통상관계에서 정복의 선각자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클라디우스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임용으로 인한 불안정한 황제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어줄 승리를 필요로 하고있었다.
만약 클라디우스가 한 세기전에 위대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해내지 못했던 업적을 달성한다면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의 그의 위치는 확고해질것이 분명했다. 이 시기의 로마역사가들은 클라디우스가 정복할 것을 제안했던 이 안개에 휩싸인 미지의 섬나라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당시 로마인들은 브리타니아가 알려진 세상의 위험스러운 가장자리라고 믿고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클라디우스의 군대가 브리타니아로 항해할 것을 거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군단, 20군단, 11군단, 2군단의 총 4개 군단이 브라타니아로 파병되었다. 2군단장을 맡고있는 베스파시아누스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4개 군단은 론디니움으로 진격하기 위해 북쪽을 압박하다가 길목마다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자 템즈강 북쪽에서 황제인 클라디우스의 도착을 기다리게 된다. 클라디우스는 귀족수행원들과 원로원의원들, 친척들과 경비를 담당하는 근위대 병력의 경호를 받으며 8월초에 브리타니아에 도착하게 된다. 클라디우스는 또한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고 토착 부족민들에 깊은 인상을 주기위해 여러마리의 코끼리도 같이 데려왔다. 로마의 전 군단은 클라디우스의 지휘하에 동쪽으로 진군해나갔고 소수의 저항을 무너트리며 수도인 콜체스터를 점령해버리고 만다.
나중에 주조된 승전기념 화폐는 로마의 브리튼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상징으로 코끼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기원후 43년의 침공과 정복이 끝나고 17년이 지난 후, 브리튼 남부의 부족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비록 북쪽과 남쪽에는 여전히 적대적인 부족들이 남아있었지만....
드루이드의 종교적인 희생제식은 흩어진 부족들을 단합시키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드루이드 사제들은 동물과 인간을 희생제물로 바쳤으며, 사람을 거대한 고리버들 바구니에 넣어 산채로 불에 태우는 의식을 행하는 걸로 잘 알려져있다. 사제들은 흰색 로브를 입었으며, 황금 낫으로 참나무와 겨우살이 나무를 잘라 제물과 같이 희생제의에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점령한 종족의 종교적 관습에는 관대한 편이었으나, 이 괴상한 종교의식을 용납한다는 것은 참기힘든 고통이었다.
오늘날에 드루이드교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드루이드의 세력중심지이자 성채가 있었던 앙글세이섬 - 로마인들에게는 모나(MON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 웨일즈의 북부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유리한 지역에서 드루이드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정신적인 레지스탕스 운동을 계속했다.기원후 60년경,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14군단과 20군단을 이끌고 신성한 모나섬을 공격하기 위해 행군을 시작하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를 거쳐서,로마군은 섬의 앞바다를 건너 켈트인의 정수가 담긴 이 장소를 파괴해버렸다.... 드루이드 사제를 학살하고 그들의 희생제의가 행해지던 숲을 불태워 버렸다. 로마의 모나섬 정벌이 끝나고 얼마후에, 남부에 위치한 부족들이 이케니 부족의 여왕인 부디카를 지원하기 위해 봉기했다.
이케니족은 오늘날의 노포크와 서포크 일부,켐브리지셔를 지배하고 있던 사나운 전사부족이었다.
과거에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발견된 황금제 목걸이들은 이들이 매우 부유한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아름답고 독특한 부장품들은 대영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부디카 여왕은 채찍질을 당했으며, 그녀의 딸들은 로마인들에게 강간당했다.
이케니족은 카물로둔눔(콜체스터)라고 불리던 땅에 정착하려고하던 전직군인들에 의해 토지를 강탈당했다. 어떤 결과가 벌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반란군을 둘러싼 분노는 로마인들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부디카 여왕은 부족을 이끌고 증오스러운 콜체스터 식민지를 습격하여 남자,여자,아이들을 포함해서 모두 학살해 버렸다. 뉴튼의 겨울지구에 머무르고있던 9군단은 반란진압을 위해 콜체스터로 행군해왔으나, 트랜트강에서 반란부족과의 유혈이 낭자한 접전 끝에 참패한후,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달아나 버렸다.
전직 군인들은 클라디우스에게 봉헌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공사중인 신전안에 들어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9군단이 구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지원군이 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들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모두 살해당했다.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파병된 로마병력은 이케니족의 숫자에 비해 10분의 1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방패를 늘어세운 밀집군단에게 떼거지로 달려들던 켈트인들은 그때마다 시체의 산을 쌓고 번번히 퇴각했다.
반란군의 대부분은 죽거나 노예로 넘겨지고, 로마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브리타니아 총독을 경질시키고 좀더 완화된 식민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부디카 여왕의 최후
아래 그림은 이케니족의 전형적인 켈트전사의 모습이다. 얼굴과 몸이 모두 문신으로 뒤덮여있다. 턱수염은 깨끗이 면도한 상태지만, 콧수염은 윗입술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트린상태다.
이 전사가 머리에 쓰고있는 투구는 템즈강에서 발굴되 대영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투구를 본따 현대에 다시 재현된 것이다.
기원후 122년경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튼을 방문해 섬의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기 위한 성벽을 쌓을 것을 명령한다. 이 성벽(하드리아누스 성벽)이 길이는 해안 끝에서 끝까지 76로마 마일에 해당한다. 이집트, 북아프리카,스페인,시리아,헝가리등의 제국의 각지에서 소집된 병사들이 이 성벽의 북부 전초기지에서 근무했다.
아래 사진의 두 병사들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인 기원 후 375년경의 전형적인 로마화된 브리튼 군인들의 모습이다.
왼쪽의 장교는 기독교의 심벌이 그려져있는 방패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로마군의 갑옷과 장비는 격렬한 변화를 겪게된다. 전장의 총체적인 조직체에서의 중심은 과거처럼 군단의 보병이 아닌 기병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이 사진은 기원후 410년경 브리타니아를 떠나 로마를 지원하러 가던 병사의 모습이다... 그는 두 번다시 브리타니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첫댓글 야만족으로 인하여 브리타니아는또 혼란에 빠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