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지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제16회)
한중항로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해운계의 신규투자 의향과 관심은 대단했고 북방항로를 개척한다는 자부심으로 자연히 황금알을 노리는 눈들이 번뜩이게 마련이었다.
흉년의 떡도 많이 나면 싸다고 했는데 너나없이 모두가 중국항로를 겨냥하다보니 경쟁만 심했고 어떤 방법으로 어느 회사를 골라야 할지 또 다시 연일 계속해서 장개석 군대처럼 나날이 회의를 거듭하며 추진의 중심에 선 이종순 전무와 박창홍상무의 발걸음은 나날이 바빠갔다.
수 차례의 방중 탐색전 끝에 90년 6월에 드디어 한중정기 컨테이너 항로를 개설하게 된다. 이어 90년에는 민간차원의 협의가 오랜 산고끝에 결실을 맺어 한중간 카페리선사로 위동항운유한공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양국이 합작투자해서 취항항로는 인천과 위해간으로 합의하며 한국측은 선사와 업체를 묶은 컨소시엄으로 출자하고 초대 사장으로는 이종순 전무이사를 내정했다.
첫취항 기념으로 해운계 인사들이 화객을 실은 Golden Bridge호와 함께 방문했을 때 인구 20만의 위해가 취항 20년을 맞은 올해에는 300만을 육박한다니 누가 뭐래도 민간차원에서 선주협회가 산모가 되어 탄생한 위동항운이 턴 뱃길이 양국 수교와 교역의 물꼬 역할을 했고 오늘의 한중간 교두보 구실을 다할때에 필자도 가까이서 지켜보고 동참했었다는 긍지는 스스로 찾아갖는 숨겨둔 자부심이기도 하다.
업무외적인 얘기지만 이종순전무는 조폭의 왕초(?)를 닮은듯 조직의 장악력이 대단했고 보스기질 또한 다분한데다가 부하 직원들을 휘하에 거느리며 업무를 추진하는 추장형(?) 면모도 있어 디테일 보다 통박을 잡고 추진하는 선 굵은 스타일 이면서도 한번 맺은 인연은 중시했다.
시쳇말로 군대 모임은 해병전우회, 고향 모임으론 호남향우회, 동창 모임으론 고대교우회가 우리나라 사조직 모임으로는 가장 결속력이 강하고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정이 많아 서로 돌보기나 끌어주기에 유별나다는 칭찬과 조소,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 상반된 평가가 함께 따라다녔고 해운계에선 그 중심에 이종순전무가 기수였고 골수분자로도 널리 알려진게 사실이며 실질적으로는 필자가 이를 뒷받침 했다.
87년 협회에 부임한 이전무는 필자와 한 솥밥을 먹으면서 해운계에도 지연 학연을 묶어 유익하게 지내는 동창 모임이 더러 있다는데 착안해서 정부측 관리와 수협, 해양연구소, KMI등 비영리 공익조직과 협회 회원선사를 중심으로 한 선박대리점등 해운업계에 종사하는 부장급 이상을 두루 엮어서 초대회장에 이종순 전무이사, 조직을 맡은 필자가 간사를 맡아 작명을 해서 이름하여 호양회(虎洋會)란 조직을 만들었다.
분명 학연을 이용한 블록화나 세력규합이 아닌 순수 같은 업종 동창모임 임에도 불구하고 자칭 타칭 업계 일각에선 "해운계 하나회" 결성이냐고 비아냥대며 입방아를 찧기도 했으나 콩밭에 소를 풀어도 할 말은 있다했거늘 필자가 조직책과 실무주역으로 십수년을 이끌어 왔다.
중도에 회비제도를 없애고 회장이 뭉칫돈을 내고 사장급들이 갹출한 기천만원으로 해마다 5~60여명이 모여 회원들끼리 격려하고 포식에 과음하는 정기모임을 비롯하여 몇차례 임원급 모임을 가지는 형태로 운영이 됐고 수고가 많다는 선후배들의 격려가 흐뭇한 보람이었다.
그 밖엔 경조사에 화환을 보내고 진급이나 영전된 회원들에게 축전이나 축난을 보내거나 가끔은 더러 뜻맞는 선후배끼리 어울려 술자리를 만들어 "마시고 죽자!" 란 이종순식(?) 구호아래 교가와 응원가 제창 및 "입씨랜드 체이호 카시코시 케시코" 교호를 외치고 헤어지는게 관례화 되어있고 불우하거나 질환으로 고생하는 회원들에게 위로금을 전하는 경우가 모임의 활동 범위였다.
결성 당시 동영해운 윤두영사장(47학번), 대한해운 유재홍부사장(48학번), 조양상선 박효원부사장(48학번), 범진상운 김유연사장(60학번), 세양상선 서영기부사장(60학번), 동방의 김한수사장(61학번)등 업계팀과 해항청의 나홍주 노정과장(53학번), 진영일 울산청장(54학번)이성곤 부산항만청장(55학번), 김영성 외항과장(59학번) 등이 관심을 보이며 운영에 참여했다.
그후 든든한 재정적 후원을 겸한 카리스마와 제왕적 권위로 호양회를 이끌며 회장직을 맡아 장기집권(?) 했던 고려대경영학과 56학번 위동항운의 이종순사장은 해항청 외항과장을 거쳐 한화그룹과 삼선에서 경영을 익힌후 해운계에 혜성과 같은 다크호스로 등장해 오늘을 일궈낸 대양상선 정유근사장에게 6년전에 회장 바통을 넘기고 수렴청정 상임고문으로 후퇴했다.
따라서 필자를 총간사로 격상시키고 JH해운 최익수 사장을 총무로 선출해서 PIL 장윤철사장, KCTC 박철환사장, 모락스 이도희사장, 모락스M/T 김기훈사장, 동서해운 서영택사장, SK해운 이정화사장, STX 이종철부회장, 대양상선 이동헌부사장, 차석홍 수협회장 등과 관직을 떠난 현 위동항운 김성수사장, 해운조합 정유섭이사장 등이 줄곧 열성으로 재정을 도우며 모임을 주도했고 간단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계에는 신상우 초대 해양수산부장관, 최낙정 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과 홍승용차관, 최장현 차관 및 박남춘 청와대 인사수석, 이인수 해심원장, 강정극 해양연구원장, 홍성걸 KMI 연구위원, 정상호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등의 전현직들이 회원으로 있고 기타 현직 국과장급으로 30여명이 정부의 해양 및 해사관계 정책입안과 시행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봄에 깐 병아리 가을 타작 마당에서나 헤아려 본다듯 필자가 호양회 조직을 30년 가까이 맡아 왔어도 정확한 회원수를 알수는 없으나 범 해운물류업계 부장급 이상과 공직쪽 5급이상 퇴직자 까지를 합하면 약 200명 정도는 족히 되리란 생각이다.
필자는 이런 조직의 적극적인 참여와 운영과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서 얻은 정보나 지식을 해운현업과 접목시켜 앤티에이징의 발판으로 삼아단호히 낙후를 거부하는 포지션에 자리매김 하고 싶고 노후약화된 미력으로나마 아직도 현역으로 뛸수있는 자기계발의 도약대로 삼고있다.
한편 마릴린 먼로의 영화 7년만의 외출이라도 패러다이 하듯 우리 해운도 진념 해항청장이 부임한 88년도, 참으로 오랫간만 7년만에 모처럼 흑자경영을 보인 이후 89년에도 상당한 변화를 보이게 됐다.
해운시장 문호개방 물결의 외압에 밀려 미국선사들의 국내지사 설치를 허용하고 한중항로 개설에 덩달아 북방해운협력이 본격화되고 한소 해운회담에 이어 직항로 개설에 합의, 현대상선과 천경해운 및 부산상선이 그간 적대국이었던 북방지역에 배를 띄우게 된다.
이듬해 90년 1월엔 안공혁 제8대 해운항만청장이 취임했다. 협회는 4월에 한일컨테이너 수송협정이 발효에 따라 별도 기구로 한국근해선사협의회와 한일항로 중립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오랫동안 미뤄오던 해상안전연구실을 설치하고 운영을 개시했다.
또 포철장학회 이름으로 대주해운을 만들어 인더스트리얼 캐리어는 절대불가란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전문 해운업계를 발칵 뒤집었던 사건도 거양해운이란 보호색으로 갈아입고 선주협회에 가입하여 적과의 동침이란 어휘를 무색케 하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면 님이 되는 유행가사를 실감케 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밖에 선원복지협회 설립, 항만기술원 훈련원을 준공했고 정부측도 한국해사위험물 검사소를 설립하고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발족과 동부산 컨테이너 설립을 결정했으며 체코슬라바키아와 수교, 대북항로 개설의 근간이 되는 "남북및 북방교류 협력위원회" 를 구성했고 연말을 기해 안상영 제9대 해운항만청장이 취임했다..
정계는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됐고 윤보선 전직대통영이 서거했으며 남북총리회담의 서울 개최, 지방자치제가 부활했다.
90년 8월 국세청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국제해운을 거쳐 협회의 총무부장으로 자리를 옮겨와 필자와 함께 부장을 하다가 한발 먼저 상무직에 올랐던 박창홍상무이사가 위동항운 사장으로 영전해 간 이종순전무 후임으로 드디어 정부투하 낙하산 점령의 전례를 저지하고 오랫만에 민선 전무이사로 선임되는 영광을 안았다.
정부 부처중에 산하 단체가 제일 많아 퇴임 공무원들이 크건 작건 간에 한자리씩을 차지하는데 물 좋기로 이름난 곳이 해운항만청이란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던터라 외침(?)을 받지않고 제자리 점프에 성공한건 박전무가 드물게 첫 케이스를 기록한 것이었다.
한편 임원선출을 위한 임시총회 며칠전부터 양분된 협회업무의 한쪽 날개 업무, 조사, 국제를 묶어 업무담당 이사로 일하던 필자와 함께 다른 한쪽을 맡았던 한국해대 출신의 해무담당 K이사가 먼저 와 있던 필자를 제치고 박상무 뒤를 이어 상무이사로 승진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재수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고 했고 십리가 모래밭이라도 눈 찌르는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성격상 예각을 세우는 경쟁이나 앞서가기를 싫어하고 직장에서도 진급이나 인사문제에는 초연하다고 자처하는 필자였지만 잘 있는 사람을억지로 오라고 했던 사람들은 가버렸고 그나마 예측 가능한 인사가 아닌것 같아 기분이 그리 좋을리는 만무했지만 혼자 안으로만 새기던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상무이사 선임을 두고 준비된 전형위원들의 각본에 반기를 드는 뜻밖의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었다.20년이 넘은 당시의 정황을 지금까지도 상세히 알수도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대충 들은 바로는 전입이나 취금업무의 비중을 봐서 단연 필자가 선임인데 추월할 수는 없다는 반대의견으로 갑론을박 하다가 결국은 계획에 없었던 필자 몫의 상무이사 자리를 덤으로 하나 더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으는 바람에 그게 무슨 큰 벼슬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필자도 선주협회의 상무이사로 등록을 하게 됐던 것이다. < 계 속 >
*이상은 Weekly 해운전문지 "Korea Shipping Gazette" 연재 에세이 일부를 옮긴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