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아이디어가 발상의 전환이나 우연에서 시작되지만, 상품으로 시장에 나오려면 부단한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행은 엄두내기 어려운데요. 나만의 아이디어로 창업을 꿈꾸는 여러분에게 견본이 될 ‘창업 노트 훔쳐보기’를 연재합니다.
계절가전 '파비스'를 운영하는 엘즈 이욱 대표. /더비비드
겨울철 방 안의 천장이나 벽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찬 기운을 ‘웃풍’이라 한다. 웃풍에 가장 취약한 곳은 욕실이다. 환기를 위해 만들어 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쉽게 들어온다. 겨울마다 샤워가 두려워지는 이유가 된다. 씻기 전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틀어두고 욕실이 데워지길 기다리기도 한다.
물을 낭비하지 않고도 욕실을 데울 방법을 찾은 이가 있다. 중·소형 계절 가전 개발사 엘즈 이욱 대표(53)는 3년 간 욕실 온풍기에 공을 들였다. ‘따뜻한 욕실’에 대한 수요는 분명했다. 2022년 엘즈는 파비스 욕실 히터 출시 후 1만대 판매를 넘어섰다. 이 대표를 만나 훈훈한 욕실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에도 따뜻하게 샤워하기
파비스 욕실 히터로 욕실 온도를 높일 수 있다. /엘즈
파비스 욕실 히터는 욕실 전용 온풍기다. 타공 없이 수건걸이에 걸어서 사용할 수 있다. 수건걸이에 걸면 약 1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진다. 기기 아래로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인버터형 히터 방식이다. 주변 온도를 감지해 설정한 온도에 도달하면 송풍으로 바뀐다.
발열제는 PTC 세라믹이다. 히터 사이사이에 6개씩 3줄로 총 18개의 세라믹이 들어있다. 공기가 발열제를 통과하면서 온풍으로 바뀌는 방식이다. 고온으로 설정하면 1분 만에 토출 온도가 90도에 도달한다. 샤워하기 5~10분 전에 틀어놓으면 금세 욕실 공기가 데워져 따뜻하게 샤워할 수 있다.
3중 생활방수구조가 기기 내부로 습기가 침투하는 것을 막아준다. 1시간 단위로 최대 12시간까지 타이머를 설정할 수 있다. 전원·온도설정·타이머 등은 모두 리모컨으로 작동할 수 있다. 물 묻은 손으로 기기를 만질 필요가 없다. 전원은 전기 코드를 콘센트에 끼워 쓰는 방식이다.
◇양말에 구멍 날 때까지 뛰어다닌 영업
고등학교 때까지 복싱 선수로 활약했다는 이욱 대표. /이욱 대표 제공
첫 직장으로 섬유유연제, 빨랫비누 등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영업사원으로 서울·경기 지역의 마트를 다녔다. “처음엔 운전을 못 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요. 걸음 수를 세 본 적은 없지만 하루에 양말 한 짝씩 구멍이 날 정도였습니다. 나중엔 첫 차로 티코를 장만해 하루 5000원씩 기름을 넣고 다녔어요. 월급 38만8000원 외에 출장비 개념으로 하루에 8000원씩 더 받았으니 나름 쏠쏠했죠.”
입사 10개월 차에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직장이 사라졌다. 일자리를 찾아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전기난방기, 정수기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곳에 매장 관리직으로 들어갔어요. 제게 주어진 일은 AS, 배송, 제품설치였습니다. 소비자와 직접 대면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금세 소비자의 물음에 척척 답할 정도가 됐습니다.”
이욱 대표는 20대 후반에 세운상가 점장이 됐다. /더비비드
1년쯤 지났을까. 세운상가 점포에 점장 자리 하나가 났다. 함께 일하던 점장의 추천을 받아 점장이 됐다. “20대 후반에 ‘점장’ 소리를 들으니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주로 국내외 소형가전 제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일을 했죠. 그중 하나가 냉·온수기 제품이었는데요. 판매량 전국 1등을 달성했더니 그 제품을 납품하던 회사의 담당자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같이 사업해 보자면서요.”
29살이던 1999년 회사를 만들고 파비스코리아라 이름 지었다. “전 주로 수입·영업·판매 등을 맡았고 동업자 친구가 자금을 담당했죠. 제품을 수입하기 전에 총판을 개설해 5~6곳의 총판사에서 보증금을 각 1000만원씩 받았습니다. 제품이 도착하면 제품값을 바로 받았어요. 첫 제품 수입금 외엔 보증금으로 자금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왼쪽부터) ‘불멍’ 온풍기 파비스코리아 PV-205와 사업 초기 매출을 견인한 냉풍기. /이욱 대표 제공
수입·유통 뿐만 아니라 개발에도 참여했다. “단순히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나만의 색깔을 덧입혀 제품력을 키우고 새로운 제품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온풍기를 제작할 때 제품 아래에 ‘불멍’을 할 수 있도록 불 모양을 넣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출시된 제품이 파비스코리아 PV-205였어요.”
분명 매출은 뛰는데 회사의 곳간은 비어갔다. “명세표를 보다가 우연히 동업자의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한도 70만원 법인카드를 들고 다닐 때 그 친구는 2000만원짜리를 들고 다녔어요. 회삿돈으로 차를 뽑고 골프도 쳤더군요. 2005년 폐업 신고를 하며 이별했습니다. 퇴직금으로 돈 대신 온풍기 한 컨테이너를 받았어요. 덤핑으로 2500만원에 팔고 그 돈으로 홀로서기에 나섰습니다.”
◇판매왕의 홀로서기
이욱 엘즈 대표는 서울 강동구의 한 건물 지하 1층에서 창업했다. /더비비드
2006년 엘즈라는 이름으로 다시 창업했다. 사무실은 서울 강동구의 한 건물 지하 1층이었다. “세운상가에서 알고 지내던 점장의 건물이었어요. 사정을 듣곤 보증금 없이 월세 25만원으로 20평 정도 되는 공간을 쓸 수 있게 해 주셨죠. 하는 일은 비슷했습니다. 여름엔 선풍기, 겨울엔 온풍기 같은 계절 가전을 개발해 판매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판매처를 다변화했다. “초반엔 대형마트 양판이 주 수입원이었는데요. 가령 선풍기를 납품할 때만 해도 매출이 충분히 난 줄 알았는데 한여름이 지나고 나면 남은 수량을 반품해 버리더군요. 결과적으론 적자가 됐죠. 마트 양판은 정리하고 기업체 폐쇄몰 판매처를 뚫었습니다. 카드사·금융사 포인트몰에 사은품 형식으로 납품했어요. 보이지 않는 온라인 시장에서 10년을 버텼습니다.”
수건 걸이에 파비스 온풍기를 건 모습. 스스로 온도를 조절하는 PTC히터 방식이다. /엘즈
겨울 가전은 여름 가전에 비해 마진율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전기요 등 겨울 제품의 마진도 점차 깎여나갔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패션만 유행이 있는 게 아닙니다. 가전도 유행을 타요. 이를테면 믹서기도 해마다 미니믹서·핸디형·파워형 등 유행이 돌고 돌죠. 난방기기도 비슷한데요. 그 무렵엔 온풍기에 주목했습니다.”
욕실용 온풍기 제품을 눈여겨봤다. “겨울에 샤워할 때마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에 수요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씻기 전에 뜨거운 물을 틀어두면 욕실은 따뜻해져도 물을 낭비한단 죄책감이 들었죠. 전부터 거래하던 중국 공장과 손을 잡고 욕실 온풍기 공동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열이 발생하는 난방기기는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었다. “항공기 난방 시스템에 주로 쓰이는 PTC히터 방식이 적합했습니다. PTC히터는 온도가 설정값 이상으로 올라가면 자체적으로 전류량을 줄여 적정 온도를 유지해요. 전력 소모가 적고 고온으로 인한 화재 위험이 없죠. 또 따뜻한 바람에 정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기 아래쪽에서 나오도록 했습니다.”
◇온돌 없는 욕실의 대안
파비스 욕실 온풍기 뒷면의 바람 흡입구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이 대표. /더비비드
2021년 욕실 온풍기 1000개를 제작했다. 제품력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최소 단위로 잡은 양이었다. “한국에서 전자제품을 판매하려면 꼭 받아야 하는 인증은 전자파인증, 전기안전인증 등 2가지가 있습니다. 온풍기의 경우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을 받아야 하고, 욕실에서 쓰는 제품이다 보니 방수등급도 필요했죠. 국제공인 TUV 인증을 통해 IPX2(수직에서 15도 범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대한 저항) 방수를 확인받았습니다.”
고장이 잦은 부분은 KTL, KTR, KTC 등 국내 인증원에 문의해 해결 방향을 찾아나갔다. “온도 측정, 타이머 등을 담당하는 PCB기판이 계속 고장이 났어요. 다시 제작할 필요가 있었죠. 또 수건걸이를 고정하는 부분의 플라스틱이 쉽게 깨지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브라켓을 걸 수 있도록 3000만원을 들여 뒷판 금형(같은 결과물을 반복 생산하기 위한 금속 틀)을 새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