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휴게소 세 곳에 가보니
추석 연휴가 다가오면서 고속도로 ‘길보드 차트’가 들썩인다. 휴게소마다 각종 음반 판매상이 특수를 기대하고 있다. 고속도로 길보드는 ‘트로트 메들리’ 등으로 특화해 독자적인 음반 시장으로 성장해왔다. ‘삐융 삐융’ 하는 전자음과 ‘아싸’ 따위의 추임새가 특징적이다. 추석을 앞둔 경부·영동·서해안 고속도로 휴게소 세 곳을 찾아 길보드 음악 판도를 점검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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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고속도로 용인 휴게소에서 영업 중인 길보드 음반 판매점. 각종 트로트 메들리는 물론, 1980~90년대에 발매된 희귀 카세트 테이프까지 진열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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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뽕짝, 희귀 음반도 인기=‘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삐융 삐융)’ 14일 오후 화성 휴게소(서해안선). 가수 강진의 히트곡 ‘땡벌’에 전자 효과음을 포갠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차장 한 가운데 자리잡은 음반 판매점엔 길보드 테이프·CD 수천 개가 빼곡했다. ‘트로트 대잔치’ ‘뽕자야 놀자’ 등 트로트 메들리가 대부분이다. 테이프 1세트(2개)는 6000~7000원, CD는 1만~1만2000원에 판매 중이었다.
화성 휴게소에선 이른바 ‘뽕짝’이 대세였다.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론 ‘별 다모아 별 잔치’가 꼽혔다. 태진아·송대관·장윤정 등 인기 트로트 가수의 오리지널 노래를 테이프·CD 등에 담은 음반이다. 무명 가수들이 메들리로 부른 트로트 음반도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운수업을 하는 박종훈(52)씨는 “휴게소에서만 살 수 있는 트로트 메들리는 히트곡을 계속 따라부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졸음 쫓기에도 최고”라고 말했다.
안성 휴게소(경부선)의 음반 판매점에선 1970~80년대 포크 음악이나 최신 댄스 가요 등도 상위권에 들었다. 이 판매점은 시간대별로 장르를 바꿔 트는 방식으로 고객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오전엔 잔잔한 포크, 오후엔 강렬한 댄스, 해질녘엔 끈적끈적한 트로트 음악을 틀어주는 식이다. 음반 판매상 이금복(50)씨는 “과거엔 트로트 일색이었지만, 요즘은 50~60대 고객들도 포크·댄스 등 다양한 장르를 찾는 편”이라고 했다.
희귀 음반도 찾아볼 수 있다. 용인 휴게소(영동선) 음반 판매점은 김원준·신성우 등 추억의 인기 가수들의 오리지널 카세트 테이프를 판매 중이었다. 20년 전 테이프 발매 당시 가격(3000~5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또 ‘휴게소 스테디 셀러’인 MC 송해의 ‘송해쏭’, 성인용 음악인 ‘에로쏭’·‘노골쏭’ 등도 눈에 띄었다.
가수 정희라가 부른 에로·노골쏭 시리즈는 길보드 시장의 인기 아이템이다. ‘과부신세 타령’ ‘마누라 바꿔치기’ ‘비아그라 타령’ 등 낯뜨거운 제목으로 빼곡한데, 100만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노골쏭 팬이라는 이모(55)씨는 “야한 가사를 듣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터진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음반이라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300~400만장은 기본=고속도로 길보드 차트는 무명 가수에겐 꿈의 무대다. 이곳에서 이름을 알려 방송 무대에 진출하는 사례도 적잖다. ‘가요계 마이너리그’인 셈이다. 가수 김용임·신웅·김난영·진성 등이 ‘고속도로 4인방’ 으로 불린다. 이들 가수들은 누적 앨범 판매량이 적게는 300~400만장부터 많게는 1000만장이 넘을 정도로 인기다. 트로트 가요기획사인 영웅기획 시성웅 대표는 “설 수 있는 무대가 적은 트로트 가수들에겐 고속도로 휴게소가 성장의 발판이 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글·사진=정강현 기자
팔린 음반 2000만 장 하루 2000㎞ 뛴 적도
휴게소 스타 출신 가수 김용임
가수 김용임(사진)은 ‘행사의 여왕’이다. 하루 2000㎞를 달린 적이 있을 정도로 스케줄이 빼곡하다. 그렇게 숱하게 달렸을 고속도로는, 또 그에 딸린 휴게소는 김용임을 성장시킨 ‘인큐베이터’다.
김씨는 1984년 ‘KBS 신인가요제’에서 장려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어려서부터 극단 ‘꼬마 가수’로 활동했던, 주목 받는 신인 트로트 가수였다. 하지만 데뷔 이후 이렇다할 히트곡을 내지 못하면서 긴 무명 생활을 이어갔다. “무명에 지쳐 9년간 활동을 접은 적도 있다”고 했다.
무명의 설움이 정점에 달했을 즈음, 그에게 활동 공간을 내어준 건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1999년 ‘김용임의 트로트 대백과’라는 트로트 메들리 음반을 발표했다. 방송용이 아닌, 오로지 길보드 차트용으로 제작된 음반이었다. 비록 다른 가수의 노래였지만, 김용임 특유의 애절한 음색은 숱한 팬을 사로잡았다. 음반은 100만장을 훌쩍 넘기며 날개달린 듯 팔려나갔다.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는 가수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고 했다. 김용임은 이후 ‘의사 선생님’‘사랑의 밧줄’ 등 솔로 음반도 잇따라 흥행시켰다. 특히 2006년에 발표한 ‘내사랑 그대여’는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오지 않는 곳이 드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휴게소마다 밥먹는 내내 내 노래만 들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휴게소 스타’에서 ‘트로트 디바’로 성장한 김용임. 현재까지 40여 종의 음반(테이프·CD)을 내 누적 판매량이 약 2000만장(기획사 추산)에 이른다고 한다. KBS 가요무대·전국노래자랑 등에 단골 출연하고, 1만명 이상의 공식 팬클럽을 지닌 트로트 스타로 맹활약중이다. 그는 “후배 트로트 가수들에게 더 많은 무대가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