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자유통일(自由統一)'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좌파적 통일관을 비판하는 목적을 갖는다. 한국 사회에서 '통일'이란 이름만큼 복잡한 이데올로기의 실타래도 없다. 이 글은 그 실타래를 푸는 입장에서 도움이 되고자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물론, 이 글은 인터넷 네티즌 개인의 소견을 대변할 뿐, 그 어떠한 정치 세력의 이념을 대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론적 기원을 모호하게 남겨둔 채 인터넷 통신 공간에서 글쓰기를 즐기는 다른 분들에, 이론적 기원들을 명쾌히 정리함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또, 보수적 전통의 창조적 발전을 신뢰하는 입장에서, 보수적 전통의 보수적 지속을 바라는 시선에 자유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 네티즌 개인 입장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2.. 자유통일 (自由統一)
자유통일이라고 말할 때의 '자유'는 철학적 자유 수준으로 도약한 적은 없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기 때의 침체기와, 가난한 나라를 겪을 때의 체험과,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전략에 흔들리는 나라를 지낼 때, 그것에부터 넘어서야 한다는 의식이 '자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차지한다.
이것이 덜 철학적이고 더 체험적인 지평이라고 과소평가할 수 없다. 모든 철학자들은 먼저 체험자이어야 한다. 체험을 하지 않는 철학은 '잡상인의 말'로 봐야 된다.
2.1. U.N.(國聯)을 번번히 거부하는 소련, 그리고 장려될 통일방안 연구.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기원으로 돌아갈 때, 제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텍스트는 다른 맥락에 놓이게 될 때, 원래의 맥락에서 내포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175센티 미터의 한 남성이 2미터 30센티 짜리 초등학교 농구 골대에서, 초등학생 데리고 농구하면서 덩크 슛을 팍팍 꽂을 때에 그러한 의미와, 평균적인 일반 성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3미터 5센티 짜리의 골대 밑을 못 들어가고 공만 돌리다가 '야투'를 던지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175센티 미터의 남성이란 사실보다도 어떠한 맥락에 놓이느냐가, 핵심으로 자리한다.
-인용문시작-
우리의 최대 비원(悲願)은 조국의 통일이다.
통일!
단일민족으로 연면(連綿) 5천 년을 이 지토(地土)에 선조의 뼈를 묻으며 살아온 이 나라 백의 동포, 그러나 오늘은 날이 갈수록 낯이, 풍속이 자꾸만 설어지는 먼 이웃, 이웃들.......
이러다간 국토의 양단이 아니라, 종국은 민족의 분단이 될까 두렵기만 하다. (박정희, 조갑제 해설, [국가와 혁명과 나], 지구촌, 1997. 239쪽.)
-인용문 끝-
2003년에 있어서 평균적인 20대에게는 '통일'을 화두로 내세우는 좌익의 목소리처럼 읽혀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통일'을 화두로 내세우는 좌파가 자유통일의 목소리를 지우면서 대중화 하는 전략을 썼다.
-인용문 시작-
그러나, 불행한 국토 분단은 일본군에 대한 점령 사무를 핑계로 약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절차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은 이북을 강점하고, 미국은 남한에 계속 주둔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이같은 운명을 새삼스럽게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국연(國聯)을 통한 끈덕진 통일에의 소원도 번번이 소련의 거부권으로 묵살되는 이상, 외세에 의한 타율적 통일은 구두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한 모르고 있지도 않다.
-인용문끝-(앞의 책, 240쪽.)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보편 목소리를 외면하는 소련. 그 소련은 북한에서 나갔었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계속되는 그들의 거부. 이것이 왜 그렇게 사무치는 주장이 되는 것일까? 요새 유행하는 '반미친북좌파(反美親北左派)'식 규정으로 '수구(守舊)'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탈냉전'에 대한 자의적으로 설정한 부드러운 이미지 기준으로 딱딱하다는 비난의 차원으로 '냉전세력'어쩌고 해서도 안된다.
-인용문 시작-
우리 당대에서 못 이루면 자대(子代)에서, 자대에서 불능하면 손대(孫代)에서, 우리의 염원은 틀림없이 풀려질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다. 우리의 후손이 우리의 한을 꼭 풀어주고, 이 한의 소인(素因)들도 꼭 제거하여 줄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저 내일로 이 일을 미루어놓을 수는 없다. 통일에 대한 연구와 그 방안은 얼마든지 장려되어야 할 일이다. (앞의 책, 240쪽)
-인용문 끝-
'통일론'에 관한 후대의 연구가 가능할 수 있음은, 박정희 대통령의 이 말씀 때문에 그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문단은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20대들에겐 '애국(愛國)세력'을 조롱하는 반역세력들의 통일론 맥락에서 읽혀질 것이라 본다. 좌파에게도 대한민국의 한 소속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지는 우파적 관점의 자율성으로 우파가 좌파에게 포용하려는 의식은, 물 거품 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2.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자유통일'에서의 '자유(自由)'의 의미는 '국가(國家) 없는 부자유' 상황의 반대말로서 자리한다. '조선왕조'의 붕괴 이후에 억압받던 우리 민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따라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근대 국민 국가를 내세움으로서 얻어진 권리가, '자유통일'의 '자유'의미의 원점에 자리한다.
조선왕조 붕괴 이후 10년 가까이 숨죽여온 우리 민족은, 3월 1일에 떨쳐 일어났다. 이 날의 사회적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는 민족적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민족의 지도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인용문 시작-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프랑스 조계 金神父路에 있던 현순의 임시 가택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려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진행되었다. 갑론을박 끝에 석오 이동녕이 의장에 정동 제일교회 목사 손정도가 부의장에 가기 선출되었고,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뽑혔다.
다음날(4월 11일) 석오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집무하면서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울음섞인 감격의 선언이 있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의 법제적 뒷받침-절차를 원만히 밟아 민족사적 정통성의 맥락이 이어졌다.
-인용문 끝-(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 121쪽.)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의 지도자들은, 일제 말기의 일반인들의 고립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극도의 고립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 하나로 버텨 나갔다. 임시정부 초기는 분열상이 심각했다. 그리고, 자금난은 엄청난 억압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대통령과 안창호 선생중심의 전반기와, 김구 선생 중심의 후반기 운영으로 나뉜다. 1948년 무렵에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세력의 정통성을 거부하고, 김일성에 사실상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기 전까지는,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가장 실천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음은 분명하다.
-인용문 시작-
이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백범은 14년간 임정의 지도체제(1927-1940)를 의연히 지속 유지되게 하였다. 따라서 백범의 임정에 거는 丹誠이 얼마나 열성*농도가 짙었느냐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의 배추잎을 주워 먹으면서도" 그의 독립운동상에는 시종일관 아무런 변화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백범을 구심점으로 한 임정의 1940년까지의 독립투쟁을 살펴보면, 한국 독립당의 조직과 지청천의 고려 혁명 사관학교 설립운영을 비롯하여 삼균주의에 의거한 건국원칙의 발표가 있었다. 또한 지청천의 한국독립당군 등이 중국인 의용군과 연합 제휴하여 유격전을 강화하였다.(앞의 책, 155쪽)
-인용문 끝-
[독립신문]은 서재필에 의해 1896년 4월 7일 처음 발행된 이래 그 광복사적이고 주체적인 의미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신문의 이름은 1919년 8월에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부활되었다. 개화파 세력의 이름을 이은 만큼, 이 신문의 목적은 민족을 개화하고 계몽하는 입장을 분명히 포함하였다. [독립신문]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상으로 경영 자금의 압박을 받았다. 끝내, 그 고독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춘원 이광수는 중도에 귀국하였다. [독립신문]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보다 먼저 생긴, 개화파세력의 이념을 이으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포함했던 신문이었다. 결국, 경영난으로 중도 폐간되었으나, 21세기의 우리 앞에 '인터넷 신문'형태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주목해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을 주축으로 하며, 그 주축세력은 개화 계몽 운동을 신봉했던 선각자였다. 이승만대통령의 <옥중잡기>에서 드러난 바처럼, 신학문을 높이 세우려는 입장(유영익 편, [이승만 연구], 연세대 출판부, 2000. 29쪽.)은 몰락해가는 조선왕조에 대한 기대보다, 세계 국제 정세와 더불어 돌아가려는 영어로 쓰여진 잡지를 즐겨 읽었던 입장의 반영이다. 그리고, 신문의 위력을 깨달은 것은 조선왕조를 지키려 했던 세력들의 폭력봉기와 거리를 두려 했던 의지였을 것이다.(앞의 책, 32쪽.) 또, 교화로 나라를 세우려는 입장은 조선왕조 멸망 무렵의 정치적인 한 파벌로, 다윈주의를 수용하는 국가주의의 한 양상을 보게 된다. (35-36쪽) 다윈주의를 수용하는 국가주의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국가' 아니다. 아시아의 영원한 유토피아의 상징성에 해당되는 '대동세상'의 구현치로서의 요순시대를 미래에 투사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지도자로서 경쟁자에게 관대하지 못한, 인격적 흠이 있었던 듯 여겨진다.(앞의 책, 97쪽) 하와이에서의 상무정신을 수용한 박용만과의 대결의식은, 해외 민족운동의 정당성의 가치를 전부 훼손하고도 남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모두가 훼절하고도 남을 시간에 꿋꿋하게 버틴 깨끗한 영혼의 민족적 지도자들이 모인 집단은, 그 집단이 건국의 정통성을 포함하게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은 해방 이후에, 실현가능한 절대적인 건국의 정통성이 있을 집단으로 여론화되었다. 1945년 무렵에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쪽은, 좌파 쪽도 마찬가지였다. 전단 형태로 정부 조각을 마련해놓고 사람들을 나중에 섭외하는 형태라서, 전단에 끼어진 사람이라고 그 소속성을 확실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승만대통령은 좌파세력의 지도자로도 많이 명명되었었다.
김일성은 소련 군대를 타고 북한에 진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나누고 있는 민족 지도자 조만식 선생을 기술적으로 억압하고, 사회의 곳곳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북한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유도했다. 북한 공산 집단은 일찌감치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론 기치 아래에, 3.8 선 이북 지역 내에서의 공산집단 권력화를 확립하였다. 3.8 선의 경계선은 처음에는 흐릿했다. 남과 북을 오고 가는 장사꾼이 많았다. 그러나, 북한 공산 집단의 권력화가 완성되자, 그러한 가능성이 대폭적으로 제한되었다. 북한 공산 집단의 권력 완성화는 남쪽에 사는 주민들에게 억압감을 만들었다. 북한 공산집단의 김일성이의 뒤에는 소련이라는 권력체가 떡 하니 받혀주고 있는데, 남한 지역의 미국이 자유대한을 지켜줄 수 있을지가 민족지도자들에겐 회의스럽게 다가왔다. '찬탁'과 '반탁'대결에서 소련의 꼭두각시로 만족하는 '북괴'찬양자들과 달리, 자유대한을 사수하고자 하려는 세력은 '반탁'의 입장에 섰다. 그로 인하여 자유대한을 지지하는 민족 지도자들은 1년 가까이 미국과 소원한 상태로 되는 결과를 만나게 되었다. ('친미인사'로 하는 대부분의 논의의 출발점은, 실제적인 유학경력을 문제삼는 수준에 가깝다. 실제적으로 가장 커다란 요인은 '윌슨'과 가깝다고 소문 난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좌파의 신뢰의 착오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가 핵심으로 보인다. 또, 가시적이고 명백하고 분명하고 스탈린조종에 꼭두각시 김일성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맞춰서, 좌파가 우파를 비난하기 적절할만큼 역사를 왜곡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겨서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은 U.N.이 지지하는 한반도 내에 합법정부로 승인되었다. '국가 없는 부자유'에서 '국가 있는 자유'가 될 때까지, 좌파들의 집요한 공산독재전체주의 국가로 방향을 선회하려는 폭력적 움직임과, 그것에 맞서는 우파들의 대항폭력의 움직임이 있었다. 좌파들의 폭력성과 우파들의 폭력성은 어느 쪽이 더 컸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시대 역사적 당사자들에겐 체험적인 지평일 의미가 가장 컸을 쪽이고, 후시대 사람들에겐 친근한 의미로 구성하려는 쪽이 작았을 것이라고 본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세력들에겐, 구한말 마지막 왕조의 입헌군주제 정통을 발전시키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공산집단은, 왕조시대에 흔했던 오랑캐 집단의 부당한 영토 잠입일 것이다. 건국이 되었으되, 미군 철수후에 국가적 안보가 위기에 달했던 대한민국은 북한에 '북진통일론'이란 공갈정책을 쓰게 되었다. 일단, 씨족제 농촌 마을 분위기가 지배적인 아시아 사회에서, 거대한 실향민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북한 공산 집단의 권력 과정의 폭력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씨족제 농촌 마을을 떠나게 만든 실향민들에게, 그 집단의 부당한 잠입자를 몰아낸다는 것은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목적이 될 수 있다.
6.25 전쟁에서의 국군의 '북진' 과정은 부당하게 점유한 북한 공산 집단 권력체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한다. 북한 실향민들은 북한 주민을 부당한 권력 집단에서 북한 주민을 자유롭게 하려는 의지를 가져왔다. 북한 주민에 대한 애정은 분명하다. 소련에 의지해서 북한영역을 차지한 권력체에 대한 적개심이었을 것이다.(박정희, 앞의 책, 242-243쪽.)
자유통일의식은 자유대한의 극대화를 통한 상대쪽의 절멸의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자유통일 노선의 가장 오랜 시간은 '승공(勝共) 자유통일'의 노선이었다. 이것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의식의 확고함을 토대로, 대한민국 국가의식을 확대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에 북한 공산 집단에 억압되는 이들의 '인권 문제'제기는 아래의 인용문의 연장선에서 사고해볼 부분이라 본다.
-인용문 시작-
셋째로, 본인은 통일 독립에 대한 국민의 부단한 관심이 제고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사실, 해방 후 19년간은 정작 해야 할 건설은 도외시하고 허망된 자유 추구와 정쟁만을 일삼은 공백기라 할 수 있다. 이 동안에 경박한 외국의 풍조가 이 땅을 휩쓸었고 모든 불안은 국가관념이나 주체의식을 상실케만 했고, 따라서 민족정기는 쇠퇴 일로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조국의 통일문제는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앞날, 증흥창업은 분할된 국토와 분리된 동포가 함께 뭉쳐 통일됨으로써 비로소 기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불붙는 그 정열에 더욱 더 통일에의 결의를 제고하기 위하여는, 저 임진강 북녘에서 몸부림치는 형재 자매들의 혈원을 가슴에 아로새겨주어야만 할 것이다.(앞의 책, 246-247쪽)
-인용문 끝-
자유통일에 대하여는 최근에 황장엽 선생의 관점 연구에서 다시 살펴보아야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자유 대한', '대한민국주의의 강화'를 통일의 해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좌파적인 통일관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좌파적 통일관은 우리 민족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일본과의 통일을 시도한 '매국노'이완용의 정신과의 깊은 상관관계를 가졌다고 봐야 적절하다.
3. 좌파적(左派的) 통일관
자유통일과 평화통일의 이분법은 옳지 않다. '북진통일론'의 상무정신의 가능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사 50여년의 '자유통일'노선의 오랜 기간은 '승공(勝共) 자유통일'의 노선이었다. 즉, 자유통일과 평화통일은 모두가 우파의 자유통일관의 일부분이다. 애국우파와 반역세력이란 구분을 내세우거나, 나의 제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전 세계적 보편사람과 매국노 영혼만이 '진보적 통일'이라고 우기는 세력들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즉, 제대로 된 '통일관'과 '통일관'이 아니면서 통일관이라 사기치는 논리의 두 가지가 있다고 봐야 된다.
'북진통일관'이 강했을 때는 예외없이 좌파적 통일관으로, 대한민국이 극도의 혼란을 겪을 때이다. 좌파적 통일관은 '연방제' 노선과 자유대한의 가능성의 축소나 공격을 목적으로 한다. 북진통일론이 한반도 전체를 힘에 의거한 자유민주주의 지향성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좌파적 통일관은 결국 궁극적인 방향성이 뒤바뀐 것으로 보면 적절하다.
좌파적 통일관은 자유통일관의 역사만큼 역사가 깊다. 20대 초반들은 뭔 사소한 환경에 이다지도 역사적인 긴 무게가 얹혀있냐고 하면서, 꼴리는 대로 하고 싶겠다고 할 지 모르겠다. 유교적 제사 문화는 동아시아 사회의 역사 문화를 누적적이고 축적적이고 무겁게 만들었다.
3.1. 임시정부의 곁가지 파벌로서의 해외 공산당 운동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 '공산주의'의 의미는, 김일성의 의미로 요약 정리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반도 내에서의 공산주의 이입의 뿌리는, 구한말의 외세 격변기에서의 민족적 대응양상에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인용문 시작-
1894-95년의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은 이승만과 이동휘 두 사람 모두에게 인생 역정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승만은 서당공부를 중단하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선교학교인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새로운 서양의 문명과 학문을 접하여 전혀 새로운 사상과 세계관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맞았고, 이동휘 역시 개화에 적극적이었던 단천 군수의 도움으로 한성에 올라와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러시아장교들로부터 사관 교육을 받았다. 갑오개혁 이후 이승만과 이동휘의 서로 다른 진로는 두 사람의 향후 독립운동과정에서 상이하고 대립되기도 한 정치노선과 활동의 방향을 결정짓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유영익 편, 앞의 책, 224쪽.)
-인용문 끝-
이승만대통령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관점에서 사고를 했다. 글로벌 1세대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개화파에 해당된다. 구한말에 이승만대통령에 벌을 주었던 정부는 친러적 경향을 가졌다고 한다(230쪽)
이동휘는 이승만대통령의 개화 논리에서의 전형적인 수구파(守舊派)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친러의식'==> '고종에 대한 근왕의식'===> 임시정부 이승만에 대한 존경감. 이동휘는 1918년 6월에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모스크바에 대표를 파견한다. 러일전쟁에 일본에 지기까지 했던 약소국가가 공산화에 시도하고 나니, 러시아혁명에 성공했으면서도 일본의 도발이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중국에 있는 운동가들에 지원은 소련 국가 안전에 의미가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극도의 자금 빈약에 시달리던 운동가들에겐, 소련에서 오는 엄청난 지원금은 환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자이기보다 민족주의자이려 했던(이정식, [조선노동당 약사], 이론과 실천, 1994. 23쪽.) 이동휘는, 보다 더 소련파벌에 가깝게 정리될 이르쿠츠파의 시기를 받게 된다.
3.2. 식민지 시대와 해방기의 공산주의 운동 : 일제=미제=대한민국??
식민지 시기의 민족운동사를 놓고 본다면, 신간회의 코민테른 지령에 의한 해소 때부터가 공산주의 운동이 독립운동으로서의 일반의미보다는, 소련의 '괴뢰(傀儡)'의식으로 만족해가는 선으로 여겨진다. 소련의 지원 아래에 일본 공산당을 모델로 많은 공산당이 세워졌지만,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지속적으로 붕괴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 공산주의 세력의 '항일' 민족의식의 강한 의미는 인정해야 한다. 김일성을 위한 김일성의 김일성만의 북한 관변 논리가, 한국 공산주의 세력의 삶에서 발견되는 의미가 모두 김일성에게 나타나는 듯이 억지 논리를 펴는 이유는, 한국 공산주의 세력의 항일 외세의식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소련의 지원'에 의해서 유도되고, 대한민국의 독립의지와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된다.> 아니, 이 별도의 항목이 더 본질적일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벌이 상상 이상의 숫자로 나뉘어서 상호 견제하면서도 독립운동을 향해 나아갔다면, 한반도 내에 공산주의 세력도 상상이상의 파벌로 나뉘어서 소련에 대한 지원을 향해서 상호 견제하면서 존재해 나갔다.
식민지 시대의 독립운동은, 순수하게 독립운동을 하되 이견을 조화 못해서 지지고 볶는 우파 세력과, 소련에서 지원해주는 파이를 기대하면서 서로 잡아먹으면서 그러한 지원이 의미있을 수준까지의 독립운동의식을 내세우는 좌파 세력이 있었다고 보면 적절하다. 즉, 우파에겐 '자유대한'을 향한 절대진리를 위한 독립운동이 있었고, 좌파에겐 '독립운동'을 하면 자연히 따라오게 될 (따라와야 만 할) 잇권을 보는 게 있었다고 보면 적절하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는, 공산주의 세력은 독립운동 움직임에서 완전히 분화되어서 소련에서 주요 인사를 거두어 교육시키고 내려보내는 '괴뢰 만들기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봐야 적절하다.
한국 좌파의 언어는 식민지 시대의 언어에서 달라진 게 많지 않다. 계절마다 투쟁하는, 투쟁 단위의 농사꾼 달력화 하는 논법도 식민지 시대 어법이고, 일제 에 의탁하는 소수의 기득권 세력과 나머지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화라는 차원으로 비유해서, 좌익 혁명론을 일제 식민지 국가를 무너질 국가로 비교하는 어법 차용도, '일제 식민지 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꾸면서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너무 압축적 묘사인 것 같아서 풀어서 설명해본다.
왜,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국가의 연장선상으로 의식되는 것일까? 좌파들은 조선총독부
미군정이 이어받았고, 그 미군정을 대한민국이 이어받았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일제 식민
지가 망하고, 2차 대전 전후 처리 과정으로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하여, 미국의 도움으로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이 대한민국이라 할 때, 대한민국의 역사적 발생과정의 한계를
약점으로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식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즉, 대한민국
은 공산세력에 의해서 건국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 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의 모국인 '소련'과 '북한'에 충성하도록 길들어진 무의식에 가까우며, 자
유말살 논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좌파적 통일관의 바닥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모국에 대한 충성심과, 대한민국 부정의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 식민지 시대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이완용과 비슷한 일제에 기생한
기득권 세력과 싸우려 했음에도, 한국 좌파는 그러한 세력과 싸우면서 영혼에서 이완용의
식에 깊숙하게 접어 들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좌파적 통일관의 핵심은 '자국'의 상징권을 격파하여, 공산주의자의 모국의 주도권에 그것
을 넘겨주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