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학봉종택 (義城金氏鶴峰宗宅)
이정표를 따라 봉정사 가는 길에 있는 서후면 운계리의 학봉종택을 찾아 들었다. 대문 앞마당에 차를 세울 수 있고, 마당 왼 쪽에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 먼저 들어갔다. 기념관에는 학봉선생이 생전에 썼던 문집 편지글, 유서통, 각대, 가죽신 등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유서통은 1592년(선조 25년) 4월 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 된 학봉이 왕의 유서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다. 그 밖에 낡은 책상과 임진왜란 때 쓰던 칼도 있고, 학봉이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도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전통정원의 모습을 갖춘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마당엔 파릇한 잔디가 깔려 있었고 작은 소나무가 아름답다. 왼쪽으로 사랑채가 보이고 맞은편에 운장각(雲章閣이 있다. 정원마당으로 들어서니 16대 종손 김종길선생이 고택을 지키고 있었다. 김종길선생은 삼보 컴퓨터 CEO를 지내고 은퇴 후에 낙향하여 고택을 지키며 도선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을 겸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김종길선생이 운장각 잠을쇠를 열었다. 웬만해서는 열지 않는 유물관인데, 특별히 문을 열어 안을 볼 수 있게 하고 설명을 해 주시는 고마움에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학봉 선생의 친필원고와 선생의 안경과 벼루를 비롯하여 고서 56종 261점, 고문서 17종 242점이 있고, 보물이 두 점이나 있어 습도 조절기가 설치되어 있다.
밖으로 나오면 정원 후면, 운장각 왼 쪽 위로 문을 닫아 놓은 사당이 있다. 사당 외관을 찍고 있으려니 김종길선생은 그곳도 열어 주시겠다고 한다. 정말 웬만해서는 안 연다는 사당 안을 볼 수 있음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당 안에 안치된 위패까지 찍을 수 있었으니~ 처음 인사할 때 변변찮은 글 줄 좀 쓴다고 종택순례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던 것이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선생은 자신이 쓴 책과 CD까지 챙겨 주었는데,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김성일가의 독립운동사와 제봉고경명의 아들과 학봉가의 인연까지 들려주는 친절함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시 하고 학봉종택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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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학봉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1995. 12. 1)로 조선 중기 문신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가이다. 김성일은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과 수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초유사로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의병의 전투력 향상에 큰 공을 세웠다. 퇴계의 제자로 뛰어난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의 학문은 이후 영남학파의 학문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옥은 一자형으로 정침의 우측 후면에는 학봉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3칸 규모의 사당(祠堂)을 배치하였으며, 안채와, 문간채, 풍뢰헌, 학봉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렀다. 운장각은 유물의 보관과 전시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선생의 유품과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옛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원래는 현 위치에 지어졌으나, 지대가 낮고 침수가 자주 되어 선생의 팔대손인 김광찬 공이 영조 38년(1762)에 현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 후 200여년이 지난 갑진년(1964)에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침은 입구자(口)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으로 아래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보면 일자(日)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구는 모두 간결한 구조이다.
퇴계 선생은 1569년(선조2년)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으로 돌아가면서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학봉 김성일, 세 사람의 인재를 추천하였다. 이준경은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지냈고, 기대승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인 제자이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였다. 함께 추천한 이준경과 기대승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그 때 서애 유성룡은 이미 조정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추천할 필요가 없었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에는 학봉에 대해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겐소와 소 요시토시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학봉은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학봉 김성일 집안. 이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학봉 김성일 집안과 제봉 고경명 집안의 우의>
학봉 집안은 광주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집안과도 끈끈한 인연이 있었다. 제봉 집안은 임진왜란 때 삼부자가 순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봉과 그의 둘째아들은 1592년 7월 10일의 금산전투에서 함께 전사하였고, 제봉의 큰 아들은 얼마 있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집안은 호남의 대표적인 강골집안이었는데, 당시 60세의 노인이었던 고경명은 둘째 아들을 데리고 금산전투에 참가하면서 막내아들인 16세의 고용후(高用厚)를 경상도의 학봉 집안으로 보냈다.
학봉 집안에 내려오는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고경명은 아들을 보내면서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안동 금계의 김학봉 선생 댁을 찾아가서 피난을 하여라. 그 집은 높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 난리 중에도 너희들을 그냥 죽게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학봉과 제봉 사이에 어떠한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봉이 나주목사로 재임할 때 보여준 인간적인 신뢰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임진왜란 중에 고용후를 비롯한 고씨 집안 일가족 수십명은 학봉집안 사람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난리중이라 먹을 것도 변변찮았지만 같이 죽을 먹고, 산나물을 먹으면서 고생을 함께했다. 그 와중에서 고용후는 금산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아버지와 형님의 소식을 접하였다. 얼마 후 학봉이 호남의 관문이 되는 진주성을 지키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는 기별이 왔다. 호남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인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학봉과, 역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제봉 집안은 두 집안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었다.
고용후와 비슷한 연배였던 학봉의 손자 김시권(金是權)은 “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 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님 상을 당하고, 우리는 조부님 상을 당했으니 피차에 일반이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 입은 짐승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학문에 힘썼다. 학봉 집에서 4년 동안 피난하였던 고씨 일가는 광주로 되돌아왔고, 1605년의 과거시험에서 고용후와 김시권은 나란히 합격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에 고용후는 안동부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안동부사 고용후는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학봉의 부인과 큰아들인 김집을 관아로 초청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하고 울먹이면서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영, 호남의 대쪽 같은 선비집안들이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우정과 미담이다.
<조선 놀음판의 큰손으로 불렸던 파락호 김영환>
파락호란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를 말한다. 이런 파락호 중에 일제 강점기에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의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 있다. 그는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돈을 다 잃게 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쳐 판돈을 자루에 담아 유유히 사라졌다.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도 다 팔아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팔아먹고 나면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다.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파락호 노름꾼인줄 알았던 김용환이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낸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일제의 눈을 피하여 독립자금을 보내려고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산 것이다. 김용환은 독립군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쓰면서 가족들에게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다. 임종 무렵에 독립군 동지가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게 되는데, 훈장 받는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에 담아 발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