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을 찾아가는 차량들이 편도 1차선 산악도로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행 중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조바심은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프칸 나발루 전망대에서 키나발루 고봉만을 감상한 후 출발한 터라 아무데라도 차를 세워준다면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행 6명이 단체로 움직여야 하므로 혼자만의 산행은 욕심에 불과한 일이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속도로는 좀처럼 목적지에 닿을 것 같지 않던 차량도 때가 되니 드디어 목장 앞에 당도했다.
이 나라에도 우리 해병대처럼 군복에 주황색 명찰을 붙인 나이 든 예비역들이 목장 입구에서 교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목장 코앞인데도 들고나는 차량들이 서로 먼저 진행하려고 얽혀 한참이나 꼼짝을 못했다. 어렵사리 차량을 주차한 후 목장을 들어서자 예상대로 탐방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많은 걸로 봐서 대부분 자국인 말레이시아나 인근 동남아에서 온 관광객들로 보였다. 평일인데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목장을 찾은 게 신기했다. 목장을 찾은 사람들은 목적이 있었을 터이다.
젊은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젖소와 염소를 가까이에서 만나는 목장체험을 안겨주고 싶어했을 것이고 미식가들은 목장에서 생산한 아이스크림이나 요구르트와 같은 유제품을 실컷 먹어보고 싶어서 찾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수목원처럼 잘 가꾼 조경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식물이 내뿜는 피톤치드라도 마셔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일행에겐 목장이 키나발루국립공원에서 관광명소로 꼽히는 곳이라 가이드가 안내한 것 같았다. 별로 넓지 않은 면적에 많은 관람객이 동시에 몰리다보니 목장이 아니라 시장바닥처럼 왁자했다.
얼굴만 내놓은 채 머리에서 가슴 부위까지 천을 늘어뜨려 상체를 가리고도 여성들은 유달리 사진촬영에 열을 올리는 게 특이했다. 운집한 관람객들로 목장건물 내부는 통로가 막혀 혼잡했다. 유제품 빙과류 판매코너에 몰린 관람객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지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곳이 시끄러운 중국이었으면 어쩔 번 했나 싶었다. 중국인들에 비하면 이들은 문화시민으로 대접받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혼잡 속에서도 수줍음 많은 가이드는 용케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하나씩 나눠주었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가이드에게 선물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아이스크림은 일찍이 다른 곳에서 체험하지 못한 독특한 맛으로 혓바닥을 살살 녹였다. 다른 유제품들도 맛은 비슷할 터이니 사람들은 기를 쓰고 이곳 목장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대관령목장에선 탐방객들이 양들에게 건초를 줄 수 있도록 한다면 이곳에선 갓 채취한 싱싱한 풀을 제공토록하고 있어 온대지방 가축들은 그만큼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이 나눠주기 체험은 주로 어린 자녀들에게 맡기고 부모들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들은 부모가 요청하는 말귀를 알아듣고 포즈를 취하지만 젖소나 염소는 그렇게 영리하지 않았다. 딴청을 부리는 젖소와 염소에게 포즈를 주문하던 엄마아빠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자 성질을 부리며 소릴 질러댔다. 자식사랑은 동물적이란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목장은 고산 키나발루 자락에 들었지만 먼 거리를 차량으로 올랐기 때문에 얼마나 높은지 고도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경사가 심한 대관령 양떼목장과는 달리 이곳 젖소들은 거의 평지에서 사시사철 싱싱한 풀을 먹을 수 있으니 야생과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맹수로부터 보호해주는 목장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니 팔자가 늘어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외양이 깨끗한 얼룩소들은 인기가 있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울타리 가까이 다가와서 그들을 배경으로 잡느라고 법석을 떨어도 동요되지 않고 마냥 무심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고산 날씨는 참으로 믿기가 어려웠다. 말짱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심술이라도 부리듯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곳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들만 순간 당황하여 우왕좌왕했고 대부분 사람들은 한차례 지나가는 비라는 것을 아는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보다 이곳에 뿌리를 박고 사는 열대우림을 생각해서 이렇게 자주 비를 내리는지도 모른다. 연평균 강우량이 2천mm를 넘고 연중 평균기온 27도를 유지해야만 살 수 있는 나무들이니 하늘의 보살핌이 없다면 생존 자체가 어려울 터이다. 서산으로 해가 약간 기울기 시작할 무렵 우리가 탄 차량은 목장을 빠져나왔다. 2시간 전과는 딴판으로 도로는 뻥 뚫려 원활한 소통을 보였다. 도로에 오가는 차량들을 지켜보면서 유럽까지 진출한 우리 한국 차가 여기서도 눈앞에 나타나주길 기다리며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든 차량은 끝내 보이질 않았고 대부분은 일본 차량이었다. 역사 속에서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차량도 보급되었을 터이다. 그에 따라 영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오른쪽에 장착한 핸들에 왼쪽차선 주행도 그대로 이식되었을 것이다. 집이라곤 거의 보이지 않는 산복도로만 달리는데도 산 아래에 숨은 집들이라도 있는지 도로변엔 한자로 만든 커다란 천주교회 간판이 자주 나타났다. 지역에 따라 성당이름이 각각 다른 걸로 봐서 이슬람국가이지만 천주교가 이 나라에 상당한 세력을 확장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천주교가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는지 북경시내에 서있는 모양과 흡사한 간판만 보일뿐 유럽풍 십자고상은 길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달리는 차안에서도 카메라 렌즈는 차창 밖 하늘을 변화무쌍하게 수놓는 하얀 뭉게구름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둥실 구름 밑으론 산비탈을 경작하며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집들도 자주 나타났다. 알프스 산장처럼 지붕과 외벽에 빨강과 파랑을 칠해 멀리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무채색 판잣집으로만 다닥다닥 붙은 히말라야 고지대 산간마을 집들보다 세련돼 보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도로변에 붙은 민박집 간판에 든 ‘홈스테이’나 ‘웰컴’ 글자는 거의 녹슬었고 함석지붕도 내려앉은 곳이 자주 나타났다. 폐차장으로 옮기지 못한 채 집 마당에서 썩고 있는 차량도 가끔씩 보였다. 산간마을들은 몇 개 부락이 만날 수 있는 지점에 장터를 만들어 생활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점포가 있는 곳에서 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지는 보도엔 함석이나 플라스틱으로 지붕을 설치한 캐노피가 이어졌다. 느닷없는 비를 얼마나 자주 만났으면 이런 대비까지 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 지붕도 이미 군데군데 쇠락하여 구멍이 뚫린 게 그들의 궁색한 삶과 닮아 있었다.
도로를 따라 배전선로도 끝까지 함께 달린다. 전기를 사용하는 수용가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선로 경과지만 도로를 따르고 전기사용은 산 밑 양지바른 곳마다 몰려있을 부락일 터였다. 수목이 울창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데도 지지물은 나무로 만든 목주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수명이 오래가지 못하는 단점 때문에 철재를 쓴 것 같았다. 지지물은 모두가 가느다란 철주였고 대부분은 새빨갛게 녹슬어 있었다. 방송과 통신용으로 보이는 대여섯 개의 굵은 케이블 다발이 연약한 지지대에 흉물스럽게 걸쳐져 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무게에 짓눌려 대부분 기우뚱한 형편이었다.
관리주체가 다르다보니 방송사와 통신사가 각각 지지물을 세운 모양인데 차로 달리면서 산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겐 볼썽사나운 장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로 약간 밑으로는 새로 건설하고 있는 배전선로 철탑도 자주 눈에 띄었다. 기존의 선로로선 늘어나는 용량을 소화할 수 없어 설비를 늘이면서 튼튼한 철탑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도로미관까지 고려하여 루트도 옮기니 난공사가 아닐 수 없을 터였다. 오전에 전망대를 출발하면서 가이드가 목장을 보러간다고 했을 때 난 어렵게 찾은 키나발루인지라 산자락을 더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이미 우리 부부보다 먼저 도착한 팀에게 오늘 둘러볼 코스를 알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인심이 얼마나 각박하게 변했으면 함께 여행하면서도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경우는 드문 세상이 되었다. 때론 서로 경계라도 하듯 냉랭한 분위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어쩌다 여행지 사진을 전하기 위해 메일주소나 전화번호를 받더라도 일회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데사목장을 떠나오기 전 가이드는 자신이 오늘 인솔한 여행객 6명을 세우더니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4가족 카메라로만 찍고 끝내려는 가이드에게 내 카메라를 내밀었다. 그는 한번만 찍으면 서로 나눌 거라고 생각했던지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정보를 쉽게 남에게 알리지 못하는 세상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사이버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릴 터이니 인정을 나눌 수 있었던 지난날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살벌한 마당에도 마음을 열고 자신의 연락처를 홍보하듯 적극적으로 알려준 코타키나발루의 대한남아 신진식과 현지인 Valw 두 가이드가 더없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