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관 그림을 그리다 / 안도현
지붕이야 새로 이엉을 얹지 않더라도
왼쪽으로 빼딱하게 어깨 기울어진 슬레이트면 어떠리
먼산에 흰 눈 쌓일 때
앞 개울가에 푸른 풀 우북하게 자라는 마을에
나도 내 집 한 채 그려넣을 수 있다면
서울 사는 친구를 기다리며
내가 기르던 까치를 하늘에다 풀어놓고
나 이발관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누우리
시골 이발관 주인은
하늘의 구름을 불러모아 비누 거품을 만들겠지
이 세상의 멱살을 잡고 가는 시간 같은 거
내 목 속을 쿨럭, 쿨럭거리며 흐르는 강물 같은 거
빨랫줄에 나란히 펼쳐 널어놓고
무시로 바람이 혓바닥으로 핥아먹게 내버려두리
내일은 사과나무한테 가서
사과를 땅에 좀 받아 내려놓아야지, 생각하다 보면
면도는 곧 끝날 테고
나 산모롱이를 오래오래 바라보리
문득 기적 소리가 들리겠지
그러면 풍경 속에 간이역을 하나 그려넣은 다음에
기차를 거기 잠시 세워두리
내가 머리를 다 말리기도 전에
기차는 떠나야 한다며 뿡뿡 울며 보챌지도 몰라
그러면 까짓 것 보내주지 뭐
기차야, 여우가 어슬렁거리는 밤길은
좀 천천히 달려야 한다, 타이르면서
내 친구는 풀숲을 더듬거리며 오리
길에 왜 사람이 없냐고
물동이 이고 가는 아낙이라도 그려보라 하겠지
사람을 그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뻔히 알면서
예끼, 짐짓 모른 체 농을 걸어오겠지
- 안도현 시집 <바닷가 우체국> 1999
[출처] 안도현 시인 9|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