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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삼상 15:10-19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10-19 / [여호와께 버림받은 사울]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웠으나 후회스럽다. 그가 내게서 떠나고 내 명령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여호와의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기도하였다. 12) 다음날 아침 일찍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사울은 유다 남부에 있는 갈멜 성읍에다 자기의 승전비를 세운 후에 길갈 성소로 내려갔습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13) 사무엘이 길갈로 가자, 사울이 그를 맞으며 이렇게 인사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저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였습니다.' 14) 그러나 사무엘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내 귀에 들려 오는 저 양 떼와 소 떼의 울음소리는 무엇이오?' 15) 사울이 변명하였다. `그것은 우리 군인들이 끌고온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저렇게 가장 좋은 양과 소만 골라서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우리가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16)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였다. `그만 변명하시고, 지난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시오!' 사울이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17) 사무엘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수령이오! 당신은 자신이 왕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여호와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소 18_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왕으로 세운 뒤 당신을 아말렉 족속에게 보내면서 `너는 그들과 싸워 전멸시켜라! 가서 싸우되 그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없애 버려라! 그들은 내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나를 모욕한 자들이니,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말고 몰살시켜라!' 하고 명령하셨소. 19) 그런데 왕께서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약탈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그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저질렀소?'
사무엘이 근심으로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동안 사울은 스스로 승리를 자축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사울의 평가와는 달리 하나님의 평가는 불순종이었습니다. 약간의 충성은 위장된 불순종입니다.
사무엘, 사울을 위하여 울다(10-1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후회는 ‘깊은 한숨’을 어원으로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온 밤을 “근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음도 하나님의 후회와 맞닿아 있습니다. 근심한다는 것은 사울이 여러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불순종으로 일관하고 있기에 사무엘의 의분이 섞인 표현입니다. 사무엘이 온 밤을 새워 근심 가운데 기도하는 동안 사울은 승리에 취하여 자축에 빠집니다. 사울을 향한 사무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만 함을 교훈해 줍니다.
사울의 변명(12-16) 사울이 전쟁에 승리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갈멜이었습니다. 갈멜은 모세가 아말렉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출 17:15-16). 모세가 갈멜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울은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웁니다(12). 사울이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은 길갈입니다. 길갈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곳이기에 그의 승리를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고 자축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여실히 볼 수 있는 움직임입니다. 하나님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자청합니다. 오히려 약간의 불순종은 백성들의 탓이라고 발뺌까지 합니다. 사울이 순종했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는 불순종이었습니다.
탈취하기에만 급하여(17-19) 사무엘은 사울의 불순종의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였기”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불순종의 대부분의 원인은 물욕과 탐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골 3:5). 사울의 행위는 순종이 아닌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적 용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면 그것은 위장된 불순종일 수 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만 명, 그 일을 시작하는 사람 백 명, 그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사람 한 명, 나카타니 아키히로<행복어 사전>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매우 많으나 시작하는 사람은 극히 적고 계속 꾸준히 하는 사람은 손으로 꼽게 됩니다.
호크마 주석
=====15:10,11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1절 ; 13:8-14).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 여기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당신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여,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29절). 이것은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神的)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창 6:6, 7). 돌이켜서(* , 슈브)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종종 여호와께 대한 반역 및 배교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민 14:43 ; 32:15 ; 수 22:16, 18 ; 렘 3:19). 사무엘이 근심하여 - 여기서 '근심하다'(* , 하라)란 말은 '(분노로) 타오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오히려 '진노하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창 4:6 ; 민 11:33 ; 신 7:4 ; 삼하 24:1). 아마도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1절)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거룩한 의분(義憤)을 느꼈을 것이다(Keil, Fay).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사무엘의 이같은 태도는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각오(12:23)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자신의 각오처럼 이때 사무엘은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 (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은 이전에도 수차 나타나는데(7:8, 9 ; 12:18), 이로 보아 진정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한편, 유대 학자 아바르바넬(Abarbanel)은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그처럼 간절히 중보 기도한 것은,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사울을 그 용모와 용감성 때문에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15:12
사울이...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사울의 이기적 행동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한편 '기념비'(* , 야드)는 원래 '손'(hand)이란 뜻이나,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다는 효과 때문에 '기념비'란 의미로 전의(轉義)된 듯하다(삼하 18:18 ; 사 56:5). 한편 여기서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를 가리킨다. 갈멜에 이르러 - 여기의 '갈멜'(Carmel)은 헤브론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원래 갈렙에게 주어졌었다(수 15:55). 이곳은 또한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였다(25:2-40). 현재의 '쿨물'(Kurmul) 지역으로 추정된다(Fay, Keil). 돌이켜...길갈로 내려갔다 - 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기브아(10:26)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간 까닭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는 여러 곳(7:16) 중 가장 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절). 한편 '내려갔다'(* , 야라드)라는 말은 길갈(Gilgal)이 요단 골짜기 저지대에 위치했었다는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해 준다(10:8 ; 창 43:20 ; 수 16:7 ; 18:16). 즉 사울은 갈멜에서 승전비를 세운 뒤 유다 산맥을 가로질러 요단 계곡의 길갈로 향했던 것 같다(13:4). 한편 '길갈'(Gilgal)에 대해서는 수 4:19 주석을 참조하라.
=====15:13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치 않았으면서(8, 9절),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묻기도 전에 말한 것은 죄의식(罪意識)의 소산이요, 외식(外飾)의 결과였다.
=====15:15
그것은 무리가...끌어 온 것인데 - 여기서 '무리가'란 말은 13절의 '내가'란 말과너무나도 대조된다. 즉 13절에서는 자신을 내세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다가, 이제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무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 및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는 사울의 위선이 애처롭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는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다(창 3:12).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사울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결코 짐승들을 끌고 올 수 없었다(14:24-26).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남김이요 - 사울의 이 말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사울이나 백성들이 짐승들을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진멸치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바로 이같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제사'를 빙자하여 짐승들을 진멸치 아니한 것이었다(Keil).
=====15:16
가만히 계시옵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프'(* )는 문자적으로 '중지하라!'(Stop!)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간밤에...이르신 것 -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인 듯하다(11절).
=====15:17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킨다(9:21).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여호와께서...기름을 부어...왕을 삼으시고 -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2)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5:18,19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 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길로 보내시며 - 여기서 '길'(* , 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한다(Fay). 죄인 아말렉 -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이다(2절 ; 출 17:8-13).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 spoil, KJV)란 뜻이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 설 교 >
제사보다 순종을
삼상 15:7-28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직접 다스리시던 백성 이스라엘이 주변 이방 나라들처럼 왕에 의해 다스려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그 요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사무엘을 통해 가르치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지시하셔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가장 인물이 준수했고 키도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으며(삼상9:2) 모든 백성 중에 그에게 견줄만한 이가 없었다고 사무엘이 말할 정도였습니다(삼상10:24).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온 백성 앞에 소개할 때에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쳤다고 했습니다(삼상10:24). 풍채 좋은 왕을 얻긴 했으나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이 큰 죄악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무엘은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하게 그를 섬기라고 위로했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과 백성이 다 멸망하리라고 경고도 하고는(삼상12:20-25) 모든 통치권을 사울에게 넘겨주고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의 마지막 장은 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매우 비극적인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이스라엘이 패퇴하며 많은 사람이 죽을 때에 사울과 그의 세 아들도 길보아 산에서 한 날에 다 죽었습니다. 사울의 죽는 과정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병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패주하던 중 활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무기를 든 수종자에게 부탁하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자기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우니 블레셋 군사가 닥치기 전에 칼을 빼어 자기를 찌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무기를 든 자가 감히 자기의 왕 찌르기를 두려워해서 못하고 있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무기를 든 자 또한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그의 머리를 베어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 돌려보게 하고 갑옷을 벗긴 그의 시체는 길보아산 지역 성읍인 벧산의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31:8-10). 이스라엘 온 백성 중에 가장 인물이 준수하고 풍채가 좋았던 왕 사울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의 자존심도 갈갈이 찢기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영광도 치욕으로 뒤덮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그의 삶을 마쳐야 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극을 안겨주어야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울이 사십 세에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 되었을 때에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병력은 삼천 명이었고 이들과 싸우려고 모인 블레셋 사람들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으며 삼만 대의 병거와 마병 육천 명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서워서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어서 떨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먼 곳으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려고 사울에게로 모여왔던 백성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사울은 초조해졌습니다.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터인데 제사를 드려줄 사무엘은 아직 나타나지 않자 사울은 기다리지 못하고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라 하여 스스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왔고, 그는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고 사울을 추궁했습니다. 사울은 대답하기를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 명령을 지켰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선언하고는 일어나 사울에게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13:13-15).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사울의 이 첫 번째 어긋난 행보 속에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선 두려움입니다. 자기 군사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블레셋 군사의 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진 것입니다. 누구든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출애굽 때부터 그때까지 언제나 이스라엘과 놀랍게 함께하셨고 늘 기적 같은 승리를 안겨주시곤 했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병력의 수나 병장기의 우수함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으로 승리했음을 확신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충실하게 순종해야 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장만 드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규례도 마땅히 지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내가 명색이 왕인데 제사 정도는 대신 드려도 되리라"고 생각하는 망령된 교만에 벌써 빠져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뜻은 없이 제사만 드리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믿음도 문제였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어리고 노쇠한 제사장 엘리의 두 망나니 아들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키고 있을 때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믿음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이기리라 여기고 언약궤를 가져왔었지만 블레셋에게 오히려 대패하고 언약궤마저 그 이방인들의 손에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경험했던 역사를 사울은 기억하거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그 역사적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기를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 불신이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철저한 순종의 결여, 그것이 사울의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사울의 어긋난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옛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에 이스라엘에 대적하여 괴롭히며 싸움을 걸었던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사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아말렉을 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15:4-8). 그러나 사울과 그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로잡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주었고 그 왕의 가축과 소유 가운데 모든 좋은 것을 남겨두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엘은 사울을 찾아가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사울이 갈멜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은 일과 그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일이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을 봅니다.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여기는 교만이 자리 잡은 증거일 수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좋은 전리품들은 자기를 위하여 고스란히 남겨놓게 만든 동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옛날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친히 견고한 성 여리고를 무너뜨려주심으로써 가나안 진입에 성공했지만 아간이란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 중 탐나는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감추어둠으로써 그 다음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던 역사 또한 사울은 모르고 있었거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본 사울은 그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그러자 사울이 둘러대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여기서 이미 우리는 사울의 교활함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자기의 탐욕적 행동을 신앙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인 양 포장한 것이고, 둘째는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무리가 한 일이라고 발뺌을 하며 책임을 백성에게 전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속아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그러자 사울의 버티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며 앞서 한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사울은 여기서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속생각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로 변명하며 사실상 하나님과 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과 교만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그때에 사무엘의 단호한 답변이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울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어기는 것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했다는 자백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의 눈치를 더 살피는 나약해진 사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울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약해지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뜻이 약해지면 사람에게 굴복하게 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막판에야 잘못을 인정한 사울에게 사무엘은 잘라 말하기를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는 돌아설 때에 사울은 사무엘의 겉옷자락이 찢어지도록 그를 붙잡았지만 사무엘로부터 결정적인 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모든 이야기를 요약한다고 볼 수 있는 유명한 구절이 본문 22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제사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나 모든 중요한 일은 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곤 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뢰와 순종이 없이 드리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도 효력도 없는 행위에 불과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불신앙과 교만과 탐욕과 불순종의 행위를 제사라는 명분으로 감추어보려 했으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통할 리가 없다는 사실만을 보여주며 비참한 최후를 향하여 줄달음쳐 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 후 악령에 사로잡혀 번뇌의 나날을 보내야 했고(삼상16:14), 나라를 구한 영웅이요 충신인 다윗에 대한 질시 때문에 그를 죽이려는 살의에 가득 차 블레셋과 싸우는 일보다 그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일에 매달렸으며, 사울의 살해의 위협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굶주린 다윗 일행에게 호의를 가지고 먹을 것을 제공한 제사장(삼상21:1-6)에 대한 분풀이로 제사장 팔십오 명과 제사장들의 성읍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쳐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는 광기를 드러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삼상22:18-19).
사울의 비극이 우리의 비극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여 예배는 드리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줄 몰라서 우리의 예배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있으나 진실한 믿음은 찾아보기 힘든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배하는 모습과 신앙생활이라는 껍데기 아래에 온갖 거짓과 탐욕을 숨기고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 하나로 우리의 불신앙과 교만과 불순종의 행위를 덮어버리려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온전히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을 다함으로써 우리의 예배가 진실하여지고,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누리고, 이 나라가 튼튼하여지며 이 민족이 건강하여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이삼규목사 / 삼상 15:10-23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삼상 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대적한 일로 인해 아말렉을 심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함은 신성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속성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하시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도 다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도, 죄를 용납할 수도 없는 분이며, 완전한 선행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을 따라 온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십니다.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 각 사람이 행한 그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삼상 15: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과 전쟁을 벌인 사울은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멸하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과 좋은 양과 소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무엇입니까?
1.자기 공로를 내세우려는 사울을 봅니다.
삼상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울이 불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잘못 세운 것 때문에 후회합니다.
요즘 보십시오. 4대강 때문에 많은 걱정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강을 막아버렸으니 강이 썩고 이상한 태형동물이 창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도자를 잘 세워야 합니다. 한 사람이 잘못 판단함으로 백성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후회’라는 말은 ‘나함’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숨 쉬다, 한숨 쉬다’입니다. 여기에서‘뉘우치다, 후회하다’라는 부정적인 의미와 ‘위로하다, 안심시키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나왔습니다. ‘나함’이라는 말은 ‘슬퍼하다, 안타까워하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안타까워하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돌이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였습니다. 온 밤을 세워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었겠습니까?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사울이 승리의 기념비를 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공로임을 드러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세우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사무엘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사울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그러나 실상은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는 분명 알았습니다.그렇지만 그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지난 번 장관 임명할 때 두 사람이 낙마하였습니다.그들은 청문회 과정에서 뻔히 드러나 있는 사실을 거짓말로 일관하다가 결국에는 한 사람은 지명철회를 당하였고 하나는 자진사퇴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묻습니다.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사울은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을 백성들의 탓으로 돌립니다. “무리가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하려하여” 이것은 지도자의 바른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책임질 일을 백성에게 떠넘기는 것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9절에서는 분명히 ‘사울과 백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결코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의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이 세운 적당한 기준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기준에 도달하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라 착각하며 열심을 다해 지키고자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 기준을 따라 열심을 낼 때 그 모든 것은 자기 의와 공로가 됩니다. 죄인들은 자기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 열심을 공로 삼아 자기 의를 내세우려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종교에 상관없이 덕을 많이 쌓고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착한 삶의 기준을 정하고,그러한 삶을 살다가 떠난 사람의 행위를 가리키며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착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야 할 성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다니며 착한 삶을 살았다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귀하게 보셔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은 그 어떤 착한 행위와 공로로도 절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자기주장을 악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겸손할 때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말렉이 다 없어지기까지 진멸해야 했습니다.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그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 급급했고, 자기 공로를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의 행위와 공로를 자랑하는 일을 악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스스로 정한 적당한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은 악하게 여기셔서 심판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사람이 생각하는 의와 다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와 같은 완전한 의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주신 거룩한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기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려는 자를 의롭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여기셔서 심판하십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하나님은 사울의 행동을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왜 이토록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는 일을 하였을까요? 그것이 바로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청종’이라는 말은 ‘샤마’라고 하는데 ‘듣다, 청종하다, 순종하다’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잘 듣고 순종해야 하는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성경을 보십시오. 아간이 탐욕 때문에 망하였습니다(수 7장).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탐욕으로 망했습니다(2:12-16). 게하시도 탐욕 때문에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가룟유다도 탐욕 때문에 선생님을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울도 탐욕으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사람들은 전 생애에 걸쳐 율법을 지키고자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기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행위를 공로로 삼으려고 할 때 스스로 만든 자기의 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사울과 같이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는 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버리십시오.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3.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은 번제와 다른 제사보다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듣는 것을 숫양의 기름보다 낫게 여기십니다.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사무엘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삼상 12:14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삼상 12:15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이미 사무엘을 통해서 주신 왕으로서의 규례를 어김으로 사울이 기소를 당한 것입니다.
거역하는 것은 무슨 죄와 같다고 하였습니까?
‘점치는 죄’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점치는 죄는 여호와께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점치는 일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레 19: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신 18: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신 18: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신 18: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 18: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완고하다는 것은 ‘오만 불손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양과 소를 가져온 사울에게 그분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한마디로 순종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입니다. 믿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이나 특정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공로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대적하는 불순종의 죄를 지을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날마다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서 다 계시해 주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뜻인 이 길 외에 다른 길로 그분께 나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다 죄이며 악입니다.내가 지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인지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기 기념비의 운명
삼상 15장 10~15절 / 곽선희목사
깊은 산 속에 고요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려올 때 많은 짐승들은 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왔습니다. 저마다의 몸짓을 해가며 그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슴 한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 그림자를 보면서 자기 뿔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잘생긴 사슴뿔을 딱 비추고 이리저리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했습니다. 다른 짐승들,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는 그 머리를 보면서 저것들은 참 불쌍하다 생각하고, 봐라 내 뿔이 얼마나 근사한가. 그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 그 뿔을 물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서 자기 모습에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숲에서 사자가 나왔습니다. 으르릉 할 때에 모든 짐승들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 도망을 했지마는 이 사슴도 도망하다가 그 뿔이 수풀에 걸려 가지고 그는 더 도망가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슴은 뿔 때문에 죽었습니다. 저가 자랑하던 그 뿔 때문에 그는 그 아침에 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그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올해 초에 포춘(Fortune)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2001년 100대기업이 채택한 21세기 리더쉽이라고 하는 지도력을 제시했습니다. 그 제시한 리더쉽은 바로 써번트 리더쉽(Servent Leadership)입니다. 사실은 1977년에 로버트 케이 그린리브(Rober K. Greenleaf)라고 하는 분이 AT&T라고 하는 회사에서 38년 동안을 근무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지혜를 얻고 경험을 하고 또 배웠습니다. 그 배운 바를 집약해서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써번트 리더쉽, 2001년 신년특집으로 이 책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섬기는 지도력, 지도자는 지도자이기 전에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하고 섬기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지도자의 위치를 지킬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올시다. 지도자로서 섬기기를 포기할 때에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대단한 이론도 아닙니다마는 이게 기본적인 것입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섬김이 문제입니다. 그래 저는 결혼 주례할 때 가끔 그런 얘기를 해봅니다. 아내를 섬기겠느뇨? 남편을 섬기겠느뇨? 문제는 섬김을 받으려할 때 문제가 많고 섬기려할 때 아무 문제도 없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출발하면, 그대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려 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얼마만의 섬김의 마음이 있습니까 만일에 고민이 있고 문제가 있다면 그 섬기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이요 바로 그 자세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라고 하는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밑을 내려다보는데 급급한 나머지 위에 계신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밑에 것만 내려다보면서 바로 위에 계신 분을 못 본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그게 망조가 든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 그는 그 옛날에 타자기가 없을 때니까 편지를 꼭 직접 손으로 써야되는데 친필로 편지를 쓰고 편지의 마지막 글은 꼭 이렇게 맺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으로부터'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이 이 편지를 씁니다.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충직한 하인일 뿐입니다. 언제나 이 자세를 잃어버림으로 해서 사회는 시끄러워집니다 본인도 불행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 왕이라고 하는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아말렉과 전쟁을 벌입니다. 늘 그랬듯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이길 수 있는 것이요.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였느니라 할 때만이 전쟁은 가능했고 승리도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나아가 싸워서 이겼습니다.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곧장 자기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영웅호걸이든 천한 사람이든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련해서 자기가 세상 떠난 다음에도 꼭 자기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기억하나마나 별거 아닌데. 나는 기념비를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어떤 기념비든.
비근한 얘기입니다마는 여러분 아시는 데로 소망교회에 묘지가 우리 수양관에 있습니다. 그래 거기 큰 비석을 만들어 놓고 이제 거기다가 '소망교회 성도의 묘' 이렇게 썼어요. 그리고 화장을 해서 그걸 거기에 갔다가 뿌리게 이렇게 돼있는데 벌써 수백 명이 들어갔습니다. 가끔 그것을 방문해보고는요 어떤 분은 이렇게 꼭 물어봐요 "목사님 이거 참 좋은 방법이긴 한데 고 비석 뒤에다가 조그맣게 내 이름 하나 쓰면 안될까요?" 그래서 제가 "글쎄올시다. "그래 그 당신의 이름을 뒤에 사람들이 꼭 기억을 해야되겠소?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고. '소망교회 성도' 그것가지고 안되겠소? 분명한 것은 이 비석 안에 내가 들어갈텐데 내 이름도 없습니다." "뭐 하기야 그렇죠 뭐." 세상에 기념비처럼 맹랑한 게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어쩌면 내가 세상 가거든 빨리 잊어버려다오, 뭐 그런 게 좋은 거지 뭘 기억해달라고 하노. 기억할 사람도 없지만. 이것이 바로 기념비란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마다 문제예요. 그저 이 재산도 나 죽은 다음에 뭔가 좀 어떻게 물려주길 바라고, 이어지길 바라고, 명예도 이어지기를 바라고, 뭐 어차피 죽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에요.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해서 자기의 어떤 생명이 무슨 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거든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사울이 기념비를 세웠어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어요. 후세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라, 여기서 내가 승리했느니라. 어떻습니까? 그래 기억됩니까? 세상에 쓸데없는 짓이 바로 이것이거든요.
성경 본문을 계속해 읽어나가면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이 높여 왕이 되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문명이든 어느 개인이든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치를 않습니다. 왜요? 높아지고 있는 동안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사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은 의롭고, 불의하고, 선하고, 악하고 이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겸손하냐 교만하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절대로 의인이 아니에요. 우리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야. 딱 기준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고 그것만이 문제더라구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혹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는 겸손하다 생각하십니까? 제가 판단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교만한 사람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교만하다. 나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이다. 나는 쉽게 교만한 사람이다. 환난과 고통과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나는 곧 교만할 수밖에 없는 못된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 사울은 이렇게 교만했습니다. 은혜로 전쟁을 이겼는데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 명령대로 따르는 중에 승리한 건데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승리인데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탑적인 자랑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겼노라.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다는 것을 우리는 한눈에 보았습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 것도 아니요. 장담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영광을 자기가 취하게 됩니다. 내가 이겼노라 내가 이것을 이루었노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건 자기자랑을 하려고 자기 명예를 높이고 오래오래 기억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는 승리자로 기념되려고 했는데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그는 당대에 왕위에서 끊어지고 심지어는 온 가족, 가문 전체가 일시에 죽어지고 맙니다. 그대로 대가 끊어집니다. 가문이 망하는 그런 부끄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잘못되었던 점은 무엇이냐 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을 때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먹으면서도 회개 못합니다. 뉘우치면서도 회개 못합니다. 후회하면서도 후회 못합니다. 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가 그를 책망할 때, 주위를 지적할 때 말입니다,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왕처럼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무릎을 꿇지 못하고 어쩌면 이렇게 엉뚱하게 누구 안전인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변명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인간의 인격은요 변명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평가된답니다. 자기 변명하는 것처럼 미련한 게 없어요. 이것이 교만의 결과요 이것이 진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요 자기 상실이라고 하는 중증이 이렇게 표출되는 것이올시다. 모두가 자기 변명이요 변명하기 급급해요.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교만입니다.
로라 슐레징어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교수면서 유명한 카운셀러올시다. 그가 아주 재미있는 책을 몇 권 썼는데, 내가 이제 세권의 책을 소개할 테니깐 알아서 한번쯤은 읽도록 해보세요. '여자가 인생을 망치는 열 가지 방법' 여자가 왜 망하는지 왜 망쳐지는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렇게만 쓴 게 아니에요. '남자가 인생을 망치는 열 가지 방법' 골라서 보세요. 세 번째 책이 있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일곱 가지 변명' 변명이 망친다는 거예요. 그 순간 진실을 떠나거든요. 은혜도 떠나거든요. 축복이 떠납니다. 변명! 거기는 회개가 없어요.
첫째 변명이 뭐냐 하면 '나도 잘 압니다마는 나도 사람이라고요.' 이 '인간인고로'라고 하는 말로 변명을 합니다. 잘될 때는 저 인간처럼 자기를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꼭 나도 인간인고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당신의 실수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 길 외에 선택이 없었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인고로 하고 말할 때에 창조주를 모독하는 겁니다. 죄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창조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문제예요.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맙시다. 인간인고로. 아니올시다. 얼마든지 피할 길도 있었고 그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인 고로'라고 하고 하는,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올시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넉넉한 힘을 주셨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지혜도 주었습니다. 인간을 그렇게 창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책임입니다. 하나님께 돌릴 책임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잘못이라는 것은 압니다마는 하지만 그 순간만은' 어떤 이득을 위하여 어떤 순간적 기쁨을 위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잘못인줄 알면서도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따라갔노라는 거예요. 착각이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스스로 이렇게 변명할 때가 많아요. 다윗은 그렇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할 때 '내가 그날 밤 깜빡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얘기 안 합니다. 실수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다윗은 말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내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것은 내 잠깐 실수입니다, 다시 한번 진실하게 묻습니다. 그거 실수였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변명이요. 또 하나는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마는' 하고서 '용기가 없었습니다.' 알기는 알지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용기와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겁니까? 아무 변명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또 하나의 변명이 있습니다. '나야말로 진짜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그럽니다. 이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피해자라는 것이죠.
어떤 부부가 말다툼을 하는데 부부싸움을 좀 하는데 남편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깐 아내가 견디다 못해 하는 말이 "당신 요즘 점점 더 이상하게 혈기를 내는데 거 왜 그러시냐"고. 남편 뭐라고 한지 아세요? "나는 본래 그런 남자가 아니다. 너하고 살면서 그래졌다." 제 성격 나빠진 게 누구 책임이요? 꼭 남에게 돌리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피해자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지는 마시고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을 보세요. 내 주변에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또 한번 좀 직시해보세요. 이제 할말이 있나. 아내가 불행하죠 자식이 불행하죠 남편이 불행하죠. 누구 때문인데요. 나 하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가고 있는데 가해자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내가 피해자라고요? 그 내 존재는 어디 갔습니까?
또한 '나도 한때는 가치관이 있는 사람이었다고요' 이렇게 말해요. 과거는 괜찮았다고요. 그런데 현재가 어렵다 그말이요. 이렇게 변명을 하려고 듭니다. 과거를 미워하면서 현재를 비하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고 환경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그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요. 선한 일을 볼 때 귀한 일을 생각하면서 그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나 같은 보통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뭘 잘했을 때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그러고, 일이 안되었을 때에는 자기가 보통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해야할 도리를 내가 해야할 뿐이요. 일곱번째는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가 그만 어쩌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완전히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겁니다.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노라. 미쳐 깨달음이 없이 여기까지 왔노라. 어쩌어쩌다보니 밀려서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들 환경과 남에게 책임을 전달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고로 가장 진실한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올시다.
브레인 리(Blain Lee) 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께서 '지도력의 원칙'이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읽어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거기에 보면 지도력이란 강압적 지도력이 있어요. 세금을 물린다. 벌금을 물리라. 감옥에 보낸다. 협박을 해 가지고 이것을 지도력으로 삼아서 인도하려고 하지만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실리적 지도력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면 실리적으로 당신에게 이로울 것이다. 이것도 오래가진 못합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원칙적 지도력입니다. 내게 이롭고 해롭고가 아닙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지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고로 원칙적으로 행할 때, 진리대로 행할 때 많은 사람은 그를 따라주는 것이에요.
사울 왕은 자기 기념비를 세웠으나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돈과 명예 이 두 가지를 깨끗이 버려야 지도력이 통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심에 용기가 있습니다. 오직 섬기는 자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하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만이 그 마음에 참 평안도 있고 많은 사람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오직 진실만이 가장 위대한 힘입니다.
자기 기념비를 세운 왕
삼상 15장 10~23절 / 한대근목사
이솝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깊은 산 속에 고요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많은 짐승들은 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옵니다. 그 중에 사슴 한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사슴은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슴은 다른 짐승들의 머리와 자신의 아름다운 뿔을 비교하면서 혼자서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숲에서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아침거리를 찾으러 나온 것입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모든 짐승들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사슴은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그렇게 자랑스럽고 아름답던 뿔이 수풀에 걸리는 바람에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슴은 뿔 때문에 죽었습니다. 저가 자랑하던 그 뿔 때문에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것이 여러분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장은 사울 왕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불러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말렉의 모든 백성들과 그들의 소유까지도 다 멸절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들을 대적하였던 아말렉(출17:8-)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말렉을 심판하는 전쟁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난 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한탄하시면서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을까?
1.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의 교만함 때문입니다(12, 17-19절)
늘 그듯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였느니라”할 때만이 전쟁은 가능했고 승리도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명령하셨을 때에도 “아말렉을 너의 손에 붙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겨 놓고 싸우는 전쟁입니다. 승패가 이미 결정된 전쟁입니다. 사울 왕은 소돔과 고모라는 진멸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처럼 심판이 집행자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물을 것 없이 그대로 나가서 싸우고 진멸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이긴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기 승전 기념비를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교만에 빠져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사울은 본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겸손해서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뽑았을 때에 그는 짐짝 사이에 숨어서 나타나지를 않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그가 왕으로 세움을 받기 전에 자기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 나귀를 찾아 사흘동안을 헤맬 정도로 순종하는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작게 여기며 살았던 겸손한 사울이 왕이 되면서 어느 사이에 교만해졌습니다. 1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의 길로 보내시며”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이 그를 높여 왕이 되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어리석음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낮추시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교만한 사람은 밑을 내려다보는데 급급한 나머지 위에 계신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밑에 것만 내려다보면서 바로 위에 계신 분을 못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4장 6절에도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 주신다.”고 했으며, 잠언에서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했습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문명이든 어느 개인이든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치를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겸손하냐 교만하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높아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잊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이며, 은혜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이겼는데 자기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 명령대로 따르는 중에 승리한 것인데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승리인데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명예를 높이고 오래오래 기억되게 하려고 자기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의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대대로 영원한 승리자로 기념되고 싶었으나 그 반대로 대대로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당대에 왕위에서 끊어지고 심지어는 온 가족, 가문 전체가 일시에 죽어지고 맙니다. 가문이 망하는 그런 부끄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취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교만한 사람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교만한 사람은 순종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불순종을 불러옵니다. 교만한 사람은 순종을 잘 못합니다. 사울 왕의 경우에도 교만은 곧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고서 전리품을 챙기는 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사무엘에게 떠벌리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데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아말렉과 더불어 싸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가서 싸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순종을 다 한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순종하는 척만 했지 진짜로는 불순종했습니다. 좋은 양과 소, 그리고 쓸만한 물건들은 자신을 위해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말렉의 아각 왕은 죽이지도 않고 포로로 잡아오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순종했는데 내용적으로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 욕심과 탈취물을 취하는데 급급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는 것과 남들이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그래도 내가 왕인데,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나? 내가 꼭두각시인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이런 생각이 지배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절대로 체면 깎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체면 문화 속에서 살았고, 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숨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허세가 나오고 허영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 같은 데 듣지 않습니다.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그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다 훌륭하고 똑똑한데, 여럿이 모이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충고하면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방법과 생각대로 합니다. 분명히 좋지 않은 결과가 올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두 배로 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많이 해야만 그 속에서 뛰어나 보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지 않습니다.
교만의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회개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때늦은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사무엘이 찾아온 이유는 사울이 그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울에 대한 실망을 접해 들은 후 밤을 새워가며 여호와께 부르짖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사울 왕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어보려는 사무엘의 충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백성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 15절입니다. “사울이 가로되 그것을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20절과 21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백성들이 마땅히 그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신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위기 의식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그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회개할 기회를 주었을 때, 속히 회개하였더라면 그들의 잘못은 그 자리에서 무마되고 회복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변명하고 핑계하다가 결국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변명하는 것은 교만의 결과입니다. 진실을 잊어버린, 자기 상실의 증상이 변명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우리와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모두다 똑똑하지도 않았고, 모두가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갖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랑을 받은 딱 한가지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귀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바로 다윗이 그랬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겸손함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권세로 선지자 하나쯤은 얼마든지 없앨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무디(D. L. Moody)가 미국의 한 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열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모 신문사의 한 기자가 무디에게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전도대회로 너무나 바쁜 나머지 그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신문 기사마다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혹평의 글들이 실렸습니다. 무디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이런 거짓된 기사를 싣다니 말도 안돼”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화를 내야 할 무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동료 한 사람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사마다 공개적으로 선생님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화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무디는 “제가 화가 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기자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쓴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는 그보다 더 교만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고 변명하면서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을 귀중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고 의식하는데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이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교만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데 있습니다. 교만의 근본은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가 바로 교만함의 뿌리란 말입니다. 사람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보다 사람을 위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되고 그것으로 자기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하고 신령해 보였지만 그 모든 신앙의 행위들이 사람을 의식한 외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자신들의 기념비를 세워주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사람들의 우러름이 자신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착각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에 백성들이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늘 조급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급하게 서두르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실패하기도 했고, 어이없는 명령을 내려서 백성들을 곤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백성들이 두려워 그들의 말을 듣다가 그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편지를 쓸 때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으로부터’ 라는 친필 사인을 반드시 남겼다고 합니다.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이 이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충직한 하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영적인 자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든지, 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잘못된 동기라면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두려워말라는 것이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우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교만에 빠져서 자신의 위치와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이성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교만함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겸손한 사람인가 교만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진단해보아야 합니다. 그 몇 가지 진단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편인가? 아니면 말을 많이 하는 편인가?/ 책임질 일이 있을 때, 회피하는가? 아니면 감당하는가?/ 잘못을 변명하는가? 아니면 수용하고 회개하는가? / 하나님과 사람 둘 중에 누구를 더 의식하는가? 지금 현재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가? 불평하는가?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는가? 고민하는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다가!
삼상 15장 10~23절 / 지태일목사
1664년 영국 런던에 가공할 만한 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수백 명의 런던시민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페스트는 맹렬한 기세로 여러 도시에 전염됐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한 청년은 전염병을 피해 울즈도르프라는 시골로 내려갔다. 이곳은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작은 시골이었습니다.
청년은 학문연구에 정신없이 몰입했던 삶에서 벗어나 모처럼 여유를 즐겼습니다. 청년은 넓은 뜰을 거닐면서 사색에 잠겼습니다. 한 번은 청년에 뜨락에 앉아있는데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는 이것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사과가 왜 옆이나 위로 떨어지지 않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것일까. 땅에 사과를 잡아당기는 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청년의 이름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뉴톤이었습니다. 이 날 청년이 발견한 것은 그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이었습니다.
역경을 만날 때 오히려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탐색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긴장하거나 원망이나 시비를 버리고 좀 영적으로도 여유있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며 기도하며 말씀속에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기회는 찾아 옵니다. 당시 영국을 뒤흔들었던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뉴톤을 세계적인 과학자로 만드는데 기여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큰 것을 기대하다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집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얼마나 잘 포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평소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되고 그런 사람이 성공하게 됩니다. "왜 난 운이 없을까?" “왜 나는 되는 일이 없을까?”로 신세를 한탄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형편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경과 고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뉴톤을 과학의 아버지로 만들었던 것처럼 오히려 좋은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 복음성가 찬양처럼, 인생길 험하고 마음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낙심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아오시오. 평생의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 때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어둔 밤 지나면 새날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날이 다가 오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입은 너를 고치시리리.
오늘날도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나 어려움, 고난이나 역경, 실패나 좌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님니다. 성도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처음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은 본래 베냐민 지파의 후손인데 아버지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아들이었고 그 용모는 준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사무엘은 그를 기름 부어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후 사울은 성령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삼상10:6) 그가 왕이 된 뒤에는 사방에 있는 대적 모압과 암몬과 에돔 소바 불레셋 아말렉을 쳐부수고 큰 승리를 하여(14:47) 왕으로서 인기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 아말렉을 진멸하라.
본문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러한 때에 사울 왕은 하나님의 또 다른 지시를 받았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아말렉 족속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방해했던 족속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행할 때 뒤에서 쳐진 사람들, 약한 사람들, 노인들이나 아이들을 대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못된 족속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로 막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적자가 되었던 아말렉 사람과 모든 소유물까지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되 옛날에 괴롭힌 죄까지 찾으셔서 그 죄를 추궁하심을 보여 줍니다. 만약에 그들을 가만두면 다시 일어나 보복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자기 백성들이 평안하도록 그 주변을 정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만한 것은 모조리 진멸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우리들의 눈에 좋아 보일지라도 죄의 모습이라면 끊어버려 진멸시켜야 합니다. 아말렉에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빌2:12) 구원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 아무리 좋은 모양이라도 찾아 없애는 신앙이 되어야함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삼상 15:11을 보면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울왕이 그러한 하나님 명령의 말씀을 좇지 아니하고,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온 밤을 지세우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민족을 위하여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왕과 사무엘 선지는 참으로 대조되는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좋은 자리에서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신앙이요. 한 사람은 민족과 왕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참으로 사울에게는 왕이라는, 그거도 이스라엘의 초대왕이라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잃치 않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울왕을 버리셨습니까?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고 점점 더 부끄럽고 실패하는 멸망의 자리로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자기를 드러내려다 멸망한 것입니다.(12절)
1절-9절까지 내용은 사울왕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아말렉과 전쟁을 벌입니다. 늘 그랬듯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였느니라고 말씀하실 때만이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싸움을 하는 것은 사람이 하였지만 배후에서 역사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중반절 말씀을 보면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는 길갈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12절 상반절을 보면 사무엘은 아침 일찌기 사울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려고 일찍 온 것입니다.
그럴 이유가 있으니 얼마 전에 사무엘이 좀 늦었다고 제사장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제사할 수 없다고 만류하는데도 자기 왕권을 가지고 나가서 제사를 드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실을, 사울왕이 얼마나 너무나 조급한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침 일찌기 서둘러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이미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기념비만 세우고는 길갈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가 전쟁에서 이긴 것은 그가 용맹스럽고 그가 훌륭하므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이기었지만 막상 이기고 나서는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오히려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그는 자신의 업적인 양 이름을 높이려고 곧장 자기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사실 인간은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영웅호걸이든 천한 사람이든 마찬가집니다. 떠나거나 죽으면 점점 더 잊혀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련해서 자기가 세상 떠난 다음에도 꼭 자기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훗날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또 기억 좀 한다고 별거입니까?
세상에서 기념비처럼 허무 맹랑한게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은 내가 세상 떠나 가거든 빨리 잊어버려다오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게 좋은 거지 뭘 기억해달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기억하다보면 좋은 것만 생각나는 것 아닙니다. 좋지 못한 점도, 사람은 다 불완전한 존재인데 깊이 생각하면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 아쉬운 점, 서운한 점들이 더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으려 할만하면 무슨 유품이나 기념품, 기념비 동상을 본다면 뭐가 그렇게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라할지라도 더 보고 싶어 마음에 깊은 아픔만이 더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며 사는 것 아님니까?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 뭐라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연장되어 알아주었으면 하는 착각이 바로 무서운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라, 내가 여기서 승리했느니라. 어떻습니까? 그래 기억됩니까? 세상에서 쓸데없는 짓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들, 무슨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치 못하면, 바로 사울왕과 같은 경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신앙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이어 받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고, 보호하며 인도하셨는데 그 결과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인간이 성공하는 것, 사업이 잘되는 것, 명예가 높아지는 것, 자녀들이 잘 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막상 잘되고 보면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로 압니다. 사업이 어렵고 다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사업이 잘되면 제멋대로 산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생활입니다. 질병도, 가난도, 아픔도 어려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주어진 분깃, 내 형편과 처지, 내가 가진 것에, 얼마를 받았던지, 어떤 형편에 살던지 여기에 만족하십니까? 만족하시면 그것은 겸손입니다. 나는 작은 수고를 했는데 하나님이 큰 것을 주셨고, 난 아주 부족한데도 하나님은 넘치는 은혜로 나를 만족하게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겸손입니다. 그저 감사한 것입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 스스로는 작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본문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겸손 할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이 높여 왕이 되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님께서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실패하게 하고 나중에는 버리시기로 하십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문명이든 어느 개인이든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치를 않습니다. 낮추어 버리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높아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사실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의롭고, 불의하고, 선하고, 악하고 이것 문제가 안됩니다. 원래 우리는 죄로 인하여 타락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믿고 거듭나고 새사람 되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습니다. 죽는 그날까지 이 두가속에서 싸우며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존재입니다. 스스로 의롭고 착하고 선하고 열심이지를 못합니다. 참으로 불안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고 성도가 되었다고 직분을 받았다고 절대 의인이 아니잖습니까? 선하면 얼마나 선합니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 봐도 참으로 어리석고 부족하고 철없이 행동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기분이 나 감정을 따라 뜨거웠다가 식었다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이런 존재에 판단 기준 안삼으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얼마나 겸손하냐 교만하냐 우리가 부족하고 죄인줄 알고 나약한 존재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실 하나님앞에 겸손하고 교만하고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제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겸손하다 생각하십니까? 교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교만하다. 나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이다. 나는 쉽게 교만한 사람이다. 환난과 고통과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나는 곧 교만할 수 밖에 없는 못된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은혜로 전쟁을 이겼는데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 명령대로 따르는 중에 승리한 건데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승리인데 이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내 명성을 남겨보려고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바벨탑을 세우고 자랑한 것입니다. 내가 이겼노라.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고 나약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 우리는 한 눈에 보잖습니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고, 늘 건강한 것 아니고 아프다가, 늙다가, 나중에는 스스로도 아무 것도 못하고 남의 도움으로 겨우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할 때,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워 놓은 문명도 아무 것도 아님니다. 장담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을 자랑하겠습니까? 물질이나 지식이나 권력을 명예를, 쾌락을, 아니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자식을 자랑하겠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이지만 하나님 부르셔서 자녀 삼아 주시고 영육간에 강건케 하시고 사용하시고 소망중에 살게 하신 은혜 감사하고 전적인 하나님 은혜 아님니까?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영광을 자기가 취하게 됩니다. 내가 이겼노라고, 내가 이것을 이루었노라고 자랑하면서 기념비를 세운 사울왕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워 자기 자랑하고 자기 명예를 높이고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사울은 그렇게 기념할만한 왕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승리자로 기념되기보다 가장 부끄러운 왕으로, 실패자로, 멸망자로,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셨음을 후회한다고, 자기 자녀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아버지요, 할아버지요, 그의 집안은 몰락되고 말았습니다. 훗날 사울의 가정은 당대에 왕위에서 끊어지고 심지어는 온 가족, 가문 전체가 일시에 죽어지고 맙니다. 그대로 대가 끊어집니다. 가문이 망하는 그런 부끄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께 돌려드릴 영광을 자기 스스로를 위해 기념비를 세울 때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하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만이 그 마음에 참 평안도 있고, 많은 사람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하나드리고 마치려 합니다.
깊은 산속에 고요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려올 때 많은 짐승들은 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왔습니다. 저마다의 몸짓을 해가며 그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슴 한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 그림자를 보면서 자기 뿔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잘 생긴 사슴뿔을 딱 비추고 이리저리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했습니다. 다른 짐승들,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는 그 머리를 보면서 저것들은 참 불쌍하다 생각하고, 봐라 내 뿔이 얼마나 근사한가. 그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 그 뿔을 물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서 자기 모습에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숲에서 사자가 나왔습니다. 으르릉 할 때에 모든 짐승들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 도망을 했지마는 이 사슴도 도망하다가 그렇게 자랑하고 뽐내던 뿔이 수풀에 걸려 가지고 더 도망가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슴은 뿔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뽐내던 그 뿔 때문에 사슴은 그 아침에 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나의 자랑은 바울의 고백처럼 연약한 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받은 은혜, 늘 승리의 삶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릴 때 비로서 우리 인생의 축복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이어집니다. 나를 위하여,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나를 위한 이름이나 기념비에 현혹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늘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자손만대에 계속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불순종하는 이유는?
삼상 15장 17~23절 /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0. 들어가는 글
2월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발생하여 축산 농가에서 자식처럼 키운 소를 도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조류 독감으로 계란 파동을 겪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육류파동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런 물가 파동으로 서민들의 먹고 사는 일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고통 받는 서민들을 돌보기는커녕 누가 정권을 잡는가에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이 우리를 더 서글프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백성을 돌보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오직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왕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어 사울 왕의 불순종을 책망했습니다(19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울의 불순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고, 우리는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불순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울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17절).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후로 겸손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아말렉을 진멸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입니다(12절).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를 위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를 위하여 좋은 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또한 사울은 사무엘의 책망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여 달라”고 합니다(30절). 이처럼 불순종은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더 클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영적으로 포장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려 했다”고 그럴듯하게 말합니다(21절). 그의 변명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입니다. 저도 가정에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클 때 아내에게 불만족이 생겨서 다투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도 영적으로 포장하여 아내에게 ‘기도가 부족하네.’ ‘성경을 읽지 않네.’ 등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부부 싸움에서 이기려고 합니다. 정말 제가 위선덩어리 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들고 시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영적으로 포장하여 그럴듯하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만약 자기를 위하는 신앙이 심해지면 우상숭배와 기복 신앙에 빠집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자기를 위하는 신앙이 많다보니 기복 신앙과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울 왕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심해진 결과는 초조해져서 신접한 여인까지 찾아가는 죄를 범했습니다(삼상28:7).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더 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을 위하여 순종하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누구의 기준을 따르는가?
사울 왕은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는커녕 사무엘에게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라고 뻔뻔하게 자랑까지 합니다(20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이어지기까지 치라”는 것입니다(18절). 하나님의 기준은 사울 왕을 도구로 사용하여 죄인 아말렉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기준은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라고 합니다(21절). 그의 기준에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첫째로 그는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을 백성들이 원해서 한 것처럼 책임을 전가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원했던 마음을 “탈취하기에만 급하여”라고 책망했습니다(19절). 이런 책망을 받고도 사울은 백성들이 원했던 것처럼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원했던 마음을 드러내기가 부담스러우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것처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준이 없는 사람입니다. 굳이 기준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원하는 것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사울은 ‘마땅히’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진멸해야 하는 것을 남겨서 제사 드리려도 되는 것처럼 바꾸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어떤 기준의 차이가 있습니까? 모든 출발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느냐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은 사울로부터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순종이 되고, 자기로부터 출발하면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사울로부터 출발한 제사에 대하여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합니다(23절). 또한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 것은 어느 것의 우열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22절).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면 순종이지만 사람으로부터 나오면 우상 숭배가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기준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순종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답은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에 있습니다(23절).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버림으로 결국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아니하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음 글로 답변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세계 역사가들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것을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꼽습니다. 금속활자의 발명이 서양 문명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보다 무려 63년이나 앞서서 직지심경을 찍어 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활자 발명이 조선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어령 교수는 “중요한 것은 발명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보급하는 가치의 발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은 서양보다도 앞서서 발명했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고 보급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의 가치를 모르고 불순종하면 결국 죽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인정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의 가치를 인정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커져서 불순종이 시작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들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을 위하여 순종하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원하는 것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 기준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순종하게 하소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말씀의 가치가 최고임을 인정하고 우리들이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계강현목사 / 사무엘상 15:17-31
본문 v22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말씀하는데, 오늘로 풀어쓰면, ‘순종이 예배보다 낫다.’는 얘기다. 이 말씀은 예배는 안 나오더라도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된다는 뜻인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살펴보려 한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 군대를 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하지만 사울은 그 명령을 어기고 대충 순종하다가 책망 들었다. ‘전멸하라’는 말은 모든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 등 모든 걸 다 없애고 죽이란 명령이다.(v3) 여기에 대해 안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공격한다. 왜 사람과 짐승을 다 진멸하라고 하실까? 군인과 짐승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아와 임신부까지 죽여야 할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것 같은데,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한 진노의 하나님이라며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말렉 사람들의 악행을 기억하셨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갈 때, 지쳐서 뒤처진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을 아말렉 군대가 쫓아와 야비하게 죽였다.(신 25:18) 이런 아말렉을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전멸하라 명령하셨다. 영적으로, 오늘 우리의 원수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악한 영들이다. 그 마귀와 귀신들을 대충 봐주면 되겠나? 진멸하는 것이 옳지 않나? 우리 속에 죄가 있는데 대충 넘어가면 되겠는가? 아니면 뿌리까지 싹 진멸하는 것이 옳은가? 그런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그만 사울 왕이 그 명령에 불순종한 거다. 하나님이 사무엘 제사장에게 말씀하시길, v11,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엘 선지자가 전쟁에서 돌아온 사울에게 찾아갔더니, 사울 왕은 반가이 맞으며 주님 명령대로 다 순종했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여기저기서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다. 그러자 사울은 변명했다. v15, “그것은 아말렉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이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진멸하였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군인들이 한 일이고,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물로 삼으려고 가장 좋은 놈들만 남겨서 끌고 왔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명령대로 다 진멸했으니 나름 순종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자의적 신앙’, '선택적 순종'의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무엘 제사장은 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v22-23,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자의적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호된 책망과 저주를 듣게 되었다. 자의적 신앙, 선택적 순종은 또 다른 불순종에 불과하다. 왜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나? 그 뜻이 무엇인가 살펴보며 은혜 나누자.
1. 가장 중요한 제사보다 순종을 더 좋아하신다.
모든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제사, 예배다. 제사란 신을 섬기기 위한 의식인데, 각 종교마다 의식은 달라도 나름의 격식과 정성을 다해 제사한다. 제사가 그만큼 중요하단 얘기다. v22,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이렇게 중요한 제사보다 하나님은 순종을 더 좋아하신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대게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은 예배를 꼽는다. 교회 개척할 때 건물을 제일 먼저 준비하고 피아노와 앰프부터 구입한다. 왜? 가장 중요한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없다면 굳이 교회당부터 마련할 필요가 없다. 가정에서 모여도 되고, 교인 수가 는 후에 준비해도 된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관계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옆으로는 이웃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관계를 놓치고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예배할 수 있다. 마음도 없이 얼마든지 예배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다. 부부가 갈등하고 미워하면서 예배 자리에 같이 앉아있기도 한다. 예배보다 순종이 먼저란 말은 바로 그 얘기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순종이 없이는 예배자리에 앉아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음 중심이 중요하단 얘기다.
순종 없는 제사는 종교행위로 전락하기 쉽기에 경계해야 한다. 사울은 꽤 종교적인 사람 같다. 왕이 되기 전,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려고 선견자에게 물으러 갈 때, 수중에 예물이 없다며 가길 주저했다.(9:7)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갈 때는 예물을 바쳐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 블레셋과 전투를 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제사장이 드려야 할 번제를 스스로 드렸다.(13:9) 제사를 전쟁에 승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 같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한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으려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가, 요나단이 이미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움직임을 보자, 다시 언약궤를 가져오지 말라며 번복했다.(14:19) 언약궤를 마치 부적처럼 여긴 모습이다. 또한 전력해야 할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군인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까지 하게 했다. 이럴 정도로 종교적 의식에 비중을 크게 둔 사람이었다. 이런 사울을 생각해 볼 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좋은 소와 양을 남겨서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거라 생각한 게 좀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울의 종교적 관례에 따른 자의적 신앙일 뿐이다. 결국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순종은 “하나님이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 하면 아닌 줄 알고,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안하고”의 하나님 말씀 그대로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는 기복신앙의 문제는 순종의 삶이 없는 종교의식의 문제다.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신앙생활 다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예배에 나가주는 거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가주고 십일조 잘하고 입 딱 닫고 있으면 일반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사람에 속한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든 관계없이 주일예배만 나가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믿는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헌금만 잘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복 주신다고 믿는다. 순종은 대충 하면서 양질의 제물로 제사만 잘 드리면 된다고 여긴 사울과 비슷하다. 예배 시간에 그리스도가 임재 하여 계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내 속에 있는지를 살펴보라.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들은 말씀에 따라 결단헌신하고 한 주간 동안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단 얘기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예배 전에 부부가, 형제자매가 교인들이 화해하는 순종을 먼저 하라는 것이다. 사 1:11-15,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vv16-17,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17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한 마디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예배하라는 얘기다. 제사는 드리는 데 마음도 없고,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이 없이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오늘 우리도 순종 없는 예배만 드리고 있다면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예배에 앞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 바로 순종하려는 진실 된 마음이다.
2. 마음의 교만에서 불순종이 나온다.
사울 왕이 불순종한 내면의 이유는 교만 때문이다. 우리도 잘 순종하지 않는 것은 교만 때문이다. 특히나 영적 교만은 신앙을 병들게 한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갔더니 누군가가, v12, “사울이 갈멜로 가서 승전비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서 떠나 계속 행진하여 길갈로 내려갔다.”고 전해주었다.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아말렉과 싸워서 이기고는 하나님을 위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승전비를 세웠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기 자신이 했다고 착각하며 교만해진 것이다. 또 v17에도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했다. “임금님이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던 그 무렵에, 주님께서 임금님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 참 겸손했던 사울을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셨는데, 왕이 된 사울은 그만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등졌다.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다.
또한 v26ff.에도 보면 사무엘 제사장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달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 사울 왕은 사무엘을 강하게 만류하다가 그만 사무엘의 옷을 찢고 말았다. 이때 사무엘이 찢어진 이 옷자락처럼 이스라엘 나라도 찢어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줄 거라고 예언한다. 이때 v30에 사울의 반응이 너무 황당해서 기가 막히다. “사울이 간청하였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백성 이스라엘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제발 나의 체면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가셔서, 내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죄를 지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을 보면, 제발 자기 체면을 백성과 장로들 앞에서 세워달라고 요청한다. 진정한 회개가 아님을 우리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나? 울며불며 회개하고 통곡하며 매달려도 부족한 사울인데, 체면 타령이나 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사울의 모습이다. 교만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잠 16:18,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있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울이 처음에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교만해졌나? 왕이 되고 나서 전쟁도 이기고 좀 잘되자 교만해졌다. 우리가 좀 잘 될 때도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끝까지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물론 100%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다. 여기 목사도 잘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순종하지 못할 때 남들보다 더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려고 발버둥 친다. 그게 다른 점일 거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게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이다.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잘 안 되고 순종하다가 좀 실수하고 넘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루아침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예 하나님을 왕이나 주님으로 생각지도 않고, 그저 자기 복 받겠다고 예수 믿는 차원에 머물러 하나님을 내 축복의 수단으로만 삼고 있다면 그건 아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이런 교만을 책망하신 거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각자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데, 실수하여 넘어지는 자인가? 아니면 순종하려는 마음은 아예 없이 내가 주인 되어 이 세상에서만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관심을 쏟고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창조주, 구원주로 믿고 사랑하는 성도에게 교만은 있을 수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무조건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 성 어거스틴은, 크리스천의 덕목을,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고 말했다.
3. 순종 자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도인 우리에게는 순종 자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에는 영적 흐름이 두 가지가 있다. 옛 아담의 라인이 있고, 새 아담 예수님의 라인이 있다. 첫 아담은 죄의 시작이고 둘째 아담 예수님은 의의 시작이다. 조상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인류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죄를 해결하고 영생을 주시는 운명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래서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런데 아담의 후예의 특징은 불순종이다. 엡 2:1-2,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마귀의 지배 아래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다. 그 삶 자체의 패턴이 불순종이란 얘기다. 반면에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후예들의 특징은 순종이다. 빌 2:5-8,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도 순종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순종을 연습해야만 하고 순종을 연습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제자로 변해가게 된다. 세상은 불순종의 영에 찌들어 있다. 이걸 이기고 순종을 연습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온통 순종을 명령한다. 엡 6:1,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엡 5:22, “아내 된 이 여러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벧전 2:18,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하신다. 히 13: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롬 13:1,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지 아는가? 순종할 때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권위에도 순종하지 못하는데, 보이지 않는 권위에게 순종할리 만무하다. 일상에서 순종을 연습하는 거다.
vv22b-23,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잘 듣지 않고 고집부리며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냥 좀 순종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점치는 사술의 죄, 우상숭배의 죄와 동급이다. 구약시대에는 이런 죄악은 돌로 쳐 죽였다. 그만큼 불순종은 악한 죄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순종의 시대문화를 거스르는 것이라 순종하기가 어렵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은 대게 반항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순종을 굴종으로 생각해서 싫어한다. 성경은 굴종이 아니라 순종을 얘기한다. 싫지만 힘에 눌려서 할 수 없이 하는 건 굴종이다. 반면 순종은 자신이 기뻐서 자발적으로 하는 거다. 주인의 소유물인 종이 순종 안하면 죽이는 시대에 주신,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자발적으로 하라는 뜻이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자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던 시대에, 그러니 ‘주 안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굴종이 아닌 순종을 할 수 있나? 주님께 하듯, 하나님을 생각하며 할 때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죄가 아니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리더의 말을 들어주고 하자는 대로 협력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거다. 그럴 때 비로소 굴종이 아니라 순종이 된다. 이렇게 순종할 때 우리의 자아가 깨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나님이 제사보다 순종을 더 좋아하신다. 하다가 안 되는 건 당연한 거지만, 아예 순종을 염두에 두지 않는 교만이 문제다. 순종 자체가 우리를 제자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잘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고 하늘의 상 받는 자가 되자. 아멘.
축복의 통로 순종
삼상 15장 17~23절 / 김필곤목사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미들로디언의 한 마을에 19살 학생인 라이언 키칭이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 게을러 방 청소를 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살았답니다. 그러자 2주 동안 어머니가 방 청소를 하라고 잔소리를 하였답니다. 오늘 온 가족이 모여 예배드리는 가족 예배를 드리는데 중고등학생들 방청소 잘하고 있습니까? 유초등부 학생들 자기 방 잘 정돈되어 있습니까? 오늘 예배 후에 자신의 방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 학생은 어머니가 계속 2주 동안 방청소를 하라고 해도 청소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계속 강요하니까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청소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던 방을 억지로 청소하던 키칭은 방청소를 하다가 복권 한 장을 발견했답니다. 지난달 자신이 일하는 대형 마트에서 산 복권이었답니다. 방이 쓰레기장이라 방 어딘가에 던져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복권인데 그는 그 복권의 당첨 여부를 확인했답니다. 그 결과 5만 2981파운드(약 9400만원)에 당첨되었답니다. 예상치 못한 복권 당첨에 키칭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쁨을 표시하며 "무엇보다 (청소를 요구한) 엄마에게 감사하다"고 글을 남겼답니다. 어머니 말 순종하였더니 9천 400만원의 돈을 번 것입니다.
오늘 같이 예배드리는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 대학생들 여러분 부모님 말씀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길일까요? 거역하는 것이 복 받는 길일까요? 부모님 말씀 순종하여 손해 본 경험이 있어요?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고 싶어요? 저주를 받고 싶어요? 순종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닙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 세 가지만 들라고 하면
❶ 예수 믿고 내가 복 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먼저 영적인 복을 받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천국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복을 받고, 내가 건강에 복을 받고, 내가 물질의 복을 받고, 내가 인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❷ 내가 복 받음으로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복으로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였습니까?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통해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렀습니까?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른 것입니다. 제자 삼는 자로 만들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였습니까? 우리를 통해 이웃들이 복을 받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만 천국 가는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웃이 천국 가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를 통해 이웃이 부의 축복을 같이 누려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돈 벌어 남 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만 건강하고 나만 평안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웃들이 건강하고 마음의 평강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에스더 한 사람 때문에 민족이 살고,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가뭄에서 굶주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고 나로 말미암아 가정이, 사업이, 사회가, 나라가 잘되면 그것으로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여 불렀습니까? 우리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4)”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4)”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이런 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단순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끝없는 복을 누리며 인간을 살게 만드시고 단 한 가지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만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예배드리는 우리 어린이들 부모님에게 용돈 많이 받고 싶지요. 용돈 많이 받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컴퓨터 게임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효도하라고 하면 효도하고 부모님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돈도 많이 받고 세상에서 출세합니다. 부모님 말씀 잘 듣다가 망하는 사람 없습니다. 부모님 말씀 순종하지 않고 잘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순종이야 말로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부어 주십니다. 어떻게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적당히 순종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50%만 순종하려고 하지 말고 100%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종은 동의와 다른 것입니다. 내 뜻에 맞는 것에 따르는 것은 동의입니다. 내가 이해 할 수 있는 것만 따르는 것은 동의입니다. 순종은 이해되든 안 되든, 내 맘에 맞는 안 맞든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한 분의 권위와 능력, 인격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할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롬6:17; 엡6:5; 대하34:31)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기쁘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사1:19). 이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원에 있을 때의 일이랍니다. 수도사가 되겠다는 두 사람이 수도원을 찾아왔답니다. 그때 그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을 했답니다. "배추를 거꾸로 심어라." 한 사람은 프란체스코의 말대로 순종했고, 또 한 사람은 "말도 안 된다"라며 제대로 심었답니다.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사로 입문하게 되었고, 제대로 심은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는 순종의 사람을 원했답니다. 사울 왕은 철저히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웠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막내아들의 후손입니다.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찾아오라고 합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 찾으러 갔다가 사무엘을 만나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아버지 말에 철저히 순종하다 복 받아 졸지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왕직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이겠습니까? 아말렉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아말렉은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처음으로 그들의 길을 막은 족속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아말렉은 사탄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족속입니다. 이 사람들은 간교하게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해서 노약자와 어린이 병자를 공격하여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민족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 괴롭혔던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대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말렉을 멸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심판하라고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철저히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15절을 보세요.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남겨 놓았습니다. 물질 앞에서 철저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세요.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끌어 왔습니다. 아각왕을 살려두었습니다. 전쟁 승리의 업적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명예 앞에서 철저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적당히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하는 체 하는 것입니다. 100%가 아니라 80% 순종한 것입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다만이 문제입니다. 이 때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 32: 11은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민32:11)”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은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민 32 : 12, 14: 24, 신1:36, 수14 : 9). 순종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은 곧 죽음입니다. 불순종은 곧 파멸입니다. 인생의 실패는 불순종입니다. 순복이 복의 통로입니다. 순종하되 온전히 순종할 때 놀라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청명한 하늘에 거대한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노아는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창6:22). 적당히 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창22:1 이하). 이성과 상식에 맞지 않는 아버지의 지시에 묵묵히 순종하는 이삭도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의 질은 축복의 질이 됩니다. 순종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입니다.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 시절에 가장 정치를 못하였다고 평을 받은 분이 카터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했답니다. 세계 분쟁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찾아가 평화를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다. 해비타트 프로젝트를 만들어 망치를 들고 다니며 집이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매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집을 지을 때도 5일 일하고 어김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섬기는 주일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교회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아내와 더불어 교회 청소를 하였습니다. 늘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였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철저히,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순종을 회복하여 징계가 아니라 축복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왕상 2:3)”
2. 순종할 때는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의 질, 순종도의 문제라면 끝까지는 순종의 시간의 문제입니다. 계속성의 문제입니다. 오늘은 순종하다 내일은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순종으로 끝나기 원치 않습니다. 밥 한 번 먹고 죽을 때까지 배부른 것 아닙니다. 축복은 순간순간의 순종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울은 어릴 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준수한 소년이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미남이었습니다.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크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 위해서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서 산지사방을 돌아다닐 만큼 순종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뽑혔을 때 너무 부끄러워서 짐보따리 뒤에 숨을 정도로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사무엘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순종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축복을 받아 왕으로 기름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지금은 어떻습니까? 최고의 권력을 잡고 부해지고 왕의 명령 한 마디면 산천초목이 떠는 권력을 가졌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탈취하기만 급급한 것입니다. 셋째가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는 것을 행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누구의 목소리를 들은 것입니까? 백성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의 부가 누구에게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온 것입니다. 사람이 부족하고 연약할 때는 잘 듣습니다. 그러다 조금 높아지고 있어지면 교만해 집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릇이 차 있으면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알면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버립니다. 사울은 얼마 전에도 자신의 자리를 망각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13장 9절을 보십시오.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입니다.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이 하나님께 화목제와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월권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사장 역할을 해도 괜찮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 권력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왕위를 패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조금 높아졌다고 조금 안다고 교만 떨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 보십시오. 최고의 권력을 가졌을 때에 성전을 건축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단선지자가 피를 너무 많이 묻혀서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얼마든지 어기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순종을 합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해 놓고 그것으로 마칩니다.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안 된다고 합니다. 선교의 명장입니다. 판단력이 있습니다. 예측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 된다고 하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사울을 보십시오. 전쟁에 이기고 무엇을 합니까? 15장 12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웁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교만이 극치에 이르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것이 자기의 힘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게 해 주시고, 능력 주기고 은혜 주어서 승리한 것입니다. 명예욕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극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순종, 끝까지 순종하는 순종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 때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왕이 순종하지 않아 버렸다고 하니까 그가 사무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0절 보십시오. 백성의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자신을 높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자고 하면서 자신을 높여주기 위해 예배를 같이 들이자는 것입니다. 결국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사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투 길보아산전투에서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생명을 잃고 맙니다. 그는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의 생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까? 16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버려 버린 것입니다. 15장 23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조금 배우고, 조금 돈이 생기고, 조금 살만하고, 조금 세상에 명예를 얻고, 조금 권력을 받으면 교만해져 하나님 무시하면 안 됩니다. 불순종합니다. 삼손이 불순종하다 결국 포로가 되고 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순종하여 복 받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진정한 복을 잃었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하지 않는 다른 불로 제사하다가 망한 것입니다(레10:1-2), 노아 홍수 때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받는 자들은 다 순종치 않는 자들입니다(벧전3:20).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40년이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거꾸러진 것은 불순종 때문입니다(민14:26-39). 불순종은 망하는 것입니다.
조금 안다고 으스대며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 2:30)”
3. 불순종을 지적받으면 바로 회개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자 순종했다고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말합니다. 내 귀에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하나님께서 양과 소도 다 죽이라고 했는데 어찌 된 것입니까? 라고 물어 봅니다. 그 때 사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핑계를 댑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것은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백성에게 돌리고 하나님을 악하게 이용하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들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백성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백성 핑계를 댑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워 버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잘 못은 시인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면 될 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 될 텐데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자신 멋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드리는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자기 생각대로 바벨탑을 하나님을 흩어 버렸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민3장). 웃시야 왕이 나라가 부강하게 되자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스스로 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대하26장).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시지 아말렉의 짐승으로 예배를 받고 싶은 분이 아닌데도 제멋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했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사실을 탐욕인데 그것을 감추고 하나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욕심과 사욕을 하나님 예배로 포장한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환경 핑계를 댑니다. 부모님 핑계를 댑니다. 자신의 머리 핑계를 댑니다. 공부하지 못한 이유가 자신이 순종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나쁘고, 부모님이 학원을 보내 주지 않아서이고, 공부방이 없어서이고, 친구들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사업을 못하는 이유가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아말렉 제물로 제사를 받는다고 언제 하였습니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자신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4학년이 되었는데도 매일 지각하는 어린이가 있었답니다. 선생님이 지각하지 말라고 말해도 매일 지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왜 매일 지각을 하는 거냐? " 그러자 그 어린이가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학기 초에 선생님께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고 하셔서 저는 선생님말씀을 실천중입니다” 제멋대로 해석하면 진정한 순종을 할 수 없습니다.
16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밤에 다 알려 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9절 보세요. 백성이 문제가 아니라 왕이 하나님 말씀을 청종치 않은 것이고, 왕이 탈취하기만 급급한 것이고, 왕이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는 것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지적을 받으면 항복해야 하지요. 하나님 잘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명령에 따라 절대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사울을 보십시오. 20-21절을 보세요. 나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이 마땅히 멸할 것을 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다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시지 그런 불순종의 제사 받는 것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왕은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퇴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이 범죄했다고 시인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왕이 이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요즈음도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 얼마나 어려워합니까? 자손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자인데 백성 앞에서 선지자 앞에서 자기 잘못을 시인하면 뭐가 큰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죄를 사해 주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결국 무었을 위한 예배입니까? 30절을 보세요. 자기 이름 내기 위한 예배, 자기체면 세우기 위한 예배입니다. 잘 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빨리 회개하고 순종의 길로 돌아오면 복 받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 순간 불순종하여 축복보다는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를 계수하다가 수많은 백성들이, 온역으로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부하를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어 죽게 하였습니다. 성적 욕망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할 때 바로 회개하고 순종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처럼 징계의 자리가 아니라 축복의 자리로 돌아선 것입니다. 순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불순종은 멸망의 통로입니다. 순종의 길로 돌이키는 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창의성과 자율성을 길러준다고 아이들 불순종하며 살도록 방치하면 축복과는 멀어집니다. 순종하는 자녀로 만드는 것이 축복받는 교육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라는 책을 쓴 헨리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헨리 목사님이 처음 어떤 교회에 부임했답니다. 그는 처음 젊은 부부의 집에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너무너무 말을 안 들었답니다. 부모가 말하면 꼭 반대로 합니다. 앉으라면 일어나고 가라고 하면 오고 조용히 하라면 더 떠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손자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그 아이를 전혀 건들지 못하게 했답니다. 젊은 부부도 그 아이를 마냥 귀여워만 했습니다. 꾸짖고 책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답니다. 대문이 열려있는데 그 아이가 대로변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답니다. 엄마가 그걸 보고 “얘가 돌아와야 돼, 거기가면 안 돼”라고 소리쳤답니다. 아이가 돌아서서 씽긋 웃더니 계속해서 대로변으로 걸어 나갔답니다. 그때 차 한 대가 질주하며 달려왔답니다. 차에 치여서 즉사하고 말았답니다. 목사님은 그 단장이 끊는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뼈저리게 큰 교훈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반듯이 즉각적으로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이 목사에게 있음을 그는 깨달았답니다. 요즈음은 권위를 너무나 우습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부모에게 순종하고 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불순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순종의 길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길은 불 보듯 뻔한 결과입니다.
어느 때든 불순종에서 회개하고 순종의 길로 돌아서면 축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죽음 직전에서 돌이켜 용서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순종의 길로 돌이키기만 축복의 길은 열립니다.
불순종이 얼마나 나쁜 죄인가를 보십시오.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제사보다도 낫고, 반대로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
어 하시는 사술의 죄나 우상에게 절하는 죄보다도 더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어떠하며(1-14),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저주가 어떠한가를(15-68)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1),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1), 모든 복이 네게 임하고(2),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8,12).
그러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15,58), 모든 저주가 네 게 임하고(15,45,46), 모든 일에 저주가 임하고(20), 모든 민족에게 놀램, 속담, 비방거리가 되고(37), 모든 경내의 열매가 떨어지고(40), 모든 나무의 소산을 메뚜기가 먹고(42). 모든 성을 원수가 에워싸고(52,53,55),모든 질병을 네 게 불겠다고 했습니다(60,61).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영혼이 깨끗하게 됩니다.(베드로전서 1:22)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순종하는 삶을 자신의 성향으로 만들었습니다.(누가복음 2:51)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리서 5:8)
한 마디로 예수님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순종의 완전 모델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부활의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빌립보서 2:8)
성경의 공식은 단순합니다. 순종하면 복이 오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순종하면 물질적 축복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 32절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라고 말씀합니다. 순종하면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복을 받는 신비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서는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 임하는 영적 권세에 대해 이런 확신을 줍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순종하는 자가 영적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신속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즐겁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1장 19절에서는 “너희가 즐겁게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즐거워한다고 간증합니다.(시편 40:8) 신앙 생활할수록 순종이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순종하다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 그 자체가 최고의 성공이고 순종이 최고의 복이며, 순종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순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순종을 잃었습니까? 축복의 통로인 순종을 회복해야 합니다.
순종의 제사를 드리자
배 혁목사 / 삼상 15:17-27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백성들이 함께 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 그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 입니다.
비록,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나라를 원하시는지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함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 실현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까지 데리고 오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계획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백성들의 순종이 동반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원대한 계획은 없을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다가 보면,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을 보시면서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왕의 권세를 주시고 그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왕은 불순종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사울왕이 하나님께 후회하게 만들고 버림받기 위해서 일부러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울왕은 무슨 이유인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그는 불순종의 대가가 그리 심각한 것일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보시기에 불순종의 사람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세우고, 이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왕에게 행할 일을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아말렉 족속을 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에게 못되게 굴었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비무장상태에 있을 때에 공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방해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위험한 민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의 죄를 벌하시고, 이스라엘을 굳건히 세우시기 위해 아말렉을 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말렉을 칠 때에,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남녀와 노소,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 짐승들을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아말렉을 멸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 명령대로 아말렉과 싸우기 위해 백성들을 소집합니다. 그리고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킵니다. 그리고 사울이 아말렉을 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과는 달리, 다 멸하지 않고, 아말렉왕과 좋고 기름진 좋은 소와 양을 남기고 그 외의 것만을 진멸합니다. 사울은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불순종을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버리시기로 작정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사무엘 선지자를 보았을 때에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울은 마음 편하게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생각하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100퍼센트 순종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90퍼센트 정도는 순종했으니까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행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적당히 하는 순종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하는 순종인 것입니다. 명령한 것의 99퍼센트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의도적으로 1퍼센트를 불순종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순종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사울왕이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아말렉을 진멸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그렇게까지 진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몇가지 부분에는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각왕과 좋은 짐승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승리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적인 순종에는 실패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전심을 쓰지만 능력이 없어서 그 말씀을 완전히 행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단과 의지만큼은 100퍼센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할 부분을 미리 정해 놓고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순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적당하게 순종한 것을 가지고, 대단한 순종을 한 것처럼 여겨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당신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는데, 의도적으로 특정부분은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울의 행동을 불순종으로 여기셨습니다.
그의 전적인 순종을 방해했던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특별한 영역이 있지는 않습니까?
2.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기를, 19절에,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다 진멸하고 싶은데, 진멸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이 눈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려서 가지고 가면 참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아말렉왕을 잡아서 가면 백성들이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짐승들을 가지고 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능력있는 왕이라고 여길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유익한 좋은 것들을 보고서, 그것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이유는 상대방의 것을 탈취하기 위함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상대 나라의 영토를 차지하고, 사람과 물건들, 짐승들을 약탈하여 자기것으로 삼고 자신의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사울의 행동이 탈취하기에만 급한 행동이었다고 책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멸을 원하셨는데, 좋은 것을 탐하여서 탈취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포기해야 할 결단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에게 명령한 대로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번 씻었을 때에 그의 나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그 일로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그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예물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엘리사 선지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게하시는 그 물건을 탈취하고자 하는 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 몰래, 나아만 장군을 따라가서 거짓으로 말합니다. “지금 엘리사 선지자에게 두 제자가 왔는데, 엘리사 선지자가 제자에게 줄, 은 달란트와 옷 두벌을 달라고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다가 집에 감춥니다.
좋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취하려고 하는 탈취하는 마음이 그로 범죄케 하였고, 그 일로 인해서 게하시는 징벌을 받아 나병이 발하여서 그 살이 눈같이 되었습니다.
순종은 내가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기 어려운 가치있는 사람이나 물건, 어떤 조건들이 있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좋아보인다고 할지라도, 가장 좋고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그러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순종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을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여있을 때입니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질책에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끌어왔고, 다른 이들은 진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백성들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세 제사하려고 한다고 하여 양과 소를 끌어왔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15:24절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그가 끌고온 것이 마땅히 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멸하지 말고 제사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에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들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사람들의 인정함을 받으려는 사람이었습니다.
15:30절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간청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책망을 받는 상황에서, 그래도 백성앞에서 자신을 높여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존재인데, 도리어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높임받고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함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낮아져야 하는 경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신경쓰이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불편한 시선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가 높아지려고 하는 유혹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인정받으려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께 더욱 붙들려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가장 기초로 함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양과 소를 죽이지 않고 가지고 온 것을 추궁하자, 그것으로 하나님께 좋은 짐승을 드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 사무엘은 5:2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제사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해서 좋은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가지고 왔다고 했지만, 진정으로 좋은 제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소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제사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자의 제사인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으셨던 것은 아벨의 제사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4:4절에, 하나님께서 아벨로부터 받으신 것은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아벨 자체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반대입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제물이 나빠서가 아니라 가인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받지 않고 버리고자 하셨던 것은, 그가 바치고자 하는 제물들이 형편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지 않았을 때에 사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제물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지에 따른 것입니다.
그 어떤 제물보다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의 제물이 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무엘상 15:1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찾아와서 하는 첫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기대하셨던 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종이셨습니다. 사울이 순종할 때에,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떄문입니다.
미가 6:8절 후반절에, 미가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겸손하게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전적으로 순종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주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결단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시고 멀리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받으시는 인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과 함께 행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