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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의 예언 후 사울과 헤어짐
삼상 15:28-35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삼상 15:28-35 / 그러자 사무엘이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내 옷자락에서 한 조각을 찢어낸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오늘 당신에게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찢어내어 당신보다 더 자격 있는 다른 사람에게 주셨소. 29)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셔서 거짓말도 하지 않으시고, 한번 판결을 내리시면 번복하지도 않소. 그분은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거나 자기의 판단을 뒤엎는 분이 아니오' 30)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간청하였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군인들과 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는 나를 왕으로 대접해 주시어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나와 함께 성소로 올라가 주십시오!' 31) 사무엘이 마음을 돌이켜 사울을 데리고 성소로 올라가자 그가 여호와께 제물을 바쳤다. 32) [아각을 처형한 사무엘] 사무엘이 길갈 성소에서 사울에게 명령하였다.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오너라!' 아각은 `이제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났구나!' 하고 좋아하면서 사무엘 앞으로 걸어왔다. 33) 그러나 사무엘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네 칼이 뭇 여인들을 자식 없는 슬픔으로 몰아넣었으니, 이제는 네 어미도 자식 없는 쓰라림을 당할 것이다!' 사무엘은 이렇게 외치면서 길갈 성소의 제단 앞에서 아각을 토막내어 죽였다. 34) 그러고 나서 사무엘은 즉시 라마의 집으로 돌아갔고, 사울도 자기가 왕의 도성으로 세운 기브아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35) 그 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만나지 않고 피하였으나 사울 때문에 늘 슬퍼하며 괴로워하였다. 여호와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것에 대하여 슬퍼하셨다.
사울은 이 일로 말미암아 결국 이스라엘의 왕에서 폐위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울의 회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아각을 처형함으로 성취되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합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예언(28-3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15장 전체에서 보이고 있는 사울의 행동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니기에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가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울은 끝까지 백성들에게 높임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인정받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사울은 회개하려 하지 않고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백성과 장로들 앞에서 나를 높여 달라고 청원합니다(30). 이제 사울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요, 자신의 존귀였습니다. 나의 명예와 존귀,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도 사울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은 천동설이 아니요, 지동설입니다.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내가 변하여 가고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치관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성취와 기도(32-35) 사울의 불순종으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아말렉 진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마무리 될 상황입니다. 이에 사무엘은 백성에게 명령하여 아말렉의 왕 아각을 끌어 오게 하고 길갈에서 아각을 죽입니다. 이로서 실패로 끝날 뻔 한 아말렉 진멸을 완수해 냅니다.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만 눈이 멀었던 사울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사무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길을 나아갑니다. 사울에게서 떠난 사무엘은 자신의 처소 라마로 돌아가고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울의 아말렉 진멸과 불순종의 소식을 들었던 사무엘이 온 밤을 슬퍼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사울을 왕에서 폐위시켰지만 사울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사무엘의 사명과 같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적 용 : 내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까?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화되기 위해 오늘 내가 행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고자 하는 우리 아이들. 어떻게 하면 엄마, 아빠에게 좀 더 잘 할까 고민하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내 마음에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나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살게 됩니다.
호크마 주석
=====15:28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 , 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 행 13:22). 주셨나이다(* , 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15:29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지존자(* , 네차흐) -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 ,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 ,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Keil, Fay).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15:30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 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미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5:31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O.V. Gerlach).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C.F. Keil).
=====15:32
아각이 즐거이 오며 - 여기서 '즐거이'(* , 마아단노트)는 '부드럽다', '느슨하다'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어근 '아단'(*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쁘게', '기꺼이' 등의 뜻이다. 아마도 아각은 자신이 왕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을 알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확신했던 것 같다(Clericus). 한편 '아단'이라는 동사에서 '복락', '기쁨', '환히' 등의 의미가 있는 '에덴'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창 2:8 ; 시 36:8).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다(R. Payne Smith).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Lange).
=====15:33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 출 21:24, 25 ;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애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다(왕상 18:40). 찍어 쪼개니라 - 기본 동사 '솨사프'(* )는 '여러 조각내다'(cut in pieces) 또는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15:34
사무엘은 라마로...사울은 기브아 본집으로 -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에 대해서는 1:1주석을,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Gibeah)에 대해서는 10:26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15:35
사무엘이...사울을 다시...보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한다. 즉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23, 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11절 및 29절 주석 참조.
< 설 교 >
사울이 죄를 고백함
삼상 15:24-35
사무엘의 책망을 듣고 사울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으나 진실로 통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미스바에서 우상을 섬겼던 백성들의 고백과 같지 않았습니다.(삼상7:6)
1. 자백의 성격
①자신이 스스로 느끼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기에 억지로 한 고백이었습니다.
②또 결과가 두려워서 한 고백이었습니다.(23, 26절)
죄가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 아니라 사울은 그 나라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과 백성들이 자기에게 불복종할 것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한 고백이었습니다.
③또 사울의 고백은 하나님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에게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호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4, 25절) 진실 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고 죄의 극악성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시25:11절)
④자신을 자인하기보다는 정상 참작을 바라는 내용이었습니다.(24:15절)
⑤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보다는 체면을 내세웠습니다.(30절)
사울이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높이는 것보다 겸손을 바랐어야 합니다.
⑥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겠다는 것보다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반복한 것뿐입니다. 사무엘의 책망의 진의를 모르고 제사를 드림으로 칭찬을 들을 수 있는 대중적 예배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울의 인격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신실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경배하겠다는 반복이나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의 충고를 멸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좋은 점이라고 봅니다.(왕상21:20절)
2. 자백의 결과
사무엘의 지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①하나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상실 시킨다는 것을 세 번이나 선언했습니다.(26, 28절)
신실치 못한 죄의 자백은 먹구름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더 캄캄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 자신이 스스로 그 결과를 자초했다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았을 때 그것이 찢어졌습니다.(28절)
②죄 때문에 몰수권 존엄성은 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양도될 것이 암시되었습니다.(12:14절) 12:14절에 하신 하나님의 뜻은 변개(變改)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다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대상은 비밀로 되어 있었으나 그때부터 사울의 중심에 의심과 증오가 싹텄을 것입니다.
③완고한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공개되었습니다.(32절)
아말렉과 아각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완고한 죄인에게 조만간 내려질 일종의 엄숙한 경고였습니다.
3. 우울한 작별(34-35절)
사무엘과 사울간의 회담은 끝났습니다. 그것은 두려운 회의였고 일생의 작별이 따르는 모임이었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라마에서 출발했고 믹마스에서 끝났습니다. 사울은 라마에서 사무엘을 만났는데 그때는 겸손, 신중성, 관용과 고상한 기품을 소유한 모습으로 장래가 촉망되었는데 믹마스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실수를 한 곳으로 이후 반기 모습은 고집, 건방짐, 불복종, 이기주의 등으로 점철된 생애로서 지극히 타락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심히 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래서 사울과 우울한 작별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①더 이상 협조가 불가능했습니다.
②어떤 유익한 영향력을 줄 수 없었습니다.
③사울의 행위에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떠난 것은 잘못된 일에 대한 정죄였고, 진리와의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괴롭고 무거운 마음으로 길갈에서 라마로 행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 삼상 15장 22-24절
우리는 살아가면서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힘들어도 끝까지 붙잡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붙잡아야 할 것은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은 붙잡음으로 비참하게 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왕입니다.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와 사울왕을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23절 말슴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왕에게 있어 인생최대의 실수는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버리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말씀을 붙잡은 다윗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말씀을 즐거워했습니다.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의 맛을 알고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했습니다. 말씀에 늘 귀를 기울였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항상 몸부림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크게 사랑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증 높은 자리로 높여주셧습니다. 온갖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다윗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족족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기도하면 귀기울여 들으시고 기꺼이 응답하시고 구한 것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살아가며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말씀을 붙잡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속에 지식과 지혜를 담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속에 약속과 능력을 담아 두셨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말슴으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말씀과 가까와져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집에 꽃을 가득 채우고 수시로 꽃나무를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고가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온집에 고가구로 가득채우고 시간만 나면 반질반질하게 닦고 만집니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하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가까이 합니다. 시편기자는 1편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즐겁게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분들은 가장 큰 특징이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간절히 기다리고 말씀 듣는 것을 가장 즐거워합니다. 말씀을 더 알고 싶어합니다. 말씀을 온갖 방해하는 일들이 있어도 다 극복하고 말씀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재미있게 여깁니다. 말슴보다 다른 것을 더 의식하고 주저합니다. 말슴이 그의 마음과 생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작습니다. 말씀으로 만족을 얻으려하기 보다는 다른 것에서 만족함을 찾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사울은 사무엘에게 변명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을 더 크게 생각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가벼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말씀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즐거워하십니까? 말슴을 가까이하고자 말슴을 듣고자 은혜의 보좌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오십니까? 더 깊이 깨닫고자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기록된 말씀을 펼치고 밤낮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버리고서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말슴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유학간 어느 대학생이 이민 2세인 클레스 메이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그러자 고민하는 유학생에게 친구는 그 비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전을 곁에 두면 좋아. 차에 한 권 두고, 침대에도 한 권 두고, 책상에도 한 권 두고, 그리고 언제든지 사전을 볼 수 있도록 해. 그것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열쇠 중의 하나야."
항상 풍성함을 하나님께 공급받아 영적으로 건강하고 샘솟는 은혜를 맛보며 살기를 원하신다면 같은 원리를 실천하면 됩니다. "가는 곳마다 성경을 가까이 놓으세요. 침대 옆에, 차에, 가방에, 거실에,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세요. 교통 체증이 심하여 차가 막힐 때는 쓸데없이 짜증내지 말고, 잠시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하세요. 어디를 가든지 성경을 가지고 다니다가 읽으세요. 아니면 성경을 암송카드를 가지고 다니며 묵상하거나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다니세요."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민족에게 항상 형통하려면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말씀을 사랑하여 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2.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22절을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 해석하면 예배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고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보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사울왕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선지자를 통해 중요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이엇습니다.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군인들은 물론 아말렉 족속을 다 멸하라. 우양과 약대와 나귀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병사 12만을 거느리고 아말렉군대를 순식간에 섬멸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진멸시키려고 하였으나 점차 그것들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점차 하나님의 이 명령을 불순종하고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죽이지 않고 끌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끌고 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인하여 탄식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삼상 15:11)" 사울은 수만명을 죽였지만 중요한 사람을 살려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엘의 책망에도 당당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얼핏보면 순종한 것 같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잇습니까? 사단의 미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여 불순종을 충동입니다. 사울은 좋은 양과 소를 죽이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런차에 부하들이 "이놈은 죽이지 말고 산채로 끌고가서 하나님께 제사할 때 쓰면 좋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또 아각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끌고가면 백성들이 더 왕의 명성을 높일 것입니다. 하였을 것입니다. 그순간 사울은 좋은 변명거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사무엘이 책망하자 백성들의 핑게를 대는 것입니다.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습니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왔습니다.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을 다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통하여 순종의 본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뜻과 감정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따라 순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순종으로 모든 사람을 다시 의롭게 될 수 잇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순종하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의인이 됩니다. 자기 행위가 불의하고 죄로 얼룩져 있어도 순종하고 믿기만 하면 한순간에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분이 우주의 주인이고 우리는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은총을 받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관계는 깨어지고 준엄한 심판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불순종한 사울에게 어떤 결과가 임합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던 사람이 변하여 제사장 85명과 아내와 자식들마저 죽이는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악신에 사로잡혀 늘 괴롭힘을 당하고 번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질투와 시기와 분노의 종이 되어 자신과 가정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잇습니다.
100여년전 지구 반대편의 미개한 땅에 찾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26살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입니다. 언더우드의 기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 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언더우드의 순종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교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당시 가장 가난하고 절망적인 이땅이 세계가 놀라고 부러워할만큼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능동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큰 복과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시골 촌놈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훌륭한 선지자가 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다윗과 같이 유능한 신하가 보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말씀을 버림으로 인해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악신에게 사로잡혀 비참하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다윗은 왕의 자리도, 쓰임받을 기회도, 온갖 좋은 축복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아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윗처럼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여 온갖 좋은 하늘의 복을 하나님께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삼상 15장 22절 / 서윤발목사
Ⅰ. 서 론
학생들이 대학 시험을 치르거나 직장인들이 회사에 입사할 때 이제는 시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면접이다. 시험은 그 사람의 학업능력만 알려 주지만 면접은 그 사람의 성품, 그 사람의 특기 등 여러 가지 모습들을 다 불 수 있게 해 준다.
면접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대략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비판능력이 있는가?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말 쏨씨가 있는가?
단정한 외모를 갖추고 있는가?
예의가 있는가?
그런 것을 본다.
그래서 이런 점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학업을 잘 감당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이 회사의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신뢰감을 주어야 선택이 되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평가하시는가?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일에 쓰시는가? 그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와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야 저 사람,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겠다' 그런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세상에서도 이제 단순한 능력이나 기술을 보고 사람을 뽑지 않고 전인적인 자세를 보고 뽑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뽑고 사용하실 때 어떤 능력이나 지위를 보고 선택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EX) 얼마전에 장로로 계시던 어느 분이 대통령에 선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나보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나 보다. 그렇게 수근거렸습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그렇게 귀중하게 사용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는 기준과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모세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처음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몇 가지 지침을 듣고자 합니다.
Ⅱ. 본론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모세가 세상에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민족은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은 수 백년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해왔지만 애굽은 이스라엘이 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산아제한 정책을 썼는데 특히 이스라엘 중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세의 부모도 모세를 낳았을 때 이런 명령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자기 아들을 죽일 수가 없어서 목숨을 걸고 아이를 몰래 숨겨서 키웠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모세의 부모는 애굽의 공주가 강가에서 목욕을 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갈대 상자에 넣고 강물로 떠내려보냈다.
애굽의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고 자기 양아들로 삼았고 모세의 친어머니는 모세의 유모로 들어가서 모세를 키웠다.
그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다 힘들고 어렵게 생활했어도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세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이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겠다는 결심을 가졌다.
모세는 그것이 자기 인생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러나 모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애굽을 돌아보고 있는데 그 때 마침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말린다는 것이 그만 화가 나서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모세는 자기 민족을 단 한 사람도 도와주지 못하고 미디안이라는 광야로 도망을 가서 살게 되었다. 애굽의 왕자로 40년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버림받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으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는 말씀처럼 아무리 좋은 뜻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인생이 이런 식으로도 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튼 모세는 광야로 도망을 쳤는데 거기서 그래도 이드로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해서 한 40년 정도를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로 살았다.
40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가?
40년을 양치기로 살았으니 이제 그 옛날에 배웠던 학문은 다 잊어버렸다.
왕자로서의 그 당당했던 위풍도 사라졌다.
용기도 없다.
그저 평범한 양치기가 되어서 광야에 뭍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40년이 지나고 모세가 80세가 되던 어느 날이었다.
모세는 마음을 정하고 완전히 양지기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어느 날 모세가 산을 오르다가보니까 한 떨기나무에 불이 활활 붙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나무는 타지 않는 거다. 사실 광야에서는 뜨거운 대낮에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불은 보통 불이 아니다. 불은 붙었는데 나무는 타지 않았다.
그래서 구경을 하려고 가까이 갔다가 거기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모세야! 모세야!"
하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을 듣고는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다시 애굽으로 가서 고통받는 네 백성 이스라엘을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인도하라' 하는 그런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그 명령은 알고 보면 옛날에 모세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젊은 혈기 때문에 실패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다시 시키시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학문도 다 잊어 버렸고, 나이도 들었고, 왕자의 신분도 없고, 말도 못하는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그 명령을 거절했다.
나는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일을 시키시는데 나중에는 진노하시면서 까지 가라고 명령하시니까 나중에는 모세가 할 수 없이 간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본문의 내용을 읽으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들이 생깁니다.
1. 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을까?
그중에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로서 나타내실 때 왜 하필이면 떨기나무를 선택하셨는가? 하는 거다.
'떨기나무'는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인데 가시가 많고 앙상한 나무다.
다 자라도 1-2m 정도 밖에 안 되고 가늘어서 아무 곳에도 쓸 수 없는 나무다.
그래서 성경을 찾아보면 이 가시나무는 늘 안 좋은 이미지로 비유된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이 나무는 나무라고도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나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나무에 불을 붙여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셨다.
왜 그랬을까? 이 나무말고도 다른 나무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왕 불을 붙여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려면 거대한 상수리나무, 수십 미터나 되는 그런 나무에 불을 붙게 하시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신다면 얼마나 멋진가?
EX) 오래 전에 시골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지원해 주고 마지막날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전도도 하고 폭죽놀이를 하는데 비가 부슬 부슬 내려서는 폭죽들이 젖어 버렸다. 그래서 터뜨리니까 조그만하게 불꽃이 퍼지면서 높이 올라 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재밌다는 듯이 보기는 하는데 별로 감흥이 없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직 젖지 않은 폭죽이 있었는지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하늘 높이 올라가서 불꽃이 확 퍼지니까 모인 사람들이 쳐다 보면서 탄성을 지르는 거다. 웅장하다. 멋있다. 대단하다. 그러는 거지요.
그렇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크고 웅장하고 뭔가 있어 보여야 감흥을 느끼고 또 그 앞에 숙이게 되어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이왕에 불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실 것 같으면 수십 미터 되는 그런 상수리 나무같은데다가 불을 확 붙여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셨더라면... 그리고 그 불꽃이 날아와서 모세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라도 확 살라 버렸으면 아마 모세가 그 순간부터 땅에 바짝 엎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1,2m 밖에 안 되는 그런 나무에 불을 붙이셨으니 웅장한 모습은 아니다.
나무가 타지 않아 보기에는 신기했겠지만 위엄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서 모세도 처음에는 그 나무에 붙은 불을 구경했다고 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뭔가?
그것은 떨기나무에 붙은 이 불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있는 분인가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임재의 상징인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자에게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은 초라한 자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1)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줄 잎사귀도 없었다. 가시뿐이다. 열매도 없다. 꽃도 없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다.
2) 그리고 또 모세 역시 떨기나무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위풍당당함도 없다. 학문도 잊어버렸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장인의 양떼를 돌보는 고용된 목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임하시고 그런 사람을 부르셨다.
그러면 낮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사람을 선택할 때 신분 높은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사람을 선택할 때 능력있는 사람을 선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서 낮은 자, 자신을 낮추는 자를 선택하신다.
고린도전서1:27을 보면 "...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했다.
이 선택의 원리를 잘 이해 하셔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로 서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쓰임을 받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왜 40년이 지나서야 모세를 부르셨는가?
둘째로 이 본문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되 40년이 지나서 부르셨느냐는 거다.
이왕이면 모세가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자기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을 때,
그 때 명령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으면 더 좋았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40년이 지나서, 이제 정말 아무 것도 못한다고 포기하고 위축되었을 때, 그런 명령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모세를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물론 40년 전에도 모세는 민족을 구해야 겠다. 그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 모세는 민족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능력, 자기 지혜, 자기 권세를 이용해서 모세 자신이 민족을 구하려고 했다.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듣고 구하고 순종하는 자세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젊음도 사라지고, 지식도 사라지고, 용기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부르셨다. 그리고 가라 하신다.
그러나 이제는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여 주시고자 하신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서“내가…하리라, 내가…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10절을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 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모세의 능력은 필요없다.
다만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모세는 처음에 그 명령을 거절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4장 1절을 보면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그랬다.
나는 못한다는 거다.
나는 능력이 없다는 거다.
모세는 아직까지 자기가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다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가 해야 할 일은 순종하는 자세다.
사람을 사용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사항은 능력과 재능, 권세와 힘이 아니다. 순종하는 자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세는 이 후에 애굽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시키시는 그대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순종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사람,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될 사람을 찾으신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순종이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리를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Ⅲ. 결 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다.
그러나 모세가 젊고 능력있을 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무 능력없을 때 부르셨다.
모세가 혈기 왕성해서 자기 뜻대로 일을 행하려 할 때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저 말씀 앞에 순종할 때 부르셨다.
그리고 그런 모세를 통하여 큰 일을 이루어 주셨다.
여러분, 모세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고 쓰임받는 도구가 되기 바란다.
요한복음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했다.
어떤 인생이 귀중한 인생이 되겠는가?
EX) 전 세계 여러 민족 중 자살을 제일 많이 하는 민족은 인도 사람들. 인도에서는 1분에 1명씩 자살을 하는데 그것도 18세에서 25세까지의 젊은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삶의 목적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 불교다. 삶의 분명한 목적을 중시하지 않는다. 다만 왔다가 가는 덧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가치관이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삶을 헛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삶이 헛된 줄 알았다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더욱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결코 후회없는 인생, 귀중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겠다 하셨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또 그 원리대로 쓰임받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 인생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끝내 기회를 놓친 사울
전승문목사 / 삼상 15:22~27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또한 믿음이 있으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서도 말씀을 믿으면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합니다. 어떤 말씀 어떤 명령이든 하나님을 정말로 믿으면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너무나도 어려운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순종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을 명하시는 겁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해야 하는데 그저 묵묵히 성을 돌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쳐야 하는데 고작 300명만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풀무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 사자굴로 뛰어들라고도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어째서 그토록 순종하기 힘든 것들을 명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해주시려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내 힘으로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보여야 하는 겁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으면 순종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반드시 순종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말씀 그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시험을 당하는 것 그건 좋은 겁니다. 왜냐면 시험은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험에 응시할만한 자격이 있어야 그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당하는 건 그 시험을 칠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험하시는 겁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약속을 이루어주시려고 시험하시는 겁니다. 시험을 이겨내면 약속하신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주시려고 시험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시려고 아브라함에게 그 시험을 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당하거든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2~4)” 시험은 우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고 주시는 겁니다. 풍성한 은혜, 놀라운 은혜,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시험을 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은 답이 이미 다 공개된 시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답을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시험입니다. 그 답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려는 시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험은 믿음이 있으면 통과할 수 있고 믿음이 없으면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인 겁니다. 참 감사한 건 하나님은 시험에 떨어져도 또 기회를 주신다는 겁니다. 7번 넘어져도 8번 기회를 주십니다. 아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다만 회개하면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 언제까지든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십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기회가 사라집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런데 기회는 언제나 시험과 같은 말입니다. 시험을 통해 기회를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기회인 겁니다. 믿음이 있으면 통과하고 믿음이 없으면 떨어지는 기회인 겁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사울에게도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중요한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사실 사울은 그동안 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회가 사울에게 주시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다시 기회를 얻게 된 건 그 곁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아들 요나단이 그 곁에 있었던 겁니다. 또한 사울을 위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를 쉬지 않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이 여전히 사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산 겁니다. 아들 요나단의 믿음 덕분에, 그리고 사무엘의 기도 덕분에, 지금까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울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울에게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기회,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언제나 시험으로 찾아옵니다. 성도는 시험을 통해서만 믿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에게 기회를 주신 겁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2절~3절)”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성도들이 힘들어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이런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아예 진멸하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너무 잔인한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너무나도 잔인한 명령을 내리시는 겁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멸은 헤렘(חרם)이라는 말인데 완전히 없애버리는 겁니다. 사람은 물론 가축까지 땅도 집도 가구도 의복도 다 태워 없애는 겁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 다 죽이는 겁니다. 그것이 헤렘입니다. 그것이 진멸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째서 이토록 잔인한 명령을 하시는 것일까요?
헤렘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헤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일체의 차별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튀르기예에서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10여 개 도시가 초토화되고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재해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겁니다. 왜 그러시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지진이 일어날 때 여자와 아이라고 재난이 피해갔을까요?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지진이 피해갔을까요? 아닙니다. 지진은 아무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도 아이도 짐승도 지진은 다 똑같이 대했습니다. 홍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수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산불도 마찬가지고 폭풍도 마찬가지고 하늘이 하는 일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일체의 차별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의 성현인 노자는 도덕경 5장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성인불인(聖人不仁) 이백성위추구(以百姓爲芻狗) : 천지는 인자하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고 성인 역시 인자하지 않아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자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자연의 재해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취급받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뜻을 아는 성인도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일체의 차별이 없어야 세상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헤렘을 명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일이니까, 하나님의 방식으로 집행하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그렇기는 해도 순종하기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해도 한 민족을 완전히 진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을 치기는 했지만 헤렘을 시행하지 않은 겁니다 :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7절~9절)” 사울은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했습니다.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은 살려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아말렉의 왕 아각도 살려두었습니다. 아마도 아각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 사울이 어진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말렉이 불쌍해서 그래서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도 살려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욕심이 생겨서, 아까운 마음에 그런 겁니다. 또한 자신에게 효용가치가 있어서 살려둔 겁니다.
헤렘은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전체를 통째로 하나님께 다 드리는 겁니다. 죽여서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남겨둔 것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겁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인데 도둑질해서 가로채는 겁니다. 감히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겁니다. 사울이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각,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울은 마지막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울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1절)”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사무엘이 근심하여 밤새도록 부르짖어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사울이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겁니다. 갈멜에 전쟁기념비를 세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전쟁을 이긴 것이 자기 공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왜 그랬냐고 물었습니다. 분명히 진멸하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했는데 왜 그랬냐고 물은 겁니다. 그러자 사울이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15절)”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져왔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이건 하나님께 제사지내는 게 좋겠다고 해서 가져왔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가져온 것이 아니고 욕심이 생겨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전쟁이라 생각해서 전리품으로 챙겨온 겁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을 우롱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19절)”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욕심에 눈이 가려서!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0절~21절)” 회개하지 않는 겁니다. 핑계를 대고 구실을 대며 회개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사울은 끝내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이 말씀했습니다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2절~23절)” 자꾸만 제사를 구실로 삼아 핑계를 대자 말씀하는 겁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유명한 말씀입니다. 반드시 기억하고 또 마음에 새겨야 하는 말씀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겁니다. 말씀을 믿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사울은 백성들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셨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만 살핀 겁니다 :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30절)”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만 바라본 겁니다. 그렇게 사울은 모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35절)”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며 후회하시게 하면 안 됩니다. 나를 세우신 것을, 나를 이 자리에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게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선악과를 버리고 믿음을 회복하라고 주신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을 보일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좋은 겁니다. 그러니 순종하며 사십시오. 말씀에 언제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사십시오.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시험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중요한 시험입니다. 믿음으로 이겨내십시오. 믿음으로 홍해바다를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기다리면서 반드시 순종하십시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이겨낼 수 없는 것을 이겨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꿈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지금 그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기회가 어려운 문제를 통해 시험을 통해 찾아온 겁니다. 그게 시험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순종하여 그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맛보십시오.
회개와 용서
삼상 15장 22~23절 / 조용기목사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계신 것을 우리는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됩니다. 입술의 고백입니다.
입술로 담대하게 고백하지 아니하면 한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서론>
저는 “회개와 용서”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사람 중 형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모두가 다 잘 되기를 원한다고 믿습니다. 못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삼성경제연구소와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만 18세 이상 되는 남녀 1천 605명을 대상으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실시하면서 행복의 조건을 물었습니다. 그 결과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이 70이 넘은 사람은 행복하기 틀렸지 않습니까? 젊음이 좋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남보다 잘 사는 것’ 그리고 ‘많이 배우는 것’그 뒤를 이어 그 다음 ‘종교를 갖는 것’이고 ‘가족과 여가를 보내는 것’ 등이 행복의 조건으로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사람 가운데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뭐 여러 가지 조건을 말했지요.
젊음이 있어야 된다. 부자여야 된다. 좋은 가족관계를 가져야 된다. 그런 것 다 있지만 그런 것은 다 있다가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화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될까요?
“아 나는 회개할게 없는데요 뭘 회개할까요?”회개할게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우상화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자기의 우상화를 회개
우리가 제일 먼저 회개해야 될 것은 자기를 우상화하는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 전체를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 지혜로 살고 내 총명으로 살고 내 노력으로 살고 내 힘으로 산다. 주님은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내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으로 살려면 인생이 고달프기 짝이 없다. 고달픈 인생을 내게 가져오면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하는데 그러지 않고 나는 나를 의지하고 살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도 자기를 의지하고 살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큰일까지 와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큰 문제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적은 문제도 주님께 와서 맡기면 돌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전부 자기가 스스로 일하려고 하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 127:1~2)고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도우지 아니하면 끝장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끝이 무너지고 말아요. 그러므로 자기의 우상화를 철저히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로 24절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지혜와 총명의 근본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맹을 자랑치 말고 부함을 자랑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얼마 안있다가 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자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의 한 구석에 조그마한침 드러내어 하나님께 의지하고 어려울 때 도움만 청하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100%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일터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고 한 그 사이에 우리 삶을 100% 주께 맡긴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켜 놓고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필요할 때만 와서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의지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는 내 마음에 한구석만 내어 드리고 어려울 때 자기의 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를 원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조그마한 구석만 주님께 내놓고 내 어려울 때만 와서 도와주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관심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 이것은 대단히 유치한 신앙인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로 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범사, 자고 깨고 일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 인정하라. 어떻게 하나님 인정합니까? 말로써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함께 합시다. 하나님 이 일을 이끌어 주십시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어떠한 죄와 불의와 추악한 일을 했을지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화해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히브리어로 ‘슈브’인데, 그 말은 ‘길을 바꾸다’, ‘되돌아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 중심에 있는 죄에 대한 영적 자각으로 마음이 변화되고 생활을 돌이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시편에서는 “통회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예레미야는 “죄를 자복하는 것”이 회개라고 말했고, 에스겔은 “죄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였고, 호세아는 “야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스바냐는 “야훼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회개란 말을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마음의 변화와 돌이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한다”라고 할 때에는, 그저 마음으로만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깊은 책망과 가책으로 죄에서 180도로 생활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후회만 자꾸하는 것은 회개 아닙니다. 회개라는 것은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찰스 피니는 “회개란 나의 의지와 느낌과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오던 것을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내 뜻대로 살던 것을 하나님 뜻을 따라 사는 것으로 바꾸는 그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회라는 것을 회개라는 것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그랬다.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 그렇게 행동하지 말걸 그랬다. 그것은 후회입니다. 후회는 100번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단호하게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욕하던 것 이제는 욕 안해야 되겠다. 화내는 것 이제 화 안내야 되겠다. 술 마시고 담배 폈던 것 이제는 포기한다. 등을 돌린다. 그렇게 행동을 바꾸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지금까지 불순종한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2. 불순종을 회개
지금 잘못한 것 뿐 아니라 지금까지 불순종하고 살아온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열심이었고 폭력과 잔인한 악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 불순종하고 사는 것이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설교하라. 40일 이내에 돌아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늘 침공해 들어오고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가 멸방받기를 원하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요나서 1장 1절로 3절에 “야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야훼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야훼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 가는 정반대가 다시스입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지중해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서 정반대로 도망을 치면 내가 니느웨 가지 못할터이니까 그러므로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설교를 안해야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을 수 있으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받기를 원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했는데 여기에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듣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고 듣지 않고 반대적으로 행하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갑자기 대풍랑이 와서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요나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야훼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대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파괴될 지경입니다. 사공들이 모든 화물을 바다에다 던지고 배의 기구도 던지고 하는데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선실 밑창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에 뭐 니느웨는 안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139장 7절로 10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러니 하늘과 땅과 세계 어느 곳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이곳은 하나님이 안 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바로 그 자리에 계셔서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옛날에 부산에서 제가 잘 아시는 분을 그 부인이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에 모시고 나왔는데 예배 볼 동안에 담배가 피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예배를 다 드리고 신속히 집에 들어오자마자 담뱃불을 붙였습니다. “여보, 주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왔는데 왜 담배부터 피웁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지붕이 있어서 하나님이 못 내려 보신다. 우리집은 지붕이 아주 두껍게 되어있다.” 아무리 지붕이 두꺼워도 우리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기가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바람처럼 공기처럼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공들이 굉장히 배가 파선지경에 이르니까 우리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왔는지 제비를 뽑자. 이유없는 재앙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재앙이 다가오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는 시골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무당을 데려오고 점쟁이를 불러서 점을 치고 하는 것은 이 재앙이 무엇 때문에 오는가, 누구 때문에 오는가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1장 9절로 12절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야훼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야훼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제비를 뽑으니까 제비가 요나에게 딱 떨어졌거든. 그래서 사공들이 요나를 보고 네가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진노하사 풍랑을 내리셨는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막으려고 이 큰 풍랑을 보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그는 죽더라도 원수의 나라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배를 저어서 항구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로 던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주 독한 사람입니다. 안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주 니느웨 사람 너 죽고 나 죽고 같이 죽자. 그만큼 니느웨 사람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다에 던져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잠 16:9)
죽고 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됩니다 여러분, 죽는 것도 하나님이 눈을 감아야 줘야 죽지 마음대로 죽지는 않아요. 사는 것도 하나님 은혜로써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죽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가니까 일본에 1년에 3만명 이상씩 자살을 한다고 그래요. 세상에 1년에 3만명 이상 자살을 하니 일본이 이렇게 되어서 되겠느냐.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쉽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요나 보십시오. 죽으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죽어지지 않습니다.
요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살았던 선지자로 하나님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대해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괴롭혔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 것입니다. 앗수르의 서울인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니느웨가 더 처절히 타락하여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 후, 요나는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했다가 요나가 떨어지는 것 덥썩 마셔버렸습니다. 물었으면 죽었을 것인데 이빨이 없었던가 봐요.그 고래가 그냥 마셔버렸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난 다음에 주님이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 반드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를 갖고도 거역할 때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순종하면 큰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우리의 모습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도 여러분, 3일을 견뎠습니다. 3일 견디고 난 다음에는 도저히 못견디는 것이 소화가 안돼요. 3일만에 소화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내가 소화되기 참고 기다리자. 하루 있어도 소화가 안되고, 이틀이 있어도 소화가 안되고, 사흘이 있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니까 소화가 안돼요. 물고기는 바다에 떨어지는 것 하나 먹었더니만 소화불량증이 걸려서 견디지 못하니까 물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 물고기도 괴롭고 요나도 괴롭습니다. 죄인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 죄인도 괴롭고 우리도 괴롭습니다. 함께 고통스러워요. 회개하면 함께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 괴로우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고통이 계속하면 회개의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서 2장 1절로 10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야훼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훼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야훼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훼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야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육지에 가서 토해라. 해변가에 와서 웩하고 토해 버리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소화액이 얼굴과 몸을 노랗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노란 요나가 탁 튀어 나왔습니다. 물고기는 어~ 시원하다. 한 사흘 동안 소화불량증이 나았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시매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나와서 니느웨로 가서 외칩니다. 이제 요나가 더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면 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냥 믿는 것하고 내게 체험해서 믿는 것하고 단수가 틀립니다. 체험을 하고 나면 굉장히 믿음이 강해져요.
3.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한 사흘있다가 나오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서 굉장한 강한 믿음으로 예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서 3장 1절로 5절에 “야훼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야훼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야~ 굉장한 나라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핍박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자 온 국민이 다 회개를 했다. 이게 이 나라가 살 운명인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회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온 국민이 다 회개하면 남북통일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문을 닫아놓으면 열자가 어디 있습니까?
요나서 3장 6절로 10절에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임금부터 시작해서 온 국민 전체가 다 삼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으며 통회하고 자복하고 금식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하고 돌이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역사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하고 온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하라 안하면 40일 이내에 멸망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그는 성읍 동쪽에 성벽 한곳에 천막을 치고 니느웨가 망하는 것 구경하려고 기다립니다. 내가 이렇게 외쳐도 회개할 턱이 없다. 너깟 놈들이 뭘 회개하노? 너깟 놈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냐? 그러니 반드시 하나님이 멸망시킬 것이다. 내가 그 모습을 구경하리다. 그래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기다리는데 햇빛이 강하게 비취니까 머리가 뜨겁지 않습니까? 하루저녁 자고 나니까 박넝쿨이 나서 잎사귀로 초막을 덮었으니 시원합니다. 여러분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돋아나서 그렇게 큰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박넝쿨을 요나의 머리 위에 펼쳐 놓으니까 요나가 그 박넝쿨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야~ 희안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느헤미야서 9장 17절에 보면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용서하면 받으면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햇빛이 비취는데 박넝쿨이 쭈굴쭈굴하고 말라 버렸습니다. 보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벌레가 박넝쿨에 와서 그 줄기를 씹어버리니까 박넝쿨이 그냥 말라버렸어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벌레까지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세밀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큰 일만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벌레도 예비하신다. 적은 벌레도 예비하사 이끌어 가서 박넝쿨을 물어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큰것까지라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이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씹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야훼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욘 4:6~8)
아~ 햇빛이 비취고 있는데 니느웨 성은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안무너지고 해만 비춰서 머리만 뜨겁고 하니까 혼동 가운데 하나님 날 죽여요 죽여 살아서 뭘 하겠어요? 죽는게 낫지. 실컷 망할 것이라고 한 다음에 안 망하는 것 보니 하나님이 나보다 니느웨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나 죽여주세요.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는 나으니이다. 죽는 것이 더 편안하다. 그럴 정도로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결론>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을 요나서 4장 10절로 11절에 기록해 놓았는데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너는 박넝쿨 하나 났다가 말라지는 것도 화를 내고 야단법석을 하는데 이 니느웨 성에는 어린 아이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12만명이나 있다. 짐승들도 많다. 그들이 멸망받는 것을 내가 원하겠느냐? 사람들은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희안하게 만들어졌어요. 사람처럼 희안하게 만들어진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맞바꾸기 해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가 그렇게 맞바꾸게 할 정도의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존재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형상인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나님으로 하늘에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천당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굉장히 귀한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귀합니다. 하나님은 이 귀한 사람들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지옥에서 불탈 것을 생각할 때 괴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렸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귀한 존재가 아니면 주님이 목숨을 대신해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이 못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갈보리 십자가를 쳐다봐야 됩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 죄와 불의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이 청산되어 버린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삶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믿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보배는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부귀나 영화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의 그늘이 됩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고 거기에 거룩함이 있고 거기에 병고침이 있고 거기에 축복이 있고 거기에 영생복락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생명의 근원이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면 모두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0여 년 전에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에 놀랄 만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마을 전체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부흥이 한 여인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회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여자 성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서 봉사를 제일 많이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녀는 교회의 성미쌀을 몰래 가져다가 쓴 적이 있었는데, 기도회 이후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이 쌀은 교회의 것인데 내가 가져갔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성미쌀 훔친 것 회개했습니다.우리 한국에서도 6.25사변 난 이후 어려울 때 교회 성미쌀 훔친 사람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성미쌀이 예배드릴 때 가득했는데 예배 후 반만 찼을 때가 많았어요. 남의 교회 그런 것 아닙니다. 우리 서대문 우리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내게 보고가 부인회에서 와요. 목사님, 성도들에게 성미쌀 훔치지 말라고 좀 광고해 주십시오. 성미쌀 가지고 온 것처럼 보따리 봉투 가지고와서 성미쌀 담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서며 “저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집 계란 한 줄을 주인이 모르는 때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한 남자 성도가 “저는 서점을 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선교사님의 집에 갔다가 오면서 선교사님께 말하지도 않고 성경 한 권을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회개하며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모두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거나 잘못된 것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마을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서로 잘못을 빌고 용서하며 마을 전체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부흥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와 불순종을 회개할 때, 개인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했는데 회개의 불길이 이웃에 붙어 나가서 온 마을 전체가 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나 혼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회개의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 나가서 온 교회, 온 나라가 회개할 수 있는 은혜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이 많으신 분이라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고 버림을 받습니다. 회개하면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인 강도가 예수님 우편에 매달려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때 주여, 주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회개도 큰 회개가 아닙니다.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는 회개의 시작을 말했을 때 주님이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당장 주님께서 용서해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받고 용서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라
삼상 15장 22절 / 김병삼목사(만나교회)
내가 믿지 못하므로…
홍기영 목사님의 책 [더, 더 가까이]에 아주 의미 있는 말씀 해석을 보게 됩니다. 사사 기드온이 불림을 받고 사역하기 전에 양털 실험을 하는 장면입니다. 사사기 6장 36~37절을 보세요.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참 재미있는 관점인데, 여기에서 기드온이 양털 실험을 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안 믿어져서 한 것이라는 말씀이죠. 믿어지지 않는데 믿어진다고 거짓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기드온은 믿어지지 않으므로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이 하나님과의 신뢰를 쌓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그분을 믿기에 나에게 없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내 귀를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를 하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알았던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나타났던 표적 때문에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죠. 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하나님을 향해 순종의 귀를 열어놓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믿음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착각을 말씀드릴까요?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네요.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돈을 자매님에게 흘려보내라는 마음을 주시네요.”
진정한 믿음이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또 다른 기적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적도 끝이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7장 7절에 보면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릿 시내가의 마실 물과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또한, 사르밧 과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엘리야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 순간을 통해 엘리야는 사역을 다시 시작하면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가 의지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릅니다.
오대원 목사의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에 나오는 글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지만, 그 어떤 방법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어떤 방법도 다른 방법보다 더 영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지, 그분이 사용하시는 방법이나 원리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방법도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영구해 변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를 도울 만한 사람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시려고, 까마귀를 통해 직접 그를 먹이셨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를 먹이셨다.
오대원 목사님이 글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에 나오는 글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란,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숨 쉴 공기를 주시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또 하루의 생명을 주셨음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려 그분의 뜻대로 쓰시도록 하며, 그분이 우리의 재정을 다스리시도록 내어 드린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나의 모습 전부와 내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령님이 다른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실 때 그대로 순종하여 후하게 주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령님이 돈을 저축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시면 돈을 은행에 넣어 저축을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은행에서 돈을 꺼내 성령님이 택하시는 사람에게 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되,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시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게 사실 때 감사하고 겸손할 줄 안다는 뜻이다.
여기에 믿음으로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이는 생활방식이자, 말씀을 통해 받는 매일의 훈련이다. 둘째는 후하고 관대한 정신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기쁨으로 줄 수 있게 된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사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없는 분이시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나님께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나를 드린다.”라고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인가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 헌금을 안 해도 되겠네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나 같은 사람이 일을 안 해도 되겠네요.”
그런데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헌금으로 드리는 물질과 우리가 봉사하는 헌신에 대하여 예민하기 때문인가요?
반면에, 우리는 제사를 드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거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하시는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 있습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부족하고,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지만,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받으시기에 우리는 매일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받으시기에 우리는 헌신의 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갑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나의 인격이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격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실제적인 감각입니다. 그래서 인격 앞에서 우리는 절대로 무례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또 하나의 믿음 없음 ‘인정’에 굶주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심각한 중독 증세 중의 하나는 ‘인정’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사랑과 용납과 확인을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 하죠. 절대 채워지지 않는 관계는 잘못된 관계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었던 사울에게 인정에 대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사람 앞에 자신이 어떤 왕인지를 증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기다림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쟁에서 기다려야 할 것,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월권을 하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제사를 드리려고 재물을 구분해 놓았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행동은 믿음이 아닌 죄일 뿐입니다.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는 내면에는 바닥난 자존감이 존재합니다. 약해진 자존감은 누군가의 건설적인 비판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지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긍정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피트 윌슨은 그의 책 [하나님인가, 세상인가]에서, 다른 사람의 사랑과 인정이 자신의 깊은 욕구를 채워 주리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세 가지 운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1. 평범하게 될 운명.
인정에 중독된 사람들은 늘 대중을 따르기 때문에 평범한 삶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 대중을 따르는 삶이 같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대중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려면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인기 없는 의견을 제시하고 흐름을 역행하고 사람들을 화나게 해야 할 때도 있죠. 다른 사람의 인정에 항상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피터 윌슨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생 시절 겨우 스물한 살이었던 때 교회를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그는 청년부 사역을 내려놓고 교회에 알렸습니다. 교회에서 밤늦게 일을 하던 중 우연히 교회 도서관을 지나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두 집사님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그 애송이가 정말 자기가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설교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스물한 살짜리가 목사라고 따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 소리를 듣고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눈물을 참고 기도하는데 그 날 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셨다. 내 인생의 목표는 모두에게서 허락과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느끼는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만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평범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평범함을 극복한다는 것은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탈진하게 될 운명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미지 관리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들을 생각하며 쏟아 붓는 에너지는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일에 헌신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착한 남자 콤플렉스’는 목회자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가만히 내면을 돌아보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고 싶은 욕구인지 모릅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서 라기보다는 비난받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후 격무에 시달립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죠.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좋은 리더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장인 이드로가 좋은 제안을 합니다.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세워 사람들을 관리하도록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인정받음으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것이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기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일을 위탁하는 것, 누군가를 믿으며 맡길 수 있는 것이 필요하죠.
3. 실망과 거절을 경험할 운명
인정에 중독된 사람은 창조주에게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어쩌면 자포자기한 상태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닐까요?
문제는 어떤 인간도 당신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만나는 인간 중 완전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며, 나와 마찬가지인 또 하나의 불완전한 죄인을 만날 뿐입니다. 아니, 당신을 믿고 실망하게 하지 않았던 그 사람도 결국은 죽게 될 것이며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슬픔과 거절을 자초하게 될 뿐이죠.
‘권태기 부부의 일상’이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우리 부부는 좋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한 잔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유대를 돈독히 합니다.
아내는 화요일에 가고, 저는 금요일 날 가죠.
우리는 또 각자 딴 침대에서 잡니다.
아내는 여기 온타리오(캐나다)에서, 자는 투산(미국 Arizona주 휴양지)에서. . .
나는 어디든지 아내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잘도 찾아냅니다.
결혼기념일에 나는 아내에게 어디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안 가본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부엌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우리는 항상 손을 잡고 다닙니다.
내가 그 손을 놓으면 아내는 즉시 쇼핑을 합니다.
아내가 지나가는 쓰레기차를 뒤따라 달려가며 소리쳤습니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그러자 쓰레기차 운전기사는 말했어요.
“아뇨, 올라타세요!”
잊지 마세요. 결혼은 이혼의 첫 번째 원인입니다.
통계적으로 이혼한 사람의 100% 결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약혼할 때 끼는 반지는?
engagement ring
결혼할 때 끼는 반지는?
wedding ring
결혼하고 계속 끼는 반지는?
suffe-ring
그렇다면 어느 날 그대의 여친이 “나 힐링이 필요해!”
하고 그대에게 갑자기 울부짖는다면 그대는 어떤 액션을 취할 것인가?
즉시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그녀에게 필요한 명품 힐(heel)과 링(ring)을 사준다.
이것이 현대의 힐링이다.
해결책이 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봅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서 만족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며 늘 쫓기는 인생을 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의 이야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목마른 인생을 살던 한 여인의 달라진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성경에는 어떤 기록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던 시간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 아마도 사람들을 피해 다녔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든지 경멸의 대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동네 여인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래서 이 여인은 더 많은 남자에게서 무언가 인정과 용납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라고 하셨을 때, 여인의 대답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7-18)
아마도 이 여인에게 무슨 상처와 사정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남자들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다섯 명의 전 남편이라니요. 아마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여인이 남자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버림받은 여인 혹은 남편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 여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남자에게서 같은 사랑과 용납을 찾고 있지만, 역시 목마른 상태였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인정중독에 걸린 여인의 모습.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여인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를 알고 계신 예수님이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면 될 줄 알았지만, 누군가에게서 만족을 찾으려 했지만 절대로 채워지지 않던 것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두 알고 계신 그분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수를 주시리라는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기쁨이 찾아온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그분의 인정으로 이 여인에게 찾아온 만족이었습니다.
어윈 맥마너스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 스스로 사랑이 서툴다는 사실,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여러 관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당신 마음이 보내고 있는 신호들, 즉 당신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놓칠지도 모른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인정할 때,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채워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확신을 줍니다.
오늘 한 가지 묵상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반석이라 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석처럼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반석이 아닌 자갈 같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끊임없이 주님 앞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물 위를 걸어보았지만, 곧 가라앉고 말았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마당에도 예수님의 우편에 앉아 권력을 휘두를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남들은 다 예수님을 모른다 해도 자신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던 사람.
그런데 그날 밤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알았습니다. 그 새벽 끌려가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를 원망하는 눈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하고 너무나 슬퍼하는 베드로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냥 자신을 야단쳐 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시던 예수님의 눈길.
베드로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렇게 쉽게 무너진 자신을 끝까지 바라보시던 눈빛이었고, 자갈 같은 인생을 사는 자신을 끝까지 ‘반석’이라고 믿어 주셨던 그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아닌, 당신을 믿어주시는 주님의 믿음으로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믿으시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신 31:8)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렘 31: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사 울
삼상 15장 22~23절 / 이동휘목사(평강교회)
(고전 10:11-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 B.C.1445년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하기 위해 정탐군을 보내도록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민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을 선발하여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이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군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더러 가라고 하신 그 땅에, 우리가 갔었습니다. 그 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땅에서 난 과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고, 매우 큽니다....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이들 10명의 정탐군들은 더 나아가 그 탐지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삼키는 땅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보고는 한 마디로 그 땅은 우리 힘으로 정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온 백성들이 술렁이면서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14:2-3)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렇게 원망하면서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14:4) 며 선동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염병으로 모조리 쓸어버리고 모세로 하여금 더욱 더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민14: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모세는 이같은 말씀에 하나님께 간곡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합니다.(민14:13-19)
(민14: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대신에 하나님을 원망했던 무리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하며 원망불평을 늘어놓았던 무리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조리 죽게 될 것과, 정탐군들이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자신들의 죄악을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세대가 다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민14: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로부터 약 400여년 세월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이 든 사무엘에게 압력을 가하며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삼상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러한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대로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 당시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절대적으로 의뢰할 또 다른 그 무엇을 섬기고자하는 우상숭배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음을 보여 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적인 허용일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한 백성들의 요구에 응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인간 왕이 가져다 주는 온갖 폐해를 깊이 체험케 하여, 마침내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요 유일한 통치자임을 깨우쳐 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택한 왕으로 인하여 후에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롬1:24-25)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은 방임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일종의 심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후일 호세야 선지자에 의해 설파된 바 “(호13: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는 메시지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요구를 다 들어주셨다고 축복이라 생각하거나, 거절하셨다고 해서 축복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기도가 거부되는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부는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기도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응답되어지기 바랍니다.
2. ‘왕을 세워 달라.’는 말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개념은 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리고 임종을 앞둔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면서, 왕의 홀은 유다 지파에 속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를 퍼붓도록 주문을 받은 주술가 발람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게 되면서,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서 대단한 왕들이 나오게 될 것을 보았습니다.
(민24:7)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민24:17-19)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따라서 모세는 미래의 이스라엘 왕들이 따라야 할 규정들을 미리 예언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신명기17:14-20입니다.
(신17:14-2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왕으로 세워, 평생에 하나님 말씀을 옆에 두고 읽어 하나님 섬기기를 배우며,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왕위에 오를 때 사무엘은 그 구절들을 사울과 백성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삼상10:25)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왕을 요구한 그들의 주장에 따르는 문제는, 그 요구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기 전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기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주변 국가들로부터 압제당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범죄와 불신앙과 우상 숭배 행위에 있는 줄 깨닫지 못하고, 사사(士師)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神政政治)에 결함에 있다고 보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때와 경륜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인본주의적 욕구를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왕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그들의 통치자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추앙하면서 자랑할 수 있는 영웅적인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는 왕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백성들과 달라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구원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11:45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거룩하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의 뜻을 살펴 구별되어 깨끗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기를 바라실 때,(민 23:9)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되고 싶어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왕이 그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기를 바랐는데(삼상 12:12),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삼상 8:6-9).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신 이후 줄곧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통합되어 위험한 주변 국가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계셨고,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으며, 그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들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분열은 잘못된 정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순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이 마음에 있을 때 조직이나 기구를 탓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왕으로서 다윗이라는 경건한 젊은이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를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한 발 앞서 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불순종을 깨닫지 아니하고 막무가내로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대책으로 그들이 바라는 초영웅적인 사울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사울은 유다 지파가 아니라 베냐민 지파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왕조를 수립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왕으로 세움받아야 할 사람은 유다 지파여야 함을 알고서도,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을 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창49:1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행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 사울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이 아무리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도(삼상9:2), 왕이 되어서는 안될 베냐민 지파 사람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면, 왕을 세우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그의 통치를 마칠 즈음,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가 왕이 되도록 하기 위해 충분히 준비시키고 훈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한대로 왕을 세우는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3. 사무엘은 이스라엘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울을 자기 고향인 라마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때는 동이 틀 때였고,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기라도 하는 듯했습니다.
(삼상9:26-10:1)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더라.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삼상10:9-10)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사울이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거룩한 인격이나 성품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할 자로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되었다는 사실을 사울이 분명하게 깨닫게 되리란 뜻입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한 열망이 사울에게 맹렬히 타오르게 되어, 이제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사울은 이전의 사울의 모습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막중하고도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여야 할 왕의 처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신이 능력으로 사울에게 임했고, 또 사울이 선지자 생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영적 회심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새 마음”(??? 아헤르, ?? 레브)은 사울이 이제 더 이상 평범한 농부가 아니라, 왕처럼 생각하고 왕의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임한 “새 마음”은 그의 성품이나 인격이 변화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그가 하나님을 그 영혼 깊숙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사울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신앙 원칙이, 그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고결하고 온화하고 칭찬할 만한 타고난 좋은 성품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이 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사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과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예언한다고 해서 믿음이 강하다거나, 남을 도와주는데 특별나다고 해서 믿음이 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언을 하거나 여러 성령의 은사를 받아 활동한다고 해도 믿음과 변화된 성품이나 인격과는 전혀 ‘다른 사람’(‘새 마음’, 아헤르 레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좋은데 인간관계가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인간관계는 좋은데 믿음이 가졌다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 판단력과 도덕적 분별력을 함께 갖추어야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빌1:9-11) 사울은 이제 단순한 베냐민 지파 평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새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세웠음에도, 사울은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의 여행용 행구(짐보따리들) 사이에 가서 숨었습니다.
(삼상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그것이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받은 후 그가 보인 첫 반응이었습니다. 행구는 진영의 가장자리에 보관하고 있었던 잡다한 장비들과 비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황한 사무엘은 하나님께 왕이 어디 있는지를 여쭈어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셨고 사람들이 사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울이 숨은 것은 겸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겸손에는 독성을 가진 교만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사울은 자신의 성품을 타락시키고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겉치레와 어리석음이라는 제스처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사무엘과 백성들 앞에 선 사울에게는 건장한 몸과 훌륭한 외모와 함께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위만큼 컸더라.”(삼상 10:23). 그는 백성들보다 높이 서 있었지만 결국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고,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는” 백성들의 환영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력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삼상 9:1). 그리고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친구가 있었고, 요나단이라는 뛰어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다윗이라는 재능 있는 사위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신이 그를 도왔고, 그를 따르는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삼상 10:26).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고, 산재해 있는 백성들을 규합해 하나의 견고한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일들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관식을 통해 높이 서서 멋지게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전쟁터에서 수치스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삼상31:1-6)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사울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그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지도자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지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지 못하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성품과 인격을 변화시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사울은 그 시작은 좋았지만 시작부터 비틀거리는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 시작은 참으로 상쾌했습니다. 최초로 이스라엘 군대를 소집하고 지휘하여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구하며 통쾌한 출발을 했습니다. B.C.1050년경, 암몬이 이스라엘 남부 지역인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했습니다. 이에 전령들이 급히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 가서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백성들이 이를 듣고 큰소리로 통곡하며 사울에게 전하자, 하나님의 영, 성령이 강하게 사울에 임하게 되어 사울이 이스라엘 전역에 군대 소집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 소집명령에 따라 소집된 병력이 무려 33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광야에서 최종적으로 조사된 전투 능력을 지닌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 601,730명의 약 반에 해당되는 많은 숫자입니다(민 26:51). 이처럼 사울의 징병 요구에 전 이스라엘이 거국적으로 응한 것은, 사울이 두렵거나 사울의 지도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두려움으로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상11:7)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사울은 이렇게 소집된 군대를 지휘하여, 군대를 삼대(三隊)로 나눠 적들이 방심과 자만심에 빠져 깊이 잠들고 있는 새벽녘에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 3면 협공 기습 작전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같은 전법(戰法)을 구사할 줄 아는 강력하고 유능한 무사적(武士的) 왕을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삼상8: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렇게 이스라엘 최초로 왕이 지휘하는 군대로 멋지게 승리하게 되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말합니다. “사울이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 있느냐고 떠들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런 자들을 내주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쳐서 죽이겠습니다.” 미약한 베냐민 지파의 일개 농사꾼 사울을 왕으로 뽑은 일에 불만을 품고, 노골적으로 그에 대해 불복종과 거역의 뜻을 나타내었던 비류들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삼상10:27). 더 나아가 이제는 사울을 자신들이 바라던 스타일의 왕(삼상8:20)으로서 완전히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울은 암몬과의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이스라엘은 왕정(王政)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음을 공식 선포하고, 축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을 치름으로써 이스라엘 초대 왕의 공식 등극을 추인하고 확증했습니다. 이때 사울의 나이 40세이었고(삼상13:1), 그 후 사울은 다윗이 차기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40년간(B.C.1050-1010년)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행 13:21) 그러나 불행히도 이때를 정점(climax)으로, 그의 왕국과 왕권은 점차 퇴색되고 사라져 결국 영적, 도덕적, 정치적인 면에서 실패한 왕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 과정을 보겠습니다. 그 과정의 첫 번째 사건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먼저 길갈로 내려가라며 이렇게 지시합니다.
(삼상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이 길갈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7일이 다 되어갈 즈음에, 블레셋이 해변의 모래같이 진을 치고 공격채비를 갖추었습니다.
(삼상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전차가 3개 부대, 기병이 6개 부대, 보병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았습니다. 이러한 블레셋 군대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적으로 훨씬 열세여서 큰 위기를 깨닫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숨어들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군사들도 몹시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때 사울은 백성들의 동요를 막아 더 이상 흩어지지 않게 하고 전쟁 승리를 기원하고자, 사울 자신이 주도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전투를 준비시킬 목적으로, 임의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나라의 통치자이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에 따라 아무리 사태가 급박해도, 정하신 때에, 정하신 사람, 사무엘에 의해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사울이 막 예배를 마치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했습니다. 정한 예배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사태를 알게 된 사무엘이 사울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에 사울이 대답합니다. ‘내 수하의 군대는 줄어들고 있는데 제사장께서는 온다고 한 때에 오시지 않고, 블레셋 군대 총공격태세를 갖추고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아서 부득불 제가 직접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같은 사울의 행동을 보면, 사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일을 잘 하려고 노력했고, 일을 잘 하고 좋은 왕이 되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무라도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협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행동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하나의 방법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왕으로서 정치하는 일에만 빠져서 자신이 주연이고 하나님은 조연으로 여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일을 위해 예배가 도구화되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배를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왕이 망령되게 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왕과 왕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왕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왕에게 명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삼상13:13-14)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폐위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를 왕으로 세우셨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아말렉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든 짐승과 더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약 500년 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약속은 출애굽기17:13-16입니다.
(출17:13-16)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신 이유는 신명기25:17-19입니다.
(신25:17-1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막을 지날 때, 아말렉 족속이 비겁하게도 피곤하여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하신대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왕은 살려주고 좋아 보이는 가축들을 숨겨두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사울 왕에게 “(삼상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고 추궁하자, 솔직하게 죄악을 시인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고자 살려두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일삼았습니다. 아말렉과 그 모든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려고 가장 좋은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예배를 핑계로 삼아 자신의 죄악을 덮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해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될 사람을 벌써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두 사건을 통해 몰락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빙자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든 사울의 삶은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주의 영이 임하여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그를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삼상10:6-9) 그러나 주의 영이 떠나간 사울의 정신과 정서는 혼돈에 빠져들었습니다. 왕이 되어 그 맡은 일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예배와 일치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사울처럼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삼상15:24) 하나님보다 사람과 일이 더 크게 보이면 몰락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일보다 더 크게 보이면 점점 강성하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주어진 말씀은 “(삼상15:28-29)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입니다. 사울의 왕위를 하나님께서 폐하신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도 “(삼상15:30)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성품보다 자신의 명성과 인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뻔뻔한 모습이었습니다. 이후로 사무엘은 죽어 다시 돌아오게 될 때까지 다시는 사울을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떠나버린 인생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만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사울의 몰락은 하나님의 영, 성령이 떠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왕직을 맡기실 때 기름부음을 부으셨고, 또한 주의 영, 성령을 부어주셔서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삶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에 사울을 폐위시키시고 하나님 마음이 합한 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세우셨습니다.(삼상16:12-13)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영이 급한 바람처럼 다윗 안에 들어가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와 함께 하시며 큰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이스라엘의 왕은 겉으로 볼 때 여전히 사울이 왕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모르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 왕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삼상16:21-23)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사울은 다윗을 보자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어 자신의 오른팔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우울증이 사울을 괴롭힐 때마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진정되었고 어둡고 우울한 기운이 걷히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윗의 영성(靈性)이 시작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성령이 떠난 자를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다윗을 두려워하면서 다윗을 죽이려 하지만 매번 허탕치게 될 뿐이었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잡으려 한다는 과대망상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악령에 이끌려 무당을 찾아가게 되고, 그 무당을 통해 블레셋에 패배하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이 죽게 되리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쟁터에 나가 사울의 세 아들이 그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블레셋 궁수가 쏜 화살에 사울은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죽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삼상 31장) 그리고 어느 아말렉 병사 하나가 사울 왕의 왕관을 가져다 다윗에 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칭찬만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경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계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사도 바울도 과거의 사건들을 거울삼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0:11-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자신의 믿음과 삶이 다 된 줄로 생각하여 교만하게 되면 끝내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항상 무릎을 꿇는 것이며,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을지라도 항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스스로 낮아져서 섬기는 자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풍부한 물질적 환경에 취해 교만한 사람들을 가리켜 “교만한 면류관”을 썼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발에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사28:1-3)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교만하면 그 면류관을 끌어내려 던지십니다.
(렘13: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풀무에서 금을 연단하듯이 어떠한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을 주셔서 여러분의 삶을 영화롭고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잠4:8-9)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범사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며, 어떠한 경우와 환경에서도 항상 겸손히 하나님의 뜻과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으로 “영광과 생명의 면류관”을 잃지 아니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울 왕의 교만
삼상 15:24-31 / 주바나바
어떤 사람이 거짓 예언가 친구를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보니까 자네는 분명히 가짜인데 어떻게 그렇게 소문난 예언가가 되었는지 모르겠네! 내가 들어보니 천하의 높고 낮은 사람들이 자네만 만나면 다 무릎을 꿇는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비밀이 있는가?” 그러자 이 가짜 예언가가 말했습니다.
“아주 쉬운 일이라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든지 처음에 ‘교만하구나!’ ‘교만하니까 병들었어!’ 그렇게 말하면 다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거든 그러면 모두 내 앞에 엎드려 지지! 모든 사람이 다 교만하거든!”
인간은 누구나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교만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교만이 있습니다. 지식의 교만, 가문의 교만, 학벌의 교만, 물질로 인한 교만, 직위의 교만, 자기 얼굴에 대한 교만 등 현재는 물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하여 심지어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까지 교만합니다.
사람에게 겉으로 겸손해 보여도 속에는 교만이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고, 교만할 것이 전혀 없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조차도 교만합니다.
교만하다, 교만하다 못해 교만할 거리가 없으면 겸손하다가도 교만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교만증후군'이 있습니다. '교만증후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나는 공의롭다고 생각하는 습성, 자기는 절대 정직하다고 믿는 습성, 자기가 선하다고 믿는 습성,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습성,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는 습성, 항상 결론은 자기가 내려야 하는 습성, 자기는 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습성 뿐만 아닙니다.
자기는 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습성,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습성, 화해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습성, 사과를 하지 않는 습성,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는 습성, 감사할 줄 모르는 습성, 내가 혼자 다했다고 생각하는 습성, 그리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습성 등입니다.
여러분은 이 '교만증후군'이 몇 개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많든 적든 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교만증후군이 몇 개가 되든 교만으로 가는 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교만으로 빠져들어 있는 나의 모습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삼상9:21을 보면 그가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이 말씀에서 보듯이 사울은 왕으로 세움을 받을 때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삼상 11:6을 보면 사울이 왕으로 세움 받은 직후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암몬과의 전쟁에 나설 때 하나님의 영의 감동되어 왕의 직무를 능히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왕으로 자리 잡고 난 뒤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때 제사장도 아닌 왕이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삼상13:13을 보면 이 일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고 아말렉과 전쟁에 나가서 또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는 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삼상15:11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여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사울은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종'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마저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 받고, 세움 받고, 쓰임 받는 것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하고, 계속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도중에 하나님께 외면당하거나 아예 버림을 받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그러면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있습니다.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그러니까 교만이란 우선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않고 건방지게 행동하지 않으면 교만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이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이러한 답을 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겸손한 자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다.”
그러니까 자기는 결코 드러내 놓고 자기를 자랑하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 건방지게 행동하지도 않으니,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큰 교만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전에서 정의한 말로는 교만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교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본문에서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먼저,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일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신앙인의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느냐? 붙드느냐? 는 싸움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일에 실패한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므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실 말씀을 버리는 그 순간 이미 사울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에게 갔습니다.
가서 보니 사울왕은 처음의 원정 길에서 이겼다고 기념비까지 세우며 기고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보자마자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13절)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사울 왕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18-19절)
이 말은 사울 왕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리품을 얻는 일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엎드려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본문 20절-21절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20-21절)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가 이어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절)
이 말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도 더 좋아하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결정적인 말씀을 합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절)
하나님의 말씀이 악을 행했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엎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따랐다고 변명합니다.
다만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원해서 좋은 것은 남겼다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울 왕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만큼 아름답고 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사울 왕의 죄는 말씀을 버린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일이 교만입니다.
또한 교만은 회개다운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24-25절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은 회개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회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을 보면 그는 회개치 않은 회개입니다.
회개했으면 다음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백성을 청종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백성에게 핑계를 댑니다.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나와 함께 돌아가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회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바로 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면 절대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슬픔보다 자신의 왕위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더욱 슬펐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자신을 높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본문 26-29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사무엘은 사울이 세 번이나 회개하지 않자 사울에게 단호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울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도 사울을 왕에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사울과 함께 돌아가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키자 사울은 회개하기보다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 옷이 찢어질 정도로 잡았습니다. 사무엘은 이제 사울의 왕권은 끝이 났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나라를 사울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발견하고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회개 다운 회개가 아닌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또한 교만은 스스로 높이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15장30절에 우리는 스스로 높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을 만나봅니다. 그의 시작은 스스로 자기를 작게 여겼었지만 그의 나중은 계속해서 높임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의 죄를 책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비록 자기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사무엘에게 요청합니다.
30절을 보면,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한마디로 자기를 높여주기를 사무엘에게 청하였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계속 높임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교만입니다. 그러한 교만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길 원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사울 왕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으실까? 과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자를 기쁘게 받으실 까?
결코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는 겸손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는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높이시사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는 자요 하나님께서 귀하게 도구로 사용하시는 일군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라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자를 높이십니다.
우리는 쇠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더 낮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는 높이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거나 스스로 높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높이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 23:12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높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이려 할 때 결국은 낮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스스로 높이는 자세를 버려야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높이는 교만을 버려야합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타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야곱'을 말합니다. 그는 명예를 위해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얻고 물질을 얻는데 이십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야곱도 얍복강의 싸움에서 환도뼈를 부러뜨리시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은혜의 역사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사울(바울)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사울은 자기 열심으로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종교생활하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책망하고 저주하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을 때 그는 회개하였고 분명히 변화되었습니다. 평생을 그 이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면 사울 왕과 야곱, 신약의 사울(바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자신이 깨어지느냐 깨어지지 않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교만을 깨뜨려야 합니다.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합니다.
바른회개를 해야합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며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아멘
돌이킬 수 없는 후회
삼상 15장 30~35절 / 이규왕목사
오늘 우리의 현실은 세월이 갈수록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어느 구석을 돌아보아도 문제와 허점투성이이며, 또한 더 나아질 기미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총체적 위기 상황이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국민들이 절실히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난국을 평정시키고 동남아와 세계의 중심이 되는 한국을 건설의 꿈을 이루게 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총선에 임하였으며, 새로운 정권에 대한 기대를 걸어왔지만 여당을 비난하던 야당이 주권정당이 되어도, 일당 독재를 하며 장기 집권의 타도를 외치던 개혁 세력이 집권을 해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번번이 실망을 해왔습니다.
가까운 중국을 가보면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개발 붐이 일어나고 공장에서는 연기가 계속 품어져 나와 황사를 만들어 바람을 타고 밀려오고 값싼 중국 제품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데도 우리는 탄핵반대파와 탄핵지지파로 남북처럼 분열되어 골이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그 영향은 가정 안에 부모의 세대와 자녀의 세대 간에 갈등으로까지 번져가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에 겨울은 가고 생명력이 약동치는 새봄이 이미 왔는데 내수 경기와 수출시장은 꽁꽁 얼어붙어 풀릴 줄 모르는 한 겨울처럼 계속 냉각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은 탄핵반대파 지지파로 양분되어 논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옳고 그른 것일까요? 언제까지 치졸한 싸움이 계속되어야 끝이 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우리 민족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온 국민이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참 지도자가 나타나 우리 민족이 한번 세계를 향해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민족이 갈수록 꼬여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결해 나가아야만 할 것인가 하는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
우리가 어렸을 때나 혹은 가난하던 시절 남이 먹는 것이나 가진 것이 무척이나 부러울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차를 가지고 싶다든지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든지 하는 소망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세월이 흘러 그렇게 부러워했던 것들을 나도 남처럼 소유하고 누려보지만 실상 기대했던 것처럼 좋고 신나기만 하지 않고 덤덤하거나, 아니면 그 좋은 재미가 얼마 가지 않아 권태로워짐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 같이 감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만민들 가운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그들로 하여금 여호아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며,
2)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압제를 당할 때 노예의 신분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였었으나 여호아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여호아 하나님이 애굽 왕보다 더 능력이 많고 위대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시내 산 아래 모으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과 돌보심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는 전쟁에 익숙한 가나안 일곱 족속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쫓아내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그들에게도 이방나라처럼 왕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방나라처럼 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일 이었기 때문에 거절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표면적으로는 사무엘 선지는 늙고 그의 아들들은 요즈음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처럼 뇌물을 좋아하며 악하고 불의하였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핑계하였으나 이면에는 세상 나라와 왕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었습니다.
(삼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왕으로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이는 세상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인간을 왕을 섬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요구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거절하셨으나 끝내 듣지 않자 그들이 요구대로 왕을 허락하여 주셨는데 그 첫 번째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지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나라들처럼 인간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 제사장 가문이 끊어지고, 사무엘 선지는 나이 많아 늙고, 그 아들들은 사무엘과는 달리 악행과 무능함으로 인한 불신감 때문에 주변의 이방 나라들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는 잘못된 요구였습니다.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그것은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기대가 아닙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되심을 거부합니다. 위대한 인간 지도자가 출현하여 정치적인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고, 경제를 재건하여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국가를 건설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연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지도자가 있을까요? 기대가 지나치면 반드시 실망을 하게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기대치를 낮추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지도자들을 불신하게 되고 원망 불평을 일삼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같은 기대가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인간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삼상 8: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시고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셨으며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막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말로해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자기 고집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경험으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삼상 8: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2. 왕이 된 사울의 과오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왕을 허락하시되 그 왕이 하나님처럼 공의롭게 백성들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대f행자가 되기를 기대하시고 선지자나 제사장처럼 왕이 될 사울에게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한 것처럼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고 겉으로 보기에도 호감이 갈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이기도 하였습니다.
(삼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사울은 외모만 준수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씨도 고와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효자로 윤리적으로도 모범적이고 흠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느 시대 사람을 막론하고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시는데 사울도 왕이 되기 전에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사건은 그가 사람들에게 왕으로 제비 뽑혔을 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러워 숨은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정도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0:21)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삼상 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사울은 명실 공히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고 백성들에게는 제비 뽑혀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인정함을 받음으로 왕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사울을 흡족히 생각하고 만세를 부르며 크게 환호하며 사울에게 기대를 크게 걸었습니다.
(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다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늘의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당과 반대하는 야당이 있는 것처럼 사울 당시에도 사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상 10:27) 어떤 비류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노 대통령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아브라함 링컨도 본래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860년 선거 때처럼 1864년 선거 때에도 국민 대다수가 공화당에 표를 던졌고 링컨은 일반 투표에서 겨우 과반수를 넘는 55%의 지지를 얻어 민주단 후보 매클렐런 장군으 누르고 대통령으로 재선 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변호사 시절 도전적인 비판과 논쟁을 좋아하여 늘 남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내고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는 일을 좋아하는 중에 쉴즈라는 정치인을 공개비판 했다가 결투 신청을 받아 위기를 당할 번 하였습니다. 그 때 누군가의 중재로 인해 겨우 목숨을 건진 전력을 가진 인물로 링컨은 그 후부터 암살 될 때까지 남을 비판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사울왕은 정반대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사울이 왕이 된 후 정권욕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영광스럽게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사울이 몰락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영적 질서를 어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질서의 혹자는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은 우주 질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질서와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오늘날의 삼권분립과 같은 제도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통령과 같은 왕권이고, 국회와 같은 선지자권이고, 사법과 같은 제사장권으로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고 상호 협력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창출해 내게 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평화롭지 못할 때는 그 질서가 깨어지고 무너지는 때였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군비를 증강하여 주변의 블레셋을 물리치려고 하는 일에 인위적인 노력은 하면서도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심은 매우 약했습니다.
사울은 뒤늦게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역부족이라고 느꼈을 때 뒤늦게 사무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믹마스까지 진격해 오고 있지만 그것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때 뒤늦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무엘 선지자의 도착이 늦어지게 되자 불안에 떨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최신예 무기로 무장을 하고 공격해오지만 사울의 군대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부하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자 사울왕은 기도하면서 사무엘이 올때까지 참고 기다렸어야만 하였는데 참다 못해 자기가 사무엘 선지자 대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월권을 범하였습니다.
(삼상 13: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은 제사의 행위가 제사를 드리는 자의 믿음보다 더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상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왕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제사를 집행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을 가리켜 사무엘 선지는 망령되다고 책망을 하면서 왕권이 길지 못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그러나 사울은 참다운 회개 대신에 그럴듯한 변명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일에 급급하였습니다.
(삼상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2) 거듭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습니다.
사울은 그와 같은 전력을 가지고 형 집행이 유예된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조심하지 않고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행하는 죄를 범하므로 화를 자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기게 하여주실 때 한 가지 명령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말렉과 싸워 이기거든 전리품을 챙기지 말고 다 진멸하여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마치 구제역이나 광우병이나 조류 독감을 예방하기 위해 아직 병들지 않은 짐승까지도 도살하거나 매장하는 경우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이 물욕에서 비롯되었음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쓸모없는 것만 골라 죽이고 가치있는 것은 따로 구별하여 살려 두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무엘 선지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 앞에 변명만을 늘어놓고 자기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삼상 15: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여호아 하나님은 그와 같이 뻔뻔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을 크게 후회하셨으며 사무엘 선지도 근심하며 밤새워 여호와께 부르짖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그러면 왜 사울왕이 동일한 죄를 반복하면서 화를 자초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러한 과오는 사울 왕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것들임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주변환경과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울과 같은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그와 같은 사울왕은 하나님이 왜 자기를 버리셨으며, 자기에게 기름을 붓고 왕이 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무엘 선지자가 왜 자기를 멀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반성보다는 그로 인해 자기가 왕의 자리에서 폐위가 될 것에 대한 염려에만 급급해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벗어던지지 못하였습니다.
(삼상 15: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에 대해 어떤 주석가는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다는 죄의 고백이 순전히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으로서 이끌 왕의 으로서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다” 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일리가 있는 주석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같은 사울 왕은 끝내 돌이키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께도 사무엘에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버림을 당하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상 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에서 사울 왕의 처지는 누구와도 같습니까? 국회의원들에게 탄핵을 당한 대통령, 나라의 통수권자를 투표로 탄핵을 한 국회위원, 그러한 대통령과 국회위원들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처한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평생 옳은 일만하는 선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잘못만 범하며 사는 악한 사람도 없고 단지 어느 쪽에 더 치우치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인간은 누구나 칭찬받을 선과 책망 받을 악을 더불어 행하기 때문에 만일 임의로 살도록 버려둔다면 인간은 부패해서 세상은 더욱 악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죄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정의로운 사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당한 사회적 규범이 필요합니다. 그 규범이 바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지켜야 할 법이며 그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요,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다.
법의 근본원리는 상선 벌악으로 선행에 대해서는 칭찬과 상급을, 악행에 대해서는 징계와 형벌이 따르게 될 때 선은 장려되고 악이 절제되어지는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사회정의요 또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사회는 민주주의는 절대다수가 결정하는 것이 선이라고 착각하는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그것이 곧 민심이요 하늘의 뜻이라고 오해하며 사회 규범인 법조차도 다수의 힘으로 부정해버리는 몰상식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국가관을 가지고 탄핵 정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비록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아닐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애국가처럼 우리나라를 보우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국민 경선을 통해 대통령이 되게도 하시고, 국회를 통해 탄핵을 하게도 하시고, 헌법재판소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온 국민이 대통령이나 국회위원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버리고 그들을 뽑은 국민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이미 결정된 사항을 놓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언행을 삼가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서로를 포용하고, 인내하고, 비난대신 협력하는 것이 애국입니다.
민주주의는 삼권대립이나 일인독제나 집단이기주의가 아니라 삼권분립을 통해 독주를 견제하여 삼권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인 정의와 화해를 이루어 보다 더 강한 민주국가가 되게 하는 합리적인 정치체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금번 탄핵 정국을 통해 행정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인 국회와, 불법을 수사하는 사법부가 탄핵정국을 통해 거듭나 삼권이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참된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기회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헌법재판소의 판사들이 어떤 외압이나 사사로움을 버리고 국가의 성쇠를 가늠하게 되는 금번 재판이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공정하게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또한 그 결정을 온 국민이 탄핵 반대와 지지라는 사견을 접고 그 결정을 겸허하게 순복하므로 나라의 안정을 되찾고 성숙한 민주국민이 되어지는 기회가 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뜻을 함께 모아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럴 때 구국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각자의 삶을 정립하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주홍글씨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호돈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짤막한 글을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절벽 위에 인자하고 현명한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예부터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불리었다. 이 마을에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내려왔다. 큰 바위 얼굴에 얽힌 예언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어니스트는 그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하게 기다린다.젨그러다가 하나씩 예언의 인물이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큰 부자가 된 개더골더와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라는 장군, 정치가인 올드 스토니 피즈 그러나 큰 바위 얼굴처럼 숭고함이 없는 세속적인 인물들이었다. 어니스트는 예언의 인물을 기다리는 동안에 현명하고 성실한 삶으로 주위의 명성을 얻게 된다.젨그럴 즈음 예언의 인물이라는 시인이 나타나지만 역시 예언의 인물은 아니었다. 나이가 많이 든 어니스트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를 들은 시인이 어니스트를 보고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친다. 드디어 예언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돌아간다
물론 이 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는 재산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선행과 사랑을 베풀고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며, 사상과 생활이 일치하는 인간이 되기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직한 인간이 되어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슬픔
삼상 15장 34~35절 / 한대근목사
지난주 수요일부터 기독교 절기상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이 당하신 시험과 고난에 대해 묵상해 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방법과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저는 이번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주일에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의 슬픔을 묵상함으로 우리들을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한 나라의 영권을 쥐고 있는 영적 지도자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닌 사울 왕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기름 부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의 첫 번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슬픔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좋습니다. 절망보다는 희망이 좋습니다. 눈물보다는 웃음이 좋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우리 시대는 웃고 즐기는 일에 너무 치중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웃기기 열풍입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의 유희만 있을 뿐입니다. 진지함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사랑이 식어진 시대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사울을 위해 슬퍼하는 선지자 사무엘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무엘의 슬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슬픔입니다
실패한 왕, 사울을 보면서 그를 바르게 지도하지 못한 선지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는 슬픔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영권을 책임진 한 나라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책임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사무엘은 가장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꿈도 비전도 영성도 없는 시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성전을 더럽히던 시대, 하나님 대신에 언약궤를 미신처럼 숭배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혼란한 시대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그릇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대각성을 주도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희망의 빛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도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면서 사무엘은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의 민족과 다른 특별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는 특별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승리를 이유로 왕을 요구했지만 전쟁의 승패도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악한 행위를 그치라고 최선을 다해 설득했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왕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친히 기름을 부어 구별한 사람입니다. 겸손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지 채 3년도 못되어 교만에 빠져서 하나님과 사무엘을 거역하고 백성들을 무시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버림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는 사무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아마도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좀더 잘 하지 못한 후회의 감정과 함께 자신의 연약함을 통감하며 슬픔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영혼 깊이 슬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슬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많고,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한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디언들의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어느 날 그의 일기에 “나의 아침 기도 시간에 나는 나의 영혼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 속에 있는 사악함과 타락함을 목격하고 나는 깊이 울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슬퍼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인들입니다. 베드로처럼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부인하지도 않겠다고 장담하며 떠들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베들레헴에 창궐한 흉년을 피해서 모압 땅에 내려간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압에서 얻은 며느리 룻과 함께 힘없이 고향 땅에 돌아올 때,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이가 나오미냐?”고 하면서 온 성이 시끌벅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오미가 “나를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마라(쓰다, 슬프다)라고 칭하라”고 말합니다. 엘리멜렉이 자기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에 갈 때, 그들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꿈도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자기 부인의 이름처럼 기쁨의 날들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흉년을 피해서 모압에 갔는데, 그들은 더 큰 슬픔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쁨이 좋은 것입니다. 웃음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기쁨만 있지 않습니다. 슬픔과 쓴웃음이 더 많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의 연약함과 한계, 그리고 그 슬픔을 직시하고 깨달은 사람들만이 하늘의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얻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과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사무엘의 심정을 여러분들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점검하기를 쉬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그 순간,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때인 것입니다. 일상의 가벼운 웃음만 추구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하며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슬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사울을 위한 슬픔입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의 슬픔은 사울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시작된 왕의 직임을 사울이 저버리고 거부했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는 사울이라고 하는 한 영혼에 대한 긍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아꼈습니다. 아주 어렵게 시작된 왕정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기름 부어 세운 왕이기에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마음은 각별했었습니다. 그가 왕으로 취임할 때, 사무엘과 백성들과 사울 왕 모두가 크게 기뻐했습니다. 사울이 겸손했을 뿐만 아니라 큰 용사였기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과 사무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낮출 때에 왕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스스로 높이게 되면서 그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업적과 기념비를 쌓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업적을 쌓는 일에, 기념비를 세우는 일에, 인기를 얻는 일에 분주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무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떠나게 될 때, 한 영혼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16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역사하면서 사울이 겪는 고초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장에 보면 자신의 사위며, 충성스러운 신하인 다윗을 두려워하여 평생 대적이 됩니다. 28장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을 찾아 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심으로 그가 무당을 찾는 형국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0장에 가면 결국 사울도 그의 아들 요나단도 전쟁에서 죽고 가문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용맹스럽던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생의 비참함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이렇게 비참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무엘은 미리부터 알고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버림받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영혼이 주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절대로 세상의 가치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가지 않기를 항상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무관심입니다. ‘내어버려 두는’ 것입니다(롬1:24,26,28). 죄악에 파묻혀 살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사울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스로 고립되어 외롭게 살다가 결국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은혜가 되지 않을 때가 위기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가 위기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실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주의 종들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머물고 있는 인생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도 도중에 하차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슬픔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3. 나라와 민족을 위한 슬픔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슬픔은 바로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한 슬픔입니다. 이제 막 꽃피우기 시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사울 왕의 죄악과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흩어질 수 있다는 염려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왕정에 대한 실험은 너무나 밝은 미래를 보장해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을 대한 거역한 사울 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 속에서 당할 수 있는 아픔을 끌어안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의 도구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재난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낙담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 열방에 선포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힘없는 민족으로 손가락질 당할 것에 대한 염려로 인한 슬픔을 사무엘은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진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슬픈 메시지를 들고 백성들 앞에 서야 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라(렘4:19).” 당연히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백성들이 들을 리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라고 매도하면서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백성들에게 쫓겨난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을 떠나기로 결심했지마는 “그들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라(렘9:1,2)”고 하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예레미야를 버렸지만 그 영혼들을 위해 슬퍼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슬퍼 우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 있는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로마의 군대에 의해서 곧 무너질 이스라엘 민족의 길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슬퍼하셨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 나라를 보시지 않을까요?
여러분, 이 나라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고 걱정스럽습니까? 보물선 인양 과정에서 주가 조작등으로 불거진 소위 ‘이용호 게이트’라는 사건과 관련하여 이형택(대통령 처조카)씨에게 진도 보물 발굴 사업을 권유한 것이 역술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역술인은 보물이 위치한 지점에 점을 찍고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며 이형택씨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한낱 혹세무민하는 역술인의 말에 청와대, 국가 정보원, 국방부, 검찰 등 중요 국가 기관의 관계자들이 놀아났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라는 우상과 이를 부추기는 무당의 말에 넘어가는 한심스러운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서 도대체 무슨 희망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절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듣고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던 아브라함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을 구원하소서.”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해야 하는 희망 없는 도성을 끌어안고 기도하던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슬퍼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곳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들의 고민과 염려와 슬픔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좀더 갖고 싶고, 누리고 싶고, 편안해지고 싶은 욕심들 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의 인간적인 고민들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송악교회 성도들은 큰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병들고 연약한 영혼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죄악 때문에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며 슬퍼할 수 있는 사람들, 바로 이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은 밝아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
삼상 15장 35절 / 이익환목사(욥바교회)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 ’이라고 불렀다. 나이 40이 되면 세상 일에 혹하고 마음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4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마음빼앗기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상 정년은 60세다. 그러나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은퇴 연령은 그보다 10년 빠른 평균 50.2세라고 한다. 우스개소리로 했던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40대, 50대의 시기는 자녀들의 대학교육이나 결혼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때다. 그럴 때 ‘직장밖으로 내팽겨쳐진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더우기 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은퇴 후에도 살아야 할 날이 40~50년은 된다. 40~50년 생활할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40대는 불혹이 하나의 이상일 뿐, 실상은 많이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의 40대는 아플 수도 없는 나이, 죽지 못해 사는 나이라고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은 나이 40에 왕이 되었다. 사사기의 혼돈을 지나며 불안한 시대를 살던 백성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된다.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신 왕이 사울이었다. 그가 왕으로 세워질 당시만해도 그는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택함 받았음을 알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상 9:21,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사울이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짐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었다. 미약한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자마자 암몬과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거둔다. 백성들은 흥분했다. 모든 백성들이 길갈에 모여 사울을 왕으로 삼고 성대한 즉위식을 올린다.
길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할례 받은 곳이다. 그들은 길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애굽의 수치를 굴려 보내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새롭게 세워졌던 것이다. 사무엘은 비록 백성들의 요구로 인간 왕을 세웠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다짐했던 과거 언약들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 이 길갈에서 즉위식을 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이 세상 왕과 달리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되고 2년 후 바로 이 길갈에서 왕으로써 실패한다. 세상 왕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철저히 순종해야한다는 사실을 그가 잊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수의 블레셋 군대에 놀란다. 백성들이 두려워 뿔뿔히 흩어지자 그도 다급해지기 시작한다. 사무엘이 7일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는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린다. 이후 도착한 사무엘에게 그가 변명한다. 삼상 13:11-12,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변명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말한다. 삼상 13:13-14,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사울은 흩어지는 백성들을 바라봤다.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군대를 바라봤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놓쳤다. 이스라엘 왕은 세상 왕과 달라야 했다. 자신 위에 하나님이 있음을 명심하고 그분의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가, 아닌가, 그것이 왕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기준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하실 말씀을 왕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왕은 선지자의 말을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 기준에서 비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번에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삼상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들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다. 쉐마는 신명기서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이었다.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왕은 정책을 수행하는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최고 권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권위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은 하나님이 보내는 중개자의 말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다.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여기서 ‘진멸’이라는 히브리어 ‘헤렘’은 ‘하나님께 바치다’라는 뜻이 있다. ‘헤렘’은 이방신과 그 우상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로 치러지는 전쟁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의 신들에게 행하는 가증한 우상숭배를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해 진멸 전쟁을 명하셨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또 다른 이유로 진멸 전쟁을 명하신다. 신 25:17-1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약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완수하라고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고 나라가 안정되자 사울을 통해 그 일을 이루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사울이 잘 했을까?
그는 보병 21만명을 모아 전쟁에 나선다. 그리고 칼로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한다. 그러나 다는 아니었다.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슬퍼하셨다. 삼상 15:10-1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성경은 표현한다. 하나님도 후회하신다. 여기서 ‘후회’는 하나님이 왕을 잘못 세워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아니다. 후회는 히브리어로 ‘니함’인데, ‘슬퍼하다, 한탄하다, 뜻을 돌이키다’는 뜻도 있다. 하나님이 사울을 기대했었기에 그만큼 그의 불순종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도 불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으시는 것이다.
사무엘은 밤을 지새고 동이 트자 사울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어떤 사람이 ‘사울이 갈멜에 자기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다’고 사무엘에게 전해주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 기념비를 세우며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통치를 강화할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자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자 사무엘이 질문한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된 것입니까?” 사울이 답한다. 삼상 15:15,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긴다. 그러자 사무엘은 지난 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전한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 즉 쉐마에 실패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렇게 답한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백성들의 말을 듣느라 하나님의 말을 놓친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원해서 세운 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요구와 압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긴 했지만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 나라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도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이는 현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끊어진 사울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다. 악령에 시달리고 시기심으로 인해 인격적으로 허물어진다.
15장 마지막 절인 35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다시 한번 기록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말하실 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후회는 과거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사무엘상 16장에는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다윗이 소개되고 있다. 사울의 실패는 하나님이 그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40대에 왕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떠맡았던 사울만이 들어야할 말씀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도 사울처럼 환경이 어려워져서 ‘부득이하게’ 하나님의 뜻을 양보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한 사람, 능력 있는 아빠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도 사울처럼 예배는 드리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뜻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있진 않은가? 우리는 돌아보아야만 한다.
아말렉은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비를 건 족속이다. 그래서 아말렉과의 싸움은 구원받은 이후 우리가 겪게 되는 영적 싸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에 있는 육체의 본성을 진멸하는 싸움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우리를 영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기대하신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기대와 목소리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굴복하며 ‘쉐마’에 실패할 때 하나님은 후회하신다. 우리를 불러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인생은 인간적으로 성공했을진 몰라도 소망이 없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가정의 제사장으로, 사회의 제사장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할 40대는 더더욱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위기감이 몰려온다 해도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는 인생, 우리도 후회함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