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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려표조(怫戾僄窕)
불끈하며 제 성질을 못 이기는 성품과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怫 : 답답할 불(忄/5)
戾 : 어그러질 려(戶/4)
僄 : 가벼울 표(亻/11)
窕 : 으늑할 조(穴/6)
다산의 두 아들 초명(初名)은 농사일을 배우라는 뜻의 학가(學稼)와 학포(學圃)다. 당시 벼슬길에서 겪은 다산의 환멸이 느껴진다.
1801년 다산이 강진으로 귀양을 떠났을 때, 큰아들이 18세, 둘째는 15세의 예민한 나이였다. 한순간에 폐족이 되자 두 아들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신을 추스르지 못했다.
강진에서 다산은 두 아들 걱정을 달고 살았다. 큰아들은 불끈하며 제 성질을 못 이기는 '불려(怫戾)'한 성품이 문제였고, 둘째는 표조(僄窕) 즉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한 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각각 '화기재잠(和己齋箴)'과 '경기재잠(敬己齋箴)'을 지어주었다. '화기재잠'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학가는 성질이 불끈하며 사나운 점이 많으니 그 병통을 고치려면 그 방에 '화기재'라고 이름을 걸고, 학포는 성품이 간혹 경박하므로 그 문제를 바로잡으려면 그 방을 '경기재'로 이름 붙여라. 이에 각각 잠(箴)을 한 편씩 지어서 경계한다.'
화기재(和己齋)는 자신을 온화하게 가라앉히는 집이고, 경기재(敬己齋)는 몸가짐을 공경스럽게 갖는 집이다.
큰아들에게는 화(和)를 간직해야 사물이 조화를 얻고 삿된 정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가 있다면서 '말을 부드럽게 하고 낯빛을 온화하게 가져라(兪兪其辭 溫溫其色)', '평소에 길러두지 않으면 나중에 잘되어도 혹 순수하지 않게 된다(養之弗素 達罔或純)', '목소리와 낯빛, 행동거지는 네 마음 씀에서 말미암는 것이다(聲容曁動 繇汝心工)'고 했다.
둘째에게는 '네가 너를 공경하지 않는데 누가 그 모습을 본받겠니? 마음을 붙잡고 간직해서 함양하여 길러야지(汝不汝敬 孰踐其形. 維操維存 乃涵乃養)'로 시작해서, '재갈 문 듯 삼가서 정신을 모으고 뜻을 고정해, 하는 말은 법에 맞고 몸가짐은 공손해야 한다(愼乃銜橛 神凝志定, 出口惟法 施體維恭)'고 다짐을 받았다.
두 아들은 돌에다 이 당호를 새겨 평생 공부의 화두로 들었다. 불끈하던 학가는 뒤에 이름을 학연(學淵)으로 고쳐 연못처럼 깊고 듬직해졌다. 경박하던 학포는 학유(學游)로 고쳐 육예(六藝)에 노니는 묵직한 사람이 되었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남긴 유산
이 편지는 1810년 9월에 다산초당 동암에서 쓴 것이다.
나는 벼슬하여 너희에게 물려 줄 전답을 마련하지 못했으나,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마음에 지녀서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이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쓴다 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근(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며, 갠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할 바가 있고 어린이는 다니면서 받들어 행할 바가 있으며, 젊은이는 힘든 일을 맡아하고, 아픈 사람은 지키는 일을 하며, 아낙네는 밤 사경(四更)이 되기 전엔 잠자리에 들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집안의 상하 남녀가 한 사람도 놀고먹는 식구가 없게 하고 한순간도 한가한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를 일러 근(勤)이라고 한다.
(斯之謂勤也)
그러면 검(儉)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의복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을 취할 뿐이다. 가는 베로 만든 옷은 해어지기만 하면 세상없이 볼품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거친 베로 만든 옷은 비록 해어진다 해도 볼품없진 않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모름지기 이후에도 계속하여 입을 수 있느냐의 여부를 생각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가는 베로 만들어 해어지고 말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고운 베를 버리고 거친 베로 만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음식이란 생명만 연장하면 된다. 모든 맛있는 횟감이나 생선도 입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리므로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것이다.
사람이 천지간에 살면서 귀히 여기는 것은 성실한 것이니 조금도 속임이 없어야 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고,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는 데서부터 농부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상인을 속이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 속일 게 있으니 바로 자기의 입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식물(食物)로 속이더라도 잠깐 그때를 지나면 되니 이는 괜찮은 방법이다.
금년 여름에 내가 다산(茶山)에 있을 때 상추로 쌈을 싸서 먹으니 손님이 물었다. '쌈을 싸서 먹는 게 절여서 먹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건 나의 입을 속이는 법일세.'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모름지기 이런 생각을 가져라. 정력과 지혜를 다하여 변소 간을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으리라.
이러한 생각은 눈앞의 궁한 처지를 대처하는 방편일 뿐만 아니라 비록 귀하고 부유함이 극도에 다다른 사군자(士君子)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이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버리고는 손을 댈 곳이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반드시 가슴 깊이 새겨두도록 하라.
다산이 아들들에게 남긴 '근검(勤儉)'이란 유산. 이 얼마나 값진 유산인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교훈
정약용 선생은 조선 22대왕, 정조 이산에 의해 등용된 실학자입니다. 정조 옆에서 정조의 뜻을 나라에 펼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정조의 꿈, 이상이었던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거중기를 발명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던 개혁가이기도 합니다.
정약용 선생은 정조에 의해 발탁되었는데요, 정조가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이루고자 했던 나라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비록, 정조가 얼마 못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정약용 선생도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8년이라는 긴 고난의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정조 옆에서 정조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정약용 선생은, 정조에게 있어서는 절대 없어서는 안될 신하이자,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리고 세대를 뛰어넘어 책으로만 접한 저에게도 정조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펼치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그 강한 의지와 열망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들, 학연, 학유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청소년 권장 책으로 나왔는데요, 그래서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두 아들들에게 아버지로써 앞으로 살면서 도움이 되는 책들, 그리고 처세에 관한 조언 등 아버지의 사랑을 편지에 담아 보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려사', '사서'와 '사기'를 반복해서 읽어라, 좋은 책을 가려서 읽어야 한다.
◼ 인간이 귀한 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에게 우환이 있더라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절대로 마음에 한을 품지 말고 오로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 사람이 마침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일테고, 그렇지 않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고 생각하여라,
절대로 '나는 전에 이렇게 저렇게 해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한다. 서운하다'고 경솔히 말하지 말거라. 이러한 말은 한번이라도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 아침에 바람에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집에 오는 손님을 정성으로 맞이해라. 만약,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인사나 나눈 다음, 다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하품이나 하고 있고, 배웅할 때도 마루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평생의 복을 내쳐버리게 되는 것이니 절대 그리하지 말거라.
◼ 효제를 근본으로 삼거라.
효제의 중요성 :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애 대한 우애만 잘 해도 모든 선이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 아버지의 교훈
1) 부모 형제를 배반한 사람은 친구로 사귀지 말아라.
2) 내 마음과 행실을 이미 올바르게 닦았다면 친구를 사귀어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되는 것이므로 친구를 사귀는 일에 결코 특별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3) 사람을 알아보려면 먼저 그의 가정에서의 행실을 살펴보면 된다.
4) 임금을 섬기는 도리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5) 미사여구로 문장이나 꾸미는 얄팍한 기교는 비록 한 시대에 널리 알려진다 하더라도 배우가 무대에 올라 우스갯짓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6) 춘추시대의 제나라 관포지교..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7)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구차하게 한 책이거나 한 때의 괴상한 웃음이나 자아내게 하는 책이라든지,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이야기나 지루하고 쓸데없는 논쟁같은 것들은 다만 종이와 먹만 허비할 뿐이니, 좋은 과일 나무를 심고 좋은 채소를 가꾸어 생전의 살 도리나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한 것이니라.
8)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마라, 사소한 사물이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을 벗어날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안목으로 보아라.
9) 백마디가 모두 신뢰할만 하더라도 한마디라도 거짓이 있다면 이건 바로 장난 같은 것이다.
10) 아량을 베풀고 용서해라, 도량의 근본은 용서함에 있다.
11) 내것, 네것을 따지지 마라.
12)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면 그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고 싶으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13) 돈놀이, 물건 파는 일, 약 파는 일은, 인간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본적을 깎아먹고 본업까지 잃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런 일은 아예 할 생각을 말아라.
14) 정도를 걸어라.
그러고 보면, 하나같이 다 살면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국 인생은 태도가 답인 것 같습니다. 꼭 필요한 조언들입니다. 다시 한번 저의 태도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정조대왕을 재평가한 내용도 나와 있는 것 같은데 내용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깝게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던 아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 받을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조대왕은 왕으로서 어떻게 정치했느냐는 그 다음인데요, 정치적으로 어떤 술수를 썼든, 중요한 건 방향성, 즉 누구를 위해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지를 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에서는 한치의 오해도 없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산의 두 아들(학연, 학유) 이야기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중등학교 학생이 제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학교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면서, 글이 어려워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았지만,
다산이 두 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가 많았고, 책을 많이 읽으라하며,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읽으라는 글이 있었다면서, 그런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자란 두 아들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는가를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들의 답장은 전해지지 않아, 일방적인 아버지의 편지만 열거된 책이어서, 그런 궁금증을 지님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편지에 답장을 줄 겨를을 얻지 못해, 그냥 오랜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2014년 마침내 '다산정약용평전' 쓰기를 마쳤는데, 다산의 후예들이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인품의 인물이었는가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간단한 답을 했습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집안이 폐족이 되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언제까지 우리 가문이 폐족으로 남아 있어야 하냐면서, 폐족이 폐족에서 벗어나는 길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폐족이라도 무한정하게 독서를 하다보면 반드시 폐족에서 벗어날 길이 있노라고 확신한다며, 두 아들에게 그렇게도 간절하게 독서를 권장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 없던 효자 두 아들은 참으로 많은 독서를 했습니다. 다산 집안이 국가로부터 폐족에서 벗어났다는 명확한 징표로, 다산의 큰아들 학연(學淵)에게 벼슬이 내렸습니다.
정학연이 아버지의 제자이자 자신의 친구인 강진의 황상(黃裳)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852년 8월 4일자의 편지이니 다산이 세상을 떠난 16년 뒤의 일입니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어 6월에 감역(監役; 종9품 벼슬)에 제수되었소. 음직으로 벼슬을 받아 집안이 마치 고목에 봄이 든 것만 같구려. 안방에서도 감축하고 원근에서 모두 축하해주니 옛날의 구슬퍼하는 감회를 더욱 누르기가 어렵네. (다산정약용평전)
위의 내용에서 그때의 사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하급의 벼슬이지만 학자에게 내리는 감역이라는 벼슬은 직급이야 낮지만 귀하게 취급받는 벼슬입니다.
글을 하는 선비라면 가장 명예로운 호칭이 학문과 덕행, 절의가 뛰어나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징사(徵士)가 된 것이니까요. 뒷날에 정학연은 벼슬이 올라 사옹원주부(主簿; 종6품)의 위계에도 올랐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분원(分院)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주부정학연선정비(主簿丁學淵善政碑)'라는 비들이 서 있는 것을 보면 고향 집에서 가까운 분원의 주부 벼슬을 역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정학유는 세상에 전해지는 '농가월령가'라는 유명한 글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나 박식하고 글솜씨가 뛰났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시를 잘 짓고 글 잘하는 선비로 대접받았던 사실은 여러 곳에서 증명됩니다.
추사 김정희와 정학유는 동갑내기 친구로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자신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난 정학유의 부음을 알리는 추사의 편지가 전합니다.
서로 함께 친했던 강진의 황상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 '운포(정학유)가 중병으로 설 전부터 위독하다더니, 마침내 이달(2월) 초하룻날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말았네, 이런 막된 세상에 이러한 사람을 어디서 다시 보겠는가(如此末俗 如此人 何處更見耶)?'
'완당전집' 중 여황생상(與黃生裳)이라는 글입니다. 추사 같은 높은 안목으로 까다롭게 인물과 글을 평하던 분이 그런 평가를 내렸다면 정학유의 인품은 넉넉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대의 문사 해거재 홍현주(정조의 부마)는 '두 형제 모두 박학한 선비인데다 시에도 뛰어났다(博學, 工詩)'고 표현했다.
다산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재산 대신 남긴 두 글자는?
하피첩은 전남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이 1810년 부인 홍씨가 보내온 낡은 치마를 정성스레 잘라 만든 작은 서첩이다.
하피란 '붉은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다산이 부인의 치마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다산은 여기에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을 적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장만한 치마에 아버지의 글을 적은 자손들에겐 그야말로 집안의 보물인 셈인데, 실제 보물 1683-2호로 지정돼 있다.
민속박물관에 따르면 하피첩은 원래 네 첩이었으나 현재는 세 첩만 알려져 있다. 민속박물관에서 경매를 통해 구입할 당시 각 첩의 표지에 제목이 일부 남아있으나 첩의 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물 보존처리를 위해 두 권의 첩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을'과 '정'이라는 글자를 통해 '갑을병정' 순서로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
다산은 1첩에서 두 아들에게 가족 공동체와 결속하고 소양을 기르라는 당부를 했다. '효제(孝悌)'가 인을 실행하는 근본이라 말하며 부모와 형제간 화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비록 귀양살이하는 가문의 자손일지라도 분노를 참고 화평하기를 바랐다. 아들과 손자 세대에 이르면 과거와 경제에 뜻을 둘 수 있으니, 문화적 안목을 잃어선 안 된다고도 했다.
2첩에선 삶의 실천 방향을 제시한 '경직의방(敬直義方)'이라는 경구와 함께 자아 확립과 삶의 자세에 대해 썼다. '경직의방'은 공경하는 바른 마음가짐으로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산은 ‘쓰러진 나무에 싹이 나고’라는 사언시를 통해 집안은 비록 풍비박산 났지만 실망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닦으라고 했다.
또 벼슬이 없어 농장을 물려줄 수 없으나 대신 부지런할 '근(勤)'자와 검소할 '검(儉)' 두 글자를 남긴다고 적었다. 이 두 가지는 좋은 전답보다 나아서 한 평생 쓰고도 남는다고도 했다.
또 3첩은 주로 학문과 처세술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다산은 온 마음을 기울여 자신의 글을 연구해 통달하기를 당부했다. 학문뿐 아니라 재산을 베풀고 달관하는 등 처세술에 대하여도 이야기하고 있다.
▶️ 怫(답답할 불, 발끈할 비, 거스를 패)은 심방변(忄; 마음)部와 弗(아닐 불)의 합자(合字)이다. 그래서 怫(불, 비, 패)은 ①답답하다 ②울적하다(鬱寂--) ③마음이 불안(不安)한 모양, 그리고 ⓐ발끈하다(비) ⓑ발끈 화를 내다(비) ⓒ분노(憤怒)하는 모양(비) 그리고 ㉠거스르다(패) ㉡어그러지다(패)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불평불만으로 끓어오르고 답답함을 불울(怫鬱), 기분이 나지 않고 답답함을 울불(鬱怫), 불끈하며 제 성질을 못 이기는 성품과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려표조(怫戾僄窕) 등에 쓰인다.
▶️ 戾(어그러질 려/여, 돌릴 렬/열, 어그러질 태)는 회의문자로 戻(려)의 본자(本字)이다. 지게호(戶; 지게문)部와 犬(견)의 합자(合字)이다. 개가 문 밑으로 억지로 나옴의 뜻으로 따라서 어그러짐의 뜻이다. 그래서 戾(려/여, 렬/열, 태)는 ①어그러지다, 거스르다 ②사납다, 포악하다(暴惡--) ③돌려주다 ④탐하다(貪--), 욕심을 부리다 ⑤세차다, 맹렬하다(猛烈--) ⑥거세다 ⑦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⑧갈다(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하여 다른 물건에 대고 문지르다), 연마하다(鍊磨--) ⑨(바람에)말리다 ⑩안정하다(安定--) ⑪또렷하다 ⑫죄(罪) ⑬허물 ⑭법(法) ⑮염병(染病: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 그리고 ⓐ돌리다(렬)ⓑ바람 소리의 형용(形容)(렬) 그리고 ㉠어그러지다(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그러질 괴(乖), 거스를 패(悖) 등이다. 용례로는 돌아가는 길을 여도(戾道), 서울에 다달음을 여락(戾洛), 요사한 기운을 여분(戾氛), 하늘에 닿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높이 솟음을 여천(戾天), 되돌려 보냄을 여환(戾還), 관세를 내고 수입한 화물을 재료로 하여 제조한 화물을 여세(戾稅), 서류 등을 결재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을 반려(返戾), 이리처럼 욕심이 많고 도리에 어긋남 또는 어지럽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을 낭려(狼戾), 일단 판 물건을 대가를 치르고 도로 무르는 일을 매려(買戾), 배반하여 돌아섬 또는 어긋남을 반려(叛戾), 성미가 깔깔하고 팍함을 강려(剛戾), 사리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않음을 괴려(乖戾), 성질이 못시 사납고 고약함을 한려(狠戾), 허물을 일컫는 말을 건려(愆戾), 언행이나 성질이 순직하지 못하고 비꼬임을 패려(悖戾), 괴이한 재앙을 괴려(怪戾), 광망하고 패려함을 광려(狂戾), 서로 어긋남을 상려(相戾), 어긋나서 틀어짐을 규려(睽戾), 그릇되고 어그러짐을 와려(訛戾), 죄가 될 만한 허물을 고려(辜戾), 음험하고 사나움을 험려(險戾), 죄를 저질러서 몹시 어그러지는 일을 죄려(罪戾), 인도에 벗어 나게 모질고 사나움을 폭려(暴戾), 사납고 도리에 어긋남을 맹려(猛戾), 배반되고 어그러짐을 배려(背戾), 욕심이 많아 바른길에서 벗어남을 탐려(貪戾), 한번 받았던 금액 가운데서 얼마간 되돌려 주는 돈을 할려금(割戾金), 스스로의 재능과 지혜만 믿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강려자용(剛戾自用), 불끈하며 제 성질을 못 이기는 성품과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려표조(怫戾僄窕) 등에 쓰인다.
▶️ 僄(날랠 표/가벼울 표)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票(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僄(표)는 ①날래다 ②재빠르다 ③가볍다 ④경솔하다(輕率--) ⑤경박하다(輕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경솔하고 교활함을 표교(僄狡), 불끈하며 제 성질을 못 이기는 성품과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려표조(怫戾僄窕) 등에 쓰인다.
▶️ 窕(으늑할 조, 예쁠 요)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구멍 혈(穴; 구멍)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兆(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窕(조, 요)는 ①으늑하다(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이 있다) ②조용하다 ③틈이 나다 ④한가하다(閑暇--) ⑤깊숙하다 ⑥아리땁다 ⑦놀리다, 집적거리다 ⑧가늘다 ⑨가볍다, 경솔하다(輕率--) ⑩미색(美色) 그리고 ⓐ예쁘다(요) ⓑ요염하다(妖艶--)(요)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부녀의 행동이 얌전하고 정숙함을 요조(窈窕), 마음씨가 고요하고 맑은 여자 또는 마음씨가 얌전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여자를 일컫는 말을 요조숙녀(窈窕淑女), 불끈하며 제 성질을 못 이기는 성품과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려표조(怫戾僄窕)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