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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이기양(李基讓·1744∼1802) 소전, 다음 검색
조선 후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茯庵). 양명학(陽明學)을 정면으로 수용하여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시킴으로써 소장학자들의 주도적인 학문이 되게 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소장학자들이 뒤에 대거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따라서 천주교 수용과 발전에 미친 그의 영향은 적지가 않다.
1 가문과 학문 배경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후손인 그의 집안은 본래 기호 남인(畿湖南人)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6대조인 이여규(李如圭)로부터 부(父)인 이종한(李宗漢)에 이르기까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관계 진출도 6대조인 이여규와 증조인 이복인(李復仁)이 음서(蔭敍)로 출사(出仕)하였을 뿐이고
조(祖)·부(父) 대에 이르러서는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대에 이르게 되면 끼니도 제대로 잇기
어려운 비참한 생활을 할 정도로 그의 가문은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성호학파의 주요한 여러 가문들과 두루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그는 허경(許?)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의 사촌 처남이 성호 이익(李瀷)의 제자이자
조카인 이용휴(李用休)의 딸과 결혼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 이기성(李基誠)은 안정복(安鼎福)의 손녀와,
그의 장남 이총억(李寵億)은 권철신(權哲身)의 딸과,
그의 차남 이방억(李龐億)은 이가환(李家煥)의 딸과,
그의 딸은 홍낙민(洪樂敏)의 아들 홍백영(洪柏榮)과 각각 혼인하였다.
이기양은 1764년경부터 이익의 조카이자 제자인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 이병휴는 예산(禮山)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수학의 편이를 도모하기
위해 1766년경에 아산(牙山)으로 이사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이철환·안정복·윤동규(尹東奎) 등에서도 가르침을 받았으며,
권철신·한정운(韓鼎運) 등과도 학문적 교류를 깊게 나누었다.
그의 주된 스승으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이병휴는 성호 이익의 실학(實學) 가운데서도
진보적인 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계승·발전시킨 인물이었다.
이병휴는 윤동규·안정복 등의 만류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경전(經傳)에 대한 자주적인 해석을 적극 추구하였고,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적극 추구한 이병휴는
그를 장차 성호학파를 이끌어 갈 주된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경계한 안정복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학문을 독실하지 못하다고 심하게 비판하였다.
2 양명학의 수용과 전파
이익의 제자 대에 이르러 성호학파 내에 양명학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용휴가 문학적인 면에서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또한 이병휴가 경학적인 면에서 양명학을 ‘외주내왕’(外朱內王)의 형태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하여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시킨 인물은 이기양이었다.
일찍부터 이병휴 밑에서 학문을 닦은 그는 양명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병휴의 여러 학설을 계승하는 한편
왕양명(王陽明)의 ‘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의
설에 따라 주자학(朱子學)을 전면적으로 배척하였다.
아울러 양명학의 설에 따라 주자학의 두 공부 방법인 경(敬)과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배격하였으며,
또한 미발(未發)의 중(中)과 그에 관한 공부인 계구(戒懼)에 대한 해석도
양명학의 입장을 따랐다.
이와 같이 그가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한 시기는 1768년 12월(음) 이전이었다.
이기양이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한 뒤
그의 영향으로 양명학은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되어 나갔다.
우선 1766년부터 양명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권철신이 1769년에 양명학에
입각한 중화(中和)·경·격물치지 등에 관한 이기양의 학설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양명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기양과 권철신의 영향으로 그들의 동료인 이가환·한정운·
권일신(權日身)등이 양명학을 수용하였으며,
이어서 그들의 문도인 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
·이존창(李存昌)·홍낙민(洪樂敏)·이총억(李寵億)·이방억(李龐億)·
권상문(權相門)·권상학(權相學)·이윤하(李潤夏)·윤유일(尹有一)·
김원성(金源星) 등이 양명학을 계승하였다.
양명학의 확산을 막으려는 안정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명학은 마침내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지배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양명학이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 사이에 널리 전파된 데에는
1768년부터 1783년까지 거의 매년 겨울에 천진암(天眞庵)·주어사(走魚寺) 등의
산사(山寺)에서 개최되는 일련의 강학(講學)이 큰 기능을 하였다.
강학 참여자는 처음에는 이기양과 그의 동료들인 권철신·한정운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뒤에는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인 정약전·김원성·이총억·이벽·권상학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기양과 그의 동료들이 주축을 이룬 일련의 강학은 이기양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내용은 양명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권철신·한정운 등은 바로 이 강학을 통하여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권철신에 의해 주도된 일련의 강학도 양명학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었으며,
그의 문도들은 바로 이 강학을 통해 양명학을 계승하였다.
이처럼 이기양이 수용하여 널리 전파시킨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사회의 통념이나 주위의 비난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양지에 비추어 옳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과격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좌파 계통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기(理氣)의 개념을 가치 세계에 속하는 것과
사실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인식 방법도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덕(德)을 이루는 학문과 더불어 사공(事功)에 관한 학문도
적극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론적으로 더욱 체계화하였다.
이와 같이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한 결과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은 서양 과학 기술을 천주교와 구분하여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등
사공에 관한 학문을 널리 추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좌파적 성격을 지닌 실학적 양명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정계 진출과 그 좌절
이기양은 1765년 무렵만 해도 관계 진출에 별로 뜻이 없었으나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한 뒤인 1796년 무렵부터 서울의 명사(名士)들이 모이는 곳에
나아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관계 진출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는 1774년에 진사(進士) 시험에 장원한 후
1778년에 음서로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었다가
1784년에는 문의현령(文義縣令)으로 승진하였으나
1785년 이후 머지않은 시기에 파면되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는 다시 진산현감(珍山縣監)이 되었으며,
1795년 3월에는 남인의 영수(領袖)인 채제공(蔡濟恭)의 천거로 문과를 거치고
급제하였다.
그런 다음 정조(正祖)의 배려로
그는 곧바로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으며,
1795년 봄에는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에,
이듬해 봄에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에,
같은 해 8월에는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에,
10월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에,
1799년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는 등
매우 빠른 속도로 승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고속 승진은 정조가 그를 채제공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과 더불어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해 주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당시 정조가 추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노론(老論) 벌열(閥閱)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기
때문에 정조의 사망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게 된
노론 벌열들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켜
그를 천주교 신자로 몰아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보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802년 2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4 천주교 수용에 끼친 영향
1784년 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과 함께 전도하자
이기양도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안정복은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천주교 수용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이벽과 논쟁을 벌렸다는
달레의 언급이나 그가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에는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였다가
뒤에 입장을 바꾸어 이단을 막는 글 두 편을 저술하여 서울의
소장학자들에게 보냈다고 주장한 내용, 그리고 신유박해 때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또 그는 두 아들 이억총과 이방억도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천주교 서적을
깊이 공부하였으나 뒤에 입장을 바꾸어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이의창(李宜昌)과 손부인 정희순(丁喜順, 가타리나)은 천주교를 믿고 따랐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이의창은 연루되었으나 도피하여 체포를 모면하였고
, 정희순은 체포되어 3년 간 옥에 갇혔다가
1841년 가을에 형조로 옮겨 심문을 받는 중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기양이 널리 전파한 양명학을 수용한 사람들 가운데는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즉 천주교 수용에 압장선 이벽·이승훈·권일신·홍낙민·윤유일 등은
모두 양명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정약종도 정약전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김범우·최창현 등의 증언들도
그 이전부터 이벽과 사귀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양명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경기도의 양근·광주·여주·포천 등의 신앙 공동체와
충청도 내포·충주 등의 신앙 공동체,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진산
등의 신앙 공동체의 설립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도
대부분 양명학을 수용하거나 양명학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은 이기양이 아산에
살
때부터 그의 집을 드나들며 양명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 이와 같이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해 남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그들의 주된 학문인 양명학에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유리한 이론적 특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기양이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가 있다.
이기양의 저술로는
정약용이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저술할 때만 해도
《복암유고》(茯庵遺稿) 4책이 있었으나
오늘날 아무것도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와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이병휴·안정복·정약용 등의 문집 속에서
그의 학문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관련들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출처와 기록등(향토대문화사전, 고기,삼국사기, 유사
성 씨족에 관한 주장
오늘날 우리가 신라(新羅)의 내물왕(재위: 356~402년)에 알고 있는 것은 왕릉을 제외하면 거의 없지만 다행히도 두 건의 역사 문헌을 통해 그의 삶과 통치에 대해서 일부 살펴볼 수 있다.현재 전해지는 내물왕 관련 지식은 대부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통한 것이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그가 언급돼 있다.
‘삼국유사’는 1200년대 초 한 승려가 이야기와 신화를 모아 집필한 책이다. BC 100년부터 약 650년까지의 야사와 설화, 신화 등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의 학자들이 집필한 정사다. 한반도에 위치하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 삼국에 대한 정확하고 사실적인 기록이다. 신라의 17대왕인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은 사적 제 118호인 경주 내물왕릉에 묻혀있다.
내물왕은 신라 왕권에서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세력을 굳힌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내물왕 이후 서기 935년까지 대부분 경주 김씨가 신라의 왕권을 잇는다. 내물왕 이전에는 김씨, 석씨, 박씨 일가가 신라 초기의 왕권을 놓고 경쟁했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에 대해 몇 가지 짤막한 정보를 나열하고 있다. 내물왕은 신라의 17대 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나라에 대한 공로로 각간(角干) 지위를 받은 김말구(金末仇)였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 출신의 휴례부인(休禮夫人)이었다. 왕비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은 신라 초기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년)의 딸이며 자비로운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364년 내물왕은 오늘날 울산과 포항 사이에 있는 토함산(吐含山) 부근에서 왜인들을 물리쳤다. 이들은 일본 고훈 시대(古墳時代)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내물왕은 산비탈에 군인들처럼 보이는 허수아비를 세워놓아 적을 교란시키고 매복시켜둔 전력으로 성공적으로 적을 무찔렀다.
373년에는 수 많았던 백제-신라간 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쳤다.
381년 내물왕은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에 사절을 보내 교류하고 한자와 청자 등 중국 문물 도입에 힘썼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200년대 초 한 승려가 설화를 모아 집필한 책으로 한국 고대의 왕들에 대한 신화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내물왕 36년(390년)에 왜에서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왜와 신라, 백제는 당시 전투 중이었다. 왜의 왕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을 비난하면서 백제에 대항해 신라와 동맹 맺기를 청했다. 그리고 동맹의 증표로 아들을 한 명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내물왕은 이에 동의하며 당시 열 살이던 셋째 아들 미해(美海)와 신하 박사람(朴娑覽)을 사절로 왜에 보냈다. 미해는 그 곳에 정착해 40살까지 신라에 돌아가지 않았다.
392년 내물왕은 고구려의 19대 왕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1~413년)과 동맹을 맺었다. 393년 왜의 군대가 신라를 또다시 공격하자 내물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이를 물리쳤다. 한편 395년에는 말갈(靺鞨)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397년 국가에 흉년이 들자 내물왕은 일 년간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이는 내물왕의 여러 치적 중 하나로 기록된다.
오랜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기록이 자료의 전부다. 궁정 기록과 일화집을 비롯해 모든 사료는 정치적이며 제작된 시기를 반영한다. 따라서 고대 신라 왕들에 대해 우리가 지닌 정보는 후대, 그 중에서도 고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점들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과 비교해 고대에 인간 수명이 짧았던 점을 미루어 볼 때 내물왕의 재위기간 46년은 상당히 긴 기간이다. 내물왕은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신라 왕릉지대에 묻혀있으며 그의 무덤은 한국의 사적 제118호로 지정됐다. 방문객은 입장료를 내고 왕릉에 입장할 수 있으며 내물왕릉은 오늘날 사실상 쾌적한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락국이 성립되기 전 김해 지역에 존재한 9촌에는 국(國)의 칭호도 없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으며, 또 사로국이 세워지기 전 경주의 6촌에는 군주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일(放逸)하였다고 한다. 이는 9촌이나 6촌의 군주가 없는 사회, 아직까지 정치적 지배자가 출현하지 않은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읍락사회는 정치적으로 평등한 관계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읍락 내부의 사회관계가 평등했으므로, 읍락 전체와 관련되는 중요한 일들은 읍락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의논을 거쳐 정하였다. 김해 지역의 경우 구지봉(龜旨峯)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 촌간으로 표현된 읍락 우두머리들이 중서(衆庶) 2~3백 명을 거느리고 모여서 일을 논의하여 처리하였다든가, 경주 지역의 경우 각 부部의 조상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논의하였다는 기록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락의 9촌간들이 수로를 옹립한 것과 사로의 6촌장들이 혁거세를 옹립한 것도 공동체적 의사 결정에 따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읍락사회에서는 나라 이름도 없고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그러나 국이 형성되면서 나라 이름이 생기고 군신의 칭호가 생겼다. 이는 정치적 구심력이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국의 수장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 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가운데
부족 전체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들은 씨족장회의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부족 전체를 대표하는 부족장이 씨족장회의에서 선거된 것은 물론이다. 신라의 6촌장들이 모여서 혁거세를 추대하였다는 이야기, 혹은 가야의 9간이 모여서 수로를 추대하였다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부족장을 선거하던 사실을 전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특권층의 대두와 함께 일정한 지역에 대한 영도권 내지는 지배권을 둘러싼 공동체 상호간의 대립․항쟁이 마침내 통일세력의 대두, 곧 원초적인 형태의 국가의 성립을 초래케 하였다.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 강좌1-고대편>
화백이라 함은
일은 반드시 중衆과 더불어 의논하는데, (이를) 화백이라 호號하며, 1인이 이의를 내면 파罷한다(신당서 신라전).
고 한 데에서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대사大事가 있으면 군관群官을 모아 상의해서 정한다(수서 신라전).
고 하여 그 구성원을 [군관]이라고 하였다.
부족연맹체에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지난날의 귀족층이 사회적으로는 골품제나 부제部制로 편성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대등이라는 관직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
-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가운데
시조님의 관직이 내물왕대
내사령이라,萬姓譜,廣陵世보,동고 상공 기록등에 기술하고있다,
왜 내사령인가. 내사령은 조선조 영의정,
여조 시중에 해당하는데,
통일신라가 당과 수교하던 그 시기 당관제가,3省 6部이니,,
내사성,문하성,상서성이다.內史省은 왕의조칙을 행하고,
국무를 관장하는 최고기관으로,장이 내사령,내의령이다. 조선조 영의정,오늘날총리다
고려는 중국관제를 도입 ,내사성 내의성이고,
내사 문하 상서의 삼성이 통합 되어
내사 문하성은 후에 중서문하성,중서성,상서성 순으로 변천되었다
내사령이 중서성이 된 뒤 도첨의사사,도방,중방으로 변질되엇으나..
최고 권력기관으로 존재하고,조선조에서는 의정부로 개칭되니, 삼정승 육조이다.
羅初에 신라관 제에 내사령직을 사용한 고거(古據)는 발견되지않는다
(중기후17관등제사용,통일신라기 육부등을 사용하는데,部의長이 令이다,
최고기관으로는 초기품주,군주를 집사부로 개칭했다,
신라令은 아찬이상의 관등만이 하는 2두품 진골이다),
내울 이사금 시기,변진한 지역(가야,신라)에 처음 전한으로 부터 漢문화가 도입 되었고,
전한은 이미 철기사용이 보편화 된 강한나라였다.
그 후 통일신라 전후대에 이르러 당과수교후
당의 제 문물, 제도등을 받아 들인 바, 唐의 집정관직이 내사령인 바, 당측이나
羅朝에선 지배 부족인 자선李족의 수장인
족장 자성을 내사령 이라 호(呼) 했다.
수년전 일본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시대 "정창원문서에 "내시령"이란 직이
나오는데.학계의 중론은 지방의 조세를 부과 징수하고,위임 통치하는 파견돤 中央官,
지역담당관, 吏등으로 정의하고 있는 바
내사렁을 지낸自成의 전,후예(煎,後裔)가
칠원伯을 세습했다는 것과 일맥 통한다..
신라의 王호칭은 거서간,차차웅,니사금,마립간으로 변천되었다,
전부다 우리고유의 임금님이란 순수 우리말이다,
혁거세의 居西干은 당시 밝족이 서부에
집거 한 族으로 西부족의 큰임금이란 뜻이다,,
간은 크다이고,신라각간,고구려 막리지도 같은 어원이다
조상은 오래오랜옛날부터,군장,씨족장,부족장,족의
어른을 "임금,마마,님"이라고 했다
마치 지금의 "서울이란 어원이
신라의 동경=경주=셔블에서 기원(="셔블 발기 다래 님
둘이 노니다가..)"되었듯이,,,次次雄은 철족의 웅,임금이고,
마립간은 매금,마마의 왕호이다,
시조님 관직이 왜 내사령인가?
尼師今은 "매금, 마금님, 임금등의 순수한 우리말어원이다,
우리 선족 이자성 族은 초기신라 강력한 철족의 수장이고,
쇠,선,족을 王으로 옹립했는데,내물니사금이다,
자성은 내물이사금때 내사령이라했다,
그래서, 內師令은 尼師今의 한자식 표현이다.
후대인의 기록방식이라는것이다 尼師今이 內史令으로 표현 되었다는 주장이다,
자성은 초기신라 족장으로 니사금,즉 자선 尼師今으로 호칭된 인물인데
후대 통일신라후 전제왕권확립후(아니면 고려시대)
즉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던무렵 고려조에서는
史家,士家에서 왕과 동일한 호칭을 할수 없어
"內史令(니尼=내內,사師=사史,금今=령令)으로
고려초의 관직명으로 대용한,니사금이 내사령이라는 당과,여초의 관직으로
그 기록방법이 變轉(변전)되엇을 수도 있다,
이와같이 "어원의 표기,변전"은 국어 어원 변천사에도 이미 검증된 사안이다.
라말 진덕왕시 집사부를 설치하니
長이 시중仲侍이나 별칭이 내령으로,또는 이사금이라 하였다
이상과같이 자성은 부족장으로 君내지는 임금,
이사군이였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동국의 만성中에서 신라초기(건국기)에 내사령을 관직으로,
시조로 하는,성姓씨는 없다,일부 성씨중에 있으나
신라후기나 고려초에 인동장씨를 비롯하여
최씨등 5-7家가 있다 경주李씨들 마져,
겨우 6촌의 일족이였음에 만족하고 있다,,
"니사금이란 "임금의어원은 일반백성들에게도
전전사용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사군(군현의 방백의 별칭)으로도 불리웠으니
자성이사금설도,
무시할수없는 論아닌가?
그런데 "내사령은 唐대의 직이고
통일신라후에 들어왔다는점이다.
당은 이 연에의해 616년경에 성립되었다.
삼국사기는고려때 썻는데 ,
여말 우리조상들이 선조의 직을 君장으로 내려온 것을, 구전된 것 을,
칠원의 "니사금으로 내려온 것을,
거슬러가면 신라,"宣신라의 니사금인 것을,고려에 이르러 내사령이요,
여말에 이르러 伯이니, 城主니, 호족장이라 한 것이다 ,
한자로 그 직을 칭하니
內史令으로 칭 했다.
수장의호칭이다,
내물이사금 전후시대는 초기아라가야域과신라域의 시대사구분에있어서
중요한 역사적,전환적의미의, 분기의시대이다. 밝,석족계중의3족중에서
왕을옹립하던,3부6촌족의연맹적(9족병립시대)시대에서,이족지배하의
자선李족과같은 계의 (셔블족인 쇠,석)씨를왕으로 옹립하던시기고,
미추,내물은 자선이족에의해(이자성에의해) 추대된 인물이란 점이다,
이내물의후손이 후에 신라의 왕을대대로 세습했다.또한가지는 최초 漢식제도를 도입했고,
이무렵 아라가야域도 병합됨은 물론,3부6족의신라초기연맹이 자선李족에의해 전역을 통일헸다는
점이다,이철기족은 일본으로 건너가,제부족을 통일하고 천황제를 열었으니.백제계요,선족계이다.
우리선족은 왕건에의해 회안으로 移住되고,강계되고,고래中期에昇階되어 익비 익강 익준의3賢이
나오셧고,비로소현달했다...
선세사적으로 구전된 시조記를 상공께서 기술한바 내사령이니,국정,왕족중에서 최고자에게
주던 관명이 내사령이엿다.고려초,최지몽,서희,문종,덕종이그랬고,최치원도증직을받았다...
즉 우리李가가 羅대 내사렁을지낸 족의후손을말하고,고려조 가록상 내사령은 왕과
동급또는 왕가가숭모하는 者에주던 초기최고직이니.니사금이고,新羅 內史令은 곧
재신의수상+왕사+왕귀족의수장적 의미라 할수있다.그것은 신라지배족이고,
지역을 伯으로다스렸고,신라를이끈족의 首長이기때문이다.
족보에나타난先世史적을 고증안된다하여 무시해선안된다.신라千년동안
내려口傳된 우리선조이야기를 율정,석탄,암탄,둔촌공때까지 내려온
세보에 부언한것이다.대부분 士大夫가에서 종보를 만든시기가 고려말 조선초이다
.당시 신라조 내사령으로 기술함에는 확실한 고증이 없으면 불가하였으니,
특히 이성계의 조선초기는 친명事大를 국시로 하여 나라를 이끈 시기이고,
당시 내사령이란 직자체가, 중국에서 수상에주는관직이었고,
고려때는 國師에주는 즉 재신과왕족어른에게주는 명예관직이기 때문이다.
....
문호공 비문(내사령과 고려에 대한 항거, 신라의 후손)
문호공 李坫
생년 1446년(세종 28) 1522년(중종 17)
1446(세종 28)∼1522(중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숭보(崇甫). 이밀(李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李智)이다. 아버지는 찰방 이관의(李寬義)이며, 어머니는 강순경(姜舜卿)의 딸이다.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예·사간원사간·성균관사성을 거쳐, 1499년(연산군 5) 사헌부집의·사도시정(司䆃寺正)을 역임하였다. 1500년 초무부사(招撫副使)로 해랑도(海浪島)의 유민을 수색한 공으로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되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 등에 이르렀다.
1503년 형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중 갑자사화에 연루,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508년 형조판서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를 지내고, 151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515년 동지성균관사·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51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몸가짐이 바르고 곧아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으로 일컬어졌으며, 성명(性命)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천지·일월·성신의 도수에 환하였다. 시호는 문호(文胡)이다.
8 성씨족에 관한 것과 우리나라의 통류인식의 견해
8 성씨족에 관한 것과 우리나라의 통류인식의 견해
[서론]
사서의 기록을 보면
진한 6촌과 서라벌 건국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甲子(※서기 전 57년)4월 丙辰일에 서라벌이 건국되었다
그 전에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와서 산곡간에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1은 알천양산촌(촌장:알평)이고, 2는 돌산고허촌(촌장:소벌도리)이고, 3은 자산진지촌(촌장:지백호)이고, 4는 무산대수촌(촌장:구례마)이고, 5는 금산가리촌(촌장:지타)이고, 6은 명활산고야촌(촌장:호진)이다. 이를 진한 6촌이라 한다. <삼국사기>
전한 지절 원년 임자(※서기 전 69년) 3월 초하루에 6촌의 촌장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되,우리들 위에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일하여 제 욕망대로 따르니 덕 있는 이를 찾아 임금으로 삼자, 라는 의논을 하였다. 그 때 멀리 나정숲 사이에 한 줄기 서광이 하늘을 뻗는지라 달려가 보니 큰 박같은 알이 있어 쪼개보니 해와같이 환한 미소년이 나왔다.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여겨 "밝은누리(朴赫居世)"라 이름짓고,거두어 기르기 13년(※서기 전 57년.甲子)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니 국호가 서라벌(徐羅伐)이요, 신라천년 왕국의 출발이었다.<삼국사기>
성씨는 성(姓)과 씨(氏)를 합친 말이다. 성은 지금의 성(姓)과 같고, 씨는 지금의 본관(本貫)을 뜻한다.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은 최초의 기록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삼국 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근래에 발견되고 있는 삼국 시대의 금석문을 살펴보면, 성(姓)의 사용은 간헐적으로 보이고 지명(地名)을 이용한 씨(氏)의 사용이 대체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금석문에는 씨(氏)의 사용이 주를 이루고 기록서에는 성(姓)의 사용이 주로 나타나는 이유는 금석문은 삼국 시대에 만든 기록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만, 기록서는 시간적 차이를 두고 고려 중기에 발간되어 내용적 서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덧붙이고 첨가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씨의 사용과 기록은 계급과 신분에 따른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금석문과 기록서 사이에 간극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은 실제 사용과 남은 기록에 관해서는 시차적인 차이와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감안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성씨는 삼국 시대에는 왕과 일부 귀족 계층만이 사용하는 전유물이었고, 고려 후기에는 일반 백성들까지 성(姓)을 사용하는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제력을 갖춘 외거 노비를 중심으로 성을 갖게 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성와 씨를 갖게 되었다.
[성씨의 종류]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는 신라의 국성(國姓)인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 촌장의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 등이 신라 초기부터 보이고, 고구려는 동명왕의 고씨(高氏)를 비롯하여 왕비들의 성씨인 예(禮)·송(宋)·우(羽)·연(緣)·주(周)와 신하들에게 사성(賜姓)된 기록이 보이며, 백제는 온조왕의 부여씨(夫餘氏)와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鞠)·목(木)·백(苩)[또는 묘(苗)] 등 대성 8족이 있었다. 이렇듯 삼국 시대는 왕족 외에는 귀족에게 내리는 사성에 의한 성씨의 사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고려 시대는 왕의 기록물인 왕대 종록(王代宗錄)과 문신들의 묘지(墓誌)에 나열된 성씨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성씨의 종류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265종이 나타나며, 그 후 『도곡총설(陶谷叢說)』에 298종, 『앙엽기(鴦葉記)』에 486종,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496종이 기록되어 있다. 근대의 기록으로는 1930년의 조선 국세 조사(朝鮮國勢調査) 때에 250종의 성씨가 조사되었고, 1960년의 인구 주택 국세 조사에서 258종이 조사되고, 1985년의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성이 275종, 본관이 3,349종이 조사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성씨의 기원과 그 유래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가 보통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하는 성씨(姓氏)는 고대에는 성(姓)과 씨(氏)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성은 조상 때 생긴 것이고, 씨는 후대의 자손 때에 와서 나뉜 것이다.
「삼대(하 · 상 · 주) 이전 성씨는 둘로 나뉘었었다. 남자는 씨를 불러 주었고, 여자는 성을 불러 주었다. 씨는 귀천을 구별하는 작용을 했는데, 귀한 자는 씨가 있었고, 천한 자는 이름은 있되 씨는 없었다. 성은 혼인 관계를 구별하는 작용을 했다. 그래서 동성(同姓), 이성(異姓), 서성(庶姓)의 구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씨는 같고 성이 다르면 혼인할 수 있다. 성은 같고 씨가 다르면 혼인을 할 수 없다. 삼대 이후에 성과 씨는 합해져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모두 혼인 관계로 구분하고 땅의 위치로 귀천을 밝혔기 때문이다.(三代以前, 姓氏分而爲二. 男子稱氏, 妊人稱姓. 氏所以別貴賤, 貴者有氏, 賤者有名無氏. 姓所以別婚姻, 故有同姓異姓庶姓之別. 氏同姓不同者, 婚姻可通. 姓同氏不同者, 婚姻不可通. 三代之後, 姓氏合而爲一, 皆所以別婚姻而以地望明貴賤.)」(《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이성(異姓)은 천자나 제후와 혼인 관계에 있는 성을 말하며, 서성(庶姓)은 천자나 제후와 친속 관계가 없는 성을 말한다.
〈성씨의 발생〉
삼황(三皇) 중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는 인류 문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공헌은 바로 ‘성씨를 바르게 하고, 매파를 통하게 했으며, 혼인을 제정한 것’(正姓氏, 通媒妁, 制嫁娶)이다. 원시시대에는 인류가 군거잡혼(群居雜婚)을 했으므로 근친혼을 함으로써 열성유전자가 전달되는 폐단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복희씨는 혈친 간의 혼인을 피하게 하기 위해 동성 간에 혼인하지 않는 제도를 제정했다. 중국인의 성은 그 뿌리를 복희씨에 두고 있는데, 복희씨의 고도인 회양(淮陽)은 중국 성씨의 최초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최초의 성은 복희씨의 성인 ‘풍(風)’이라 할 수 있다.
「복희씨는 수인의 아들로 바람으로 인해 태어났으므로 풍 성이 되었다.(伏羲氏, 燧人子也. 因風而生, 故爲風姓.)」(《삼분(三墳)》)
《삼분》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의 책으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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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기원 어디서 유래하는 가
서혼
성의 기원은 원시사회 모계가족제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 성에는 여자 ‘여(女)’ 부수나 ‘여(女)’가 밑에 들어간 글자를 성으로 쓴 경우가 많다.(‘성(姓)’ 자 자체도 ‘여(女)’부이다.) 예를 들자면 황제(黃帝)는 희수(姬水) 가에 살아 ‘희(姬)’ 성을 가지게 되었고, 염제(炎帝)는 강수(姜水) 근처에 살아 ‘강(姜)’ 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우(禹)는 치수에 공을 세워 ‘사(姒)’ 성을 받았다. 성은 고대 부족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 특정 부호였는데, 이 경우 주로 부락의 명칭이나 부락 수령의 이름을 그 성으로 사용하였다. 부락 수령의 아들들도 성을 받았다. 예들 들면 황제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성을 받은 자가 14명이었다. 사회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모계가족제도 사회에서 부계가족제도 사회로 넘어가면서 씨족제도가 점차로 계급사회제도로 대체되면서 귀족들은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하(夏) · 상(商) 시기에 이미 귀족들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씨는 성의 지파(支派)들을 말하는데, 이는 ‘가(家)’나 ‘족(族)’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가(家)는 공동생활을 하는 권속(眷屬)이고, 족(族)은 동성의 친속, 혹은 공동의 기원과 유전적 특징을 가진 무리, 혈통 관계가 있으면서 집단으로 거주하는 무리 등을 말한다.)
1. 나라 이름으로 씨를 정한 것
제후국의 군주는 봉토의 이름으로 씨를 정했다. 예를 들면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는 그 이름이 진중(晉重)인데, 진나라의 국명 ‘진(晉)’이 씨가 되었고, 노(魯)나라 희공(僖公)은 그 이름이 노신(魯申)인데, 역시 국명인 ‘노(魯)’가 씨가 되었다.
2. 봉지가 씨가 된 것
경대부와 그 자손들은 채읍(采邑, 봉지)의 이름으로 그 씨를 삼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진(晉)나라의 대부 필만(畢萬)은 그 채지(采地)가 위(魏)였는데, 그 후세들이 ‘위(魏)’로 씨를 정했다.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아들 공자(公子) 만(萬)은 ‘한(韓)’에 봉해졌는데, ‘한(韓)’으로 씨를 삼았다.
3. 관명을 씨로 삼은 것
귀족과 그 자손들은 관명을 씨로 삼았다. 예를 들면 진(晉)나라의 임보(林父)는 보병 조직인 삼항(三行) 중 중항(中行)의 군수(軍帥)였는데, 그의 관직을 따 중항환자(中行桓子)로 불렸다. 그의 아들 순언(荀偃) 역시 중항언(中行偃)으로 불렸다. 이들은 ‘중항’으로 씨를 삼았다.(진문공(晉文公) 5년(BC632), 북방의 적족(狄族)에 대항하기 위해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의 삼군(三軍) 외에 세 개의 보병 부대를 설치했는데, 이를 중항(中行), 우항(右行), 좌항(左行)의 삼항(三行)이라 했다. 삼항은 삼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펼쳤다. 삼군과 삼항을 합해 육군(六軍)이라 부른다.)
송(宋)나라의 집정경(執政卿)인 낙희(樂喜, 자한(子罕))는 사성자한(司城子罕)으로 불렸으며, 그의 손자인 낙기(樂祁, 자량(子梁)) 역시 사성씨(司城氏)로 불렸다. 이들은 이로 인해 사성(司城)을 씨로 삼았다.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구(司寇) 역시 이런 유이다.
4. 직업을 씨로 삼은 것
예를 들면 무씨(巫氏), 복씨(卜氏), 축씨(祝氏), 사씨(史氏), 장씨(匠氏), 도씨(陶氏) 등이 있다.
5. 거주지를 씨로 삼은 것
노장공자(魯莊公子) 수(遂)는 노나라 동문(東門)에 살아 이름을 동문수(東門遂)라 하고, 자를 동문양중(東門襄仲)이라 했는데, 이는 거주지의 이름을 씨로 삼은 경우이다. 송(宋)나라의 악대심(樂大心)은 우사(右師) 벼슬을 지냈는데, 송나라 동문(桐門)에 살아 동문우사(桐門右師)라 불렸다. 그는 동문(桐門)을 씨로 삼았다. 동곽(東郭), 서문(西門), 지(池) 등도 이런 유이다.
6. 주나라 왕이나 제후, 군주와의 혈연관계의 원근을 나타내는 칭호를 씨로 삼은 것
주(周)나라 희왕(僖王)의 아들 호(虎)는 왕자호(王子虎)로 불렸고, 그의 손자는 왕손소(王孫蘇)로 불렸다.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아들 희(喜, 자한(子罕))는 공자희(公子喜)로 불렸고, 그 손자 사지(舍之, 자전(子展))는 공손사지(公孫舍之)로 불렸다.
7. 귀족의 자(字)를 씨로 삼은 것
종법제도에 의하면 공족(公族, 제후나 군왕의 동족)은 각 대 군주의 근친 3대만 포함할 뿐, 공손(公孫, 제후의 손자)의 아들들은 공족에 속하지 못하며 반드시 따로 씨를 가져야 했다. 이런 귀족 자손들은 그 조부의 자를 씨로 삼았다. 예를 들면 정(鄭)나라 공자(公子) 발(發)의 자는 자국(子國)인데, 그의 손자 이름은 국삼(國參, 자사(子思))이다. 이는 바로 할아버지의 자인 ‘자국(子國)’의 끝 자인 ‘국(國)’을 씨로 삼은 것이다. 또 다른 공자의 자는 자사(子駟)였는데, 그의 손자는 ‘사(駟)’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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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기원(한국학)
성(姓)이란 같은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본관(本貫)과 함께 다른 혈족과 구별하는 데 사용되는 칭호다.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혼인제도가 없었던 모권사회에 있어서 어머니는 알 수 있어도 아버지를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모계(母系)의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되었다.
경제 활동은 수렵경제에서 목축경제로 변하고, 다시 농업경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짐승이나 목초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일정한 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것을 재산이 사유화되면서 경제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굴 같은 곳에서 함께 모여 살던 것이 차차 일부일처(一夫一妻)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경제 생산에 힘이 센 남자가 가정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일부일처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확실해짐에 따라 비로소 부권사회(父權社會)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모계의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집단은 차차 부계의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모권사회이건 부권사회이건간에 모두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으므로 이러한 사회 집단을 씨족사회라고 부른다. 이 씨족사회는 같은 혈연과 같은 조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인 만큼 단결과 협동으로 사냥이나 고기잡이, 농사 등의 힘든 일을 함께 할 수 있었고, 적이 침입했을 때 공동으로 방어하는 등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씨족사회도 점차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게 되어 한 조상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자연히 좀더 가까운 혈연끼리 모여 살게 되었으므로 한 씨족사회는 많은 씨족집단으로 갈라지게 된다.
사회생활이 점차 발달하고 복잡하게 되어 감에 따라 한 씨족집단이 단독으로 사는 것보다 혈연이 가까운 다른 씨족집단들과 공동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군사적으로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혈연이 같은 각 씨족집단이 서로 모여 한 사회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회를 부족사회라고 부른다.
부족사회는 다른 부족사회와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만들게 되었고, 다시 한 부족국가가 다른 부족국가들과 합쳐서 부족국가연맹(部族國家聯盟)을 만들게 되어 점점 집단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사회의 규모가 작았던 씨족사회에서는 같은 조상을 가진 혈연끼리 모여 살았으므로 씨족을 지칭하는 이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국가연맹처럼 조상이 다른 집단이 모인 사회에서는 각각 자기 씨족을 가리키는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는 글자가 없었던 때이므로 자기 씨족이 살고 있는 강이나 산 이름으로 씨족의 이름을 삼았다. 이것이 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은 중국 민족으로 중국에서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부터 제후들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혹은 강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는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살았으므로 강(姜)이라는 성을 붙여 불렀으며,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는 어머니가 희수(姬水)에서 살았다 하여 성을 희(姬)라 했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는 요허(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요(姚)라는 성을 붙여 불렀던 것이 그 좋은 예이기도 하다.
성씨의 발생과 변천
우리의 성씨(姓氏)는 1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독특한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씨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성씨는 외국인의 성씨와 어떻게 다르며, 어떠한 역사적인 과정을 밟아 변천해 왔으며, 얼마만한 성이 어떻게 분포되어 왔고, 또 본관이 왜 생겼으며 동성 동본이란 어떤 뜻을 갖는 것인지, 또 우리 민족이 오늘날의 형태로 형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이민족이 들어와 우리 민족에 동화되었는지 하는 것 등은 매우 중요한 알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엷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짚어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 대해 알게 되고 자부심을 갖게도 될 것이라 생각된다.
본(本)의 기원
본은 본관(本貫), 본향(本鄕), 관향(貫鄕), 관적(貫籍), 선향(先鄕) 등으로도 부르며, 시조의 출생지나 정착지 등으로 본을 삼았다. 그러나 시조의 발상지가 아니더라도 봉군(封君)이나 사관(賜貫)에 의해 본관을 정하기도 했으며, 후손 가운데 어느 한 파가 다른 지방에 나뉘어 거주하면서 오래 살게 되면 그 자손들이 독립하여 그 지방을 본관으로 삼은 예도 많았다. 이를 분관(分貫) 또는 분적(分籍)이라 한다.
분관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은 본래 전라도 곡성 출신이었으나 태조로부터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던 일을 들 수 있다.
성은 같은 조상을 가진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써 다른 혈통의 씨족들과 구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성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 경우가 많아 씨족의 완전한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성 앞에 본관을 붙여 다른 혈통과 구별하고 있다. 오히려 성이 생기기 전부터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부족 이름을 사용하여 같은 씨족임을 나타냈었다.
이러한 출신지가 성과 결합하여 동족을 다른 종족과 구별하는 표시로서 오늘날과 같은 본관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대체로 신라말부터 고려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였으므로 사족(士族)들 사이에서만 본관이 일컬어졌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일반 서민들까지도 본관을 표시하게 되었다.
원래 같은 성씨라 할지라도 각 성에는 여러 친족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각기 동성의 중앙 귀족과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신라 말기 골품(骨品)제도가 무너지면서 그런 유대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지방의 친족 공동체들이 각기 분립하여 직계 선조를 시조로 내세워 본관을 달리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경주 김씨나 경주 박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과 씨의 차이
성(姓)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다. 한자의 뜻을 풀어놓은 중국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에 따르면, "姓은 人之所生也"로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였다. 한국에서 성은 부계 혈통의 표지로 쓰여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평생 바뀌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해, 씨(氏)란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에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였다. 즉, 씨는 핏줄이 아니라 땅과 연계되어 있는 개념으로, 한국의 본(本)과 유사하다. 한국의 성(姓)은 본(本)을 필수요소로 하여 각 성마다 한 개 이상의 본관(本貫)이 있고, 성이 같더라도 본이 다르면 동족(同族)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성과 이름을 성명(姓名)이라고 하는 데 비해, 일본은 씨명(시메이, 氏名)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씨(氏)는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다만, 일본은 1870년까지 무사(武士) 아래 계급에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씨를 갖게 되면서 출신지의 지명이나 지형적 특징을 씨로 정한 것이 많아 한국이나 중국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름'의 어원
이름이란 단어는 "이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중세 국어에서는 “일홈” 또는 “일훔” 등으로 표기되었다. 더 오래전에는 니르다, 니름 등의 발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좁게는 성 뒤에 붙은 개인명(個人名: personal name)만을 말하며, 넓게는 성(姓)을 포함하여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거나 가리키는 모든 명칭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도입과정 성을 사용하는 과정)
한국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한자(漢字) 등 중국 문물이 수입되었던 시기에 그와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씨족 사회와 그 집단을 통치하는 지배자 계급이 발생함으로써, 성씨는 다른 씨족이나 피지배 계급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 즉 정치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이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국호 고구려에서 따와 성을 고(高)씨로 하였으며, 주몽은 휘하의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 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왕이 하사한 백제 팔족성(八族姓)인 사(沙), 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苩)씨 등은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여 부여(夫餘)씨를 칭하였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3]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백제 개국공신 중에는 마려(馬藜) 등이 있는데, 현재 마(馬)씨가 마려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이 설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며, 유리왕 6년에 6부 촌장에게 각각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등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4] 그러나 그러한 성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565년 《북제서》에 신라 진흥왕인 김진흥(金進興)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김씨 성을 쓰기 시작한 신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성이 없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치원이나 장보고 등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계층에서부터 성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남해 완도의 천민(賤民) 출신인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당시 당나라 대성(大姓) 중 하나였던 장씨(張氏) 성을 취해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꿨다. 발해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대(大)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대(大)씨와 태(太)씨가 대조영을 시조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 정착과정)
삼국 시대를 통틀어 이름은 대부분 고유어를 한자로 취음한 표기로, 오늘날의 3음절 성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남북국 시대까지는 극소수의 특정 계층을 제외하고는 성(姓)이 없었다. 심지어, 귀족집안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도 처음에는 왕씨가 아니었으며 성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고려 태조의 선대(先代)가 어떤 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 태조의 윗대에서도 성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 자신의 경우도 원래 왕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기보다는 본래 성이 없었고 이름도 다른 것을 갖고 있었는데, 고려 개국과 함께 ‘왕’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도선의 예언을 내세우면서 성을 ‘왕’, 이름을 ‘건’이라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편년통록》 등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선왕(忠宣王)이 왕자로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한 사람이 충선왕과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충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듣건대 그대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755~762)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가 있어서 나온 말인가?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있을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당신의 나라 고려에 가서 자식까지 두었다는 것인가?” 이 말에 충선왕은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제현은 작제건(왕건의 조부), 용건(왕건의 아버지・다른 이름은 왕륭), 왕건 자신까지 3대가 이름에 ‘건(建)’자를 넣은 것은, 신라시대 존경의 표시였던 ‘간(干)’을 이름 밑에다 붙여서 부른 것이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와전(訛傳)되어 ‘건’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왕건의 성명에 대해 비판한 것은 그가 고려 왕실의 계보를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작제건", 아버지가 "용건", 그 아들(고려태조)이 "왕건"으로서 "건"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서양의 귀족들이 아들 이름을 아버지, 할아버지와 똑같이 하면서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과 유사한, 또는 부칭이나 성씨의 개념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아무튼 고려 초에도 한동안 성의 사용은 최상층 계급에 국한되었으며, 귀족 계급이라도 성을 갖지 않는 인물이 많았다.[5] 참고로 왕건은 "임금 왕 세울 건"의 한자와는 상관 없는 당시의 순우리말, 즉 중세 한국어의 어떤 뜻을 지닌 단어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말을 한자로 각각 왕을 임금 왕으로 표기하여 성, 건을 세울 건으로 표기하여 이름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왕씨는 중국의 왕씨와는 한자는 같지만 관련이 전혀 없는 성이다.
신라 지증왕의 국호·왕호의 한자어 개정, 법흥왕의 연호·시호 사용, 경덕왕의 두 음절 지명 개정, 문무 관직명 개정 등 일련의 한화(漢化) 조치로 점차 중국식 이름이 보급되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의 통일 후 사성(賜姓)을 통해 귀족들이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국에 성명(姓名)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6]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것을 도운 네 명의 부장(副長)인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白玉杉), 능산(能山), 사귀(沙貴)도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태조는 즉위한 후 홍술에게는 홍(洪), 백옥삼에게는 배(裵), 능산에게는 신(申), 사귀에게는 복(卜)씨 성과 함께 중국식 이름을 하사(下賜)했다. 이로써 홍술은 홍유(洪儒), 백옥삼은 배현경(裵玄慶), 능산은 신숭겸(申崇謙), 사귀는 복지겸(卜智謙)이라는 성명을 갖게 되었다.[7]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성’은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필수 요건이 되었다. 1055년(고려 문종 9년)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할 자격이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된 이후 성씨 제도가 귀족 계급의 정치적 신분과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전역에 확대과정)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주로 지배계층이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전 인구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천민계층까지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일제강점 직전 해인 1909년 민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8]
조선 중기부터 천민층을 제외한 양인들에게 성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조선에서 성씨가 없는 무성층(無姓層)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족보매매, 족보위조, 공명첩 등을 통해 일부 천민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사회변화로 무성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8권에서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의 하나도 진짜가 없다.”며 이는 한 때의 세속(世俗)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적고 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김근식 교수(法制史)는 “김 이 박의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친족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고 평민, 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칭(僭稱)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위조 족보가 처음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주목할 점은 족보를 위조한 장본인이 양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764년 족보를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김경희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김경희가 여러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쇄시설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족보를 사들이거나 문중 대표들에게 뇌물을 주고 여벌로 족보를 더 찍게 한 다음 비밀리에 건네받는 방식이었다. 족보 매매를 의뢰한 고객이 족보를 선택하면 고객의 이름이 들어갈 지면을 확정하고 그 부분에 어울리게 가계 기록을 위조해 별도의 종이에 활자로 인쇄했다. 그리고는 본래의 족보를 해체하여 원래의 지면을 빼내고, 그 대신 위조한 별지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 수법이었다.[9]
보학(譜學) 관련 책에 나오는 내용은 공식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게 많다. 각 집안에서는 자기들 가문의 선대(先代)에 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보내지만, 그 중에는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족보가 조작된 사례로 경주 김씨의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다. 조선 인조 때 나왔다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 말기에 출생한 김경대(金景大)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 종인(宗人)이었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조작한 위보도 있다.[10]
성씨를 가진 양반 중에서도 일부는 반역, 모반에 연루되면 노비로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고,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는 신분으로 차별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의 장적, 호구 단자, 수원성 축조시의 임금 노동자 기록, 소송 문건 등을 분석해 보면 일반 평민은 물론이고, 일부 노비도 김(金)씨, 이(李)씨 등 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쓴 성이 본관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성관(姓貫)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성성역의궤》에 백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기록된 백성들의 이름들은 신체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키가 큰 사람들의 이름은 박큰노미(朴大老味), 최큰노미, 키가 작은 사람들은 김자근노미(金者斤老味), 임자근노미, 김작은복(金者斤福), 망아지처럼 잘 달리는 사람은 최망아지, 강아지처럼 생겼다고 김삽사리, 눈이 튀어나온 사람은 이부엉이, 지팽이처럼 말랐다고 신지팽(申之彭), 혹이 튀어 나왔다고 이혹불(李或不), 뚱뚱하고 느림보처럼 생겼다고 박뭉투리, 다리 길이가 작은 사람에게는 조조자근노미(趙足者斤老味), 착하다고 지어진 박선노미(朴善老味)·김순노미(金順老味), 일을 잘해 기특한 사람에게는 박기특·김기특이라고 천민들의 성과 이름을 짓고 기록하였다. 백성의 성씨와 이름을 알 수 없어 대충 나이로 이름 지은 기록도 있다. 나이가 한 오십쯤 된 것 같다고 김쉰동이(金五十同), 이름은 모르고 대충 태어난 달만 알아 지은 박시월쇠(朴十月金) 등이 있다. 김팔월쇠(八月金), 장막쇠, 정복쇠, 윤좀쇠 등 하층민의 이름에는 '김(金)'이나 '쇠'자가 들어가는 기록이 많다. 쇠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이기에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이다.[11]
한편 황현(黃玹)이 저술한 역사책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의 인구를 의도적으로 늘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백성 중에서 전주 이씨를 희망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올려주어 이 때 전주 이씨가 10만 명이 늘면서 흥선군이 기뻐하였다고 쓰여 있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성씨가 없던 노비들은 모시던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고,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주었던 양반도 있었다. 무성층에게 성을 갖도록 했더니 대부분이 인구가 많던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하여 일부 성씨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10만개가 넘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성씨의 종류가 매우 적고, 그마저 인구도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인구가 기형적으로 많은 성본의 경우 씨족간 연대성은 찾기 힘들다. 신분질서 해방조치로서의 성씨 부여는 양반 질서를 허물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원래부터 인구가 많던 거대씨족을 더욱 더 거대하게 만들어주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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