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녘.
다리미 스팀이 높다란 천장 위로 증발되고, 그 곳엔 정말 누가 봐도 '미소년이다' 라고
탄성을 내 뱉을 만큼 아름답지만 소년같은 이미지의 수혼이 동문고 교복을 입고
또 다른 교복을 다림질 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지배인님."
"...."
수혼이 마악 다림질을 마치고 뒤를 돌자, 기다렸다는 듯 한손엔 커피를 들고
빙그레 웃고있는 무현령과 마주한다.
수혼은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능글대는 무현령이 싫었다.
"이런.. 그래도 엄연한 제사장인데 예의는 갖추셔야죠 지배인."
"커피 마시는 제사장은 책에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훗. 전 현대판 아닙니까."
수혼은 여전히 한치의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숙이곤 교복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간다.
"지배인님."
"말 하십시요."
"..오늘은 붉은색을 조심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잘 다녀 오십시요."
라고 말하며 유유히 방으로 사라져 가는 무현령.
붉은색.. 그냥 넘겨 듣기엔 무현령의 예지력은 대단했기에 수혼은 내심 붉은색을
마음속에 새기곤 계윤의 방으로 향한다.
똑똑-.. 달칵-.
암실을 연상케 만드는 분위기의 방.
밝은 걸 싫어하는 계윤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난다.
"도련님. 기상시간 입니다."
"...."
"계윤도련님."
아무말 없이 일어나 언제나 처럼 수혼이 없는 사람인 것 처럼 무시하며 화장실로
향하던 계윤은 뭔가 잘못봤다는 듯이 뒤를 다시 돌아보더니 인상을 팍 구기곤
저벅 저벅 수혼을 향해 다가간다.
"..너 삽질하냐?"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하..빌어먹을."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곤 욕실로 들어가는 계윤.
아마 수혼의 옷차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혼은 탁자에 다려놓은 교복을 가지런히 올려놓고는 마영의 방으로 향한다.
똑똑-..
"들어오지마."
"...."
"..들어와."
달칵-.
"들어오지마."
"..일어나셨습니까."
"들어와. 쿡쿡. 우리 개새끼 말 잘듣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 자연스레 제자리에 멈춰 서는 수혼.
그런 수혼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던 마영은 한 순간에 눈이 동그래 지더니
수혼의 어깨를 부여잡곤 수혼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너..너...학교오냐..?"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안되 오지마. 꼰대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내 말 들어."
"..그럴 수 없습니다."
"아 왜!!! 하..완전 골때리네 우리 영감.. 안되!! 무조건 안되!!!"
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쉬는 시간마다 부려먹을 수 있겠다고 좋아할 줄 알았건만
저렇게 얼굴이 파래져서 안된다고 소리치며 끝내 욕실로 들어가버리는 마영이
의아한 수혼이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상황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혼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확인 한 뒤
낮게 한숨을 내쉰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
.
.
"요새 왕따다 뭐다 해서 말이 많은데 그러지들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자. 그럼 새로 만나게 된 친구들하고 소개는 해야지?"
2학년 3반.
갈색 교탁 앞에 서 있는 담임과 그 옆에 선 수혼.
나이만 아니라면 오히려 더 수혼이 선생님같은 분위기였다.
교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무적인 모습.
반 아이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호기심이었고, 교실 정 가운데 앉아 멍한 눈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수혼을 쳐다보는 여학생이 거슬리는 수혼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여학생의 손톱에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임수혼입니다. 여러분과 나이는 같습니다. ..그리고. 전 여자가 아닙니다.
제 성별로 싸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학생."
수혼의 말에 두 번째 줄에 앉은 학생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책상에 풀썩
누워버리고, 여기 저기서 거울을 보고 있던 여학생들은 전학온지 10분도 안된 수혼이
샤프하다느니 스마트해 보인다느니 하며 얼굴을 붉힌다.
"그럼 수혼이는 어디앉을까.."
"제 옆자리 비었는데요?"
"오오오~"
"아 저 박세리년. 왜 저래 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함성과 환호.
맹랑한 목소리로 자기 옆을 가리키는 붉은색 매니큐어.
'붉은색을 조심하세요.'
아무리 무현령이 미워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전히 뜨거운 분위기 속에 다른 여학생들의 선망어린 시선과 박세리라 불리우는
여학생의 당당하고 도도한 시선을 받고 있는 수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교실에 울린다.
"싫습니다."
다른 학생들로서는 경악스러운 일이겠지만 워낙 자기 의사가 분명한 수혼으로서는
별로 게의치 않을 일이기에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세리는 민망한건지 아님 분한건지 한순간 얼굴이 씨뻘게 져서 수혼을 노려본다.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은 쌤통이라는 듯이 쾌재를 불렀고,
남학생들은 의아의 눈초리로 수혼을 쳐다본다.
"저기.. 그래도 수혼아. 자리가 저기밖에 없는데.."
"전 공부를 하러 온 것이지 연애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학생 옆에 앉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럼..음.. 반장. 쉬는시간에 뒤에 책상 하나만 갖다놔 줄래?"
"그냥 제 자리 앉으라 그럼 안되요? 제가 세리 옆으로 가면 되잖아요~"
"그럴래? 그래 그럼. 선생님은 회의 있어서 나가니까 조용히 자습들 하고 있어."
그렇게 담임이 나가고 교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아까부터 씩씩거리던 세리가
수혼의 책상 앞에 선다.
"임수혼이라고?"
"지금은 자습시간이고 자습도 엄연한 수업입니다.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요."
수혼의 사무적이고 감정없는 건조투에 교실이 조용해 진다.
그 상황이 재밌다는듯이 킥킥 거리는 무리들도 여럿 되보인다.
"귀여워서 봐줬더니 이게..!!"
킥킥 거리던 학생들을 고루고루 야리던 세리는 더 이상 못참겠는지 손을 올려 들었고,
마악 수혼의 얼굴을 향해 세리의 손이 돌진하려고 할 때.
"전 맞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혼의 쌩뚱맞고도 당연한 말에 교실 분위기도 덩달아 머쓱해지고,
허공에 떠 있던 세리의 팔 마저 힘 없이 무너진다.
"임수혼 너."
"말씀 하십시요."
"한달 안에 나한테 목 매게 만들거야."
"야야 싫다잖아 수혼이가. 왜 달라붙니 추잡하게?"
"허. 넌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렇게 다정이 뚝뚝 떨어지게 부르니?"
"지금부터 알꺼거든? 안녕 수혼아? 난 2학년 3반 부반장 강주하야. 우리 친하게.."
"내가 찜했거든?"
"꺼질래 쫌? 이름도 꼭 지같아서 박세리가 뭐냐 박세리가. 혹시 특기가 골프..?"
강주하란 아이의 말에 교실은 한순간에 웃음바다가 된다.
장미같은 아름다움의 박세리.
야생화 같은 아름다움의 강주하.
그 두 여학생이 자신을 두고 싸우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관심 없다는 듯 다른 생각에 잠기는 수혼.
정말 이상했다. 지금 쯤 되면 두 도련님이 쌍으로 자신을 개부리 듯 부려야 정상인데..
계윤의 반은 수혼의 반과 제일 멀리 떨어진 13반,
마영은 수혼의 반보다 3층계 더 위에 있는 실업반.
종합고등학교다 보니 실업계와 인문계가 같은 건물 안에 존재한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이 부르기라도 한다면 쉬는시간인 10분 안에 정말
육상선수 저리가라의 속도로 뛰어야 할 것이다.
"잠깐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어..어어. 괜찮긴한데.. 그 존댓말 안할 수 없어?"
반장의 말에 싸우고 있던 세리와 주하의 이목까지 수혼한테 집중되었고,
그에 수혼은 특유의 포커페이스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를 갖추는게 이치입니다."
그렇게 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어 놓곤 대책없이 교실에서 나오는 수혼이다.
그리곤 계윤의 반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마영쪽이 더 문제일 것 같아
걸음을 돌려 5층으로 향한다.
학생이 되었어도 자신의 신분은 잊어선 안된다.
학생으로 왔다기 보단 그 문제많은 두 도련님을 경호. 혹은 감시 하러 온 것이니..
수 많은 계단을 올라 길게 늘어진 복도를 쭈욱 훑는 수혼.
저 멀리 실업반 중에서도 가장 소란스러운 반.
창문을 통해 조용히 마영의 상태만 확인하고 내려가려던 수혼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가만히 동태를 살핀다.
"이 새끼봐 존나.큭큭."
"냄새 나는 거 같아. 개냄새"
마영은 보이지 않고 소란스럽게 한 학생을 구타하고 희롱하는 학생들만 눈에 띈다.
맞고 있는 학생은 검은색 뿔테 안경에 부시시한 더벅머리를 하고 있었고,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마침 종이 울리고 멀리서 그 학생에게 지우개를 던지던 학생이 교실 밖으로 나온다.
"여기 천마영 도련님 안계십니까."
"천마영 도련님..? 풉.."
정말 자지러지게 웃는 이 학생.
그런 학생을 표정없이 쳐다보는 수혼.
"큭큭. 들어가 보세요."
바닥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교실을 가리키는 학생.
옷 매무새를 가다듬곤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그 학생을 구타하던 무리들이
수혼의 등장에 여러 반응을 보인다.
"오.. 남자 맞아?"
"죽인다. 전학생인가봐. 저런 사람이 있었어 우리학교에?"
"왜에. 계윤오빠 있잖아."
"얼어죽을. 완전 개싸가지야 그 새끼는."
불량스레 앉아서 수혼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여학생들.
뿔테에 더벅머리 남학생은 분위기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더욱더 얼굴을 수그렸고,
주변을 둘러보며 마영을 찾던 수혼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음을 느낀다.
"...거기.. 물러 서십시요."
"뭐..뭐야 이새끼. 존나 여자처럼 생긴 새끼가 말투는 왜 이래."
"..물러 서라고 했습니다."
"싫다면."
"물러 서십시요."
"싫..아아..아아..! 안놔 이거?!"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온몸가득 살기를 뿜고 뿔테의 앞을 막고 있던 남학생의
팔을 비틀어 가볍게 밀쳐내는 수혼.
뿔테는 바로 앞에 온 수혼을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금 고개를 휙 돌리며
낮게 욕을 뱉는다.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수혼은 뿔테를 밟은 무리들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학교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은 교칙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또한 급우를 폭행한다는건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이새끼 말하는거 대박이다. 큭큭."
"샌님이냐?"
"뒤에있는 천마영만 할까."
그랬다.
제대로 찐따차림의 구타의 대상이였던 그 남학생은 다름아닌 마영이었던 것이다.
패싸움에도 선두로 서서 활약하는 만큼 이 근방에선 웬만하면 천마영을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방금 마영을 '샌님' 이라 칭했던 남학생이 다시금 마영을 건드리려는 폼으로 손을 뻗자,
그 손이 마영에게 채 미치기도 전에 낚아채 꺽어버리는 수혼.
주변이 조용해 지고..
모두의 이목이 주목된 상태에서 수혼의 조그만 입이 차갑게 열린다.
"..함부로 손대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첫댓글 로가 러가 됬어요
잘보고갑니다
...분명 여자인데 소름끼치는 느낌이 드는근요~ㅎㅎㅎ
마영이가 왜그럴까요? 잼잇게 잘 읽었습니다~
학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지 뭔가 재미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