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장날
곽 흥 렬
낙향하고서 이따금 누리는 호사 가운데 하나가 오일장 구경이다. 재래시장에 가면 풋풋한 생활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잃어버린 유년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이다.
오늘도 일찌감치 점심을 끝내고 장 구경에 나섰다. 매번 만나는 그 모습 그대로일지라도, 장터를 한 바퀴 휘 둘러보고 온 날이면 느슨해진 일상으로부터 다시금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되곤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도 달라져 버린 풍경에 호주머니 속의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맛보게도 된다.
일여덟 살 어린 시절, 고령 오일장은 무척 즐겁고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시골 무지렁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게만 보였다. 재를 여남은 개나 넘고 신작로를 타박타박 걸어야 하는 고단한 길이었지만 마냥 설렘이 있어 좋았다. 장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현듯 할아버지의 영상이 흘러간 영화장면처럼 오버랩 되어 온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건어물 전 일을 보셨다. 손님이 물건을 골라 놓으면 코끝에다 안경을 느직이 걸치고 서툰 솜씨로,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한 줄에 알이 여섯 개짜리인 주판을 튀기며 계산을 하시던 당신의 지난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을 거둔 뒤엔 귀갓길에 다리가 떨어져 상품성을 잃은 오징어나 문어 같은 먹을거리들을 허리춤에다 차고 오시곤 했다. 그 덕분에 오일장이 열리는 날 우리 가족의 저녁 밥상은 늘 한결 풍요로웠던 것 같다.
아버지도 고령 우시장의 터줏대감이었다. 소와 함께 우시장에서 푸른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아버지, 올망졸망한 자식들 건사하느라 칼바람 부는 세파와 씨름했던 고단한 날들의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 같아 나는 자주 우시장을 배회하기도 한다.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이 그 무엇이 있을 것인가. 몇 해 전부터 고령에도 대형 할인매장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주차가 편리하고 물건이 갖추갖추 준비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그리로 몰리게 마련이다. 그 바람에 고령 오일장도 예전의 활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 줄기 휑한 바람이 옷자락을 쓸고 지나간다.
하지만 마트들이 아무리 번성한다 해도 거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향수의 시그널이다. 대장간의 차랑차랑한 쇠망치 소리며 뻥튀기 가게의 구수한 튀밥 냄새며 울긋불긋 차려입은 각설이의 우스꽝스런 모습은 마트 같은 데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고향의 정취가 아닐까. 어쩌면 그런 옛것의 마력에 홀려 꿈속을 헤매듯 재래시장을 어슬렁거리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고령 오일장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쇠락해지긴 했지만, 장터의 풋풋한 인정만큼은 오래오래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의 고향으로 영원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각설이 타령이 귓전에 감겨든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소리다.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 약력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산과 들의 품에 안겨 자라다, 큰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지론을 좇아 열다섯 살에 대처로 나와 줄곧 서른여섯 해를 살았다.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무 남은 해 동안 대구 심인고, 경상고 등에서 국어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오다 2008년 늦은 가을 고향의 흙냄새, 풀냄새가 그리워 낙향하였다.
1991년 《수필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가슴으로 주운 언어들』, 『빼빼장구의 자기위안』,『빛깔 연한 꽃이 향기가 짙다』, 『우시장의 오후』 등의 수필집과 산문집 『에세이로 풀어낸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수필 선집 『여자와 함께 장 보는 남자』, 세태비평집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 수필 쓰기 지침서 『곽흥렬의 명품 수필 쓰기를 위한 길라잡이』등을 내었다.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흑구문학상 젊은작가상, 한국동서문학 2012년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2012년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을 수여 받았다.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영남수필문학회 회원이다.
후학들을 기르는 데도 힘을 기울여, 경주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과 대구문화방송 부설 문화강좌, 육군3사관학교 그리고 경북 청도도서관 등에서 수필 창작 강의를 하면서 매일신문, 부산일보, 전북일보 등의 신춘문예와 평사리문학대상, 신라문학대상, 시흥문학상, 천강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등의 유수한 공모전에 많은 제자들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고령신문 사외 집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필생의 업으로 삼고 서른 해 넘게 수필 창작에 열정을 쏟고 있다.
* e-mail : kwak-pogok@hanmail.net
첫댓글 그제 고령장날 다녀왔습니다. 내 소유의 선산의 명의 이름 끝자가 틀려 바로 잡으러~. 읍사무소와 등기소 들락날락 ....
재산가치는 없으나 선산이라 장남한테 조만간 증여하려고 합니다. 죽기 전에 ㅎㅎㅎ 먼 훗날 골프장이라도 들어서면 돈 좀 되려나 ㅎ
장터 안의 국수집이 그대로 성업 중이었고 시외버스터미널 쪽의 추어탕집도 그래로 있어 많이 반가웠습니다.(추어탕으로 점심!)
그향이라 그러했겠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건강에 유의하세요~
고령장 대장간이 있어서 한참 구경하고
그랬습니다~고령장이 꽤 크다고 생각했고
기회가 되면 다시 또 놀러가봐야 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