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우독(晴步雨讀)
닷새 전 곡우가 지난 사월 하순 화요일이다. 그간 황사가 심하고 송홧가루마저 날리는 철이라 대기가 흐렸는데, 아침부터 이를 씻어줄 비가 내렸다. 며칠 전부터 강수가 예보된 날이라 다른 야외 활동 일정을 잡지 않고 도서관으로 나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지라 가끔 들리는 용지호수 작은 어울림 도서관 개관 시각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아침 식후부터 탁했던 대기 먼지를 재워줄 비가 가늘게 내렸다. 도서관 개관 시각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일곱 시 이전 현관을 나섰다. 이웃 동 꽃대감이 가꾸는 꽃밭으로 나가 봤더니 친구는 보이질 않고 아래층 할머니만 꽃을 살피고 있었다. 할머니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도 괘의치 않고 심어둔 모종을 둘러봐 인사를 나누었다. 꽃대감과 할머니는 각자 가꾸는 꽃밭의 구역은 달랐다.
할머니에게 하루를 잘 보내십사 인사를 건네고 우산을 받쳐 든 채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용지호수로 향했다. 인근 초등학교 근처는 등교 시간보다 일러 교통 안전 요원이나 아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용지호수에 이르자 비가 오는 이른 아침이라 우산을 쓴 산책객은 아주 드물었다.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로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수면에는 수련 잎이 잎사귀를 불려 자랐다.
내가 들리는 도서관은 용지호수 잔디밭 가장자리 위치해 접근성은 좋으나 이용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워 내가 찾기는 편리했다. 작년에는 봄날에 가뭄이 심했고 살던 아파트 리모델링으로 도서관을 찾을 겨를이 적었다. 올봄에는 비가 두세 차례 내려 도서관으로 나갈 여건이 되었다. 내가 퇴직 전 주말이나 방학에도 맑은 날은 산행하고 비가 오면 도서관을 찾기도 했다.
빗속에 우산을 쓰고 호숫가 산책로를 두 바퀴 걷고도 도서관 문이 열리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호숫가 언덕 숲속 지압 보도의 정자에서 비를 피하면서 용지호수 풍경 사진을 몇몇 지기들에게 보내면서 아침 안부를 나누었다. 이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 도서관을 가니 사서가 친절하게 맞았다. 내가 도서관을 찾으면 먼저 지방 신문을 펼쳐 본 뒤 서가에서 펼쳐 볼 책을 골라냈다.
비가 와 기온이 내려가 쌀쌀했는데 난방이 된 실내는 따뜻해 좋았다. 내 말고 도서관을 찾아온 이들은 아무도 없어 아늑한 개인 서재처럼 여겨도 될 정도였다. 다섯 권 고른 책 가운데 김태권의 ‘불편한 미술관’을 먼저 펼쳤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해 펴낸 책으로 시대와 지역과 사조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작품에서 인권의 기준을 적용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오전 3시간을 보내고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으러 중앙동 오거리 상가로 진출했다. 사서는 도시락을 준비해 와 해결한다고 했다. 가끔 찾아간 돼지국밥집으로 가니 거기는 점심시간인데도 한산했다. 인근에 회사나 관공서가 없는 상가여서 그런 듯했다. 손님이 없는 넓은 식당에서 따끈하게 끓여 나온 국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 식후 호숫가를 걸으니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렸다.
오후에 펼친 책은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는 2014년 우리나라를 엄습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을 취재해 쓴 장편이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퇴고하던 2018년에 메르스가 다시 출현해 서울 삼성병원까지 뚫려 방역 당국을 놀라게 했다. 작가는 감염병 피해자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 안전망이 작동되지 않는 시스템에 분개해 했다. 작가는 언제나 가난한 자, 아픈 자의 편이었다.
오후 펼친 책은 원고량이 꽤 되는 책이라 못다 읽고 중간에 접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군상들이 병실에 격리되고 장례 절차를 거치는 모습에서 4년 동안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라 사태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보건 의료 방역에서 이처럼 같은 현상이 가까운 시간 차이를 두고 연이어 나타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코로나를 겪은 이후는 … 23.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