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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하나를 다시 여섯으로 (12)
진무왕(秦武王)은 유달리 키가 크고 힘이 셌다.
특히 용력(勇力)있는 자들을 좋아했다.
진나라 내에서 장사로 소문난 오획(烏獲)과 임비(任鄙)는 이 덕분에 진무왕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그 무렵 제나라에 맹열(孟說)이라는 역사가 있었다.
사서(史書)에 따라 맹분(孟賁)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진무왕(秦武王)이 용사들을 총애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함양으로 달려가 신하가 되기를 자청했다.
진무왕 또한 맹열(孟說)을 보자 기뻐하며 오획, 임비와 더불어 늘 자기 곁을 따라다니게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세 용사를 삼역사(三力士)라고 불렀다.
의양성을 점령한 그 해 여름,
진무왕(秦武王)은 자신의 소원대로 의양 땅을 경유하여 주(周)나라 도읍인 낙양으로 들어갔다.
좌우로 삼역사가 철통같이 호위했다.
그는 흐뭇했다.
'감개무량(感慨無量)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당시 주나라 왕은 주난왕(周赧王)이었다.
지위로 치자면 천자(天子)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 주왕(周王)을 천자로 부르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주난왕(周赧王)은 중원 최대의 강대국 왕인 진무왕이 낙양을 구경하러 온다는 소식에 교외까지 나가 영접했으나, 진무왕(秦武王)은 손을 내저었다.
- 만나볼 필요도 없다.
그러고는 단독으로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주난왕(周赧王)은 무안했으나 얼굴만 붉힐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무왕의 발길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주나라의 태묘(太廟)였다.
그 곳에 '구정(九鼎)'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구정은 하왕조 때 각 주(州)에서 바친 구리로 만든 아홉 개의 솥이다.
솥 표면에는 각 고을의 산과 강 이름, 조정에 바치는 곡물과 조세의 수량, 지역의 넓이 등이 소상히 새겨져 있으며 특히 솥발과 솥귀마다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아홉 개의 솥을 '구룡신정(九龍神鼎)'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정(九鼎)은 하나라가 멸망하면서 은(殷)나라로 전해졌고, 은나라가 망하면서 다시 주(周)나라로 전해졌다.
이때부터 이 아홉 개의 솥들은 천자를 상징하는 보배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춘추시대 제 3대 패공으로 활약했던 초장왕(楚莊王)은 한때 낙양 근처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구정(九鼎)의 크기와 경중을 알아보고자 왔노라.
이후로 이 말은 천자가 되겠다는 야심의 상징어가 되었다.
물론 초장왕은 왕손 만(滿)의,
- 천자는 덕행에 있을 뿐 구정(九鼎)에 있지 않다.
라는 대답에 구정을 구경조차 못하고 돌아가긴 했지만.
천하 패업의 꿈을 안고 있는 진무왕(秦武王)이 어찌 이 고사를 모를 리 있겠는가.
그가 왕성으로 들자마자 태묘로 가서 구정(九鼎)을 보겠다는 뜻은 곧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진무왕(秦武王)은 태묘로 들어가 구정(九鼎)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솥들은 몹시 컸다.
구정의 솥 하나 무게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열국지>의 저자 풍몽룡(馮夢龍)은 솥 한 개의 무게를 1천 균(鈞)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거의 신빙성이 없다.
1 균(鈞)은 대략 30근, 1천 균이라면 3만 근이다.
당시 1근은 약 370g 이었으니, 요즘 단위로 계산해보면 못 잡아도 10톤이 된다.
중국인들이 아무리 과장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솥 하나의 무게가 10톤인 것은 너무 심하다.
그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겠다.
"대단하군."
탄복을 금치 못하던 진무왕의 발걸음이 문득 한 솥 앞에서 멎었다.
- 옹(雍).
옹주(雍州)의 솥이었다.
진무왕(秦武王)은 감격한 표정으로 '옹주의 솥'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며 삼역사 중 한 사람인 임비를 향해 말했다.
"나는 저 솥을 우리 나라의 함양으로 가져가야겠다. 그대는 이 솥을 능히 들어올릴 수 있겠느냐?"
임비(任鄙)가 어림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1백 균(鈞) 정도라면 모를까 1천 균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때 임비 옆에 서 있던 제나라 출신 역사 맹열(孟說)이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신이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혹 실패하더라도 꾸짖지는 말아 주십시오."
좌우 사람들이 솥 양쪽에다 튼튼한 밧줄을 매었다.
맹열(孟說)은 요대(腰帶)를 졸라매고 근육질의 팔을 뻗어 줄을 휘감았다.
이윽고 힘을 썼다.
"으랏차차!"
맹열(孟說)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이마의 힘줄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돋아났다.
순간 솥은 바닥에서 한 치 가량 떴다가 이내 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맹열(孟說)은 어찌나 힘을 썼던지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서질 못했다.
튀어나온 눈알이 들어가질 않았다.
눈동자의 힘줄이 터졌는지 눈가에서 벌건 피가 흘러내렸다.
진무왕(秦武王)은 힘도 세었지만 승부욕도 대단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맹열(孟說)이 한 치 가량 솥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끓어오르는 승부욕을 이기지 못했다.
"내 비록 힘이 세진 않지만 맹열(孟說)보다는 높이 들어올릴 수 있겠다."
그러고는 솥 앞으로 나서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임비(任鄙)가 놀라서 간했다.
"대왕께서는 귀하신 몸입니다. 경솔한 행동은 삼가십시오."
그러나 진무왕(秦武王)은 그에 아랑곳없이 가죽띠로 허리를 단단히 조였다.
마침내 진무왕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평생의 힘을 다 쏟았다.
순간 솥이 역시 한 치 가량 떴다.
여기서 그대로 끝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무왕(秦武王)은 맹열을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삼 보(步)를 걸으면 맹열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무왕은 솥은 든 채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이 아찔하며 두 팔의 힘이 쭉 빠졌다.
솥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밑으로 발이 깔렸다.
"아악!"
사람들이 달려들었으나 때는 늦었다.
다리를 덮여 누른 솥도 치울 필요가 없었다.
진무왕(秦武王)의 오른발이 이미 끊어져 나갔던 것이다.
진무왕은 기절한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좌우 신하들이 기겁하여 황급히 수레에 싣고 공관으로 모셨다.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결국 진무왕(秦武王)은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지난날 그는 저리질과 감무에게
- 삼천(三川)을 구경할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말이 씨가 되었음인가?
과연 그렇게 되었다.
졸지에 국상(國喪)을 당한 진나라 신료들은 서둘러 진무왕의 시체를 관에 담아 함양으로 돌아왔다.
젊은 진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이에 진무왕의 이복동생인 공자 직(稷)이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진소양왕(秦昭襄王)이다.
이때 진소양왕의 나이는 17세.
좌승상 저리질(樗里疾)은 진무왕이 죽은 원인이 맹열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맹열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주살했다.
반면 임비는 진무왕에게 간(諫)했다고 하여 한중군 태수로 승진시켰다.
저리질(樗里疾)은 또 명했다.
- 진무왕이 낙양으로 가신 것은 감무 탓이다. 어찌 감무(甘茂)를 그냥 내버려둘 수 있으리오.
이 말을 미리 전해들은 감무(甘茂)는 재빨리 함양을 탈출하여 위(魏)나라로 망명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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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