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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7월에서 9월까지 일시적으로 한국에서 오는 사람에 한해서 밴쿠버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이곳 캘거리까지 한번에 오는 비행기를 시험적으로 운행한다는 반가운 기사를 접했었다.. 이번 기회야말로 우리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신이나서 언니 오빠들과 상의를 하고 있었다.. 단지 염려스러운 것은 항암제를 드시는 어머니의 상태를 잘 점검해보는 일만 남았었다..
그런데...한국에 있는 큰언니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친정아버지께서 위와 장 사이에 악성종양이 자라서 겉으로 만져질 정도로 심각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아버지.. 당신께서 아시고도 이년동안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계셨다는 것이었다..
소설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왜?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비밀로 하셨을까? 칠남매나 되는 많은 자식들이 있으신데...
작년 이맘 때에 내가 한국에 가서 친정에 두달 정도 머무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진지를 잘 못드셨었다. 10년 동안 친정 어머니께서 세 차례에 걸쳐 위암과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매일매일 혈압약으로 버티셔야하는 아버지께서 부인의 병간호를 하느라 지치셔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리고 두달이 지나고 내가 그곳을 떠나온 후에는 더 진지를 못드신다고 해서.. 모두들 조잘조잘 이야기 잘해드리는 셋째딸이 캐나다로 떠나버려서 우울증 증세가 오셔서 입맛이 없어지신거라고 지레짐작들을 하고 있었다..
친정에 전화드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환자같이 못드신다고 하소연을 하시곤 했었다.. 마음이 여리신 분이 부인의 오랜 투병생활과 자식중에서 제일 약한 셋째딸을 멀리 떠나보내신게 그렇게도 힘이 드셨구나..하는 생각으로 늘 죄송스러웠었다..
그러다가 며칠전 아버지께서 전혀 못드시는 걸 보다못한 어머니께서 같은 도시에 사는 막내 여동생을 불러들였다..그리고 아버지께서 정기적으로 혼자 다니시는 병원에 동생이 같이 모시고 가서야 비로소 이 모든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의사가 말하기를 이년 전부터 이상이 보였고.. 일년 전에는 아무래도 심각한 것 같아서 큰 병원으로 가보시라고 말씀드렸다고 했다..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자식들하고 상의해서 수술 안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단다... 그래도 그렇지...어떻게 보호자를 찾지 않을 수가 있었나 원망스러웠다... 팔십이 가까운 노인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믿다니... 아버지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을지도 모르니.. 이제와서 그 의사를 원망해서 무엇하랴...
어머니보다 더 겁이 많으시고 마음이 약하신 아버지께서 그동안 혼자서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을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무서우셨을까? 부인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먼 여행길을 같이 하려고 그러셨을까? 아니면 먼저 가실려고? 일년 전 어머니께서 대장암 수술하실 때쯤에 의사로부터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것 같은데.. 자식들이 어머니 수술때문에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보시고...차마 말씀을 못 꺼내신걸까?
작년에 나와 함께 한국에 들어오셨던 시어머님의 치과치료가 예상밖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게 돼서.. 친정 부모님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기간이 그만큼 늘어났을 때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내가 다리를 다치고 나서 회복이 안된 상태라 겨우 걸을 수 있었는데.. 또 넘어지면 그먼 캐나다로 다시 돌아가기 어렵다고 두 분이 번갈아 가시면서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오셨었다.. 매일 두분의 화제는 '셋째딸이 뭘 먹고 싶어할까?'였다. 두릅..원추리나물..씀바귀..새송이버섯.. 매실장아찌...등등..타국에서 먹기 어려운 것들만 찾아오셨다.. 소꼬리를 하루종일 고아서 큰 뚝배기에 가득 담아주셨는데.. 두 분이 워낙 잘 못드시니까 내가 먹는 것만 흐믓하게 바라보셨다.. 어머니께서는 오랫만에 잘먹는 식구가 있어서 신이 난다고 하시면서 부엌에서 나오실 줄 몰랐다..
큰 수술을 하신지 두달도 안되신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을 먹는 나이 먹은 딸...큰 병환 중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장봐다 주신 음식들을 먹는 나쁜 딸... 내가 무슨 벌을 받을려고 이러나... 먼 훗날 이런 일 들이 뼈에 사무치게 후회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요리에 취미가 있어서 나혼자서도 우리집에서 성당 구역모임이 있는 날..서른 명 이상도 거뜬히 잘 먹이는 내 솜씨를 부모님앞에서 발휘해보지도 못했다.. 어머니 생각에는 네가 뭘 잘하겠냐 하는 식으로 설거지나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해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어드리자' 였다.. 효도하는 마음으로 너무 잘 먹었더니 열흘만에 5킬로가 늘어나는 일이 생겨서 무척 애를 먹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전기밥솥에 밥을 직접하게 하셨는데..내가 당황해하니까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께서 혼자 계시게 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연습하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만해도 같이 웃어넘겼는데..지금에 와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때 이미 아버지는 먼저 가실 생각을 하고 계셨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성당 활동을 아직도 많이 하시고 친구분들이 많으셔서 아들들이 사는 서울보다 지금 살고 계시는 곳이 좋다고 하셔서 부모님들만 따로 사셨다)
--- 가톨릭 천주교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고 기도를 생활화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버지께서 이상하셨던 일이 많았다.. 친정부모님과 시아버님을 모시고 이곳 캐나다로 오기 전에 식사를 하는데 아버지의 안색이 너무 안좋으셔서 시아버님께서 아버지의 안부를 재차 물으셨었다.. 그리고 친정집 앞에서 내가 떠나려고 시아버님의 차에 올라타는데 어머니는 씩씩하게 " 내년에 캐나다에 놀러갈거야..기다려라.." 하시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금방 우실 것만 같았고..내가 탄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갈 때까지 서 계시다가 앞으로 몇 발자국 따라오시는 모습이 너무도 슬퍼보였다.. 내가 백미러로 보는 줄도 모르시고.. 오는 길에 시아버님도 사돈양반이 너무 약해지셨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었다..
드라마 '장미빛 인생'에서 최진실 친정아버지가 집앞에서 딸을 배웅하는 장면을 보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던 기억이난다.. 물론 그 드라마에서는 딸이 아팠던거였지만...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심정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그 배우의 모습이 아버지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며칠전 아버지께서 전화로 우리아들 대학 입학이 언제냐고 물으시면서 입학식에 오시고 싶다고 하셨었다.. 약한 딸이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처음에는 딸을 낳고 다음에 아들을 낳으니까 얼마나 기뻐하셨었는지... 전화로 외손자와 통화하시고 나서 내가 다시 수화기를 받아들면 두분이 한참 말씀을 못하고 계셨다..유난히 목소리가 울리고 굵은 외손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나신다는 거였다..
아이들의 공부 때문에 이민을 왔지만 부모님한테는 정말 큰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성경필사본을 다 써주고 가시겠다는 어머니를 도우시더니... 밤마다 어머니를 오래오래 주물러 주시던 든든한 보호자이셨던 분께서 그렇게 많이 편찮으시면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 아버지... 모든 식구들이 알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외로이 남몰래 아프시지 마세요..
5월 28일에 서울 중앙병원에 예약을 해놓았다고 하니까 어머니처럼 꿋꿋하게 이겨내셔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께는 이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든든한 백...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모님께서 늘 자랑스러워하시는 착한 자식들과 손주들이 지켜보고 있구요.. 멀리서 이 셋째딸도 열심히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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