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락호(破落戶)
파락호(破落戶)
한자어로 ‘破落戶’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의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 했다고 합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도 다 팔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 사주곤 했다고 합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 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 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이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 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로 발표합니다.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고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김후옹님의 글입니다.
김용환 선생 영정 |
파락호 독립운동가 김용환 정말 존경스러운 분
http://blog.naver.com/parknobong/100154053015
파락호란 말은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는
사람을 일컬어 표현하는 말이지요.
일제시대 때 안동에 유명한 파락호가 있었답니다.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란 사람인데요...
그는 안동의 노름판에 끼지 않을때가 없을 정도로 노름에
미쳤었다고 합니다.
따면 좋고.
.만약 잃으면 숨겨놓았던 부하들을 출동시켜
판돈을 모두 빼앗아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노름을 좋아하던 김용환은 종갓집과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200억원도 다 팔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중에서 다시 종가집을 되사주면 또 노름으로 퍼다 주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집을 가는데 시댁에서
시집올 때 장농을 새로 사오라고 준 돈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돈도 몽땅 노름으로 탕진했다고 합니다.
딸은 몇날 며칠을 기다리다가 결국 큰어머니댁에서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시집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이니 주변에서 김용환을 얼마나 욕을 했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독립운동한다고 옥고도 3번이나 치뤘다는 것이지요
그 돈의 출처가 불투명 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김용환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 파락호 김용환이 사실은 노름을 해서 돈을 잃은것이 아니라
그 모든 돈을 의용단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주었다는 것이
그의 사후에 밝혀 진것입니다.
해방 후...김용환의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가
이제 세상에 밝혀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김용환은 선비로써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를 밝힐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행적을 알고 난 외동 따님 김후옹 여사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알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을 때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제목 :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사후에라도 진정한 의사임이 밝혀졌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김용환의 죽음은 참 쓸쓸했다고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김용환 독립의사의 정신을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야 건국훈장을 주었는지도 생각해야
할것 같습니다.
일제 앞잡이들과 친일파들은 득세하며 승승장구했는데..
정작 진정한 의인은 아무도 모르게 감춰져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파락호 독립운동가 김용환....그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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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리신 글에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