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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3년 1월 1일 주일 오전 예배 |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89편 1,2,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25편 4,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16편 3,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86편 1,2,3 성찬식 찬송 – 시 92편 6,7 (고정)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아멘찬송은 해당 시편으로 할 것 |
시편 설교 : 시편 86편 | |
성경낭독 : 사 63:7-9; 마 2:13-23 본문 : 시 86:1-7 제목 : “은혜” |
은혜
개혁신앙을 접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적 신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개혁신앙이 추구하는 방향과 신비주의 신앙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일 것이겠지만, 사실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비주의적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입장을 말하자면 저는 기독교의 여러 양태들 중에서 신비주의적 신앙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단지 “체험 중심적 신앙이 나쁘다”라던가 “기적 중심적인 신앙이 건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신비주의적 신앙이 나쁜가 하면 그 성격에 있어서 ‘기독교의 핵심’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적 신앙이야말로 저기 하늘에 있는 신앙의 핵심 요체들을 여기 땅 위에 있는 주제로 바꿔버리는 것을 기본적인 골자로 갖고 있는 신앙 양태입니다.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땅 중심, 물질 중심, 건강 중심, 기복 중심으로 바뀌어 버리니까, 사실은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한 양태’라기보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파괴해버리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전한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신비주의적 신앙을 ‘큰 적’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혹시 우리는 신비주의적 신앙을 배척한다는 것을 ‘특정 양태에만’ 국한해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방언을 추구’한다거나, ‘병 고침, 곧 신유에 치중’한다거나, 아니면 기적이 일어나거나 은사를 받는 데에만 몰두하는 그런 종류의 ‘특정 신비주의적 신앙의 양태에만’ 골몰하면서 이를 반대하고 있지는 않냐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보다 더 포괄적인 신비주의적 양태’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런 특정 양태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현세적인 것에만 집착하여 보는’ 전반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사실 보수적인 교단들에는 신비주의자나 은사주의자는 적을 수 있습니다. 당장 고신 교회들만 보아도, 시끄럽게 방언을 한답시고 떠들거나, 신유 은사를 받았다고 병을 고치겠다고 난리를 치면 교회에서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실제로 순복음 교회나 저(低)교회적 침례교회 같은 곳이 아니면 의외로 신비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포괄적인 신비주의적 양태’는 건전한 신앙을 표방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정말로 많습니다. 의미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 정도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라는 것을, 참으로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입장, 저기 저 영원의 시각에서 보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다분이 찰나적, 즉각적, 육체적,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것”
특히 이런 관점에서 ‘은혜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 하나님께 은혜 받는다는 것을, 찬양 집회 같은 곳에 가면 듣게 되는 감미로운 음악들을 들을 때, 혹은 메시지에 있어서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 예를 들면 듣고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 이런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진짜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보다 더 포괄적인 신비주의적 양태’입니다.
• 삶에서의 은혜 또한 그렇습니다.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단지 일이 잘 풀리는 것이나, 단지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은혜라고 여기면, 하나님께서 때로는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해서, 혹은 오랫동안의 인고의 시간을 거쳐 나오는 것을 통해서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여기지 않게 되지 않겠습니까? 삶 가운데 ‘은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이런 답을 갖고 있는 것 또한 포괄적으로는 신비주의적 양태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은혜와 내가 생각하는 은혜, 이 중에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은혜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은혜가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이것을 보다 더 포괄적인 신비주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짜 은혜는 이런 ‘상황’들 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때로는 삶에 구름이 끼는 것 같은 날도 있고, 비가 내리거나 한파가 몰아치는 것 같은 날이 있더라도, 그 여하들에 따라서 ‘은혜가 있다, 없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계속해서 들으시고 계시는가?” 은혜의 여하를 바로 여기에다가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시는 유은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은혜를 사모합시다. 이 은혜가 시편 86편에 나타나 있습니다.
네 개의 “왜냐하면”
1. 네 간구
시편 86편은 시작을 네 번의 간구로 하고 있습니다. 4절까지 네 개의 문장인데 원문으로 보면 네 문장이 구조가 똑같습니다. 네 간구의 전체적인 구조는
“무엇무엇해 주십시오”가 나오고
“왜냐하면”이 나온 다음에,
뒤에 이유가 나오는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조를 따라 읽으면 네 번의 간구는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1절 :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기 때문입니다.
2절 :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나는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 주를 의지하는 주의 종을 구원하소서
3절 :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종일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4절 :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4절까지 말씀은 네 번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고, 시편 86편은 이 간구들로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2. 이상한 간구
그러면 이 간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잠깐 생각해 봅시다.
1)
처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주제는 ‘이상한 이유’입니다.
제가 왜 “이상한 이유”라고 했을까요?
여러분은 시편 86편의 이 네 간구를 읽으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하면서 다시 네 간구들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느 근사한 부잣집에 들어가서 거기 있는 주인 아주머니한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와! 배가 너무 고파요! 얼른 밥 좀 내 오세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은 어떤 취급을 당할까요?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않겠습니까? 거기가 식당이면 돈을 내면 될 일이지만, 일반 가정집이라면 아는 사이라고 해도 진짜 친한 사이가 아니면 이렇게 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 사이라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 중에 한 분이 아무 성도들 집에나 저녁에 불쑥 찾아가서 “내가 배가 고프니까 밥을 좀 주시오” 이렇게 말하면 굉장한 실례가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배가 고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네 간구를 보면 참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1) 첫째 간구를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고 곤고한 것”이 왜 “여호와께서 귀를 기울이셔야 하는 이유”가 됩니까? 이 문장에서 “때문에”를 좀 주목해서 읽어보시면, 참 이상야릇한 문장입니다. “내가 궁핍하고 곤고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나에게 귀를 기울이셔야 한다.” 이게 굉장히 하나님께 무례한 태도가 아닙니까? 굉장히 이상한 모습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왠만하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인데, 오늘 시는 그렇습니다.
2) 이후 간구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경건하니까 내 영혼을 보존해 주십시오” 두 번째 간구죠? “내가 경건합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을 보존해주세요” 이건 굉장히 버릇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무슨 조건을 갖고 딜을 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무언가 좋은 것을 드리면서’ 그 대가로 무얼 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떠하니까 해 주쇼” 이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3) 셋째와 넷째 간구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종일 부르짖으니까 나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니까 나를 기쁘게 해 주세요” 굉장히 일방적입니다. 버릇없고 무례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까요? 네 간구는 참 이상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즉시 이런 생각이 드는 제일 큰 이유는 시인이 ‘조건’을 걸고 있는데 그 조건이란 것이 하나님이 들어주셔야만 할 것처럼 보이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 편에서 하나님께 “제가 하나님께 이런 걸 좀 해 드릴테니, 이것 저것을 좀 해주세요” 이렇게 간구했다면 약간 딜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건적인 것처럼 보여도 이해가 될 수 있는데, 시인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면서 들어달라고 합니다.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들면서 하나님께 요청을 하고 있으니 ‘이상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3. 해답
그러면 여러분,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왜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께 말할까요?
제가 예를 든 것처럼, 시인은 왜 불쑥 어느 부잣집에 들어가서 “저녁 좀 주쇼, 내가 배가 너무 고프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입니까? 이유가 뭘까요?
여기에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이 부잣집의 아들’이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아무 집에나 불쑥 들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가 자기 엄마 집이었으면, 그러면 이렇게 말해도 괜찮지 않나요? 대답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시골에서 가게를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횟집’ 간판을 달고는 있었는데, 시골 마을이다 보니 회도 팔았지만 돼지 불고기 같은 것도 파셨고, 심지어 테이블이 없는 쪽에는 동네 슈퍼처럼 과자나 일용품들도 가득 쌓아놓고 팔았습니다. 그야말로 만물상이었습니다. 안 파는 게 없는 그런 이상한 횟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이 이렇게 가게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저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과자를 먹을 수 있었거든요. 물론 어머니는 팔아야 되니까 막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학교를 마치고 가게에 들어가면 원하는 과자 한 봉지 정도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가끔씩 은박지 호일에 불고기를 구워서 저녁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 가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약 다른 아이들이 집어 가면 도둑놈 소리를 들었겠지만, 저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허용을 받았습니다. 마음껏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1) 1절 : 궁핍과 곤고
1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요청하면서 이유를 “내가 곤고하고 궁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요청입니다. 부잣집에 들어가서는 “내가 배가 고프니까 밥을 내오시오” 하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기 “곤고”라는 말과(히. 아니) “궁핍”이라는 말은(히. 에브욘) 둘 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의 그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팔복을 설교할 때 팔복에서 첫째 복과 셋째 복, 곧 “심령이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뜻이 비슷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셋째 복은 우리말로는 “온유한 자”라고 되어 있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이 말이 “가난하다”와 거의 같은 단어입니다(히브리어 아니, 아나우의 역어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나는 곤고하고 궁핍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나 “온유한 자”의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중요한 사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한 주석가는 이 “곤고”나 “궁핍”을 설명하면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어려움의 근본에 저항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라고 주석했습니다. 우리가 팔복에서 많이 배운 것이지요. 즉 “하나님, 저를 들어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 이유를 “제가 곤고하고 궁핍하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내가 배가 고프니까 밥을 내오시오”가 아닌 것입니다.
이 말은 ‘언약적’입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하나님이 들으셔야 하는 이유’를 ‘내가 하나님의 언약 자녀이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너희는 복이 있다! 왜? 심령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니까!”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거기 모여 있는 청중들에게 ‘선포로써’ “복이 있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니까 복이 있습니다!
시인은 왜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쎄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나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언약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들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2절 : 하시드
2절은 뻔뻔함이 약간 더 증대되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시인은 “내 영혼을 보존, 곧 샤마르, 지켜달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를 지켜주셔야 하는 이유는 “나는 경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만 읽으면 이렇게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나는 시편을 따라 기도할래”라고 하면서, “하나님 저는 아주 경건하니까 저를 지켜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굉장히 이상하고 희한한 간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전적으로 이 “경건하다”는 말에 대한 우리의 상상에서 기초하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경건하오니”라는 말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내가 이만큼 잘났다”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니다.
이 단어 ‘하시드’는 우리가 잘 아는 단어 ‘헤세드’와 같은 뿌리를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인자’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경건한”이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랑받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헤세드를 배울 때 ‘자비’나 ‘인자’라고 번역하면서도 이것을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사랑해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헤세드’이고, 따라서 ‘하시드’는 “사랑받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 보면 한글로는 거의 절반 정도는 “성도”라고 옮겼습니다.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 번역은 얼마나 멋집니까! “성도”라는 말은 단어 뜻만으로는 “거룩한 자”, “경건한 자”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그 배경이 되는 의미에는 그 “성도”라는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멋진 개념입니까!
주석의 설명입니다.
그는 “사랑받는” 혹은 “경건한” 자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언약과 관계된 주요 단어다. 누구든지 “사랑받는” 자는 여호와의 언약에 속한다. 또한 그 언약은 그분의 백성을 위한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꾸준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확신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
2절의 “나는 경건하오니”는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여호와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시드’를 이렇게 이해한 후에 다시 2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어떻게 간구하고 있습니까? “나는 경건합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을 지키시옵소서!” 이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자녀의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나를 지켜주셔야 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니”, “나를 지켜주셔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첫째 간구와 둘째 간구는 둘 다 얼마나 멋진 간구입니까?
1) 첫째 간구는 ‘언약적 용어’로서 “가난한”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외에는 아무 데도 소망이 없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시인은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니”, 즉 “나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데도 소망을 둘 데가 없으니”,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들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2) 둘째 간구 또한 ‘언약적 용어’로서 “경건한” 혹은 “사랑 받는”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으니, 나를 지키셔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 간구와 둘째 간구의 내용입니다.
자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구를 차근차근 읽으면 그림이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우리는 처음 이 간구를 접했을 때 약간 당황했습니다. 무례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조건’이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간구의 내용을’ 들어주실 필요가 별로 없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를 이해하고 나서 보면 단 한 가지 사실이 대단히 선명하게 점점 더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 됨’입니다.
시인은 지금 부잣집에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아무렇게나 밥을 달라고 하는 무뢰한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은 학교를 마치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으로 뛰어 들어온, 그 부잣집의 아끼는 아들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엄마! 밥 주세요!”, “아빠! 용돈 주세요!”
시인은 굉장히 언약적인 용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고하고 궁핍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도 그가 철저하게 의뢰하는 분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그가 “경건하다” 혹은 “사랑받는다”고 말한 것은 그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그가 어떤 소속에 놓여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이 시편은 ‘아빠에게’, ‘아들이’ 간구하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함부로 말하고, 담대합니다. 제가 학교를 마친 후에 엄마가 일하시는 가게에 뛰어들어가서 “엄마, 과자 한 봉지만!” 하더라도 “뭐 이런 이상한 놈이 있어!”하면서 내쫓지 않는 것처럼, 시편 86편의 간구는 이런 것입니다.
5절과 6절 : 근거, 그리고 들으시라는 명령
이제 5절과 6절을 살피면서 말씀을 정리합시다.
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
1. 근거
5절은 얼핏 보더라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네 가지 간구를 마친 후에 시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곧 ‘아빠는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선하시다
2) 하나님은 사유, 곧 사죄를 즐거워하신다. 여기 단어는 ‘살라흐’, ‘용서할 준비가 된’이라는 뜻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후하십니다.
“선하시다”는 것은 ‘토브’, 곧 ‘좋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죄를 즐거워/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이 좋다, 선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 이 셋을 모두 포괄해서 말할 수 있는 용어가 세 번째의 것인데, 곧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후하”십니다.
물론 “선하시다”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선하시니까 “사죄를 즐거워하신다”도 잘 이해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이 상황이 ‘언약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네 간구가 ‘아빠에게 아들이’ 하는 간구임을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간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5절 말씀의 핵심은, 역시 언약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은 인자하시다”이겠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시인이 두 번째 간구에서 “나는 경건하오니”, 곧 “나는 사랑받는 자입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만 할 수 있는 간구입니다. 사랑 받음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반대편에는 누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랑받는 시인”이 있으니 반대편에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2절의 ‘하시드’는 어디에 연결될까요? 5절의 ‘헤세드’에 연결됩니다. 2절의 “나는 경건하오니”가 5절의 “하나님은 인자하시다”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2절의 “사랑받는 사람”은 5절의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하시드’와 ‘헤세드’의 연결입니다. 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다”, 다르게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언약적 사랑, 곧 헤세드입니다.
그렇습니다. 4절까지의 간구는 5절의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간구할 때 아버지가 들으시는 것은 아버지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듣는 대상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2절과 5절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말합니다. “저는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5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2. 들으시라는 명령
그래서 6절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6절은 모두 ‘명령형’입니다.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제 간구를 들으십시오!”
우리는 가끔씩 시편을 읽다가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건 시인이 하나님께 자주 이렇게 명령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이것을 읽으면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명령형으로 말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기껏 해봤자 “저 좀 도와주세요” 정도밖에 말할 수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시편의 이런 명령형을 읽을 때마다 ‘모세’가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반역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1-12).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반역 이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던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가공할 계획’을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역한 백성 모두를 없애버리고 모세를 필두로 하여 새로운 백성을 조성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앞을 가로막고 말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리라......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민 14:13-19).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어떻게 한낱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겠다” 하신 것에 “안 됩니다. 하나님” 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모세’가 보여주고 있는 한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우리의 형님 되시는 분, 우리의 오빠 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아들이니까, 가로막은 것입니다. 아들들의 대표자로서 유일한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을 가로막고 “그건 안 됩니다 아버지!” 한 것입니다.
어떻게 시인은 하나님께 ‘명령형’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까?
간구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두 번째 단어 “들으소서”는 단어의 의미를 보면 ‘경청하다’라는 뜻입니다. 사전을 보면
“이 단어는 듣는 행위를 뜻하며 깊은 주의를 기울이거나 청종한다는 의미에 강조점을 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의 단어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여기 “듣는 것”, 곧 귀를 기울이고, 청종하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나를 귀기울여 청종해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아들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딸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시인은 5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헤세드”, 곧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한 후에 그 하나님의 ‘되심’에 근거하여, 이제 명령형으로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심지어 “귀를 쫑긋 세우고, 청종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들으시라는 명령은 단 한 가지 근거에서 나옵니다. 그분은 사랑하시고, 우리는 사랑받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저는 설교의 서론에서 ‘신비주의적 은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눈으로 볼 때 기발해 보이는’ 신비한 능력이나 경험을 얻는 것을 신앙에서 추구하면서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보다 더 포괄적인 신비주의적 양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신앙은 슬픈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참 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아빠’와 ‘자녀’의 ‘관계 속에 사는 것’입니다. 시편 86편은 우리에게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녹의 삶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저는 성경 인물들 중, 가장 부러운 사람 중에 하나가 ‘에녹’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저의 부러움의 이유를 ‘그가 하늘로 데려감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닙니다. 제가 진짜 에녹에게 부러운 것은 “그가 데려감을 당했다”가 아닙니다. 제가 부러운 것은 그 앞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이 문장 안에 무려 두 번이나 반복되어 말씀되고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며”......히브리어로 읽으면
그는 하나님과 걸었다
저는 이것이 가장 부럽습니다.
시편 86편은 우리에게 ‘진짜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줍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왜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들으시니까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 꽉막힌 듯한 세상,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 때로는 무서운 것이 너무도 많고 실패할 확률도 너무도 높고, 어느 날 문득 길을 가다가 차에 치어 죽어버리거나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무서운 세상 속에 살아갈 때, 우리는 왜 행복합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서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 말하는 은혜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들으신다는 것, 곧 우리가 그분의 아들, 딸이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참 행복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