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낙동강
이번 여름 방학 중에는 방과 후 수업도 없고 학교에서 공사를 하는 관계로 시간이 많다. 난 그동안 무시했던 EBS 수능 강의도 듣고, 낮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서 운동도 하고, 또 단지 내 독서실에서 모의고사(한국지리) 기출문제를 풀어보면서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8월 3일 전포동(어머니가 사시는 곳)소재 부산진구 복지관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쓰러져단다. 바로 차를 운전하여 서면 근처 병원에 입원을 시겼다. 곧이어 형수님도 오고 누님도 오셨다. 병명은 그냥 더위로 인한 노환이었다. 8월 5일 다대포에서 합동교외지도를 마치고 서서히 걱정이 된다. 94살 노모를 다시 혼자 살게 놔 둘 수 있느냐? 이다. 집안 형제들 간의 의견은 요양병원에 모셔야 된다고 했다. 서로 간에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는데, 우리 집사람(아내)이 우리 집(명지)에 모시겠다고 한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님, 형수님들은 미안해서인지 아무도 오지 않고 나 혼자 차를 몰고 가서 퇴원을 하고, 전포동에 가서 어머님의 간단한 옷가지를 챙겼다. 농이나 냉장고 등은 그대로 두고 간단히 챙긴데 도 보따리가 거의 10개가 넘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삼천포에서 하는 농구경기에도 못 갔고, 지리과 연수(부산대지리과 모임)에도 일부러 안 갔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지 약 1주일 쯤에 119, 112 등이 우리 집을 다녀갔다. 다시 보따리 10개를 챙기고 어머니를 싣고 전포동으로 향했다. 서부산 IC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너니 어머니가 나보고 “이 강이 낙동강이가?” 하신다. “예 맞습니다” 당신 나이 50~60때 쯤에 낙동강 근처에 밭을 메러 오신 것이었다.
마음이 뭉클하다. 1990년대 초 내가 동주여고(옛 동주여상)에 처음 왔었 때에는 우리학교 산악회가 대단히 활성화 되어 있었다. 1973년도에 창립을 하여 올해(2017년)44주년이다. 그 때 산에 자주 가시던 분이 지금도 살아계신 윤두현 실장님(올해 81세)과 김영일 선생님(70대)이신데, 이 두 분이 ‘오 낙동강’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보아라 신라가야 ....... 전통의 낙동강’
그 뒤 2000년쯤에 내가 달리기(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을숙도와 김해 공항 사이쯤에 ‘오 낙동강’ - 이은상 작사, 시비를 보았다.
내일은 ‘오 낙동강’ 시비를 보러 가야지 생각하고 동서고가도를 진입하는데, 길이 막힌다. 평소에는 차가 막히면 짜증이 나는데, 이날은 묵묵히 운전을 했다. 어머니를 다시 전포동에 놔 두시고 나는 집으로 가면 되나? 아무 생각이 없다. 전화벨이 울린다. 누나였다. 덕식아 어무를 요양원에 모시자. 그리고 가시기 전 잠시 우리 집에 데리고 온나! 알았다. 내일 모시고 갈게, 하고 전포동에 있는 어머니 단골집인 ‘수복원’이라는 중국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밤에 같이 잠을 자면서 어머니가 말씀을 했다. 아까 먹은 중국집이 왜 ‘수복원’이냐하면 그 집 주인(60대)의 아들의 이름이 수복이었는데, 4살된 아들(주인의손자)을 두고 세상을 떠났단다. 그런데 그 며느리에게 아들(손자)을 두고 다시 시집(재가)을 가라 해도 가지 않는단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집에 음식을 팔아준단다.
고인이 되신 ‘박완서’ 선생님의 자서전격인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 이런 글이 나온다. 박완서 선생님의 모친도 일찍 남편을 여의고 일제 강점기 때 자식들 교육을 시키려 황해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다. 4대문(지금의 종로, 중구 일대)안으로 이사를 하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약간 변두리에서 살았다. 당시 해마다 그믐날(음력 12월 30일)이면 박완서님의 모친이 동네 물장수(당시는 수도란 게 없었음)를 불러 식사 대접을 했다. 이유는 그 물장수의 아들이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연희전문학교 – 오늘날 연대, 보성전문학교 – 오늘날 고대). ’수복원‘하고는 내용이 좀 다르지만, 어머니도 그런 사고를 가지고 계신분이다.
8월 17일 새벽 4시쯤에 목욕탕에 갔다. 기분이 싸늘하다. 내가 달리기(마라톤)를 시작한지 18년 째 인데도, 그동안 몸무게가 3kg 이상 줄지를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몸무게를 재어보니 약 1주일 사이 5kg이나 줄었다. 아침 식사 후 다시 보따리를 쌌다. 보따리가 12개로 늘었다. 사하구에 있는 누님 댁은 모두 일하러 가고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를 거실에 모셔다 드리고 나는 다시 집으로 가야만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게 눈물을 보이시지 않았던 분이 울기 시작한다. 평소 마음여린 나이지만, 속으로 꾹 참았다. 집에서 다시 차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와야 했다. 오늘 모두 낙동강을 5번이나 건넜다. 중간에 한 번은 낙동강 둔치(삼락동 쯤)에서 음료수 사려고 잠시 쉬는데, 사람들이 수근 그린다. 어느 누가 자살을 했단다. 기분이 이상했다.
중생대 백악기 이후(약 6,500만년전) 낙동강은 계속 흘렀을 것이다.
보아라 가야 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듯 잠겨 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첫댓글 저희들은 생각없이 오고가는 낙동강인데 어머니에겐 그 강도 중국집도 붙잡고 싶은 하나하나라 생각됩니다!!
크크크~ 하 선생! 자네가 국어 선생이 아니라 지리 선생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살포시 들더라~ 그래도 글쓰기는 모든 교육지들에게 필수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짠한 내용이네!
쇠와같이 마음도 담금질을 자주해야 변덕없는 진성성생기죠.. 그중 늙으신 어머니 회한의 눈물을 보면 짠해지면서 저분이 날 키워주셧나 싶죠
하나 하나가 분절이 아닌,
다 연이 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네.
올 여름 유난히도 더웠던 거 같네.
마음이 찡 하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모처럼 수작! 잘읽었어요ㅡ
부모가 무슨 보따리도 아니고 여기저기로
요양보다 차라리 하샘이 모시는기~~!
하선생은 효자에요.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기다려주지않는다. 저는 떠나고 난뒤 진짜 의미를 깨닭게 된 불효자입니다.
전 절대로 효자도 아니고, 훌륭한 교사도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을 되새겨 보자는 뜻에서 한 번 적어 봤습니다.
백세시대에 노부모 모시기는 초등시절 깜박잊고 있던 숙제같습니다. 그래도 부모자식 모두를 생각하면 요양원에 모시는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꾸 본인집에서 혼자 지내겠다고 고집부리시는지. 그렇다고 애들데리고 본가에 들어가서 같이 살수도 없고. 소년소녀가장이 한말합니다.
내 고향은 논 한뼘 없는 깡촌입니다(지금은 없어진 낙동강역 바로 앞). 그래서 어제도 비둘기호를 타고 삼랑진 부근을 지날 즈음엔 내 마음은 희미한 낙동강철교만 보고도 콩닥콩닥 합디다. 설악동처럼 산자수려한 곳도 아니요, 김해평야처럼 물산이 풍요로운 곳도 아니지만, 마치 꼬질꼬질하게 늙어버린 어미를 대할 때의 애틋한 심사가 치솟습디다. 아마 하 선생의 모친께서도 정서지향적 삶의 지표 예컨대, 이별하신 서방님과 고난지난한 삶을 보냈던 애틋한 공간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요? 즉 요양원으로 모시면 모두가 편하겠지만...
그나저나 하 선생! 요번 총회 기념일에는 우리 클럽의 소문난 효부인 그 분의 얼굴 함 봅시다
괜히 눈물짓게 하네요 지나고나니 나도 불효자식이었다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