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져 신화가 된다.’
소설가 이병주가 남긴 명언이다. 필자는 이 말을 좋아한다. 특히 역술계 고수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행적을 추적할 때마다 이병주가 남긴 이 말이 오버랩되곤 한다. 사주팔자를 통해 염라대왕의 비밀스러운 장부를 슬며시 훔쳐보아야 하는 역술가의 삶이란 태양의 조명을 받는 양지(陽地)의 삶은 분명 아니다. 차라리 어슴푸레한 달빛에 익숙해져야 하는 음지(陰地)의 삶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정면에 나서지 못하고 항상 이면(裏面)에 머물러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음지의 삶이 지닌 애환은 활자로 남겨진 기록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깊숙한 사생활을 다루는 업무성격상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로만 후세에 전해질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이 뭉쳐 세월의 이끼가 쌓이면 신화와 전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 아닌가!
근래 한국 명리학계의 빅3 가운데 두 사람인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1903~92),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1935~2000)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발견된다. 박재완과 박제현. 공통점은 둘 다 박씨(朴氏)라는 점이다. 한국에는 역대로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기인·달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시작해 조선조 창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무학대사의 속성도 박씨였다. 그런가 하면 계룡산 신도안의 바위에 새겨져 있던 풍수도참의 글씨도 ‘불종불박’(佛宗佛朴)이다. 박씨 가운데서 미륵불이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로 인해 계룡산에는 박씨 성을 가진 도사들이 엄청나게 몰려 왔었다. 근래 ‘신앙촌’으로 유명했던 감람나무 박태선 장로도 박씨이고,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도 박씨다. 왜 박씨인가?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동방이다. 동방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木)의 방향에 속한다.
박(朴)자에는 나무 목(木)이 들어 있다. 따라서 동방의 나라에 부합하는 성씨는 박씨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나무 목의 오른쪽으로 복(卜)이라는 글자가 첨가된다. ‘복’ 자의 의미는 점을 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배출되는 영(靈)적 능력자 가운데 박씨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설이 있다. 필자에게 풍수를 전수해 준 선생님의 성씨도 공교롭게 박씨였는데, 언젠가 그 선생님과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 ‘한국에서는 나무 목자가 들어간 성씨인 박(朴)씨와 이(李)씨를 주목해야 한다’였다.
박재완 납치한 12·12 신군부 주체들
도계 박재완이 남긴 일화 가운데 하나만 소개해 보자. 1979년 12월12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경복궁 일대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이름하여 12·12 사태. 이틀 후인 12월14일 이른 아침 대전에 살고 있던 박재완은 서울 경복궁 근처의 모 안가로 강제로 모셔져야만 했다. 신군부의 군인들에 의해 부랴부랴 대전에서 서울의 안가로 납치되다시피 온 것이다. 그 이유는 12·12 거사 주체세력들의 명리를 보아주기 위해서였다.
과연 거사는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인가. 평상시에야 합리와 이성에 바탕한 판단을 중시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던질 때는 이성보다 초월적인 신의 섭리에 의존하게 마련인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신의 섭리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섭리를 인수분해하면 사주팔자가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러니까 한국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주팔자를 ‘신의 섭리’이자 ‘전생(前生)성적표’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12월14일이라면 12·12 불과 이틀 후다.
이틀 후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던 시점이다. 그 긴박한 시점에 신군부 주체들이 다른 일 제쳐두고 자신들의 사주팔자부터 보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평소 생각하기를, 칼을 숭상하는 군인들은 사주팔자와 같은 흐리멍텅한 미신(?)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줄로만 알았다. 사주팔자는 다분히 문사적(文士的) 취향 아니던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군인들 역시 사주를 본다는 것은 의외였다. 사주팔자에는 문무의 구별이 없음을 깨달았다.
12·12라는 긴박한 역사의 수레바퀴 한쪽에서 벌어졌던 이 은밀한 일화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는 바로 ‘만세력’(萬歲曆) 때문이었다. 사주팔자를 보려면 반드시 ‘만세력’이라고 하는 달력이 필요하다. 만세력은 생년·월·일·시를 육십갑자로 표시한 달력이다. 일명 ‘염라대왕의 장부책’이다. 염라대왕의 장부를 보지 않으면 운명을 알 수 없다. 만세력이 없으면 사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보통사람들의 필수품은 신용카드이지만, 도사의 필수품은 만세력이다. 신용카드는 놓고 가더라도 만세력은 반드시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도사는 주머니에 만세력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자기 앞날의 운명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2월14일의 박재완은 만세력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군인들이 대전의 집으로 들이닥쳐 순식간에 납치했으니 미처 만세력을 챙길 심리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재완은 서울에 도착하자 종로에 사는 제자인 유충엽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서울에 있네. 급히 오느라 만세력을 안 가지고 왔는데, 자네 만세력 좀 보내주게.”
“그러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글쎄…. 여기가 어디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겠네.”
이 전화가 끝나고 15분 정도 지났을 때쯤 건장한 청년 몇몇이 검은 안경을 쓰고 ‘역문관’에 나타나 유충엽으로부터 만세력을 받아 총총히 사라졌다. 이 만세력 일화는 그때 스승인 도계 박재완으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고 만세력을 전해준 유충엽씨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97년 월간시사지 ‘WIN’(월간중앙의 전신)에 ‘역문관야화’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유충엽씨는 역술인으로는 드물게 해방 이후(1949년) 대전사범을 나온 인텔리다.
대전사범이라도 나왔으니 이 일화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글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잉크방울은 핏방울보다 진하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박재완이 감정한 신군부 주체들의 사주는 이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운이 좋다. 그러나 10년쯤 지나면 ‘재월령즉 위재이환’(財越嶺卽 爲災而還) 즉, 재(財)가 재(嶺)를 넘으면 재(災)가 되어 돌아온다.”
신군부 주체들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김재규는 신군부로부터 당한 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김재규 역시 박재완으로부터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 원래 야심이 있었던 김재규는 1970년대 초반 이미 박재완을 찾아가 자신의 미래 운명을 점쳐 보았던 것이다. 그때 나온 내용 가운데 하나가 ‘풍표낙엽 차복전파’(楓飄落葉 車覆全破)라는 구절이었다. 이 문구는 보통 ‘단풍잎이 떨어져 낙엽이 될 즈음 차가 엎어져 전파된다’로 해석된다.
유의할 점은 이 구절이 김재규의 1979년 운세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반 도계로부터 이 문구를 전해 받은 김재규는 1979년이 되자 차를 아주 조심하였다. 차가 엎어진다고 되어 있으니 자동차를 탈 때 조심한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조심히 운전하라고 여러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인생을 놓고 볼 때 ‘차복전파’에 대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차(車)는 자동차가 아닌 차지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전(全)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역술계에서는 해석한다. 차지철은 죽을 때 화장실에서 엎어져 죽었고(車覆), 김재규는 전두환에게 격파당했기(全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재규는 죽었으니 차가 엎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했지만, 만약 차가 차지철을 의미하고 전이 전두환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김재규가 미리 알았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2만명의 사주는 봐야 물리가 터진다”
박재완은 1903년에 태어나 92년에 사망하였으니까 90세의 장수를 누렸다. 90세의 장수를 누렸기 때문에 도계는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고관대작과 기업가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사주를 보았다. 모모한 고위관료와 사업가치고 그에게 사주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적중률이 높았다. 그가 남긴 저술은 ‘명리요강’(命理要綱)과 ‘명리사전’(命理辭典), 그의 사후(死後) 그의 제자들이 간행한 ‘명리실관’(命理實觀) 등이 있다. ‘명리요강’은 명리의 핵심 원리들을 요약한 책이고, ‘명리사전’은 그 원리들을 사례별로 풀어 놓은 책이다.
특히 ‘명리사전’은 일본의 추명학자들이 일어로 번역본을 내자고 두번이나 요청했던 명저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재완은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 명리의 노하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리실관’은 도계가 직접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사주를 본 임상기록이다. 이것을 보통 간명지(看命紙)라고 부른다. 수제자인 유충엽이 한문으로 된 간명지를 해석한 것이 ‘명리실관’이다.
사주에 대한 적중률도 적중률이지만 그의 인품도 남달랐다. 담백무욕(淡白無慾)해서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명성이 높아지고 적중률이 높아질수록 돈에 욕심을 내기 쉬운 법인데 그는 돈 문제에 담백하였다고 전한다. 그만큼 단순한 술객의 차원이 아니라 내면 수양에도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92년 임종을 맞이해서도 그냥 가지 않고 후학들에게 감동적인 일화를 하나 남겼다. 바로 자신이 죽는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해준 일이다.
죽음을 귀천(歸天)이라 했던가!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명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짜도 정해져 있듯 죽는 날짜도 정해져 있다고 본다. 정해진 날짜에 하늘로 돌아가야만 끝맺음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귀천 날짜에 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도 과히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갈 때는 가야 한다. 이 이치를 박재완은 몸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임종에 즈음해 자식들에게 자신의 귀천 날짜와 시간을 미리 예견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정해진 그 날짜와 시간에 자신이 하늘나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절대로 링거 주사를 꽂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링거 주사를 맞으면 인위적으로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늘의 법도를 어긋나게 하는 일이 된다. 박재완은 자신이 예언한 그 날짜, 그 시간에 조용히 운명하였다. 과연 일세를 풍미한 명리학자의 죽음다웠다. 도인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즈음하여 일생 동안 닦은 내공을 바탕으로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서비스이기도 하다. 초연한 죽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도록 해주는 법문이다.
필자는 도계가 지녔던 명리학의 내공을 파악하기 위해 ‘명리실관’의 임상사례들을 분석한 바 있다. ‘명리실관’에는 무수한 실전 사례들이 소개돼 있다. 내공은 실전체험에서 나온다. 명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실전 사례를 분석하는 작업은 내공 증강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도계는 아마도 수십만명의 임상경험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십년을 보았으니 말이다. 역술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약 2만명 정도의 임상을 해보아야 한다는 설이 있다. 2만명 정도의 임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리가 터진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한다면 사주팔자는 바코드와 같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때 스캐너로 바코드를 한번 휙 그으면 책값이 단박에 나오는 것처럼, 2만명 이상의 임상 경험을 가진 역술가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주팔자를 한번 휙 쳐다보기만 해도 격국(格局)이 나온다고 한다. 이는 여덟 글자라는 디지털을 인간사의 희로애락이라는 아날로그로 전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덟 글자의 디지털 속에 잠복되어 있는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튼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이 있듯 어떤 일이든 낑낑거리면서 골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돈오(頓悟)의 깨달음이 오는 법이다. 2만명이라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0명씩 본다고 가정해도 1년이면 3,650명밖에 되지 않으니 줄잡아 6년은 쉬지 않고 중노동해야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필자는 15년 남짓 보았지만 이제 겨우 5,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2만명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다. 필자 평생에는 불가능한 목표다.
양도 양이지만 질도 문제다. 전업 역술가가 아니고 필자와 같이 대학에 있는 사람은 상대하는 계층이 주로 학교 선생들이나 평범한 봉급쟁이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사주를 가진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다는 불리함이 있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스리고에 피박까지 당하는’ 사람들의 사주를 보아야 재미도 있고 실력도 팍팍 는다.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는 ‘나인 투 파이브’들은 인생의 기복이 적어 피박을 당하지 않으니까, 사주도 믿지 않는 경향이 있고 재미 또한 없다. 종교도 그렇지만 사주팔자도 수준이 높은 상근기와 수준이 낮은 하근기가 제일 잘 믿는 반면 중근기들은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상근기는 계산이 빨라 믿고 하근기는 남들이 믿으니까 덩달아 믿지만 중간치기들은 이리저리 주판만 놓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끝난다.
어쨌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사주가 실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공부거리다. 그런 면에서제일 보기 좋은 사주가 정치인들의 사주이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라서 한발 옆으로 디디면 교도소다. 인생살이에서 길흉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사주상에 나타난 길흉과 대조하기 쉽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정치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서 가장 화려한 배역을 맡은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 다음에는 연예인들이 좋다. 연예인들 역시 기복이 심하고 길흉이 확실하게 나타난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같으면 탤런트 황수정의 사주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 어떤 운이 들어와 저렇게 망신당하는지 분석해 보고 싶다. 외국 가수 중에는 ‘파워 오브 러브’(power of love)와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셀린 디옹이 필자의 사례 연구 대상이다.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예쁘고 노래 잘하는 젊은 여자가 뭐가 부족해 25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노인장하고 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여자 사주에서 태어난 날짜가 임(壬)·계(癸) 일주(日主)는 백두노랑(白頭老郞:머리가 하얀 늙은 남편)하고 산다는 이치가 있는데, 혹시 셀린 디옹의 사주팔자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현직 검사가 집필한 사주책 ‘四柱精說’
도계는 사주팔자를 통해 많은 중생들을 도와주었다. 사업에 부도나 자살하기 일보 직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몇년이 고비이니 이 고비만 넘으면 좋은 운이 찾아온다.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아 보라”든가. 남편이 몰래 바람을 피워 낳아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찾아와 하소연하면 “팔자소관이니 하고 넘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라”고 위로하였다.
한국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차마 말 못할 고민을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점쟁이를 찾아가 털어 놓는다.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 놓아야 정신병에도 안걸리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자살도 방지할 수 있다. 털어놓고 상의할 만한 최적의 상대가 바로 점쟁이·역술가·명리학자다. 점쟁이가 2만~3만원의 복채를 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담료이니 그까짓 복채 몇푼 너무 아까워 하지 말라! 점쟁이도 공돈은 안 받는 셈이다. 점쟁이도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순기능도 있는 것이다.
명리학자였던 도계는 그러한 고충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팔자소관으로 돌려라, 지금만 버티면 다음에 좋은 때가 온다, 기다려라’의 상담초식이었다. 엄청난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로 위로할 것인가. 그 해답은 주님의 섭리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미치거나 병들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도계를 찾아와 상담했던 사람들 중 이색적인 그룹이 있는데, 그 그룹이란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수험생들이었다. 고시에 여러번 낙방하다 보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고시원에서 시험준비만 하다 내 인생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런 연고로 고시생들이 사주팔자를 많이 연구한다. 낙방을 거듭하던 고시 수험생이 어느날 도계를 찾아와 물었다.
“저 아무래도 고시공부 집어치워야 할까 봐요.”
“아니네, 이 사람아, 자네는 고시에 합격할 운이 있네, 한 2년만 더 참고 공부하면 그때 합격할 것이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소.”
아닌게아니라 2년후 그 수험생은 고시에 합격하였다. 합격하고 나서 이 수험생은 사주팔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의문을 품고 고시공부하듯 명리학 서적들을 독파했다.
그리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사주정설’(四柱精說)이라는 책이다. 고시 합격자가 핵심 원리만 뽑아 정리했기 때문에 보기에 일목요연하고 부피도 얇아 초입자가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다. ‘사주정설’의 저자는 백영관(白靈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저자의 실명이 아닌 가명이다. ‘사주정설’을 집필할 때(1982년) 저자는 현직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현직 검사가 실명으로 사주팔자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부득이 가명으로 책을 낸 것이다.
도계의 실전사례를 기록한 ‘명리실관’을 보자. ‘명리실관’을 보면서 필자가 놀란 것은 그 유려한 한문 문장이다. ‘명리실관’에 등장하는 사주풀이는 전부 한문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자의 사주팔자를 이런 식으로 평하였다. ‘주옥세진(珠玉洗塵) 왕금수기(旺金秀氣) 봉시영달(逢時榮達) 귀가지부(貴家之婦). 총명출중(聰明出衆) 임사불루(臨事不漏).’
이를 해석하면 ‘주옥이 먼지를 씻어내니 왕성한 금의 기운이 빼어나구나. 때를 만나 영달하게 되니 귀한 집의 부인이로다. 총명이 출중하여 일에 임해 소홀함이 없구나다.’
도계가 ‘명리실관’에서 사용하는 문장은 모두 4자씩 규칙적으로 결구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한문 4자 안에 내용을 함축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 ‘변려문’(騈儷文)이라고 한다. 4자씩 규칙적으로 반복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유교 경전 가운데는 ‘사자소학’(四字小學)이 대표적이고, 불경 가운데는 ‘능엄경’이 이와 같은 변려문으로 되어 있어 읽기에 편하고 운율을 감상할 수 있다. 능엄경 좋아하는 사람들은 변려문 스타일에 매우 익숙하게 마련인데, 대학에서 불교의 능엄경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은 필자로서는 도계의 한문 문체가 입맛에 맞는다. 아울러 고색창연한 변려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인생사의 파란만장을 유장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도계의 학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신출귀몰 천재형 명리학자였던 제산 박재현.
같은 사주를 정반대로 해석하는 까닭
‘명리실관’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부분은 명리학 이론서에는 나오지 않는 해석이 발견될 때다. 예를 들면 ‘경오(庚午), 기축(己丑), 기축(己丑), 무진(戊辰)’의 여자 사주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40세에 이르니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존경한다. 43~44세는 구리기둥에서 좀벌레가 생기는 격이라 믿는 곳에서 피해를 입으니 이 역시 운수소관이다.’
43~44세에 구리기둥에서 좀벌레가 생기는 격과 같은 해석은 필자로서는 불가능한 대목이다. 명리학 이론서 가지고는 해석해낼 수 없는 부분이다. 필자의 과문 탓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43~44세에 구리기둥에서 좀벌레가 생긴다고 해석할 수 있었을까. 이론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대목이다. ‘명리실관’을 읽다 보면 도처에서 이처럼 불가해한 부분이 발견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는 명리학 이론서에 나온 말이 아니라 도계가 지녔던 독특한 영감 내지 직관력에서 나온 해석이라고 여겨졌다.
사주 공부는 첫째, 이론서를 섭렵하고 둘째, 실전문제를 많이 풀고 셋째, 직관력을 갖춰야 한다. 직관력이란 영적인 힘을 가리킨다. 사주 내공의 완성단계는 직관력이다. 이것이 없으면 최후의 5%에서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해석이 아주 모호한 상황에서 이것이다 하고 판정할 수 있는 힘은 직관력이다. 역사도 결국 자료가 아니라 그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 내느냐 에서 좌우되지만, 사주도 마찬가지다.
같은 여덟 글자를 보고도 보는 사람의 능력과 관점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해낼 수 있다. 문제는 ‘영발’(靈發: spiritual power)이다! 영발을 얻으려면 입산수도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종합하면 도계는 한쪽에는 이론, 다른 한쪽에는 실전체험과 영적인 힘까지 아울러 갖추었던 실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비유하자면 쌍권총을 찬 것과 같다. ‘O.K목장의 결투’에서처럼 쌍권총을 차면 한쪽이 불발이더라도 나머지 한쪽은 작동하게 마련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순례하며 도력 쌓은 도계 선생
그렇다면 도계는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어떠한 수련 과정을 거쳤을까 궁금해진다. 그의 이력을 더듬어 보자. 도계는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0세 전에는 곽면우(郭傘宇) 선생 문하에 입문해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곽면우, 그는 구한말 영남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3·1운동 이후 일본정부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대구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는 유학자요,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도학에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이다.
소설 ‘단’(丹)을 보면 그는 정신수련에서 상당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인물로 묘사된다.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는 평소 곽면우 선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의 풍수 선생님인 박의산(朴懿山:1926~) 선생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이환조 선생이 나오고, 이환조의 스승이 정봉강이고, 정봉강 선생의 사부가 바로 곽면우 선생이 되기 때문이다. 풍수계보상으로 따져 보면 곽면우 선생은 필자의 고조부뻘이 된다.
비록 유학이 아닌 풍수이기는 하지만, 풍수를 연결고리로 해서 필자와 곽면우 선생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해 전에 경남 거창에 있는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곽면우의 풍수 수제자인 정봉강도 일본 경찰을 때려 죽이고 전국으로 유랑하였듯 도계도 곽면우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단체 내부의 파벌싸움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중국 무송현의 왕보(王甫) 선생 문하에서 태을수(太乙數)·황극수(皇極數) 그리고 명리를 사사받는다. 대가 밑에서 이론 공부와 함께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귀한 서적들을 이 시기에 입수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인연도 팔자소관이다. 여기까지가 이론 공부였다면 중국에서 귀국하여 1928년 26세 때는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을 비롯한 여러 명산 대찰에서 수도를 한다. 정신세계의 깊은 곳으로 침잠(沈潛)하는 수련의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이라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수련가의 안목에서 보면 금강산은 고단백질이 풍부한 산이다. 지구에서 방사되는 지자기(地磁氣)는 바위를 통해 올라오므로 바위산에서 생활하거나 수도하면 강력한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강력한 지기가 있어야만 내면세계라는 지하실 깊숙이 진입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힘이 없으면 내면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바위산에서 도인이 많이 배출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금강산이 주목받는 산이 되었다. 산 전체가 바위산인 금강산에서 한국 정신세계의 양대 파벌 중 하나인 금강산파(金剛山派)가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또 다른 파벌 중 하나인 지리산파(智異山派)의 인물들은 심법이 후덕한 경향이 있다면, 금강산파는 신출귀몰한 도력을 갖춘 인물들이 많다. 도계는 돈도암을 비롯한 금강산 이곳 저곳을 역방하면서 금강산파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기운 좋은 암자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심도 있는 정신수련도 하지 않았나 싶다. 요즘 사주공부하는 사람들은 책 몇권 읽고 함부로 간판을 내거는 경향이 있다. 위험한 일이다. 돌팔이는 남도 망치고 자기도 망치는 법이다. 이론을 거친 다음 최소한 3년 정도는 입산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수련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도계 같은 대가도 공부 과정에서 전국의 명산대찰을 순례하였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용옥과 같은 원숭이像인 천재 박재현
빅3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산 박재현을 이야기해 보자. 도계가 담담한 성품의 도학자적 스타일이라면, 제산은 좌충우돌 신출귀몰하는 천재형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두뇌와 아울러 격한 감정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충돌하면서 스파크를 남겼다. 그가 남긴 스파크를 추적하다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의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996년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나 받은 인상도 대단한 재사(才士)라는 느낌이었다. 우선 제산은 관상부터 비범하였다.
보통사람이 제산의 관상을 보면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상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제산의 얼굴은 원숭이형 관상이다. 눈과 눈썹 부분의 모습이 원숭이 같다. 자고로 원숭이형 얼굴을 가진 사람 중에서 천재가 많다. 우선 도올 김용옥부터 보자. 도올도 필자가 보기에는 원숭이형 관상이다. 도올이 TV에서 ‘도덕경’을 강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필자는 손오공을 연상하였다. 그 변화무쌍한 초식을 동원하여 종횡무진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신통력은 도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현재 한·중·일 3국에서 도올과 같은 손오공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도올 선생! 원숭이라고 평했다고 해서 필자를 너무 욕하지 마시라! 역사적으로 볼 때 원숭이형들은 천재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선생과 제산의 예를 든 것일 뿐이니….
일본의 원숭이형 천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경북 안동의 강직했던 선비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93)은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본 뒤 “원숭이 같이 생겼다”고 평가한 바 있다. 히데요시도 원숭이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는 만고에 죽일 놈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로 꼽는다. 히데요시는 평지돌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말을 끌던 미천한 마부 출신이 입신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은 물론 대국인 중국까지 삼켜버릴려 했던 걸물이다.
평론가의 안목에서 볼 때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보다 히데요시의 인생이 훨씬 극적이다. 아무튼 제산은 원숭이상을 지닌 천재였다. 실제로 제산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의 서상(西上)이라는 지역인데, 유년시절부터 ‘서상에 신동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던 인물이다. 그 천재성이 바둑으로 갔으면 이창호가 되었을 것이고, 학문으로 갔으면 도올 같은 인물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천대받는 업종인 명리쪽으로 갔다.
그것도 결국 팔자소관이요, 주님의 섭리일 테지만 말이다. 필자가 명리학 연재를 시작하면서 ‘월간중앙’의 정재령 부장에게 “우리나라 역술가 가운데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자 정부장의 즉각적인 답변이 “박도사를 먼저 소개해 달라”였다. 박도사는 바로 제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월간지 부장도 이미 그 명성을 알고 있었을 만큼 제산은 이 분야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자. 1970년대 후반(아마 1978년쯤) 전국적으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몇달째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부는 비상이 걸렸고, 주무부서인 농수산부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수산부 장관은 장덕진씨였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각료회의에서 가뭄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쳤고, 해당 부서 장관인 장덕진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대책이란 양수기 수만대를 외국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난 인물이 평소 알고 지내던 ‘박도사’였다.
양수기 수만대를 수입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혹시 박도사에게 물어보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해서였다. 당시 계룡산에서 칩거중이던 제산은 장덕진 장관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내가 천기를 보니 몇월 며칠에 반드시 비가 오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견뎌 보라”는 답을 주었다. 제산의 말을 믿은 장덕진 장관은 가뭄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양수기 수입을 차일피일 미뤘다. 얼마후 정말 비가 온다면 양수기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 비가 오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면 일국의 장관이라는 사람이 일개 점쟁이의 말을 듣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장덕진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탔다. 정말 비가 올 것인가. 하지만 비가 오기로 예언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별만 총총하게 빛났다. 일기예보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장관은‘아! 나는 내일쯤 목이 날아가겠구나!’하고 체념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날씨가 맑은 편이었는데, 점심 때가 지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것 아닌가. 오래지 않아 장대같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전국적인 가뭄이 해갈된 것은 물론이었다. 필자는 이 비사(秘史)를 제산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당시 제산의 집이 서울 연희동에 있었는데, 억수같은 비가 오자 장덕진 장관이 흥분한 목소리로 ‘오후 6시까지 연희동 집으로 갈 테니 제산과 같이 만나자’는 전화를 하였다. 계룡산에 있던 제산은 장장관의 연락을 받고 급히 연희동으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장덕진은 6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5시쯤 되었을 때 비서관을 대동하고 미리 연희동에 와서 박도사를 기다렸다.
박도사 믿고 양수기 안사고 버틴 장덕진
제산의 내공이 절정기에 있을 때는 이처럼 언제 비가 올 것인가 하는 천기의 부분까지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과 국가적 대사를 예언하는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486 컴퓨터와 팬티엄 3의 차이라고나 할까. 언제 비가 올 것이라는 정도까지 적중하다 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 제산의 이름은 정치인들이나 고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다.
1990년대 초반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은 헬기를 타고 제산이 살고 있던 서상까지 제산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 박회장과 제산은 같은 박씨라서 인간적으로 서로 친한 사이였다. 포철 박회장이 헬기를 타고 직접 박도사를 만나러 왔던 일은 몇몇 일간지에서 이를 기사로 보도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박도사를 가리켜 “살아 있는 토정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한 바 있다. 정치인 김복동씨와 김기재씨도 제산과 왕래가 잦았다. 이들 유명 정치인들과 제산의 관계는 사판의 대가와 이판의 고수가 만난 격이었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 시절 이곳 저곳을 방랑했다. 주로 지리산 일대였다. 함양·산청·남원의 운봉 등지였다. 특히 제산은 20대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m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도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도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 시원하고 땅 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노씨의 집안도 그 중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 경전을 단련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黃)씨일 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에 사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과연 하수라고 하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 아닌가.
평소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 보고해 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되는 수가 있다. 접신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 대고 정보를 알려 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귀에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 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하고 추궁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 보라”하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63)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乙亥명당의 地氣 받고 태어난 박도사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하다못해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제산과 같이 100년만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은 반드시 지령과 관계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제산의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밑의 산동네다. 무주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서상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잡은 동네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영·호남의 길목이었다. 경상도 거창·함양에서 전라도의 장계·장수 쪽으로 가려면 이 동네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영·호남을 오가는 많은 과객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제산 집안에서는 지나가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과객 가운데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중 특히 풍수와 사주에 밝은 과객들도 있었는데,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제산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술객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몇달이고 무전취식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제산의 집은 영·호남의 문화가 활발하게 오갔던 지리산 실크로드의 중요한 베이스 캠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과객들 중 풍수에 밝은 이가 명당자리를 하나 알려 주었다. 소위 ‘을해(乙亥)명당’이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손자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해년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안은 망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산의 7대조는 그 을해명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이 집안에는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을해년에 과연 어떤 자손이 태어나는가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명당의 이름을 하필 을해라고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명당자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지맥의 형태가 을자(乙字)의 형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어의 S자 형태와 같다. 을자의 끝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물이다. 십간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육십갑자를 순서대로 짚어볼 때 을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물은 해(亥)다. 그래서 을해(乙亥)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을자 모양으로 내려간 산줄기 밑에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라서 이를 을해(乙亥)로 상징한 것이다.
67년 전인 1935년이 을해년이었다.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자락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출렁거렸다. 5월에 첫손자가 태어났다. 첫손자는 장남이 아니라 3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5월에 태어난 3남의 아들이 인물인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구렁이가 그 새끼줄을 타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이 손자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태어났다. 이 손자는 둘째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이 손자는 둘째아들이 처가살이를 했던 덕분에 서상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 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세가 넘어 생리도 드문드문했는데 임신이 되어 창피한 데다 딸을 많이 낳아서 제산이 임신되자 또 딸인 줄 알고 낙태시키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였다. 간장을 바가지로 퍼먹거나 쓴 약초를 먹는가 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해명당의 효력이 작동했는지 제산은 마침내 을해년 동짓달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낳아놓고 보니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 가면서 제산의 총기는 빛을 발하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한번 글자를 보면 단번에 외워 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상동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도사에 관한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다음 호로 넘어간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趙龍憲
1961년생. 원광대 철학박사 불교민속학 전공. 지난 15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암자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奇人)·달사(達士)들을 만나 교류를 가짐.
그동안 음지에 갇혀 있던 천문·지리·인사에 관한 담론을 양지로 끌어올려 ‘학문적 시민권’을 얻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음.
저서로 ‘나는 산으로 간다’(푸른숲)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