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3년경 영토이다.
왕조 - 길리
설명 : 노르웨이의 독자적 역사를 부활시킨 하르드라다 왕조의 방계이자 이런 게일 왕조의 방계이자 노르웨이 내전의 경쟁자였던 스베리르 왕조와 연관이 있어 택했다.
(최전성기를 이룩한 스베리르 왕조는 단절되었기에 유로파에는 재현이 안되어 택한 차선책이었다.)
영토 재현
본토
노르웨이는 콜라 반도까지 차지했었다. 이 영역이 만들어질 당시 노브고로드 역시 강세였는데 결국 전쟁을 벌였다. 이후 콜라 반도의 원주민 삽미인들은 노르웨이와 노브고로드의 이중지배를 받는 것으로 조약을 했으나 노르웨이가 내전으로 어지러울 때 노브고로드가 접수하며 완전히 러시아의 역사에 속하게 된다.
브리타니아, 아일랜드
노르웨이가 직접 정복했다기보다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정치적 통합과 분열의 과정으로 탄생했다.
도서부
노르웨이는 해양 진출에 대한 야망이 컸는데 아이슬란드 연맹을 복속시키고 그린란드에 진출했다. 이후 더 나아가 아메리카도 발견한 듯 했으나 소규모 인원, 원주민 의 반발, 노르웨이 내전으로 철수하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아메리카와 더불어 그린란드도 무주지가 되었고 덴마크가 차지하게 되었다.
중세 노르웨이 왕국사 정리
노르웨이 왕국의 역사는 곧 왕조 변동으로 이해하면 된다.
베스트폴드 왕국 - 잉링 왕조가 노르웨이를 통일했고 하라드 페어헤어가 주도했기에 국성은 하그리파리 왕조가 되었다. 이때가 9세기 말엽이었다.
하지만 이때 급성장한 고름 왕조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공격했고 정복에 성공했다. 이때 노르웨이에서 덴마크를 지원했던 라데 가문이 공을 인정받아 라데 왕조 노르웨이가 되었다. 10세기 시작이다.
하지만 반발도 컸기에 노르웨이의 왕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전쟁으로 왕조가 계속 번갈아졌다. 결국 크누트 대왕이 등장하자 노르웨이를 제압하고 고름 왕조 노르웨이가 되었다.
노르웨이를 통일한 하그리파리의 위상이 매우 컸고 스칸디나비아에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했기에 하그리파리 가문의 방계 세인트 올라프 가문이 후계를 자처하며 덴마크 노르웨이 전쟁을 지속했다.
다시 왕조가 계속 번갈아지는 상황이 진행되었다가 오히려 노르웨이가 덴마크를 복속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세인트 올라프 가문의 마그누스가 북해 제국 재건을 추구하다가 영국에 갔다가 실패한 삼촌 하랄드와 덴마크 귀족이었던 에스트리드 가문의 반란으로 세인트 올라프 왕조 노르웨이는 끝났다. 이때가 11세기 초부터 중엽까지였다.
1048년 삼촌인 하랄드 하라드라다가 노르웨이 왕권 찬탈에 성공해 하라드라다 왕조 노르웨이가 탄생했다. 매우 강력했으나 하라드라다 왕조의 마지막 지도자인 마그누스 4세가 문제였다. 전왕인 시그문트의 사생아인 동시에 맹인이었고 덴마크의 도전, 귀족 암살로 노르웨이는 개판이 나 1130년부터 1250년까지 노르웨이 내전을 벌였다.
이때 하그리파리의 방계 중 하나인 게일 왕조가 내전에서 강한 주도권을 가졌고 길리 왕조 노르웨이가 아슬아슬하게 내전에서 일전일퇴를 하며 유지했다.
그러다가 결국 하라드라다 가문이 역관광을 하여 길리 왕조를 몰아냈으나 길리 가문의 일원이었던 스베리르에게 다시 작살이 나며 하라드라다 가문은 단절된다. 그리고 스베리르 왕조 노르웨이가 탄생한다. 그럼에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게일 가문이 다시 일어나 스베리르 왕조를 몰아냈다. 이런 과정이 12세기 내내였다.
결국 스베리르 왕조를 복권시킨 하콘 4세는 강력한 왕권으로 내전을 종식시켰으며 아들 하콘 5세와 공동 통치를 하며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성공하여 노르웨이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냈다. 1250부터 13세기 가 끝날 때까지였다.
하지만 스베리르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 하콘 5세(위의 하콘 5세와 다른 인물)가 딸만 낳으며 단절되며 노르웨이의 독자 역사는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하콘 7세가 등장할 1905년까지 없게 되었다.
첫댓글 와 노르웨이도 리즈시절은 꽤 컸네요. 콜라반도까지 ㄷㄷㄷ 북극곰이 왜 콜라를 좋아하는지 알거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