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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 16 선생님 - 요 20: 18 제자들에게
요 20: 16 선생님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하자 먼저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고 말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 3, 27말씀을 연상시킨다.
* 요 10: 3, 27 –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 돌이켜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15절과의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능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2) 랍오니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뜻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레'(*)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 (Barrett, Lenski)
Ⓑ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Bultmann).
그러므로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해 달려들었다(17절)
요 20: 17 나를 붙들지 말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
부활하신 주께서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또 그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신성(神性)의 영으로는 그가 십자가에 위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그날 낙원에서 대할 수 있으셨으나, 인성(人性)으로는 아직 땅 위에 계셨다. 그는 땅 위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이셨다(요 3: 13 전통본문).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의 행동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본문의 금지령이 이미 행동화된 상태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을 고려해서이다.
* 마 28: 9 -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그러나 불트만(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이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 말라'는 표현보다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에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메 아프트'(*, '붙들지 말라')는 '메 프토우'(*, '두려워 말라')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의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되는 경우에만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마태의 기록(마 28: 9)을 고려해 볼 때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행동화된 이후이건 혹 행동화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왜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2]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 급하지 않다.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 (Tenney).
Ⓑ 먼저 아버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 9와 조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
* 마 24: 9 -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 생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계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3]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 내 형제들에게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바 있고(막 3: 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라고(히 2: 11)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자들 간의 관계가 친구 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 요 15: 14-15 –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 되었다.
* 고전 12: 27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 (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 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 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Moule, Brown).
* 룻 1: 16 -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런데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3) 올라간다. 하라.
혹자는 본 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되는 구원사의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
* 요 6: 52-62 –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 옴을 뜻한다.
* 요 14: 18, 23 –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
* 요 7: 39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요 16: 7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다.
요 20: 18 제자들에게 -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마리아가 전한 내용은 내가 주를 보았다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목격하고 확인한 사실과 또 주님이 당부하신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마리아와 다른 이의 이 소식에 대해서 누가는 제자들이 믿지 못하고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눅24: 11)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대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 마 28: 16-20 –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 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막 16: 8-11 –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눅 24: 8-11 –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2]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이르니라'(*, 앙겔루사)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그가 주를 보았고 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3]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요 20: 1-18)
우리는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복된 만남의 장면을 바라본다. 이 만남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기쁨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 영광을 마음속 깊이 길이 간직하는 가운데 그의 평생의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 바쳤을 것이다.
* 잠 8: 17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
마리아의 신분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그가 전에 일곱 귀신 들였던 여인”이라고만 알려 주고 있다.
* 눅 8: 2 -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일곱 귀신이나 들려 정신이상이 된 이 여인에게 획기적인 그의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① 마리아는 평생 주님을 섬기는 일을 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긴 일은 주님의 복음 전도 초기부터였다.
* 눅 8: 2-3 –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오늘날에도 주님을 섬기는 여인들은 일곱 귀신 들렸던 천한 여인,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이다.
②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괴로움을 함께 맛 본 여인이다.
마리아는 주님이 어려움을 겪으실 때 그 자리에 늘 함께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그 곁을 울며 따랐다. 마리아는 골고다에 끝까지 남아서 주님의 모든 괴로움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마음으로 그 괴로움을 나누었다.
* 요 19: 25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 마 27: 55-56 –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2) 무덤에 찾아간 마리아
이른 아침에 주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나타나셔서 그 몸을 친히 보여 주셨다.
①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찾아갔다.
* 마 28: 1 -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 막 16: 1-2 –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 눅 24: 1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 요 20: 1 -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아 왔다고 했다.
②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보고했다.
마리아가 무덤에 당도해 보니 무덤을 막고 봉해져 있어야 할 돌이 무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단숨에 제자들이 묵고 있는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③ 다른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도 마리아는 홀로 그곳에 남아서 울고 있었다.
마리아의 울음은 가슴이 터지고 마음이 찢어지는 울음입니다. 그녀는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는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은 것을 보게 되었다.
④ 천사는 슬피 울고 있는 이 여인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이 말은 울 필요가 없는데 왜 울고만 있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⑤ 마리아는 천사의 물음에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다”고 대답했다.
마리아는 뒤를 돌이켜 바라볼 때 예수님이 그의 뒤에 서신 것을 보았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그분은 마리아야 하시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에 깜짝 놀라 주님께 의지하면서 “랍오니”라고 불렀다.
⑥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일러주라는 말씀을 주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의지하려는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은 부활하신 몸을 가지시고 올라가지 못하셨음을 의미한다.
* 눅 23: 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다른 몇몇 제자들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자. 마리아의 보고를 받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이다. 베드로는 무덤에 들어가 세마포가 놓인 것과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머리를 썼던 수건도 발견했다.
그 후 요한도 무덤 속에 들어와서 이 모든 사실을 보고 난 후 믿었다고 했다. 여기서 믿었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한다.
9절에서 그 해답이 밝혀 주고 있다. 베드로는 육안의 통찰력이 뛰어났지만 요한은 영안의 통찰력이 뛰어나 주님의 부활하신 사실을 믿기에 이른 것이다. 이 두 제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마 요한의 마음에는 설렘과 기대가 교차되는 가운데 집으로 갔을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친히 보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주를 보았다고 말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면 그의 임재하심을 알게 되며 그의 뜻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몸의 부활을 확신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는 단지 회생(回生)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셨다.
본문은 그의 몸의 부활 증거로 막달라 마리아가 주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주의 빈 무덤을 확인했으며, 그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수건이 놓여 있었고, 그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의 부활의 사실을 전해주었고,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의 몸의 부활을 증언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몸의 부활을 의심치 말고 확신하자.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 행 17: 30-31 –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증한다.
* 고전 15: 20-22 –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