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태와 한남동 공관 경비대의 임무 수행 예) 중장 김정호 제13대 해병대 사령관
12.12 사태는 제5공화국 수립에 출발점이 됐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한남동 공관 지역에서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연행군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지금 회고해 봐도 참으로 위기상황의 전개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19시경 승용차 두 대(우경윤 대령, 허삼수 대령 및 수사관 3명)가 정문초소에서 검문을 받고 육군총장 공관에 확인 후 통과시켰고, 몇 분 후에는 육군헌병 백차와 마이크로버스 2대(병력 61명)가 도착하여 육군총장 공관 근무 교대차가 통과하겠다는 요청을 받고 사전 연락 없이 많은 병력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육군총장 공관에 확인차 전화를 하는 순간 마이크로버스에 승차했던 육군 헌병 9명이 급습하여 근무헌병 3명을 포박하여 건물 내부에 감금하고 정문을 장악 대기중이던 전 병력을 통과시켜 육군총장 공관으로 향하였다.
19시 20분경 육군 총장 공관 쪽에서 4~5발의 총성이 들렸으므로 공관 지역에 긴급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공관 거실에서 그날 청룡부대 초도순시를 마치고 돌아와 쉬고 있을 때 총성을 듣고 김신조 부대와 같은 괴한들이 공관 지역에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급히 무장을 하고 공관 정문을 나서 삼거리의 경비대 쪽으로 달려가는데, 부관 송문현 중위(미국 샌디에고 주립대학 교수)와 신창득 해병(한국토지공사 기획실장)이 내 뒤를 수행하였고 막사 쪽에서 달려오는 세 명의 경비병이 나를 몸으로 호위하면서 "사령관님 육군 헌병에게 습격당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대장 이하 많은 병력이 체포되어 연행되었습니다." "오늘 육군하고 한바탕 합시다."라는 말을 듣고 그 순간 판단으로는 김재규 정보부장의 지지 세력이 습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막사 앞 삼거리에 이르니 10여 명의 대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기에 "나 사령관인데 지금부터 직접 지휘하겠다."고 선포한 후 "누구든지 우리의 수하에 응하지 않으면 발사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19시 10분경 육군총장 공관 지역으로 진입한 마이크로버스 2대 중 1대에 탑승한 헌병 병력은 총장 연행을 지원하였고, 다른 한 대의 버스에 탑승한 병력은 막사 지역으로 이동하여 막사를 기습하였다.
이때 공관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은 초소를 순찰중 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성 4~5발의 총소리를 듣고 급히 귀대하여 비상을 발령하고 기동타격대 20명의 병력에게 상황실 앞에서 실탄 분배중 육군헌병의 기습을 받아 체포 연행되어 막사 내에 구금되었고, 다른 대원들도 체포되었으나, 십여 명의 병력은 현장을 탈출하여 삼거리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본인이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 병력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누군가가 "사령관님 정문을 육군헌병이 장악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하기에 정문초소를 특공조로 공격토록 지시하니 그곳에 탈출하여 있는 경비 선임부사관 김명환 중사가 4명의 특공조를 편성 정문에 이르는 도로가의 배수로를 따라 포복하여 정문초소에 접근 일제사격하며 돌격하여 탈환 점령하였고, 포박되어 있는 3명의 해병헌병들을 풀어 주고, 육군헌병들을 체포, 포박하였으며, 9명 중 3명이 부상하였고, 사망자는 발생되지 않았다.
이때 마이크로버스 1대가 국방장관 공관 앞을 통과하므로 초병이 나서서 정지시킴과 동시에 길 양쪽으로 병력을 배치 차 안에 타고 있는 육군헌병 전원을 무장해제시켜 그들 모두를 차 안에 연금조치하였다.
그 무렵 막사에 감금되어 있던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이 탈출하여 왔기에 경비대 병력을 지휘하게 하였다. 경비대장에게 막사 탈환을 지시하여 이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었고, 병력을 막사 주변에 배치하고 압수한 육군헌병의 무전기를 이용 해병헌병에게 포위됐으니 항복하라고 설득했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차 속에 체포되어 있는 육군 헌병중대장(한성동 대위)을 시켜 설득하였던바 헌병 중대장의 설득으로 모두 투항하였으므로 무장 해제하고 구금하였다.
일단 긴급한 사항이 수습되었으므로 상황 보고는 우선 국방장관에게 해야 되었기에 장관 공관으로 경비대장을 대동하고 공관에 도착하니 부관이 말하기를 장관께서 공관을 출발하여 산에 있는 경비초소 쪽으로 갔다기에 급히 뒷산 쪽의 경비초소를 갔으나, 장관은 초병의 도움을 받아 울타리를 넘어 단국대 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우리 해병 경비대는 정문초소를 탈환한 후 정문을 폐쇄하였고, 정문에 접근하는 부대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초소에서는 위협사격으로서, 정문을 방어하여 여러 접근부대를 차단하였다. 초소를 떠나 삼거리 지역에 되돌아왔을 때 정문으로부터 헌병감 박종근 장군이 해군 5분대기조와 함께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있기에 들여보내도록 지시하고 정문초소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정문 가까이에서 박장군을 만났는데 밖에는 육군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이 육본 5분대기조를 지휘하여 도착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하였다. 신원확인이 가능하고 상황파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 황장군 일행을 들어오도록 조치하였다.
정문 근처 도로상에서 이들을 만나 상황을 파악해 보았으나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차 속에 체포하고 있던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과 헌병중대장 한대위를 불러와 대면을 시켰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와 언동이 수상하고 성대령이 황장군과 밀담을 나누는 태도가 수상하여 가까이 있는 황장군에 일격을 하면서 대화를 중단시키고 성대령과 한대위를 체포 포박하여 초소에 구금하였다. 그후 헌병감 박장군과 육군 본부사령 황장군을 따라 들어온 최석림 중령(총장 연행시 정문 통과를 확인 지휘하고 정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음)과 공관으로 이동하여 황장군에게 상황을 문의하였으나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현재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여 해군총장 공관으로 가서 보고하기로 하고 이들을 대동하고 해군총장 공관으로 향하여 도착하였는바 해군 김종곤 총장도 전혀 상황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현재까지의 공관경비대의 작전상황과 장관의 행방에 대하여 보고하였고, 육군헌병이 상부 지시에 의하여 정승화 장군 연행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이기 때문에 현재 누구에게도 지휘지침을 받을 수없음을 설명하고 공관 지역은 안정된 상태이니 이곳의 처리 책임은 나에게 위임하고 상황 파악을 위해 해군본부로 출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해군본부로 출발하였다. 한편 육군 본부사령 황장군을 육군 공관으로 보내 뒷수습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한편 억류중이던 성대령과 한대위는 12시경에 박장군의 건의로 공관으로 연행하여 계속 심문하였으나, 우리는 상부 명령에 따라 정총장을 연행한 것 외는 그 이상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는 일관된 답변만 되풀이하였다. 대담하던 중 "버스 안의 사복한 사람은 누구냐?"라고 질문하니, 보안사 수사관이라 하기에 장교이므로 새벽 1시 반경에 수사관 공관으로 연행하여 심문을 하여 보니 상부명령에 따라 정총장을 연행한 것 외에 그 이상은 전혀 알 수 없다는 똑같은 답변이 되풀이되므로 그들을 계속 연금 상태로 두었다. 그때의 상황진전은 계속 오리무중이었고, 시간이 흘러가므로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몰랐고, 억류된 부대 구출을 위해 역습 부대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끝까지 사수한다는 각오를 헌병감 박장군과 다짐했다.
한편 공관 지역에서의 비상사태 발생에 따라 공관 정문 앞 도로상에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 5분대기조, 해본5분대기조, 수경사 5분대기조 그리고 합수부측에서 공관 지역에 억류된 육본 헌병부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정진영 대령(후 육군총장)이 지휘하는 30경비단(80여 명)5분대기조가 출동하여 공관 정문 도로상에 극도의 혼잡을 이루고 공관 정문초소에서의 강력한 저지와 상황의 불투명한 야음으로 인한 피아 식별의 곤관등으로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서로 대치상태로 있었고 공관 정문 도로는 차단된 상태로 차량통행은 불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