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6월, 탄진이 폭발하면서 6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치는 사고가
'탄광섬'에서 일어났다. 당시 회사 측이 할당량을 달성하기까지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 통에, 작업자들의 불만도 쌓여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제2의 노조가 생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은
있었지만, 노동자 측보다 회사 측에 붙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졌다.
회사 측도 작업자에게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채용할 때 주는
준비금만 챙겨서 사라지거나, 일을 조퇴하고 파친코(일본 도박 게임)에
빠지거나, 술을 마시고 결근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학회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결근이나 조퇴할 때 자주 학회 핑계를 댔다. 함께 TV를 보았으면
서도 '비번인 날에 학회원이 절복하러 와서 충분히 쉬지 못했다' '밤 늦게
까지 학회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는 등으로 사유를 적었다. 탄광 사택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칸칸이 이어진 공동주택으로, 소리가 옆집에 다 들렸
다. 좌담회를 열면 그것도 이용당해, 결근사유에 '학회 좌담회가 시끄러워
잠을 설쳤다'고 적었다. 학회원은 사실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좌담회를
열었다. 회사 측은 학회원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좌담회는 회사에 허락을
받고 열도록' 압력도 가했다. '좌담회를 열 거면 사택에서 나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야외에서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학회에 부당한 압력을 가하던 회사 측은, 제2의 노조를
결성한다는 소문을 듣자 '학회가 주도하고 있다. 회사를 공격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증오심을 드러냈다.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억측이었다.
회사 측은 학회에 저지른 행동이 켕기기도 해서, 불안함은 더욱 커졌다.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꼴이었다.
학회가 제2의 노조를 만들려고 한다고 오해한 회사 측은, 학회 세력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회원의 집을 찾아가 압력을 가하고, 어본존을 빼앗
으며 다녔다. '탄광섬'의 남자부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일어섰다. 남자부
반장인 다야마 히로스케를 비롯해 대표 서너명이 회사의 노무담당자에게 면회
를 요청해 항의했다. "신교의 자유는 분명히 보장된 국민의 권리이지 않습니
까! 아무리 회사라고 해도 신앙의 대상인 어본존을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이것은 '신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입니다. 탄압입니다. 빼앗은 어본존을
당장 돌려주십시오!" 다야마의 말에 노무담당 책임자는 거만하게 이렇게
말했다. "어본존이라는 게 불단에 걸어 놓은 족자를 말하는 거로군. 우리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동의를 얻어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신교의 자유'라고
하는데, 학회가 싫어진 사람이 학회를 그만두는 것도 '신교의 자유'가 아니냐"
"그럼 묻겠습니다만, 대체 왜 회사가 개인의 신앙에 간섭하는 것입니까.
지금은 채용할 때도 창가학회원이면 고용하지 않잖습니까! 이것은 종교 차별
입니다. 우리는 기본적 인권을 지키기 위해 단호히 싸울 것입니다."
"회사가 간섭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학회원이 회사에 폐를 끼치거나 불이익을
가져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어디에 그런 증거가 있습니까.
학회에서, 일에 관해 어떻게 지도하는지 아십니까!" 다야마는 학회에서는
'신심은 한 사람 몫, 일은 세 사람 몫을'이라고 지도하며, 야마모토 회장도
늘 '직장에서 일인자가 되어라'고 강조한다고 열심히 말했다. 청년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회사 측의 부당한 대응은, 학회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항의는 자연스럽게 절복으로 이어졌다.
다야마는 탄광회사의 노무담당자들 앞에서 '학회는 어떤 종교인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등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노무담당자들의 태도와 표정이 차츰
바뀌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노무담당 책임자
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묻겠는데, 학회는 제2의 노조를 만들어 회사에 대항
할 생각인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 회사가 법률을 무시하거나
인권을 위협한다면 철저히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다야마는, 회사 측이
어본존을 몰수한 건을 따졌다. 그 수는 15세대로 회원의 이름도 확인했다.
또 어본존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회사가 개인이 수지
하는 어본존을 가져갈 권리는 없다. 학회원에게 어본존을 다시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회사 측은 이번 면담으로 학회원은 제2의 노조를 결성할 의사가
없다는 점, 학회의 지도는 사회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탄광 사택에서 학회 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어, 홍교도 한층 더 활발히
추진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외쳤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일어서야 한다." 정의와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함부로 날뛰는 악을 용인하는 것은, 늘 침묵이었
다. 1972년, 탄광이 폐쇄되자 많은 사람이 일을 찾아 섬을 떠났다. 그래도
학회원은 50세대 정도가 섬에 남았다. 보리새우 양식이나 관광 등이 섬의
주요 산업으로 점차 발전하는데, 학회원이 이 섬의 부흥에 큰 힘을 발휘했다.
여기서 소개한 규슈의 두개 섬은 본토와 가까워,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 아니
다. 그런데도 학회원을 사정없이 박해했다. 그러나 동지는 끈질기게 견디며,
광선유포를 위한 개척의 괭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철길을 따라 215킬로를 달리면, 홋카이도 북부 서해안에
있는 하보로가 나온다. 일찍이 탄광 도시로 번성한 곳이다.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약 30킬로 바닷길을 가면 섬이 있는데, 해안선 길이가 약 12킬로인
이 섬이 '오로론섬'으로 잘 알려진 데우리섬이다. 오로론은 바다오리를 말한다.
섬으로 가는 배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하루에 한차례만 왕복 운항한다.
해마다 3월이면 바다오리를 비롯한 바닷새 수십종이 번식을 위해 데우리섬을
찾는다. 번식기인 4월부터 8월까지는 엄청난 수의 바닷새가 기암절벽을 뒤덮
는다. 끝없이 펼쳐진 군청색바다, 바위에 부딪쳐 춤추는 흰 물보라, 하늘을
뒤덮을 듯 날갯짓하는 새들……. 그 경관은 웅대하고 아름답다. 대자연이
그린 한폭의 그림이다. 배에서 내려 언덕 위를 올려다 보면, 흰색 2층 건물이
우뚝 서 있다. 학회원인 사다 다이치가 경영하는 호텔이다. 객실 수가 30여
개로 데우리섬에서 가장 큰 숙박시설이다. 섬 주민은 약 260세대 800여 명
(1978년 현재)이다. 당시 섬에는 학회의 대블록(훗날 지구)이 구축되어
예순아홉 살인 사다가 대블록장이었다. 사다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사다의 할아버지는 지금의 아오모리현 출신으로, 메이지(1868~1912년) 초기
에 데우리섬으로 이주해 개척을 시작한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가 어업으로 성공하자, 할아버지를 따라 아오모리와 아키타에서 잇따라 사람
들이 모여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다의 집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선주로
섬의 실력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청어 잡이가 호황을 누릴 무렵에는, 어업
근거지 중 한 곳으로 번성해 인구가 2000명 가까이 불어날 때도 있었다.
바다는 풍어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모질고 가혹하다. 거친 바다는 엄니를
드러내고, 때로는 목숨도 삼켜버린다. 풍어일지, 목숨을 잃을지, 내일 일은
알 수 없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자연을 상대로 살면, 인간의
무력함을 느낄 기회가 많다. 그런 만큼 신앙심이 강한 사람도 많았다.
선주인 사다의 아버지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용신당을 세우거나 지장
보살을 건립했다. 또 어부들에게도, 어떤 것이든 좋으니 신앙을 가지도록
권했다. 그것이 최고의 선행이라고 믿었다. 사다도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랐다. '불교청년단'을 조직해, 초대 단장이 되었다. 섬의 청년
들을 불러내어 좌선이나 탁발 수행에도 힘썼다. 그런데 사다 집안은 차츰
기울기 시작해 1919년에 도산하고 만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사다는
재기할 생각으로, 어선을 이끌고 지시마섬 최북단이나 캄차카 앞바다까지 고기
를 잡으러 나갔다. 만주(현재 중국 동북지방)의 헤이룽강(黑龍江)에서 민물
고기 어업에도 종사했다. 그러나 시대의 격류에 휩쓸리기만 할 뿐, 사다 집안
에 역전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193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도산했다고는 하지만 토지 9만 9173제곱미터(3만평)를 남겨주었다.
사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어업을 이어갔지만, 생각만큼 잡히지
않고 해난 사고까지 겹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토지 중 6만 6115제곱미터(2만평)를 팔아 빚을 갚는데 충당
했지만, 그리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다. 남은 토지는 살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채권자들이 날마다 들이닥쳐 빚 독촉을 해댔다. 갚을 길이 전혀 없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망연자실했다. 야반도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했다. 홋카이도 루모이시로 가서, 남의 눈을 피해 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10년 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지인을 우연히 만났다. 사다가 섬을 도망쳐 나온
일을 고백하자, 종교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다 씨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기잡이는 잘 되지 않고, 사고까지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숙명이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숙명을 전환할 수 있는 종교가 있습니다."
숙명에 이기느냐 지느냐, 인간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열쇠는 결국 거기에 달렸다.
사다는 줄곧 의문스러웠다. '청년시절부터 남들보다 배로 신앙심이 강해,
여러 신앙활동을 했다. 나만큼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불운이 잇따르는 바람에 겨우 연명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대체 왜!' 사다는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신이나 부처 따위 없다!'고
생각했다. 지인은 사다의 괴로운 심정을 헤아리듯 격려하며, 종교의 가르침
에는 고저천심이 있다고 말했다. "인생은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령 지난해 달력을 옳다고 믿고 생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일이
차질을 빚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데우리섬에서 이웃 섬인
야기시리섬 지도를 보고 걷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대로 목적지에
가지 못하겠지요. 종교는, 행복해지는 근본적인 길을 알려주는 지도와 같습
니다. 올바른 종교를 믿고 나아간다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니치렌대성인불법(日蓮大聖人佛法)이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단체가 창가학
회입니다. 사다 씨는 지금까지, 다른 섬의 지도를 보며 걸어온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미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애써 노력하고 노력해도 이상한
결과가 되고 말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창가학회의 신심은 확실합니다. 그러한 숙명을 전환할 수 있는 신심
입니다. 사실, 저도 그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사다 씨, 인생은 이제부터
입니다. 힘내서 반드시 승리합시다." 사다는 이때 마흔여섯 살이었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희망이 솟았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인을 믿고 학회의 신심에 한번 걸어보자고 결심했다.
불법대화는, 희망을 이끌어내고 용기를 이끌어내는 생명의 촉발 작업이다.
1955년 5월, 사다는 창가학회에 정식으로 입회했다.
2p입니다
이케다 SGI 회장과 함께 신시대를 달린다 [26]
이체동심(異體同心)의 기원에서 출발
학회 창립 85주년의 가을을 향해, 광포와 인생의 위대한 비약을 위한
출발이 드디어 다가왔습니다. 유명한 성훈에 "싸움에는 대장군(大將軍)
을 혼(魂)으로 하며, 대장군이 겁먹으면 병졸(兵卒)은 겁쟁이가 되느니라"
(어서 1219쪽)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리더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결의로
일어서야 합니다. 모두 힘을 모아 지금 황금의 역사를 장식하자,
자신이 사랑하는 천지에서 영원히 빛나는 인재성을 위풍당당하게 구축해야
합니다. 법화경 방편품에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맹은 신심입니다. 정진행은 자행화타의 제목입니다. 법을 위해, 사람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원하고, 용감하게 계속 투쟁하는 사람에게 무량한
지혜와 자비가 솟아납니다. 창가학회는 언제나 '용맹정진'을 관철했습니다.
괴로워하는 벗의 편에 서서, 용기 있는 신심으로 승리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체(異體)를 동심(同心)으로 하는 '신심의 단결'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모든 승리의 원천이 있습니다.
장대한 광선유포의 활동도 그 실천의 근본은 무엇인가.
바로 '좌담회' '교학 연찬' '일대일의 개인지도'입니다.
이것이 마키구치(牧口) 선생님과 도다(戶田) 선생님 이래의 학회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가지 기둥을 축으로 힘차게 끈기 있게 실천하면
이윽고 시대를 움직이고, 인도주의와 정의의 연대를 넓혀 평화로운 세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구든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과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고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무지 회합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므로 가정방문과
격려가 중요합니다. 격려가 바로 빛입니다. 깊은 기원에서 나오는 말은,
반드시 상대방의 마음에 전해집니다. 벗을 자각시킵니다.
열심히 신심에 힘쓰는 동지가 바로 보살이고 부처입니다.
자신이 바뀌면 지역도 바뀌고, 세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인간혁명의 드라마를, 우리 함께 상쾌하게 쓰지 않겠습니까!
첫댓글 이케다 선생님은 "이 신심은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정하는 편이 좋습니다."라며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그 한 마디에 '그래, 어차피 할 거라면 철저하게
도전하자'라고 결심했습니다.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뜻있는 인재를 모았다. 민중의 힘을 모았다.
도다 2대회장은 말한다. "백성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멋지게 막부의 군대를 물리쳤다.
학회도 같은 방정식으로 풀어야 한다."
광선유포란 관념의 유희가 아니다. 작열한 현실의 싸움이다.
('한계의 벽을 부숴라!' 202P)
가장 노고하는 사람을 위해 학회는 존재한다.
광선유포란, 가장 노고하는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파견 멤버 중에 남편을 여의고 3명의 자녀를 둔 부인부가 있었다.
이케다 회장은 "아무리 천한 자라도 조금 나보다 뛰어나서 지혜 있는 사람에게는 이 경(經)의 내력을
물으시라." (어서 1382쪽)는 어서를 인용하시며,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강성한 신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보다 지혜로운, 승리의 사람입니다."라고 격려했고, 그 부인부는 용감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10일 만에 18세대의 홍교를 달성했다.
('한계의 벽을 부숴라!' 2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