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신명기(22장 - 24장) 묵상
※ 모세가 가르친 이혼과 재혼(신명기 24:1-4)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전한 세 편의 설교 모음집이다.
율법이라는 뉘앙스 때문에 지극히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별히 신명기 24장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현대 사회처럼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받고
법원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제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광야에서 이런 문제까지
심각하고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이혼 규례의 내용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1절)이다.
그 당시에 결혼이란 아내를 취하여 데려오는 것이고,
이혼이란 집에서 내어보내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취하였는데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어
그 때문에 도저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이럴 때에 본문의 정의에 따르면
결혼이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인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고
집에서 내보냄으로써 이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와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는 사회적인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둘째 남편이 그 여자를 기뻐하지 않아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된 경우나,
혹은 재혼한 둘째 남편이 죽는 바람에
이 여자가 다시 혼자가 되었을 경우, 모세의 율법은 이 여자가
다시 첫 번째 남편에게 돌아가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것은 여호와께 가증한 일, 즉 범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결혼과 이혼, 재혼에 관한 다른 성경구절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본문의 모세의 율법만 고려해서 본다면 이혼이나 재혼은 죄가 아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이나 재혼을 죄로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혼한 사람이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다시 전 남편과 결합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모세의 율법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오늘 이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바로 남자가 이혼의 사유로 삼을 수 있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스라엘에 있는 두 가지 학파의 견해가 달랐다고 한다. 먼저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수치 되는 일을 아내에게서 성적인 부정이 발견된 경우에 국한하였다. 예를 들면 아내에게서 처녀인 표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든가, 결혼생활 중에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워서 성적인 부정이 발견되었을 경우에 국한하여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가 조금 곤란하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에게서 처녀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는 신명기 22장 13-21절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녀인 아내를 누명 씌워서 내쫓으려고 하는 사람은 태형과 은 일백 세겔의 벌금형을 받고 결국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남자의 말처럼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인 표적이 없거든 처녀를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고 기록되었다. 상당히 엄하지만 이것이 모세의 율법이다. 이미 이와 같은 율법의 판결이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있어서 수치 되는 일이 성적인 부정에만 국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힐렐 학파는 이 수치 되는 일을 자의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했다. 예를 들면 음식이 맛이 없다든가, 요리를 자꾸 태운다던가, 인상 쓰는 것이 밉다든가 하는 이유까지도 모두 포함이 된다고 해석을 한 것이다. 만약에 이 해석이 옳다면 어떠한 이유라도 트집을 잡아서 아무렇게나 이혼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샴마이 학파의 보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힐렐 학파의 광범위하고 자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수치 되는 일이란 비록 성적인 부정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결정적인 결함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 사는 한 한국인 부인이 백인과 살았는데 어느 날 목사님께 상담을 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이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머리에 총을 들이대기에 이혼을 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참 어려운 상담이다. 만약 그런 사람하고 당장 이혼하라고 답해 주면 남편 되는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머리에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르고, 그래도 그냥 살라고 답변했다가 그 남편이 혹시라도 총을 발사해서 그 부인이 죽게 되면 이 여자의 가족들이 목사님께 쳐들어와서 당신이 잘못 상담해준 탓에 우리 가족이 죽었다고 탓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나도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당신 편이고 저도 언제나 당신 편입니다. 당신이 그 남자와 계속 살아도 나는 당신의 편이 되어서 기도해 드릴 것이고, 이혼을 해도 당신의 편이 되어서 기도해 드릴 것이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오”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 생활 중에는 성적인 부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보수파와 자유파의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한 논쟁은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 되었다. 마19:3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 힐렐 학파, 즉 자유주의 파가 우세했다는 사실을 암사한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이상적인 창조질서를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상적인 질서는 이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말씀하셨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또 물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이상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버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8)고 대답하셨다. 본래 하나님의 이상적인 질서는 그게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완악한 상태에서 구제하기 위해 이런 규례를 준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이로 보건대 신약의 우리 성도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한 이혼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 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