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해욱 詩『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 시집〈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봄날의책
입추가 지났다. 아침나절엔 슬쩍 시원한 바람도 만난 것 같다. 물론, 한낮엔 어림없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무더위이다. 동남아시아 어떤 섬으로 휴가를 다녀온 친구는 한국이 더 덥고 습하다는 안부를 전해왔다. 믿기 어렵지만, 이보다 더한 여름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엄살이다. 나는 종일 실내에서 근무하지 않는가. 손님을 핑계로 종일 에어컨을 켜두고 있는 서점에서 일하는 처지에 덥다는 하소연을 하다니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에어컨 작동이 지구 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무얼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양산을 접고 들어오신다. 대뜸, “우리는 책을 안 살 건데요” 하신다. 요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 하는데, 너무 더워 잠시 들어오셨단다. 조금만 앉아 있다 가겠다 하신다. “그럼요. 앉았다 가세요.” 대꾸하며 웃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 두 분은 정류장이 잘 보이는 창가 앞 소파에 앉아서, 어느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손자 자랑, 드라마 주인공 이야기, 험한 세상 걱정. 조용하던 서점이 시끌벅적해진다. 그런데 싫지 않다. 싫긴커녕 할머니들의 종횡무진 수다에 빨려들고 만다. 몇 번인가는 참견할 뻔도 했다. 물론 마다치 않으실 테지만, 그랬다간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이윽고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려고 하자 할머니들의 대화는 거기까지. 서둘러 나서면서도, 잘 쉬었다는 인사는 놓치지 않으신다. 서점은 금세 조용해지고 어쩐지 섭섭하다. 할머니들이 떠난 자리에 양산이 놓여 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집어 들고 떠나려는 버스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