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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 지방의 회교도 주민들과 러시아 정부군 사이에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코카서스 지방. 러시아 청년 바냐 길린(Ivan (Vanya) Zhilin: 세르게이 보드로프 주니어 분)이 신체검사를 받고 전선으로 간다. 그러나 바냐는 작전 도중 습격을 받고 총 한 번 못 쏴본 채 체첸인 압둘(Abdul-Murat: 드제멀 시크하루리드제 분)의 포로가 된다. 마냐의 상관이었던 중사 사샤(Sacha Kostylin: 올레그 맨쉬코프 분)도 함께 체포되어 두 사람은 같은 처지에 놓인다. 압둘은 러시아 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아들과 두 사람을 교환하려 한다. 1백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전쟁을 계속해온 체첸인에게 러시아인은 철천지 원수일 수밖에 없다. 족쇄와 쇠고랑으로 묶인채 죽음의 위협 아래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그러나 사샤가 탈출을 감행하다 처형되고 압둘의 아들 마메드는 러시아 감옥을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어버리고 만다. 포로 교환의 꿈이 무산된 압둘에게 바냐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바냐는 묶인 채로 구덩이에 갇히고 가끔씩 찾아오는 압둘의 어린 딸 디나(Dina: 수잔나 메크라리예바 분)만이 이야기 상대가 된다. 바냐는 마침내 디나에게 청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냐와 체첸인들 사이에는 인간적인 끈이 하나씩 이어져 간다. 손재주가 많은 바냐는 압둘의 딸 디나에게 장난감을 만들어주고 마을 사람들은 이것 저것 망가진 물건을 들고 바냐를 찾아 오기도 한다. 디나는 아버지 압둘이 곧 바냐를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어떻게 해서든 탈출시키려 한다. 운명의 날, 디나가 몰래 족쇄의 열쇄를 바나에게 가져다 주지만 바냐는 디나를 버려두고 떠날 수 없다며 망설인다. 그러는 사이 아들의 사신을 수습하러 간 압둘이 돌아와 바냐를 앞세우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 바냐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압둘의 총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서 한 방의 총성이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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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코카서스 지방을 배경으로, 러시아 군인과 타르타르인 사이에 있었던 짧은 일화를 통해 휴머니즘 섞인 반전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작품으로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이 원작이다. 당시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러시아 및 변경 국가들의 유혈 분쟁은 1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소비에트 연방이 븡괴한 이후로는 그 참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영화는 북 코카서스 지방의 체첸 공화국을 무대로 소설의 내용을 재현하고 있다. 1996년 깐느 영화제 국제 비평가상과 관객 인기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으며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 초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사샤: 난 말이지, 바보라서 군대에 들어왔어. 총이 너무 좋았거든. 돈도 필요했고..
그러다보니 이 일이 맘에 들기 시작했어.
체첸 민간 반군의 습격으로 총 한번 쏘지 못하고 포로로 붙잡힌 순진한 햇병아리 이등병 바냐,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만사가 천하태평인 것처럼 행동하는 잔뼈 굵은 병장 사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은 하나의 족쇄에 속박되면서,
좋든 싫든 운명을 함께 해야할 처지에 놓인다.
반군의 리더 아브둘.
마을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명의 러시아 군인을 살려둔다.
시내의 러시아군과 접촉하여 두 포로와 감옥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교환하기 위해서..
네이버 까페에 어떤한분이 쓰신 스놉시스_
시놉시스...
체첸 지방의 회교도 주민들과 러시아 정부군 사이에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코카서스 지방. 러시아 청년 바냐 질린(세르게이 보드로프 주니어 분)이 신체검사를 받고 전선으로 간다. 그러나 바냐는 작전 도중 습격을 받고 총 한 번 못 쏴본 채 체첸인 압둘의 포로가 된다. 바냐의 상관이었던 중사 사샤(올레그 맨쉬코프 분)도 함께 체포되어 두 사람은 같은 처지에 놓인다. 압둘은 러시아 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아들과 두 사람을 교환하려 한다. 1백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전쟁을 계속해온 체첸인에게 러시아인은 철천지 원수일 수밖에 없다. 족쇄와 쇠고랑으로 묶인채 죽음의 위협 아래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그러나 사샤가 탈출을 감행하다 처형되고 압둘의 아들 마메드는 러시아 감옥을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어버리고 만다. 포로 교환의 꿈이 무산된 압둘에게 바냐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바냐는 묶인 채로 구덩이에 갇히고 가끔씩 찾아오는 압둘의 어린 딸 디나만이 이야기 상대가 된다. 바냐는 마침내 디나에게 청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냐와 체첸인들 사이에는 인간적인 끈이 하나씩 이어져 간다. 손재주가 많은 바냐는 압둘의 딸 디나에게 장난감을 만들어주고 마을 사람들은 이것 저것 망가진 물건을 들고 바냐를 찾아 오기도 한다. 디나는 아버지 압둘이 곧 바냐를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어떻게 해서든 탈출시키려 한다. 운명의 날, 디나가 몰래 족쇄의 열쇄를 바나에게 가져다 주지만 바냐는 디나를 버려두고 떠날 수 없다며 망설인다. 그러는 사이 아들의 사신을 수습하러 간 압둘이 돌아와 바냐를 앞세우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 바냐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압둘의 총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서 한 방의 총성이 올리고. (네이버 영화 줄거리 인용) 네이버 영화에서 저 줄거리를 처음 읽었을 땐, 난 멋대로 애절한 로맨스 영화를 상상했다.
대충 이런, 적대관계에 있는 양민족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는 내 예상을 비웃으며 완전히 정반대로 흘러갔다. 로맨틱한 사랑의 속삭임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적인 장면도 없었다. 그렇다고 뭐, 네이버 측에서 쓴 줄거리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것과 실제의 영화는 그 관점이나 톤, 화법 등에서 차이가 있엇던 듯 하다.
<코카서스의 죄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포로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담담하고 침착한 화법을 유지한다. 거기에다 한없이 무거워질 수도 있는 소재의 스토리를 피식 웃게하는 예측불허의 유머로 환기시키는 여유까지 부린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인위적인 스토리 구성이나 격정적인 감정 표현, 극적인 효과보다는 '현실적인 자연스러움'이다. 그런데도 싱겁다거나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쿨한 리얼리티 때문에 이 영화의 휴머니즘적인 반전 메시지는 강요된 감동이 아닌 관객을 사색하게 만드는 긴 여운을 남긴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을 영화화...
영화 <코카서스의 죄수>는 톨스토이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하여 만들어졌다. 이 소설은 코카서스(러시아에서는 카프카즈라고 부름..) 지역의 무슬림 주민과 러시아 포로 사이에 일어난 일화를 통해 민족 분규의 아픔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은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코카서스 지방의 이 뿌리 깊은 민족 분쟁을 현대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참 슬픈 사실은 소련 붕괴 이후 더욱 심화된 러시아와 체첸의 갈등을 150년 전에 쓰여진 톨스토이의 소설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인물들의 성격과 상호관계의 묘사...
<코카서스의 죄수>는 러시아-체첸 분쟁을 원거리에서 조망하기 보다는 몇명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미시적으로 관찰을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인물들의 캐릭터와 상호관계의 발전과정을 캐치하는 것이 이 영화 감상의 관건일 거다. 이 영화는 인물들에게 가치평가를 부여하거나, 섣불리 인물들의 감정상태를 관객에게 이입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러시아 포로와 체첸 주민,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제 3자로서의 입장을 취하지만,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영화의 주요 포커스는 상이한 경력과 성격을 가진 두 러시아 포로에게 맞춰져 있다. 전쟁 경험이 많은 병장 사샤는 적에게 포로로 잡힌 심각한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시니컬한 농담을 내뱉어내는 건방지고 굴러먹은 베테랑이다. 하지만 강한 척 허세를 부리는 그의 모습 뒤에는 사실 아픈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어릴 적 불행한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는 그토록 원했던 배우의 꿈을 접은 채, 돈을 벌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제 막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배치된 신병 바냐는 총보다는 책가방을 어깨에 매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풋내기다. 그에게는 '적들이 네 ㅂㅇ를 자를 거다'라는 사샤의 농담을 다소 진지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이렇게 서로 정반대인 두 사람은 하나의 족쇄에 속박되변서 화장실까지 붙어 다녀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처음에 사샤는 민망할치만큼 바냐를 퉁명스럽게 대한다. 그러나 수일을 헛간에 갇혀지내는 동안, 둘은 서로의 과거를 이야기 하고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에 맞춰 블루스를 함께 출 정도로 친해져 간다. 한편, 러시아인 포로들과 체첸인 포획자들 사이에도 점차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체첸 반군의 리더인 아브둘은 시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군과 거래를 맺을 때까지 두명의 포로를 냄새나는 외양간에 가두어 놓는다. 그리고 그의 벙어리 사위 하산을 시켜 그 둘을 감시하게끔 한다. 그런데 이 과묵하고 충실한 감시자가 포로들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동안, 이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섞인 미묘한 친밀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사샤와 바냐는 곧 하산이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을 적에 러시아인 간수에게 혀를 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혀만 잘리고 ㅂㅇ은 안 잘렸수?" 라는 사샤의 농담에, 항상 굳은 표정에 무뚝뚝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가 쉰소리 나는 웃음을 터트린다. 노래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하산... 노래를 불러달라는 사샤의 짓궂은 부탁에 놀랍게도 하산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샤는 자기도 아는 곡조라며 그를 따라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ㅡ노래의 제목은 '푸른 두건(Sinii Platochek)'.. 영화의 첫부분에서 사샤가 불렀던 노래로, 하산과 사샤를 이어주는 끈이라 할 수 있다. 포로들에게 날마다 음식을 날라다 주는 압둘의 어린 딸 디나는 이 낯선 남정네들을 별로 무서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 똑같고 지루한 산골 마을의 일상 중에 나타는 이들 이방인은 호기심이 이는 대상이다. 손재주가 많은 바냐는 나무와 깃털로 새 모빌을 만들어 디나에게 선물한다.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는 두 사람. 디나는 바냐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은 목걸이를 걸어보기도 하고, 그가 혼자 구덩이에 갇혔을 때는 춤을 춰서 위로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감정은 성숙한 남녀 간의 사랑은 확실히 아니다. 아직 사랑의 경험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소년 소녀의 풋사랑 정도라고 할까.. 이들은 서로에게 이끌리긴 해도 '널 좋아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네이버 영화'의 줄거리에 바냐는 마침내 디나에게 청혼하기에 이른다 라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바로 그 문장 때문에 로맨스 영화인 줄 알고 낚인거다), 사실 그것은 프로포즈 씬이라고 간단히 압축해 말할 만한 장면이 아니다. 실제 그 씬의 대사를 보자.. 바냐 이제 결혼 했어? 디나 아니, 아직 청혼한 사람이 없어 바냐 그럼 나랑 결혼할래? 디나 우린 결혼 못해.. ...난 내년 쯤에 결혼하게 될거야. 여기선 결혼을 일찍 하거든 바냐는 진담이라기보다는 농담처럼 불쑥 청혼 아닌 청혼을 한다. 그러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하는 디나의 '현실적인 답변' 때문에, 바냐의 청혼은 실없고 썰렁한 유머가 되버리고 만다. 낭만적인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얼마나 싱겁고 재미없는 프로포즈 씬인가.. 영화에서는 이렇듯 관객의 기대와 달리 엉뚱하게 흘러가는 대사와 씬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이 영화의 리얼리즘은 헐리우드 영화의 클리쉐에 신물난 관객들에겐 신선함을 준다. 또다른 예로 사샤가 탈출을 감행하다 결국 반군 무리에 의해 살해 당하는 씬을 상기시켜보자. 헐리우드 영화였다면, 주인공의 죽는 순간의 장면에선 일단 슬로우모션 기본으로 들어가고, 묵음처리에서 곧바로 비장한 BGM이 이너지는... 등등의 효과가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샤의 죽음을 아무런 극적효과도 없이 담담하게 지켜볼 뿐이다. 그래서 관객은 그가 죽는 모습을 빤히 지켜 보면서도 슬픔이나 안타까운 감정 같은 것을 느끼기가 어려을 것이다. 전쟁 기록영상을 볼 때처럼 '살인의 잔인함과 너무나도 쉽게 처치되는 인간 목숨에 대한 허무함' 만이 느껴질 뿐.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던 장면은 사샤가 죽은 날 밤 구덩이에 갇혀있는 바냐를 찾아오는 부분이었다. 삐딱하게 모자를 쓰고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죽기 전의 모습과 하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는 죽으니까 세상이 참 고요하고 평화롭다고,.. 자기는 그게 너무 맘에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돌아가기 전에 깜빡 잊을 뻔 했다는 듯이 이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제길. 또 까먹었다. 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너무 무심한 듯한 말이지만, 바냐를 바라보는 그의 친근한 눈길과 장난스런 미소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코카서스의 죄수>는 관객에게 "이 장면에선 웃고 저 장면에선 웃어라" 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리게 하기보단 뜻밖의 유머로 피식하는 웃음을 이끌어내고, 의도적인 비극 연출로 눈물 콧물을 뽑아내기 보단 전혀 의외의 장면에서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영화는 장중한 산들이 솟아있는 코카서스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다채로운 체첸문화를 담아내고 있다. 체첸의 민속음악과 무용, 복식, 전통 결혼식과 장례의식 등등..
러시아 연방의 그 많고 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일 뿐인 체첸의 문화는 우리에겐 낯설게만 보인다. 러시아 정부의 정치적 갈등은 귀에 익히도록 들어왔지만 사실 그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아는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막연히 기본상식으로 알고있는 몇가지 사실은 체첸의 문화가 러시아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민족성분부터가 다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슬라브인, 체첸은 코카서스인에 속해왔다. 종교 또한 러시아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지만, 체첸은 주민의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언어 또한 러시아는 러시아어, 체첸은 체첸어를 사용한다. (영화에서 체첸주민들은 러시아어를 더 많이 쓰지만,,)
하지만 영화는 양민족 문화의 상대성을 보여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구성원 개인의 인간적인 성품은 보편적이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시내 감옥에 갇힌 아들을 빼내기 위해 총을 어깨에 메 든 체첸인 아브둘. 포로로 잡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러시아군조차 꺼려하는 위험한 체첸 반군과 홀로 만나는 것도 두렵지않은 사샤의 어머니.. 이들은 표면적으론 분명이 적임이 틀림 없지만,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만은 공통적이다. 또 감시자인 하산과 포로인 사샤와 바냐가 친구가 되고(정확히 말하자면 적과 친구 중간의 애매한 관계), 바냐와 아브둘의 딸 디나가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는 것은 민족의 적대관계가 각각의 개인들로 하여금 완전한 적이 되도록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사샤가 탈출 중에 하산을 낭떠러지로 떨어트려야만 했고 바냐와 디나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영화 속 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들을 잃은 아부둘이 총을 메고 바냐를 산 위로 데려 갔을 때,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 줌으로써(그 또한 다른 이의 아들이며, 그의 죽음을 슬퍼할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영화는 양민족의 골 깊은 증오를 끊는 휴머니즘의 희망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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