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방스의 도시들 중에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가 특히나 마음에 든다. 로마인들이 프로방스에서 가장 먼저 건설했다는 이 엑스에는 도시라는 명칭이 웬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어느 시골 마을이나 동네라고 부르는 게 한층 더 그럴 듯 해 보일 만큼 이곳에 가면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모든 게 나른하고 한갓져서 웬지 바쁘게 움직이기가 계면쩍어진다. 피에르 쌍소의 "느림의 미학"을 여기만큼 음미하기 좋은 데가 또 있을까.
그러나, 사시사철 분수가 물을 내뿜고 세계적인 ‘서정예술’ 축제가 열리는 이 ‘촌락’에 갈 때마다 역설적으로 나는 화가 세잔느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곳 출신의 한 위대한 작가를, 자기 시대의 불의(不義)를 목청높여 규탄했던 한 지식인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명문(名文) <나는 고발한다!>를 떠올린다.
"...하지만, 대통령 각하, 이 편지가 너무 길어졌으니 이제는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저는 사법적 오류를 저지른 장본인인 파티 드 끌랑 중령을 고발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부정행위를 함께 저지른 죄로... 메르시에 장군을 고발합니다.
저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은폐해버린 죄로 비요 장군을 고발합니다.
제가 고발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저는 그들을 알지도 못하며,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원한도, 증오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그들은 사회적 악행(惡行)의 실체, 풍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지금 하는 행동은 진실과 정의를 폭발시키기 위한 혁명적 수단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1894년, 유태인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군법재판에서 강등과 함께 악마의 섬으로 유배시키라는 형을 선고받는다. 2년 뒤, 이 판결은 위조된 서류를 증거로 채택한 결과였으며, 사실은 빚에 쪼들리던 에스테르아지 소령이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에스테르아지는 무죄로 풀려난다. 그러나, 영원히 묻혀버릴 뻔 했던 이 사건은 에밀 졸라가 로로르지에 이 글을 실어 이 재판이 편견과 오류에 가득 찬 것임을 밝히고 나섬으로써 역사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보수 카톨릭에 반유태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던 군 고위층은 이 재판의 재심을 방해한다. 결국 이 사건은 정치적인 쟁점으로 부상, 프랑스 전국을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양분시켜 놓으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뿌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국제 여론이 들고 일어났다. 또한,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와 장 조레스가 드레퓌스를 열렬히 옹호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1899년 렌느 군사재판으로 되돌려 보내졌으나, 드레퓌스는 다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가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된 것은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1906년의 일이었다.
"나는 내 조국이 거짓과 불의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 날 후려쳐도 좋다. 하지만 프랑스는 언젠가 내가 프랑스의 명예를 구원해준 것에 대해 감사할 것이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진실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에밀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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