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rhae 님의 의견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번 주제에 관한 것은 예전에 디코에서도 논의가 됐었는데 그 때에도 이와 같은 식으로 결론이 났었었죠. 하지만 저는 동양의 무력사용에 관해서는 오히려 좀 오래된 서양중국사학자들의 견해가 좀 더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그에 따라 반론을 전개하려 합니다.
carrhae 님은 중무장기병의 사용, 혹은 그 비중에 관해서 아님 플레이트 같은 무기가 나올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동양에는 동양권 나름의 군사적 상황이 있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계시고 예전의 디코에서도 그렇게 논지를 전개했었죠.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동아시아는 대체로 전쟁이 적었고(유럽에 비해),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인 군사적 진보(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닌 병참, 편제에 관한 전통까지) 또한 길게 이어지는 평화기에 잊혀지기 일수였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하면 전쟁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는 거라 다름없어 마치 동아시아에는 동아시아 나름대로 수백년 동안 다져진 전술이 있가 말하는 것 자체가 거북하단 말입니다. 적어도 중국에서는요. ]
->예 님 말도 맞습니다. 전쟁의 빈번도와, 대립세력간의 성격차이에 대해서는 저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하여 '동양의 전쟁은 전장이 북부에만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제 투석기 관련글에서)'서양의 전쟁은 비슷한 수준의 영주들 사이에서 소규모로 자주 전개되었기 때문에 경쟁적 요소가 더 강했지만 동양의 경우 유목민과 정착민사이의 성격이 워낙 달라 서로 상성관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도 서로를 견제하는 게 가능했고 이때문에 기술개발의 압력이 덜했다(예컨대 유목민은 공성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성만 대충 지어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고, 유목민들은 말만 타고 돌아다녀도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떨어지는 정챡민들을 따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의 방식을 바꿀 필요성을 덜 느꼈다. 한마디로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역시 투석기 관련글에서)'동양에서는 전쟁과 전쟁사이의 휴지기가 길었기 때문에 군사기술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식의 얘기를 했습니다. 제 투식기 관련글은 이 스레드의 본글과 연결되는 내용이라서 제 생각을 더 잘 이해하시려면 그글까지 함께 보시는게 좋습니다. 잘쓴 글이라곤 여기지 않지만..
[즉, carrhae 님께서 말하신 많은 영역을 커버하기 위한 기동전이라든가 백병전을 굳이 하지않아도 되는 동양적 상황이라는 것조차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
-> 너무 극단적이군요. 전쟁이 적긴 해도 없는 건 아니고, 단절이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는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전쟁이 발생할 때 일단 만들어지는 틀(패러다임)은 다음전쟁까지 계속 지속된다는 거지요. 이전의 전쟁에서 활이 큰 활약을 했다면, 전쟁이 없는 동안에도 이유는 까먹었어도 어쨌든 계속 활로 무장을 하게 되는 법이고, 이전의 전쟁으로 전제주의가 강화되었다면 이것은 계속 이후의 역사에 연쇄반응같은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해 전쟁이 아예 없어도 동양적 상황이란 건 존재하는 겁니다. 전쟁이 터지면 동원할 수 있는 수단 자체가 다르니까요.
[동양사에서 유목민들이 비중을 빼어 놓을 수 없지만 유목민들에 대한 기술또한 매우 편향적입니다. 유목민들이 자주 내려오니까 그 것을 요격하기 위한 빠르고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전술이라는 부분은 자칫 실제 고증 없는 가설이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제가 얘기했던 건 그것과는 좀 다른 겁니다. 빠르고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전술의 탄생 배경(그리고 덧붙이자면 상대적으로 접근전에 중점을 두지 않았던 배경)은 유목민들의 유동적 속성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전쟁동원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로 이뤄져 작전지역이 넓고 보급선이 길었기 때문이었다는 요지였습니다.
[최근의 많이 연구된 유목민역사에서 유목민과 정주민, 특히 중국인들과의 항쟁과정을 보면 그 관계는 몇몇 전환기를 빼면 대체로 한 쪽이 일방적입니다. 유목민들이 정주민을 압박하거나 정주민들의 확장에 유목민들이 물러나는 것인데, 정주민들이 유목민들을 밀어낼 때에는 물론 국가 단위의 개입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광대한 프런티어를 두고 소무력집단이 생기기 일수였고 이들의 이해관계에 또한 무력을 가진 유목민들이 각부족의 이해에 따라 연루되기 쉽상이어서 본이 아니게 유목민들끼리 싸우게 되고 이로인해 정주민들의 확장을 더욱 초래하게 되었죠. 즉 유목민들이 자주내려오긴 했지만 그 것은 역사 전반에서이고 유목민들에 대한 대책을, 즉 국지적인 대응을 상시적으로 염두에 둔 나라는 기껏해야 송일겁니다.
결국 지나대륙사에서 군사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몇몇 개변기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중원변방사람들의 것이었고 황제는 아랍의 영주들이 그 주변 유랑민족에게 했듯 그러한 상황에 적절히 개입하기만해도 중원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 중국사이죠. 다만 그 규모에 있어 아랍과 중원은 커다란 차이가 나서 중원의 경제력은 꽤 오랜 평화를 보장할 수 있었던 것이죠.
대체로 개변기에 갖춰진 왕조의 무력은 이미 이렇게 되서 돌아가기 시작한 메카니즘에서 가면 갈 수록 많은 중화의 주변민족과 관계하는 황실에 재정적으로 짐이되고 왕조가 흐를수록 외부로부터 중화를 방위하는 최선의 길은 군사력이 아닌 주변민족과의 통상을 통한 경제적 방법이 됩니다.]
-> 유목민에 대한 일상적 견제는 님이 말씀하신 바처럼 외교적 수단과, 성벽만 건설하고 눌러앉는 식의 방어적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유목민들에 대한 대책을, 즉 국지적인 대응을 상시적으로 염두에 둔 나라는 기껏해야 송일겁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유목민들의 군사적 위협은, 대개의 경우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하지 못한경우가 많아서 잠재적인 수준에 그칠 때가 많았다 하더라도, 상당히 큰 것으로 중국 역대 정부들의 주요 골치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유목민의 인구가 중국의 1~2%에 불과했다고 해서 그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은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 놓여 있어서 소요를 일으킬만한 동기가 훨씬 강했던 데다가, 인구 대부분이 중국기준에서 보면 가공할 전술능력을 갖추고 엄청나게 잘 훈련된 정예군인들이었고, 워낙 광대한 지역에서 유동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물리적 정복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서양에서도 한줌에 불과했던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이 유럽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사회적 대격변을 몰고 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자주 반복됐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때문에 중국 역대 정부들은 이들에 대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늘 국가적 차원에서의 군사적 대응에 상당한 신경을 썼습니다. 아무리 외교수단에 의지한다 해도 그것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방법인 이상, 이렇게 커다란 위협에 대해 군사적 능력을 소홀히 하는 도박을 할 수는 없는 거죠. 개별적으로 봐서는 유목민의 전투원비율과 전투능력이 정착민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중국쪽에서는 변방 몇몇 성단위로 대응을 한다는건 무리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중원변방사람들만의 것이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전쟁이 주로 중원변방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중원변방사람들만 전쟁에 동원됐다고 볼수는 없단 얘기죠.
그리고 중원변방 민족들('오랑캐'들) 사이의 전쟁이 중국인이 직접 참여한 전쟁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중국에서의 군사적 수요 감소에 미친 영향은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적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중원변방민족사이의 전쟁이 많았다는 건 그들의 호전성을 증가시켜 위협을 더욱 키운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지금 당장은 서로 치고박는 유목민들이라도 그들 모두의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중국 그 자체였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언제든 외교상황이 돌변하면 그 불똥은 곧장 중국에 튀게 된다는 거죠. '적절히 개입하기만해도 중원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과, '그 개입이 실패할 경우(무시못할 정도로 가능성이 있음) 예상되는 엄청난 재난에 대비하는 것'과는 별개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중국의 이이제이책은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려는 정책이었지 응당 해야할 걸 안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하면 전쟁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는 거라 다름없어 마치 동아시아에는 동아시아 나름대로 수백년 동안 다져진 전술이 있가 말하는 것 자체가 거북하단 말입니다. 적어도 중국에서는요. ]
-> 전쟁이 적다고 해도, 잠재적인 전쟁의 위협이 지속적이라면, 군사기술에 대한 관심도 전쟁시만큼 격렬하진 않지만 꾸준히 이어집니다. 2차대전후 사상 유례없이 긴 평화가 계속된 지난 60년동안 얼마나 많은 군사기술의 혁신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군사기술의 혁신은 극단적으로 군사적 긴장이 격렬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회의 전반적인 기술혁신수준과 보조를 맞춰 이뤄지는 것이지 그 자체적으로 이뤄지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물론 자체적 발전이 없다는건 아닙니다. 군사목적에서 탄생한 기술이 사회 다른분야에까지 파급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전반적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비군사적인 게 군사적인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비군사적 부문에서 이뤄져 군사부문으로 흘러들어가는 기술이 군사부문에서만 독자적으로 이뤄지는 기술보다 훨씬 많다는 거죠. 이때문에 사회전반적인 기술혁신이 역사상 가장 활발했던 지난 60년간, 전쟁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혁신 역시 가장 활발했던 겁니다.
동양의 경우, 전쟁회수는 적었지만 전쟁 규모가 더 컸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동양전쟁의 파괴력이 훨씬 더 끔찍했다는 거죠. 전쟁규모가 커지면 전쟁기간도 길어지고 전비와 사상자도 그에 비례해서 커지지만 피해자는 전장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노동력이 감소하고 전비부담이 높아져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기아자가 속출하는가 하면, 영양상태가 나빠져 전염병도 창궐하게 됩니다. 치수사업 등 사회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부족해져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도로나 교량보수가 안되어 교통/통신능력도 떨어져 국가 전반의 위기대응능력이 감소합니다. 상업활동도 위축되죠. 그리고 전반적인 국력의 약화는 다른 이민족 침입이나 농민반란 등 다시 새로운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동양에서 전쟁때문에 죽은 인원은 비전투사망을 포함하여 서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때문에 동양인들은 서양보다 훨씬 강한 정도로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서양의 기록들을 보면, 영주들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일반 농민들은 전쟁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를정도로 태평했던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그냥 '어 군대가 지나가니 뭔일이 있는건가'하는 정도의 반응이었다고나 할까?) 따라서 군사기술을 다질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동양이라고 해서 결코 적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다만, 상대방인 유목민들의 전투스타일 등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전술을 개발하다 보니 서양에서는 발달한 기술이 동양에선 잘 발달 안한 경우도 생겼죠.(그 역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동양에서 전쟁과 전쟁사이의 시차가 컸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평화에 길들여져 있으면 아무리 전쟁이 끔찍해도 잊게 마련이고, 군사력 증강에 안이해지게 되며 많은 전쟁기술 또한 잊혀질 소지가 큽니다. 실제로도 동양역사에서 이런 단절이 많이 발생했죠. 또한 실제 전쟁에서 전술을 검증할 수 있는 회수도 훨씬 적지요.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가 없으니 당장의 효용은 적지만 잠재력은 있는 기술들이 많이 사장되기도 하겠죠. 전술혁신에 대한 자극원도 적고요. 문제는 이런 평화시의 단절이 동양사회의 종합적 군사기술 발달에 장기적으로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인데, 제 결론은 꽤 영향은 있었겠지만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동아시아에는 동아시아 나름대로 수백년 동안 다져진 전술이 있다 말하는 것 자체가 거북하다'는 정도는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드리자면
1. 전쟁기술은 사회전반의 기술발달에 따라 발전하므로 군사적 수요만 있다면 평화시라고 해서 꼭 정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물론 상대적으로는 발전속도가 늦춰지긴하지만 멈추는건 아니다),
2. 사회적 기술이 일단 축적되어 있으면 새로 전쟁이 발발해 문제점이 드러나도 비교적 빨리(1~2세대 이내에)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 (기본기술수준이 평균수준이라면 비록 군사기술에서는 100년어치 뒤처져 있다 하더라도, 일단 전쟁을 한바탕 겪고 나면 순식간에 그 100년어치를 따라잡을 수 있다. 즉 동양의 뜸한 전쟁은 군사기술은 사회일반기술에 대체로 연동된다는 원칙때문에 전술발전이 벼락치기식으로 진행되게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전술발전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다.)
3. 동양(중국)에서 대규모 전쟁들 사이의 기간을 대략 50년가량으로 잡았을 때(이렇게 잡은 근거는 a. 왕조의 평균수명을 200년정도라 보고 b. 이 200년중 초반과 후반 약 50년씩은 대개 각종 전쟁에 시달리며 c. 왕조초반 안정을 막 이룩하고 국력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는 대개 수십년간 몇차례의 대규모 원정이 있었다는 점) 이기간은 꽤 길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망각될 정도의 기간은 아니라는 점, 특히 전쟁이 사회의 거의 모든 성원들에게 남긴 파괴적인 상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는 점.
4. 전쟁기에 일단 형성된 패러다임은 평화기에도 지속된다는 점(즉 발전이 없고 어느정도 퇴행은 있어도 전반적인 망각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
5. 무엇보다도 동양에서의 대규모 전쟁이 님이 생각하시는것 만큼 뜸한 게 아니었다는 점(적어도 명대 이전에는. 명, 청대에는 확실히 전쟁과 전쟁 사이의 휴지기가 매우 길었는데 이때는 실제로 군사기술의 발달도 눈에 띄게 정체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3번이유에서 봤듯이 200년중 150년가량을 전쟁상태에 있었다면 결코 전쟁이 뜸했다고 볼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엔 동양에서 있었던 몇차례의 군사기술적 단절은 전쟁사이의 휴지기가 길었다기보다는 사회적 상황의 급변으로 인한 전쟁패러다임 변화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더 그럴듯한것 같습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당대의 등자발명 이후, 송대의 강남천도 이후 등에 대표적인 케이스겠죠.)
또 님께서는 동양의 적은 전쟁횟수(대규모 전쟁을 따져도 사실 그리 적은게 아닙니다.)때문에 동양에는 전쟁기술 개발을 위한 충분한 경험도 부족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 견해는 좀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 적합한 대응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상황을 더 많이 겪을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소금을 민물에 넣으면 반드시 녹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기 위해선 소금을 물에 넣는 실험을 100번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1000번을 하나 10000번을 하나 지식의 확실성에 있어서는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이지 거의 똑같습니다. 더 구체적인 예로, 어떤 제품의 불량을 줄이기 위해 품질검사를 하는데 한번 할때마다 불량률이 50%씩 줄어든다고 합시다. 최초합격률이 84%였던 제품은 검사 한번하면 92%가 되고 두번하면 96%가 되고 세번하면 98%가 됩니다. 이렇게 검사한번 할때마다 떨어지는 불량률은 계속 체감하여 나중에는 10번을 하나 10000번을 하나 그 차이는 1%도 한참 안되는 아주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됩니다. 이처럼 경험적 지식의 단순축적이 지식의 정확성에 가하는 효과는 지속적으로 체감하기 때문에, 일단 어느수준 이상에 오르면 다 거기서 거깁니다. 제가 볼때, 아무리 전쟁빈도가 차이가 있었어도 수백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는 기본적으로 알건 다 알게 되었을 것이므로 동양이나 서양이나 각자의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란 점에서는 큰 차이(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생각만큼 큰건 아닐거란 의미입니다.)가 없었을 거라 보는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제가 근대과학혁명 이전 주요 문명권의 전반적인 기술차이는 대체로 다 거기서 거기였다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근대이전 세계의 과학수준은 대개 분석적 수준이 아니라 피상적이고 임기응변적인 귀납적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물론 수학사를 좀 봐서 이게 지나친 단순화라는 건 알지만 그냥 제 요점만 쉽게 표현하느라 그러는 것이니 이해바랍니다.) 발전에 한계가 있었고,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각 문명들은 이 한계지점에 거의 도달해 버렸기 때문에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동서양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들이라 칭송되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로 대단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수에 의한 오랜 시행착오와 약간의 직관만 덧붙여지면 '알만한 것은 다 아는' 집단이라면 누구나 이룩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이죠. 기술수준이 포화상태에 금방 도달하는 귀납적 지식체계 하에서는 각 문명별로 기술적 편차를 가져온 건 기술적 능력 자체라기보단 상이한 환경으로 인한 상이한 경험, 상이한 자원, 그리고 상이한 수요였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동양에서 실제로 벌어진 전쟁의 회수가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더라도, 전쟁의 규모가 크고 장기적으로 계속되던 만큼 동양의 전쟁이 제공해준 군사적 노하우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게 가져다주는 실질적인 차이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수준으로까지 감소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밖에 군사기술 연구가 중세서양보다 더 집약적이고 대규모로 진행되었다는 점도 동양쪽에선 유리한 부분이었을수도 있죠.
사실 유목민의 소규모 약탈전까지 포함한다면 동양에서의 전쟁빈도도 그리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동양에서는 전쟁의 규모가 컸다는 점이 서양과의 차이점이었다 게 잘 성립하지 않는 것 아니냐(회수로 치면 동양 전쟁의 대부분은 이런류의 소규모 싸움인데)'고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은 소규모 약탈전은 동양 지배층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동양군대의 발전방향에 별로 중요한 영향을 못끼쳤다는 점입니다. 즉, 거대한 전제국가였던 중국에서는 중국과 유목민의 전면적인 대결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거죠. 후방에서 두다리 쭉 뻗고 편히 안주하고 있던 제국의 지배층들로서는 유목민의 소규모 약탈전은 그냥 모기가 무는 것쯤으로 가볍게 무시할 수 있지만, 유목민과의 전면전 가능성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에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 더 중점을 둘수밖에 없었겠죠. 물론 꼭 그런 이기적 이유때문이 아니더라도, 전면전은 소규모 약탈전에서의 피해를 모두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파괴적이었으므로 전면전에 더 신경을 쓴 것도 사실일 겁니다.
소규모 약탈전이 중국의 군사문화에 끼친 의의도, 전술적 부분에선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 영주들간의 소규모 전투가 서양군대에 끼친 영향과는 사뭇 달랐죠. 제가 전에도 썼듯이 소규모 약탈전을 하는 유목민의 군대는 목표가 적의 군대가 아니었다는 점, 따라서 수비측의 대응에서도 방호구에는 중점이 두어지지는 않았다는 점, 약탈부대는 접근전(또는 싸움 자체)을 기피하고 주로 치고빠지기가 주전술인 게릴라부대였다는 점 등 소규모였다는 점을 제외하곤 유럽의 싸움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소규모 약탈전은 유목민과의 전면전에 대비하던 중국의 지배층에게 유목민의 전술적 실력이 어떠한지에 대한 참고사항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었고, 중국군의 전술은 이에 맞춰 계속 조율되었습니다. 동양의 대 유목민 전술이 수백년간 전쟁한번 안해본 샌님들의 탁상공론의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