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셔 전 특파원은 자신이 취재한 광주 기사가 실린 1980년 5월28일치 <쉬드도이체 차이퉁> 신문을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다. 광주를 취재하고 5월27일 서울로 올라온 그는 정보기관 감청 을 우려해,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전화로 기사를 불러 송고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경기장 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쉬드도이체 차이퉁> 전 극동특파원은,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5월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광주의 ‘마지막 날’을 취재했다.
그는 “동족이 동족을 총칼로 살해했다는 것과, 취재와 인터뷰 중 만났던 시민들이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이런 희생 없이 결코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을 광주를 통해 확인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1987년 대만 민주화시위 취재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간단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힐셔는 5월25일 화순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한국말로 “독일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군인들이 독일 신부쯤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고 했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아마 군인들이 불구 손을 가진 자가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고 그는 웃었다.
힐셔는 시민군이 장악한 전남도청과 주검들이 안치된 상무관, 조선대병원 등을 취재했다. 도청에선 1차 계엄군 진입 때 숨진 이들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을 목격했고,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선 태극기나 흰색 천에 둘러싸인 60개의 관을 봤다. 그는 상무관 한쪽에 놓여있던 7살짜리 소년과 부모의 관 3개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관 옆에서 흐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누군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힐셔는 또 같은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르던 여고생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북한 사주를 받은 폭도로 당시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광주 항쟁이 북한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쉬드도이체 자이퉁> 28일치에 실린 기사에서 이 장면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쉬드도이체 자이퉁>은 뮌헨에 본사를 둔 독일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 일간지이다.
힐셔는 30살 전후로 보였던 시민군 대변인(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중 사망한 윤상원씨로 추정됨)과의 회견을 특별하게 기억했다. 그 대변인은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군부세력이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한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니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시민군 대변인은 또 ‘현재 광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가능한 빨리 미국과 대화하기를 원한다. 서울에 가게 되면 시민군의 의사를 미국 대사관 쪽에 전해달라’고 힐셔에게 부탁했다. 힐셔는 “이런 시민군의 입장이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당시 시민군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힐셔는 대변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힐셔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이 임박한 26일 자정 무렵 광주를 빠져나왔고, 27일 아침 화순에서 라디오를 통해 시민군 대변인을 포함해 전남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날 광주에서 161명의 죽음이 확인됐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단 2명이 사살됐다는 계엄군 발표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특파원으로서 40여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힐셔는 “광주민주화운동은 일반 시민이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진압을 경험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항거에) 동참했던 역사적 분기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은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이겨내고 환상적으로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고, 시민의식도 성장했다. 한국은 내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가슴에 남는 특별한 나라”라고 말했다.
뮌헨/글·사진 한귀용 통신원 ariguiyong@hotmail.com |
첫댓글 광주 시민들을 미국은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