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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나님의 경륜 원문보기 글쓴이: 나눔
"교회가 없다" 라는 책의 재판인 것 같네요..
제가 중요한 내용들은 타이핑 좀 쳐서 올리려고 했는데 다행이 어떤 분이 요약해서 올리셨네요.
아마도 제도교회나 올바른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 조차 금지도서 목록에 올라가 있지 않나 싶네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일부 과장되거나 교리나 대안의 부재 등 있을 수 있겠지만
예배 형식에 관한 문제를 아주 꼼꼼히 정리해 놓은 것 같군요..
워치만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에서 언급한
(참조 http://cafe.daum.net/dispen/p4PK/4 http://cafe.daum.net/dispen/pRcV/2)
교회의 문제들을 의식적인 측면과 역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만이 대안을 만들어 낼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에겐 올바른 성경과 올바른 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교회가 아직 많이 없습니다.
그이유는 워치만니가 "목사제도의 문제점"에서 말한 처럼 각각 개인의 안일함과 게으름으로
우리의 의무와 권리를 포기하고 그 역할을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넘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현재 목사제도를 취하지 않는 교회는 유일하게 형제교회가 있는데 이들은 아직 바른 성경을 모르고 있다고 하네요.
수많은 교회의 문제들은 주로 이교도에서 유래한 잘못된 전통과 교리에 기인하였으며
그 결과 과거 올바른 신약 교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바빌론 음녀교회에 십일조나 바치는 좀비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바른 성경, 교리, 교회를 알아야 할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올바른 교리(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있다면 "두 바빌론"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과 더불어 반드시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주현 -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 조지 바나/이남하 옮김
서론 :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조용히 일어나는 신앙의 혁명 한 가운데에 살고 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오래되어 구태의연한 방법들을 떠나 오히려 더 오래된 방식들을 따르고 있다. 더 오래된 방식들은 성서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오래된 것에서 더 오래된 것으로 옮겨가게 하는 동기는 단지 우리를 역사에 연결해 주거나 우리의 뿌리를 도로 찾는 것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함과 온전함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돌아가려는 열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는 추진력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기 위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주님과의 관계가 인생의 최우선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 책은 당신이 믿음을 실천하는 데 있어 더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도록 도전할 것이다. 우리의 예배방식을 바꾸는 것은 간단한 과제가 아니다. 신성시되고 있는 관습에 획기적인 변화를 줄 것을 사람들이 제안할 때 사방에서 오는 "이단적이다"라는 항의를 들을 수 있는데, 그런 항의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신앙의 진짜 바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원리와 특징을 확정한 다음 그 구성요소들을 우리의 삶에 회복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백성이 되고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되도록 하나님의 계획에 충실히 하는 것이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깊고 깊은 열정의 하나다. 하나님은 교회의 안녕뿐만 아니라 교회가 이 땅에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 현대교회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성서적인 관점과 합치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의 도전 중 하나는, 우리를 위해 성서에 강조된 하나님의 의도와 당신의 영적인 삶을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 책이 현대교회의 비뚤어진 경로를 바로 잡는데 당신이 일조할 수 있도록 돕게 되시기를 우리를 기도하는 바이다.
1장 우리는 진정 성서대로 해왔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신약성서는 우리 믿음과 실천에서 안내자입니다. 우리는 성서대로 살고 성서대로 죽습니다” 남색 양복을 위아래로 잘 차려입고 아내 트루디와 함께 교회당 끝줄에 앉아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윈체스터는, 팔리 목사가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라는 말을 이어갈 때에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윈체스터는 지금 예배 바로 전에 있었던 이 일들을 고통스럽게 상기하며 팔리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자책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불과 한 시간 전 까지만 해도 불신자처럼 행동했던 내가 지금은 왜 이렇게 단정하게 빼입고 않아서 좋은 그리스도인인 양 행세하고 있을까?... 오늘 아침에 우리처럼 한바탕 했던 가엾은 가족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데 우리는 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이러고 있겠지. 별안간 윈체스터의 뇌리에 또 다른 생각이 스쳐갔다 : 그리스도인이 정장하고 교회에 가야 한다는 말을 성서에서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게 정말 성서대로 한다는 건가? 흥미롭게도 그날 윈체스터가 가졌던 의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인 대부분 의식 속에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던 것들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윈체스터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은 성서적인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목회자들이 강대상에서 외치는 “성서적”이라든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른다든가 하는 그들의 말 자체가 그것들을 부정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것 중에 신약성서적인 교회와 짝이 맞는 것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 질문들 :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고, 아테네에서 이미 공인되어 있던 관습들을 쟁점화 시키곤 하는 소크라테스의 습관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철저하게 지켜지던 전통들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토론이 아테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우게 했고, 그 결과로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사회규범을 거부한다고 해서 가혹한 형벌을 당한 사람은 소크라데스 한 명뿐이 아니다. 이사야는 톱으로 켜는 죽임을 당했고, 침례자 세례자 요한은 목 베임을 당했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물론 더 나아가서 감히 정통의 가르침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제도권 교회에 의해 고문당하고 순교 당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지도자들에게서 배웠다. 또한, 성서를 읽어야한다는 권유를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속한 기독교 전통이 물려준 안경을 쓰고 성서를 읽게끔 길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교단 또는 기독교 단체에 따라야 하고 그 가르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놀랍게도, 현대 교회의 사상과 관습은 신약성서의 명령과 표본에 근거하기보다는 신약성서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의 영향을 한참 더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그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무지하다. 그뿐 아니라, 그 사상과 관습들이 우리로 하여금 신봉하게 하는, 굳어진 수많은 인간적 전통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모든 것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표딱지를 붙여 우리에게 전해내려 왔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겁나는 초대 : 우리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떠나는 미지의 여행에 당신을 초대하고자 한다. 아마 당신은 지금까지 의식적으로는 절대로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지게 될 것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 성가시고 무섭기까지 한 질문들. 그리고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대답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들은 그리스도인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풍성한 진리와의 만남으로 당신을 인도해줄 것이다. 셜리 케이스에 의하면, “기독교 운동의 사회적 환경은 이미 1세기 말 그 이전에 대부분 이방인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의 사회적 연결고리도 거의 끊어졌다? ...100년 무렵, 기독교는 주로 이방인 중심의 종교운동이었다.....공통된 이방인의 사회환경에서 함께 살아가는” 브래드쇼에 의하면, 4세기 기독교는 “이교의 사상과 관습들을 흡수해서 기독교화시켰다. 그것을 마치 이전의 종교들이 희미하게 가리켰던 것의 성취로 보았던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겐 이교도들이 로마제국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자들이었다. 이교 문화는 4세기까지 로마제국을 지배했다. 그중 많은 것이 처음 5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흡수 되었는데, 특히 콘스탄틴 황제의 통치 기간부터 약 300년 동인(324년부터 600년까지)그랬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 관습이 유래한 다른 두 기간은 종교개혁시대 16세기와 부흥운동시대 18세기와 19세기이다. 기독교 관습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의 진짜 줄거리를 알고 싶다면, 현대 교회를 두른 휘장이 걷히고 전통적으로 고수해왔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지는 것을 기꺼이 원한다면, 이 책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눈을 뜨게 해주고, 인생을 변화시켜 줄 것이다.
2장 교회 건물 : 대를 물러온 집 콤플렉스
교회' 건물이 얼마나 교회라는 개념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 둘 다 똑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표현하는 말을 들어보라 : “와! 여보, 당신도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쳤던 멋진 교회를 봤어요?” “대단하네요. 저 교회는 내가 지금까지 본 교회 중 제일 큰 교회네요. 그런데 저렇게 큰 교회가 돌아가려면 전기료가 얼마나 들까요?” “우리 교회는 너무 작아요. 난 폐쇄 공포증에 걸릴 것 같아요. 우린 발코니를 좀 넓혀야 하는데....”
목사들이 보통 얘기하는 표현을 들어보라 : “오늘 하나님의 집에 온 것이 즐겁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성전에 들어올 때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전, 제사장, 그리고 희생제사 : 고대 유대교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전, 제사장, 그리고 희생 제사가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 가지 전부를 폐하시고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완성하셨다. 주님 자신이 성전에 되셔서 산 돌들로 만들어진 '손으로 짓지 아니한' 살아 있는 집을 구현하셨다. 결과적으로 유대교의 성전, 전문제사장제도, 희생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 지나갔다26).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성이요 실체이시다. 기독교는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성전 없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는,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신성한 공간을 구성해야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이-집합적으로-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해했다. 놀라운 것은 신약성서 어디에도 교회나 성전이나 하나님의 집을 건물로 지칭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장소를 에클레시아 라고 일컬었던 최초의 기록은 19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클레멘트는 “교회에 간다”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1세기 성도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초기 교회들은 한결같이 가정집에서 모였다. 우리가 아는바300년까지는 먼저 교회당으로 지어진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다”36) 또한, 그들에겐 하나님을 섬기도록 따로 세움을 받은 특별한 제사장 계급도 없었다. 그 대신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또 희생 제사를 폐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한 마지막 희생제물(그리스도)이 왔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드린 유일한 제사는 찬양과 감사로 드리는 영적 제사였다. (히13:15과 벧전2:5을 참조할 것)
가정집 교회에서 거룩한 성담으로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전을 구성한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래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되었다. 부활하셨을 때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 안에 거주하심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성전 곧 자신의 집으로 만드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약성서는 교회라는 말을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것에 국한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위해 신성한 건물을 세우지 않은 지상의 유일한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규모가 커지면서,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그들의 집들을 고치기 시작했다.48)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는 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듀라 유로포스의 집이다. 이 집은 그리스도인의 모임 장소로 확인된 최초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15세기까지는 그들의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신성한 장소와 물건의 등장 : 2세기 말과 3세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초점은 순교자들을 기리며 높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인들을 위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이것은 그들을 향한 기도로 발전하였다).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상징으로 카타롬, 지하 무덤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술이 신성한 장소와 접목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예배에 시각예술을 도입할 것을 주창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중 하나였다. 약 2세기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의 유골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으로 숭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유품 수집을 태동시켰다. 2세기 말에는 주의 만찬에 대한 다른 견해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주의 만찬이 식사에서 성만찬이라고 불리는 일정한 양식을 갖춘 의식으로 둔갑했다. 4세기에 가서는 떡과 잔이 위압적이고, 두렵고, 신비한 분위기를 창출해 내는 것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동방의 교회들은 떡과 잔을 놓아 두는 제단 테이블 위에 덮개를 달기도 했다. 16세기 때는 제단 테이블 위에 가로막을 얹어 놓았다. 가로막은 제단 테이블이 거룩한 사람들 성직자들에 의해서만 다루어져야 하는 거룩한 물건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3세기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성한 장소뿐만 아니라 신성한 물건들도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얼마 안 가서 신성한 제사장제도를 채택하게 된다.) 이 모든 것에서 2세기와 3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사상을 특징짓는 마술적 사고방식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 교회 건물의 아버지 : 312년에 콘스탄틴은 서로마제국의 시저가 되었다. 324년에 가서 그는 로마제국 전체의 황제가 되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그는 교회 건물들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일반화시켜 받아들여지게 했다. 321년에 콘스탄틴은 일요일을 휴일법정 공휴일로 공포했다. 콘스탄틴이 이렇게 했던 의도는 정복되지 않은 태양신 미드라를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표현했다). 콘스탄틴은 또 이교 성지의 모델에 기초를 둔 거룩한 장소의 개념을 기독교 신앙에 도입한 사람이다. 콘스탄틴은 죽은 후에 '신격인 존재'로 공포되었다.(이것은 콘스탄틴이전에 죽은 모든 이교 황제들을 위한 관습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를 이교의 신으로 공포한 것은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콘스탄틴의 어머니인 헬레나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여자야말로 유품에 중독된 사람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이다. 326년에 헬레나는 팔레스타인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327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못박는 데 사용되었던 십자가와 대못들을 그녀가 발견했다고 보고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 나무 조각들에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상은 콘스탄틴이 조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로, 이교의 마술사상이 교회 건물의 아버지로 불리는 콘스탄틴 황제를 사로 잡았다.
콘스탄틴의 건축 프로그램 : 327년에 있었던 헬레나의 예루살렘 여행에 이어서 콘스탄틴은 로마제국 전역에 처음으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중 어떤 것들엔 공적자금이 사용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성전을 건축하는데 이교도의 방법을 따랐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전에 신들의 이름을 붙이듯이 교회 건물들에 성인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성인들을 기리며 식사를 나누던 묘지들 위에 최초의 교회 건물들을 건축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적어도 1세기 전부터 성인들의 무덤이 거룩한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거대한 건물이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이런 관습은 한때 이교의 신들에게 부여되었던 것과 똑같은 능력을 순교자들이 지녔다는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최초의 교회 건물들에 관한 탐구 : 콘스탄틴의 교회 건물들은 “황제에 걸맞게” 지었다고 불릴 정도로 널찍하고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그것들은 아주 화려해서 그 당시의 이교도들이 이교 신전의 구조를 “모방한 엄청나게 큰 건물들”이라고 했다. 심지어 콘스탄틴은 새 교회 건물들을 이교의 예술품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에서 지어진 교회 건축물들은 로마의 바실리카 모델을 정확히 본뜬 것이다. 기독교 바실리카엔 성직자가 올라가서 의식을 집전하는 우뚝 솟은 단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의 중앙에는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은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건물 안에 있는 것 중 가장 거룩한 자리로 여겨졌다. 첫째는 그것이 종종 순교자들의 유품으로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단 위에 성찬떡과잔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단 앞에는 캐씨드라 주교좌라고 불리는 감독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설교는 감독의 의자에서 행해졌다. 능력과 권세가 흰색 천으로 덮여 있던 그 의자에 머물러 있었다. 장로들과 집사들은 양쪽에 반원을 그리며 앉았다. 바실리카 건축양식에서는 계급의 구분이 확실했다.
예배에 끼친 주요 영향들 : 로마 황제들이 공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들 앞에 불빛을 밝히게 하던 관습이 있었는데, 그 불빛은 향기로운 갖가지 향이 가득한 불타는 그룻에서 나는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이런 관습을 본받아서 교회 예배에 촛불과 향불의 사용을 도입했다. 그리고 성직자가 건물 안에 들어 을 때 그것들도 따라 들어왔다.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서, 전에 평상복을 입었던 성직자들이 특별한 제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 특별한 제복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로마 행정관들이 입던 의복들이었다. 행진 음악과 함께 의식을 시작했던 로마 관습도 도입되었다. 이 목적을 위해 성가대가 조직되어 교회 안에 들어왔다. 예배는 더욱더 전문적이 되었고, 극적 효과 와 의식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의 결말은 친밀감이 사라진 것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던 열린 모임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구경꾼인 평신도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전문적인 성직자가 예배의 모든 것을 인도했다. 결과적으로 교회 건물 이야기는 이교문화를 빌려와서 우리 신앙의 면면을 현저하게 변질시킨 기독교의 슬픈 대하소설이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콘스탄틴 시대와 그 이후의 교회 건물들은 특히 거룩한 사당이 되었다.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의 개념을 채택했고, 신이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장소에 존재한다는 이교사상을 흡수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손으로' 지은 곳이다. 교회 건물을 정당화하려고 구약성서를 갖다 대는 것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다. 옛날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신성한 제사장, 신성한 건물, 신성한 의식, 그리고 신성한 도구들의 효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영원히 소멸하였다. 이에 덧붙여서, 그것은 계급이 없고, 예법도 없고, 의식절차도 없는 '교회'라고 불리는 생명체에 의해 대체되었다.
교회 건축양식의 발달 : 어떤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 건축양식의 변화는 한줄기로 일정하게 발달했다기보다는 돌연변이에 의해 변종된 결과이다” 이런 돌연변이는 모든 것을 독점하는 성직자와 자생력이 모자란 회중을 육성해내는 독보적인 건축양식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건축양식은 바실리카 단계에서 비잔틴 단계로 넘어갔다. 비잔틴 교회들은 중앙에 넓은 돔과 성상들과 모자이크로 꾸며졌다. 비잔틴 건축양식 이후에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 그 뒤를 이었다. 로마네스크 건물들은 높이 올린 세 개의 층, 둥근 아치(arch)를 받쳐 주는 대규모의 기둥들, 그리고 화려한 색깔의 실내가 돋보였다. 이런 건축양식은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직후 부터 시작되었다. 로마네스크시대 다음엔 12세기의 고딕시대로 접어들었다. 고딕 건축양식은 십자가를 붙인 둥근 천장과 뽀족한 아치와 벽 날개로 가득한, 황홀하게 만드는 고딕 대성당의 시대를 열었다. 고딕 건축양식의 주요 메시지는 “하나님은 초월적이시고 도달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위엄 앞에서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메시지는 하나님이 언제나 만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분이라는 복음 메시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는 분이다.
개신교 교회 건물 : 개혁자들이 가져온 건축양식의 주요 변화는 그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그들은 제단 테이기 아닌 강대상을 건물의 정 중앙에 놓았다. 종교개혁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개념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개혁자들은 잔존하는 교회 건물들을 물려 받았을 때 그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고쳤다.
뾰족탑 : 바벨의 주민들이 하늘에 닿게 하려고 탑을 쌓았던 이래로 인류문명은 그 선례에 따라 뽀족한 꼭대기가 달린 건물구조를 선호했다. 고딕 양식의 선이 가진 특징은 그리스 건축양식과는 달리 위를 향해 힘써 올라가는 것을 암시하는 수직이었다. 이때에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교회 건물의 입구 쪽에 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탑 안에는 사람들을 예배로 부르기 위한 종을 달아놓았다. 이 탑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을 상징한다. 시간이 흘러 고딕 건축가들은(수직에 강조점을 두고)모든 탑에 뽀족한 끝을 첨가했다. 뽀족탑은 창조주와 연합하려는 인간의 열망을 상징한다. 뽀족탑의 메시지는 신약성서의 메시지와 모순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늘에 도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임마누엘의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내재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다. 뽀족탑은 이런 실체에 도전하고 있다.
강대상 : 처음의 설교들은 제단 뒤에 있었던 감독의 의자에서 행해졌다. 나중에는 성서 교훈이 읽히던 챈슬 옆의 높이 올려진 낭독대가 설교하는 자리가 되었다. 존 크리소스톰이 낭독대를 설교하는 자리로 만든 장본인이다. 강대상은 의식 행위미사 중심에서 성직자의 구두 교훈 설교으로 대체된 것을 상징했다 강대상은 성직자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강대상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충실하고자 설교자를 중심 '무대'에 세운다-그를분리시컥 하나님의 사람들 위에 높이 올려놓는다.
회중석과 발코니 : 회중석은 어쩌면 마주 보는 친밀한 교제의 가장 큰 방해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대 교회의 무기력함과 수동성의 상징으로서, 집합체로서의예배를 공연 구경으로 탈바꿈시켰다. “회중석”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포디움에서 파생되었다. 그것은 밑바닥 위로 올려진 좌석 또는 “발코니”라는 뜻이다. 현대의 회중석은 15세기에 가서야 일반화되었지만 선보인 것은 14세기였다. 그때 나무 벤치가 돌로 된 의자를 대신했다, 18세기에 가서는 상자형 교회좌석이 널리 유행했다. 회중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낮춰진 발코니이다. 무대 강단 위에서 행해지는 것을 구경하게끔 분리된 좌석으로서, 성도의 무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벙어리 구경꾼이 되게 한다. 마주보며 친밀하게 상호 교제하는 것을 방해한다.
현대 교회의 건축양식 : 지난 200년 동안 개신교 교회들에 의해 사용된 독보적인 건축양식 두 가지는 분리된 챈슬 방식(의식에 치중하는 교회들에서 사용)과 콘서트 무대 방식(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사용)이다. 챈슬은 성직자(때로는 성가대)가 예배를 인도하는 자리이다. 챈슬 방식의 교회에서는 아직도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분리시키는 가로막이나 스크린이 존재한다.
콘서트 방식의 교회 건물은 19세기 부흥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강당이다. 콘서트 방식의 건물은 설교자와 성가대가 앞에서 인도하는 극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구조물이다.
건물에 대한 해석 : 교회 모임 장소의 사회적 환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본보기가 된다. 교회의 위치는 어떻게 모여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가르쳐준다. 교회의 사회적 위치는 교회생활에서 결정적 요인이다. 그것을 단순히 '역사의 우연한 사실'로 돌릴 수는 없다. 사회적 위치는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몹시 나쁜 교훈을 가르쳐주고 또 그들의 삶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 교회 건물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유기적인 모임 장소인 가정 집에 비해 차갑고, 비인격적이고, 비우호적이다. 교회 건물이 친교나 교제를 위해 설계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 교회 건물에서는 바닥에 고정된 나무로 된 장의자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건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당신이 교회 건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당신 스스로 들어보라. 당신은 교회 건물이 "교회"를 지칭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집"으로 일컬어지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교회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따로 마련한 장소'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막대한 경비 : 대부분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이 예배를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건물 자체와 그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정은 결코 문제 삼지 않는다.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는 모든 전통적인 이유를 주의 깊게 조사해 봐야한다.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건물 하나 없이 천하를 어지럽게 했던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린다.(행17:6) 그들은 교회 건물의 도움 없이도 300년 동안 급속도로 성장했다. 교회 건물은 일회성 지출보다 한참 더 많은 지속적인 비용을 요구한다. 이런 예산폭탄은 단지 오늘뿐만 아니라, 다음 달, 내년 ‥‥ 이렇게 계속해서 교회의 헌금에서 떼어 간다. 직원들의 봉급 및 교회 건물에 들어가는 경비가 포함된 전통 교회의 경비와 가정집 교회의 경비를 대조해보라. 가정집 교회 헌금의 50-85퍼센트를 빨아들이는 그런 경비 대신, 예산에서 운영비용을 작은 비율로 줄이고 9,5퍼센트 이상을 세상을 향한 사역과 선교와 전도 등의 실질적인 것들에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전통에 도전할 수 있는가? : 기독교 신앙이 믿는 사람들의 가정집에서 탄생했는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요일마다 이교 철학에 기초를 둔 이교에서 유래한 건물 안에 앉아 있다. 사실은 교회 건물이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우리를 아주 잘못 가르쳐 왔다. 건물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부정하는 건축양식이다. 그것은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의 본질 자체와 모순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서 살아 숨쉬며 기능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하도록 교회 건물이 방해한다. 교회 건물을 지지하는 것이 성서적이거나 영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만든 건물을 교회라고 부름으로써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지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시는 결코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우리 신앙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3장 예배순서 :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일요일 아침
주일 아침 예배 순서 : 당신이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마 매번 교회당에 갈 때마다 똑같은 형식의 예배 순서를 따를 것이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주보에 예배의식을 인쇄하고 어떤 교회들에서는 인쇄하지는 않지만 인쇄한 것이나 별반 다름없는 기계적이고 빤한 순서에 따라 예배한다. 어느 교회든지 다른 교회와 구별되게 하려고 표면상으로 약간 변형시킨 것만 벗겨 내면, 당신은 규정된 똑같은 의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개신교 예배 순서는 어디에서 유래했나요? : 초대교회의 모임은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고, 자발적이고, 자유스럽고, 역동적이며, 누구나 다 참여하도록 열려 있는 특징이 있었다. 1세기 교회 모임은 수동적인 요식 행위가 아니라 역동적인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교회의 예배와는 달리 종종 예측할 수 없는 모임으로, 완전히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개신교의 예배 순서는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그것은 중세 카톨릭의 미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미사가 신약성서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월듀란트에 의하면, 카톨릭의 미사는 "부분적으로는 유대 성전제사와 부분적으로 그리스의 신비의식인 정결 의식, 대리제사, 동참의식 등에 기초하고 있다. 수도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540-604)야말로 중세 미사를 완성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듀란트는 그레고리가 이교의 마술적 개념들에 영향을 받은 지나치게 미신적인 사람이었음에 주목했다. 그레고리는 이교사상과 마술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중세사상을 구체화했다.
루터의 영향 : 카톨릭 미사의 극치는 언제나 영성체 또는 '주의 만찬'으로 알려진 성찬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미사를 통해서 재차 희생되신다는 것을 이미 그레고리 교황 때부터 가르쳤다. 미사의 근본적인 오류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인간의 행위' 라고 루터는 주장했다. 그래서 1523년에 루터는 카톨릭 미사의 개정에 착수했고 이 개정은 대부분 개신교 교회 예배의 기초가 되었다. 그 개정판의 핵심은 이것이다 : 루터가 성찬이 아닌 설교를 모임의 중심이 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개신교 예배에는 제단 테이블이 아니라 강대상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설교를 개신교 예배의 절정이 되게 한 장본인이 바로 루터이다. 그가 한 말을 읽어보라 : “그리스도인 회중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기도 없이는 절대로 함께 모이면 안 된다. 아무리 짧은 모임일지라”....“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 신성한 의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루터의 예배 의식은 카톨릭 미사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루터교의 예배 순서는 똑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회중은 여전히 수동적인 구경꾼인 것과 예배의식 전체가 여전히 안수 받은 성직자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가 그리는, 예수님에 의해 인도되는 영광스럽고, 자유롭게 흘러가고, 모두가 참여 하도록 열려 있고,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 모임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고젠4:26과 히10:23-25을 참조할 것)
츠빙글리의 영향 : 스위스의 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오늘날의 예배 순서가 정립되는데 이바지한 몇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떡과 잔을 놓아두는 “성만찬테이블”이라 불리는 것으로 제단을 대체했다. 그는 또한 나무 쟁반과 컵을 사용해서 떡과 잔을 회중에게로 전달해서 돌리게끔 했다. 츠빙글리는 주의 만찬이 기념'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떡과 잔이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양념을 제하면 츠빙글리의 예배 의식은 루터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츠빙글리도 말씀 선포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캘빈과 동료의 영향 : 개혁자 존 캘빈과 존 녹스. 그리고 마틴 부처는 예배 의식의 정립에 또 한 몫을 거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1537년에서 1562년 사이에 그들의 예배 순서를 완성했다. 그들의 예배 의식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행해졌지만 사실상 똑같았다. 그들은 단지 루터의 예배 의식을 조금 바꾸었을 뿐이었다. 가장두드러진 것은 설교 다음에 헌금수거 순서를 넣은 것이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캘빈도 예배에서 설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신자 개개인이 성찬이 아닌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캘빈의 예배 의식에서 가장 파괴적인 요소는 어쩌면 그가 강단에서 예배 대부분을 인도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아직 이것에서 회복된 적이 없다. 캘빈이 몌배 순서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요소는 회중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 가져야 할 엄숙한 태도이다. 개혁자들이 미사를 그대로 유지했던 또 하나의 관습은 예배 시작 때 회중이 서서 찬송하는 동안 성직자가 걸어 들어와서 지정된 자리에 앉는 관습이었다.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이 교회 관습에 별로 개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루터의 예배 순서에서 처럼, 개혁 교회의 의식도 공식적인' 의식의 구조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경건 의식들을 만들면서 옛 의식을 보존하려고 했다.
청도교의 영향 : 청교도들은 영국의 캘빈주의자들로, 엄격한 성서주의를 받아들였고, 신약성서의 예배 순서를 철저하게 고수하려고 했다. 청교도들은 캘빈의 예배 순서가 충분히 성서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설교할 때 그들은 청교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적 교회를 회복하려는 청교도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성직자의 복장, 성상, 장식과 결별한 것, 그리고 성직자 자신이 설교를 직접 써서 하는 것(남의 설교를 읽는 것에 반대해서)등은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이다. 그렇지만, 청교도들은 또한 “자연발생적인” 기도를 강조한 나머지 설교 전에 있는 길고 긴 “목회기로”라는 것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개신교 예배 의식에서 청교도의 기여는 하나님 사람들로 하여 금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풀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전에 예배 의식을 개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청교도의 예배 순서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상세하게 기록되어 모든 교회에서 그것을 획일적으로 따랐다.
감리교와 프런티어 부흥운동의 영향 : 18세기 감리교인들은 개신교 예배 순서에 감정적인 측면을 제공했다. 회중이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도록 권장했다. 감리교인들도 청교도들처럼 주일 아침 목사의 설교 전 기도에 양념을 가미했다. 그 기도는 자백, 중보, 찬양을 빠짐없이 포함한, 다른 모든 기도를 총망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리교인들은 또 주일 저녁 예배를 일반화시켰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도가 언제나 엘리자베스식 영어로 드려졌다는 사실이다.
감리교인들은 또 주일 저녁 예배를 일반화시켰고 오늘날 교회들고 따르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는 미국 개신교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었다. 점점 일반화되고 있는 미국 프런티어 부흥운동식 예배를 따라야 하는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예배는 수많은 교회의 예배순서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1) 프런티어 부흥운동가들은 말씀 선포의 목표를 변화시켰다. 그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말씀을 선포했다. 2) 프런티어 부흥운동에서 음악은 영혼에 호소해서 구원 메시지에대한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매개체였다. 3) 감리교인들과 프런티어 부흥운동가들은 '강단으로의 초대"를 탄생시켰다.
감리교인들은 '회심자석' 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중생의 길을 따라 걸어 나오라는 초청을 받았을 때, 불안해하던 죄인들에게 이제 지를 회개할 수 있게끔 장소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몇 년 뒤에 미국에 전해졌는데, 찰즈 피니에 의해 “구도자석”이라고 불렸다. 피니의 방식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을 일어서게 한 다음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피니가 이 방식을 유행시켜서 1835년 이후 그것은 근대 부흥운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피니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 기독교에 선사한 것 중 가장 오래된 요소는 아마 실용주의일 것이다. 실용주의는 만일 뭔가 일이 되기만 하면 윤리적으로 고려할 필요 없이 그것을 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철학이다. 찰즈 피니는 그의 큰 영향력 때문에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의식의 개혁자” 라고 불리게 되었다. 미국 프런티어 부흥운동은 이런 모든 방식을 다 받아들여서 교회를 설교소로 바꿔버렸다. 에클레시아의 경험을 복음전도 사역으로 축소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피니의 부흥운동 방식들을 표준화하고, 강단 중심의 인물들을 교회의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 부각시켰다. 그것은 또 교회를 집합적 공동체가 아닌 개인적인 관심사가 되게 만들었다. 프런티어 부흥운동가들의 목표는 죄인 개인에게 개인적인 결단을 시컥서 개인적인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초대교회의 목표는 -각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고 서로 상합하여 정사와 권세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집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
경이적인 무디의 영향 : “부흥운동 복음”은 무디의 거대한 영향에 의해 서방세계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100만 마일 이상을 돌아다니며 일억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했다. 무디의 복음은 휫필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이라는 단 한 가지 중심 메시지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에 초점을 맞춘 복음을 전했고, 그의 신학은 3개의 R로 요약된다 : 죄 때문에 망가진 인생(ruined bysin),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emed by Christ) 그리고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ed by the Spirit), 그것들이 물론 신앙의 결정적인요소임은 틀림없지만, 무디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구속 그 이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 무디에게는 “교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인 단체였다.” 그의 영향이 얼마나 경이적이었는지, 1874년경에는 교회가 멋진 공동체가 아닌 개인들을 모아놓은 단체로 여겨졌다. 이런 강조가 그를 따르는 모든 부흥운동가에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의 뼈와 골수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순절 운동의 영향 : 1906년을 시발점으로 오순절운동은 회중 찬송에 감정적인 표현을 가미해서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이것은 손을 위로 드는 것, 자리에서 춤추는 것, 손뼉 치는 것, 방언, 그리고 탬버린의 사용을 포함했다. 오순절운동의 관습들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강조해서 나온 것이다. 오순절교회 예배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찬양예배 중에 등장한다. 때로 방언이나 통역이나 '예언' 에 의해 노래가 중단되기도 한다. 오순절교회 전통은 또한 헌금시간에 수반되는 독창과 합창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이것 역시도 프런티어 부흥운동의 여파로 생겨난 결과로서, 오순절 교회 예배는 심히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오순절 교인들의 생각에 도 대부분 다른 개신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공동체적 사건이 아닌 독자적인 경험이다.
많은 조정,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변화 : 지난 500년 동안 개신교의 예배 순서는 미미한 변화에 그쳤다. 결국에 가서는, 모든 개신교 전통이 예배 순서에서 비성서적인 똑같은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다 : 예배가 성직자에 의해 인도되고, 설교가 예배의중심이 되고, 회중은 수동적이어서 모임에서의 사역이 허용되지 않는것.
어떤 학자의 말을 빌리면, '카톨릭은 의식을 교회활동의 중심에 두려고 더욱더 이교의 길을 따랐고, 개신교는 성서를 예배의 중심에 놓으려고 유대교 회당의 길을 쫓았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모임의 중심에 놓는 데는 실패했다. 또 그들은 신약성서가 그리는 바, 모임에서 서로 사역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지유롭게 하고 해방하는 데도 실패했다.
종교개혁에 의해 성서가 성찬을 대신하게 되었고, 목사가 사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중을 침묵하는 구경꾼으로 만들어놓고 여전히 혼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있다. 성서의 저자를 중심에 놓는 것은 전혀 회복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은 원초적인 문제의 근원, 즉 성직자가 인도하고 수동적인 평신도가 참석하는 예배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극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그림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 개신교의 예배 순서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신약성서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것 자체가 예배 순서를 잘못되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성서적 기초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일 아침 예배 순서는 우리가 예배할 때 사용하는 의자나 카펫 같은 것과는 다른 문제인가? 전통적인 예배 순서가 비성서적인 것이나 이교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영적 성장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다음을 잘 생각해 보라.
첫째, 개신교의 예배 순서는 상호 간의 참여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 장을 억누른다. 둘째, 개신교의 예배 순서는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목을 조르고 있다. 셋째,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주일 아침 예배는 부끄러울 정도로 지루하다. 넷째, 당신이 일요일마다, 해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묵묵히 앉아서 치르는 개신교 예배 의식은 영적 변화를 실제로 방해한다.
신약성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모임을 해야 하는지에 침묵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통이 이렇게 그분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정반대로 치닫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런 인간의 전통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신성한 의식을 고수하기 위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활동을 계속 과소 평가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연 진리의 기둥과 터인가 아니면 인간 전통의 옹호자인가?(딤전3:15) 얼어붙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녹이는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어쩌면 주일 아침 예배의식에서 극적으로 결별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뼈를 흔들어놓는 주님의 말씀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4장 설교 : 개신교의 신성 불가침 영역
설교는 개신교 예배의식의 대들보와 같다. 지난 500년 동안 설교는 시계가 돌아가듯 규칙적인 역할을 했다. 설교를 없애 버리면 당신은 수많은 신자를 위한 영적 양식의 가장 중요한 밥줄을 끊어놓게 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깜짝 놀랄 사실은 오늘날의 설교가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이교 문화에서 빌려와서 키워진 다음 기독교 신앙에 도입된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교회 모임을 설계하신 목적, 바로 그 목적의 가치를 실제로 떨어뜨린다. 그것은 진정한 영적 성장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설교와 성서 : 성서에 묘사된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설교와 오늘날의 설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사실상 언제나 이런 차이를 빠뜨리고 그냥 넘어가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부지중에 오늘날의 관습을 보는 눈으로 성서를 읽는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강단 설교가 성서적인 것이라고 오해해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현대 기독교 설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규칙적으로 -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변함없이 강단에서.
●똑같은 사람에 의해 - 일반적으로 목사 또는 안수받은 초청 강사에 의해.
●수동적인 청중을 향해 - 본질적으로 일방적인 독백임.
●다듬어진 연설 형식으로 - 일반적으로 서론, 세 개에서 다섯 개쯤 되는 요점,
그리고 결론, 이렇게 일정한 구조로 되어 있음.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설교하고 가르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선포한 말씀은 오늘날의 설교와는 들어맞지 않는다. 다음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설교와 가르침의 특징들이다.
●청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청중에 의해 중단되는 일이 흔했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정해진 원고가 아닌, 당면한 문제에서 생긴 부담을 안 고 즉석에서 외쳤다.
●구약성서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하나님 백성에게 정기적으로 설교했다는 암시 가 없다. 오히려 구약 성서식 설교의 본질은 산발적이고, 유동적이며, 청중의 참여에 열려 있었다. 고대 회당에서의 설교도 같은 방식을 따랐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설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산발적이었다.
●그것은 특별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특별한 경우에 전해졌다.
●그것은 즉석에서 행하여졌고 수사학적 구조가 없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독백 설교가 아니라 거의 대화체 형식을 띠고 있었다.
(즉, 청중의 의견을 포함했고 그들에 의해 설교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의 사역을 교회의 일반 모임들에서 교회 전체가 감당했음을 신약성서의 서신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 사역에 가르침, 권면, 예언, 노래, 충고가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로마서 12:6-8,15:14, 고린도전서 14:26,그리고 골로새서 3:16에서 볼 수 있다. 이런 “모든 지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또한 대화 형식이었고(고전14:29) 중단되는 것이 특징이었다.(고전14:30) 마찬가지로 지역교회 장로들의 권면도 보통 준비 없이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요약하자면, 기독교의 소모품으로 선포되는 오늘날의 설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둘 다와 거리가 멀다. 성서에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에 그런 설교가 존재했었다는 암시조차 없다.
기독교의 설교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 정기적으로 설교한 최초의 기독교 문서는 2세기 말에 기록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을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를 인정했음에도, 설교는 4세기경에는 신자들의 일반적인 관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설교의 진원지를 찾으려면 우리는 소피스트라고 불렸던 주전 5세기의 떠돌이 교사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소피스트는 수사학을 만들어낸 장본인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제자들을 택했고, 또 그들이 하는 연설의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누군가에 의한 유창한 연설을 듣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를 개발시켰다. 이것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저녁식사 후에 전문 철학자에게서 짧은 설교를 듣는 것이 일종의 정기적인 엔터테인먼트였다. 요컨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교의 설교에 중독되어 있었다. - 마치 오늘날의 많은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설교에 중독되어 있듯이.
오염된 물줄기의 도래 : 3세기를 전후해서 상호 간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시들어지게 되자 공백이 생겨났다. 이 사람들의 공백을 메우려고 성직자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열린 모임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교회 모임은 더욱더 의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교회 모임' 이 '예배의식'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계급적 구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종교 전문가'의 개념이 생겨났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많은 이교 연설가와 철학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이교 철학 사상들이 부지중에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초창기에 교회의 신학자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이 바로 “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쓴 문서일부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돈을 받고 연설을 하는 훈련된 전문 연설가의 개념이 기독교 주류 속으로 직수입되었다. 유급 전문 교사의 개념이 유대교에서 유래하지 않았고 그리스에서 왔음을 주지하라.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 직업을 따로 갖고 있던 것이 유대교 랍비들의 관습이었다.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기독교 메시지의 선포는 원래 쌍방통행의 대화였다......그러나 서방세계 연설의 대가들이 기독교 메시지를 손에 넣게 되자 그들은 그것을 아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설이 대화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연설가의 위대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건을 대체해버렸다. 한 마디로, 그리스와 로마식 설교가 예언적 선포, 열린 나눔, 그리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교훈을 대체하게 되었다. 설교는 교회 성직자들, 특히 감독들에게만 주어진 엘리트적 특권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말하는 법을 배우려면 수사학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런 교육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설교하는 것을 배우려고 '설교학‘이라는 과목을 택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서 수사학 법칙이 적용된 일종의 과학”이라고 여겨진다. 다르게 표현하면, 설교나 설교학, 어느 것이든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교도들에게서 훔쳐온 것들이다. 오염된 물줄기가 기독교 신앙 안으로 흘러들어 와서 그 물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 물줄기는 4세기 때 못지않게 오늘도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
크리스톰과 어거스틴 :
존 크리소스톰은 당대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설교자 중의 하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크리소스톰의 설교보다 더 '능력있고, 재치가 번뜩이고, 솔직한' 설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다. 천부적인 연설가의 재주를 가졌던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탁월한 소피스트였던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연설하는 법을 사사했다.
그리스식 설교는 크리소스톰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그리스식 설교 스타일은 수사학적인 재능과 시구의 인용이 두드러졌고, 청중을 감명시키는데 그 초점을 맞추었다. 크리소스톰은 “설교자가 유창한 웅변능력을 얻으려면 자신의 설교를 놓고 장시간 씨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거스틴에게서는 라틴 설교의 극치를 엿볼 수 있다. 라틴 설교 스타일은 그리스스타일보다 더 실제적이었다. 그것은 '보통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더 단순하고 도덕적인 면을 다루었다. 츠빙글리는 존 크리소스톰을 그의 설교 모델로 삼았고, 루터는 어거스틴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라틴과 그리스 스타일 둘 다 알기 쉽게 해설하는 형식과 구절을 한 절씩 해석하는 주석 형식을 포함했다.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은 그리스 소피스트의 계보에 속했다. 그들은 세련된 기독교 수사법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기독교 설교, 즉 내용은 성서적이지만 스타일은 그리스적인 그런 설교를 물려주었다.
개척자, 청교도, 그리고 대각성운동 :
중세 때는 성찬이 로마 카톨릭 미사를 지배했고 설교는 됫전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등장과 함께 설교가 다시 예배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많은 개혁자가 수사학을 공부했고, 어거스틴이나 크리소스톰이나 오리겐이나 그레고리 같은 사람들의 그리스와 로마식 설교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청교도들은 캘빈에게서 설교방법을 빌려왔다. 그 방법은 어떤 식이었을까9그것은 매주 성서를 조직적으로 강해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교부들에서 물려받은 방법으로써 르네상스 때 유행했던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평범한 스타일”이라는 설교방식을 고안해냈다. 이 스타일은 설교원고를 암송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었다. 그들은 성서 본문을 나누고, 더 세분해서 나누고, 분석함으로써 설교를 우수한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현대 설교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인 대각성 운동은, 초기 감리교회들에서 유행했었고 지금도 현대 오순절 교회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부류의 설교에 책임이 있다.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강단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 등을 포함한 강한 감정의 표출은 모두 이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들이다. 현대 설교의 기원에 대해 요약하면 기독교는 그리스와 로마식 수사학을 택해서 그 목적을 위해 도입한 다음 침례(세례)를 베풀고 강보로 쌌다. 그리스식 설교는 2세기 경에 기독교 교회에 침투했고, 4세기 때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같은 강단 설교자들에 와서 절정에 달했다.
설교가 교회에 어떤 손상을 입혔는가? : 전통적인 설교는 지난 5세기 동안 숭상을 받아왔지만 여러 면에서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첫째, 설교는 설교자를 교회 정기모임의 주도자로 만든다. 그 결과 회중의 참여는 잘 봐줘서 훼방을 받고, 나쁘게 보면 아예 제외된다. 설교는 교회를 설교소로 탈바꿈시킨다. 회중은 공연구경을 하는 벙어리 구경꾼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둘째, 설교는 종종 영적 성장을 교착상태에 빠뜨린다. 설교는 일방적인 선포이기 때문에 수동성을 조장한다. 그리고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지체들 상호 간의 사역을 질식시켜 버리고, 회중의 자유로운 참여를 꽉 막아 버린다. 결국, 하나님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급 강하시켜 추락하게 한다. 셋째, 설교는 비성서적인 성직자 사고방식을 보존시킨다. 그것은 과도하게 또는 병적으로 성직자에게 의존하게 한다. 넷째, 설교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막일꾼으로 만든다. 다섯째 오늘날의 설교는 종종 비현실적이다. 너무나도 많은 설교자가 자신은 경험해본 적도 없는 것을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의 설교는 그것이 약속하는 영적 성장을 고취한다는 선전에는 미치지 못하고 실패한다. 결국엔 설교가 교회를 실제로 더욱 메마르게 한다. 설교는 순간적인 흥분제처럼 작용한다. 그 효과는 길어야 며칠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인 공동체는 신약성서적 관습인 지체 간의 상호 권면과 상호 사역의 회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는 영적 변화가 이 두 가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 안에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지만, 특별히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뿐 아니라(엡4:11,약3:1), 모든 성도에게서 가르침이 나왔다. (고전4:26, 31) 우리가 가르침이 전통적인 설교의 형식을 취하도록 허용하고 그것을 전문적인 연설가 계층에 국한할 때, 우리는 성서의 울타리 밖으로 한참나간 것이다.
요약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성서적인가?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단설교는 성서에 나오는 말씀선포 및 가르침과는 같지 않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유대교에서나, 예수님의 사역에서나, 아니면 초대교회의 삶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설교는 그리스 수사학의 자궁 속에서 잉태되었다. 그것은 이교도에서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그들의 연설방식을 교회로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태어났다. 3세기에 가서 기독교 지도자들의 설교가 일반화되었다. 4세기에 가서는 설교가 표준이 되었다.
어떤 저자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설교는 그 실천에서 비판할 수없는 존재이다. 설교 자체가 목적이 되어 신성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장로들의 유전'을 왜곡되게 숭배한 결과의 산물이다..........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믿음과 실천의 모든 영역에서 최상의 안내자' 라는 주장에 가장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 파놓은 “터진 웅덩이들”(렘2:13)을 고수하려고 성서적 방식을 거부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출처
교회가 없다 요약
http://cafe.daum.net/dispen/p4PK/3
책
첫댓글 감사합니다. 여리고주막에 공유합니다.
교회가 없다...개정판...제가 예전에 여기 카페에 정리한 자료도 있어요.
http://cafe.daum.net/Eliyahu/8CKs/445
이책은 기독교라는 종교안에서 신음하며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또는 보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유익한 책으로서, 다 잃어도 진리에 서기를 바라며 에수님 만을 바라보기를 사모하는
사람에게만 유익한 책입니다.
원본엔 수백권의 문헌들을 참고한 기록이 있는데 단순 개인의 연구 결과라던가
공중에서 따온것이 아니라는것을 입증하면서 저자는 인터뷰에서 말하길 "만일 당신이
매주 목사가 중심인 제도권 교회 나가는 생활에 만족한 사람이라면 이책은 당신이 읽을책이 아니다.
왜냐면 지금것 당신이 붙들고 있는 전통에 매인 뇌에 상처만 낼 뿐이다" 합니다.
수년전 저 자신도 여러번 반복해 읽게된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양서라는 느낌이 있지만, 걱정인 것은 공동체가 감당가능한 아디아포라를 넘어 혼자 진리의 실천에 심취한듯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큰 과실을 범할 소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목사제도를 분별할 성숙한 믿음이 없는 열심당원이 스스로 명분을 삼을 여지가 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자기 그릇의 크기를 공동체가 사랑을 기반으로 판단해주리라 생각은 듭니다. 아마도 본인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읽고나니 시원~합니다.
워치만 니가 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에서, 관련하여 지적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교회당이 있어야 교회인 것은 아니다.
2. 예배순서가 지금과 같아야 교회인 것은 아니다.
3. 목사가 있어야 교회인 것은 아니다.
이런 습관에 익숙해 온 사람들은 예배당, 예배, 목사..가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초의 신약교회인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에는 위 세 가지가 지금처럼 행해지지 않고도
건재했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충격적인 말을 소화하면서 성경적인 교회생활을 해 나가려면,
그에 대한 대안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안으로는..
1. 교인들은 예배당에 안 가도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고, 가질 수 있다(행2:46,롬16:5, 고전16:19,골4:15,몬2)
2. 성경이 말하는 교회집회(예배)는 지금처럼 1인 일방 설교가 아니라, 쌍방 상호적이었고, 모든 성도들이 참여할 것이 권면되었다(고전14장, 특히 31절).
3. 초기 지역 교회는 지금처럼 특정인이 붙박이로 매주 혼자 설교하는 목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복수의 장로들의 인도하에 그리스도의 몸 안의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여
교회 안의 필요들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